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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프닌나는 주님께서 태를 닫아 놓으신 한나를 괴롭혔다.’
<사무엘기 상권의 시작 1,1-8>
1 에프라임 산악 지방에 춥족의 라마타임 사람이 하나 살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엘카나였는데, 에프라임족 여로함의 아들이고 엘리후의 손자이며, 토후의 증손이고 춥의 현손이었다.
2 그에게는 아내가 둘 있었다.
한 아내의 이름은 한나이고, 다른 아내의 이름은 프닌나였다.
프닌나에게는 아이들이 있었지만 한나에게는 아이가 없었다.
3 엘카나는 해마다 자기 성읍을 떠나 실로에 올라가서, 만군의 주님께 예배와 제사를 드렸다.
그곳에는 엘리의 두 아들 호프니와 피느하스가 주님의 사제로 있었다.
4 제사를 드리는 날, 엘카나는 아내 프닌나와 그의 아들딸들에게 제물의 몫을 나누어 주었다.
5 그러나 한나에게는 한몫밖에 줄 수 없었다.
엘카나는 한나를 사랑하였지만 주님께서 그의 태를 닫아 놓으셨기 때문이다.
6 더구나 적수 프닌나는, 주님께서 한나의 태를 닫아 놓으셨으므로, 그를 괴롭히려고 그의 화를 몹시 돋우었다.
7 이런 일이 해마다 되풀이되었다.
주님의 집에 올라갈 때마다 프닌나가 이렇게 한나의 화를 돋우면, 한나는 울기만 하고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8 남편 엘카나가 한나에게 말하였다.
“한나, 왜 울기만 하오?
왜 먹지도 않고 그렇게 슬퍼만 하오?
당신에게는 내가 아들 열보다 더 낫지 않소?”
✠ 복음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 1,14-20>
14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15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16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17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18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19 예수님께서 조금 더 가시다가,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보시고,
20 곧바로 그들을 부르셨다.
그러자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그분을 따라나섰다.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단순화시킬 때 명품이 탄생합니다>
이제 우리는 또 다른 출발선상에 서 있습니다.
교회 전례력 안의 여러 전례 시기들 가운데 가장 평범하지만, 그래서 더욱 소중한 연중시기를 시작합니다.
연중시기가 있기에 사순․부활 시기가 더욱 빛을 발합니다.
연중시기가 있기에 대림, 성탄시기가 더욱 풍요롭습니다.
이처럼 연중시기는 다른 전례시기의 배경이자 기본이 되는 것입니다.
한 시절을 매듭지을 때마다, 그리고 새로운 절기를 맞아들일 때마다 드는 한 가지 생각이 있습니다.
그 누군가가 이 세상에 와서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면 그것은 엄청난 고통일 것입니다.
한번 만개한 꽃이 시들지 않고 계속해서 피어있는 것도 무척 어색한 일일 것입니다.
우리네 사랑에 이별이 있고, 인생에 기승전결이 있다는 것, 시절의 끝자락이 있다는 것은 너무나 다행한 일입니다.
인생에도 저무는 황혼이 있다는 것은 너무나 좋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 황혼 속에서 사람들은 비로소 착해지기 때문입니다.
연중 제1주일 월요일 아침, 어제와 별 다를 바 없는 하루로 여기지 말아야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보낼 이 하루는 우리네 인생 여정에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금쪽같은 하루이기에 허투루 보내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 교회가 전례력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며 반복해서 축제를 되풀이하는 이유를 알았습니다.
우리들의 시간 속에 항상 현존하시는 주님을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찰나의 순간 속에서도 불멸을 추구해야겠습니다.
영원 속에서도 순간의 기쁨을 만끽해야겠습니다.
이 연중시기의 첫날, 예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처럼 기쁜 마음으로, 감개무량한 심정으로 다시 한번 주님과 함께 힘찬 항해를 시작해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첫 사도단을 부르시며 이렇게 외치십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생업인 고기잡이에 전념하고 있던 첫 사도단의 반응이 놀랍습니다.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던 생계의 소중한 도구인 배도, 그물도 버립니다.
아버지도 삯꾼들도 뒤로하고 즉시 스승님을 따라나섭니다.
참으로 큰 버림이요, 큰 도전이요, 큰 투신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버림’, ‘비움’이란 말이 재해석되고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들이 여기저기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결론은 이것입니다.
“비우면 채워지고 버리면 얻게 된다!”
기업 컨설팅 전문가들도 외칩니다.
“장래성이 없거나 본질에 맞지 않는 사업은 과감히 포기해야 합니다.”
의류 디자인 전문가들도 강조합니다.
“옷을 디자인할 때는 너무 많은 것을 보여주려는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욕심을 버릴 때 좋은 디자인이 나옵니다.
단순화시킬 때 명품이 탄생합니다.
버린다는 것은 다른 말로 기본에 충실하다는 의미입니다.”
오늘 사도들께서 크게 버림으로 인해 크게 얻었음을 기억합니다.
오늘 우리들 삶의 목록에서 과감하게 버려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오늘부터 연중주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오늘부터 복음은 마르코복음을, 독서는 사무엘 상권을 듣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마르코복음에서의 예수님의 ‘첫 발설’로 시작됩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마르 1,15)
이는 세 개의 내용으로 된 문장입니다.
‘때가 찼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신 일이 아무 때나 우연히 시작하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이전의 모든 시간이 지금의 이 ‘때’를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고, 지금이 바로 하느님께서 인간을 구원하기로 계획하신 준비해 온 결정적인 ‘때’(카이로스)임을 밝혀줍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는 ‘가까이’(원어의 뜻: 손 안에), 곁에 혹은 예수님과 함께 ‘온’ 나라로,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이요 은총이라는 선포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 나라’는 결코 가는 나라, 곧 죽어서 가는 나라가 아니라 지금 ‘이미’ 온 나라입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는 말씀은 ‘복음’이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요, ‘회개’는 이를 믿는 것이라는 사실을 밝혀줍니다.
동시에 바로 지금이 ‘회개의 때요, 믿음의 때’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하느님 나라’를 가져온 예수님 자신이 곧 ‘복음’이요, 그러기에 예수님을 믿고 받아들이는 이들 안에 이미 현존하는 나라임을 말해줍니다(루카 11,20).
결국 ‘회개’의 구체적인 모습은 ‘하느님 나라가 이미 왔다’는 ‘복음을 믿는 것’이 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도록 우리를 당신의 제자로 부르심입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마르 1,17)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려면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은 버리는 일입니다.
곧 가지고 있는 것, 내가 의지하고 있는 것을 버리는 일입니다,
제자들은 아버지도, 삯꾼도, 배도, 그물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결국 버린다는 것은 자신의 실현을 위한 자신의 삶의 태도를 버리는 것이요, 중요하다고 여기는 자신의 가치관과 자기 자신을 버리는 것이요, 반면에, 새로운 삶의 태도와 가치관을 따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잘못된 것, 좋지 않은 것은 당연히 버려야 할 것이지만, 좋은 것으로 여기던 것마저도 버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더 좋은 것, 더 값진 것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자신의 아버지보다도, 생계수단인 배와 그물보다도, 더 값진 예수님을 발견한 까닭입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이 ‘버림’은 예수님을 따라나서는 하나의 조건이요 방법일 뿐 결코 목적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진정 중요한 것은 무엇을 버렸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찾는지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버리기 위해 따르는 것이 아니라 따르기 위해 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곧 ‘복음’을 따르기 위해, ‘하느님 나라’를 위해 버리는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마르 1,15)
주님!
언제나 당신을 향하여 있게 하소서.
제 자신을 빠져나가 당신께 나아가게 하소서.
어디에 어떤 처지에 있든지 당신과 함께 있게 하소서.
당신을 따라 당신의 나라에 들게 하소서.
제 안에 당신의 나라를 이루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토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반인반수, 반인반신의 나?>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마르코 1,15)
오늘부터 연중 시기가 시작되며 주님의 공생활도 시작되는데, 주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시며 그 첫마디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외치십니다.
이 말씀이 제게는 복음을 믿지 않으면 회개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으로 들리고, 복음을 믿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이미 가까이 온 하느님 나라도 나에게만은 아직 가까이 온 것이 아니라는 말씀으로 들렸습니다.
이 말을 뒤집으면 회개한 사람은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온 것이 복음, 곧 기쁜 소식이며 그 복음을 믿음으로써 행복한 사람이라 하겠습니다.
회개한 사람은 우선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 슬픈 소식이 아니라 기쁜 소식인 사람이고, 그러니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그 반대인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오면 이 세상 나라는 끝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단적인 예로, 이 세상 삶이 끝나야 하느님 나라 곧 천국에 가잖아요?
그런 것이기에 가장 간단한 저의 회개 테스트는 '지금 죽게 되면, 예를 들어 암 선고를 지금 받게 되면 나는 기쁠까?'입니다.
저의 이성적 믿음은 그렇게 돼도 기쁘거나 적어도 담담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 그 상황이 되었을 때 제가 어떨지 아직 저에 대한 확신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어떨까 또 생각해봅니다.
이 세상을 지금 바로 떠나는 것이 아직은 기쁠 정도가 되지 못했더라도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의 Life Style대로 사는 것은 어떨지 말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생활 양식이라면 수도자들이 살기로 서약하는 바로 그 복음 삼덕, 곧 가난, 정결, 순명을 복음에서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사는 것이지요.
제 생각에 이것은 지금 즉시 그렇게 살겠노라고 할 수 있고, 또 그렇게 살기로 이미 서약까지 한 저이지요.
하지만 이 또한 주님께서 가르치신 그대로는 아직이라고 해야겠습니다.
그러니 저는 회개를 시작은 하였지만 아직 충분히 또는 완전하게 살지 못하는 수준이라고 솔직히 인정해야겠지요.
그렇습니다.
제가 기쁘게 살고는 있는 편이지만, 하루하루 사는 것이 너무 기쁘고 너무 행복하다고 할 정도는 아직 되지 못했음이 바로 이 때문일 것입니다.
반인반수라는 말이 있지요.
반은 인간이고 반은 짐승이라는 말 말입니다.
어제 주님 세례 축일을 지내면서 세례를 통해 우리는 인성과 신성을 살게 됨을 얘기했지만, 어쩌면 저는 반인반수이기도 하고 반인반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때는 짐승 같기도 하고 어떤 때는 하느님스럽기도 하는 저는 앞으로 한참 회개의 여정을 가야 할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 작은형제회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믿으면 다 ‘사람 낚는 어부’가 되고 사람 낚는 어부는 세상에서도 존경받는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는 일을 시작하시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마르 1,14)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은 지금까지 그런 나라는 세상에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 합니다.
우선 ‘회개’란 우리가 추구하는 ‘재물에 대한 욕망, 육체의 즐거움에 대한 욕망, 힘과 명예에 대한 욕망’이 의미가 없을뿐더러 오히려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임을 깨닫고 방향을 새로운 욕망으로 트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들은 ‘나의 생존을 위한 욕망들’이기에, 새로운 방향은 ‘이웃의 생존을 위한 욕망’, 곧 ‘사랑’밖에 남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하늘에 계시기에 나를 위한 삶이 ‘땅’을 향하는 삶이었다면, 하늘로 오르는 삶은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는 길밖에 없습니다.
『꽃들에게 희망을』이란 책에 노랑 애벌레는 고치를 거쳐 노랑나비가 됩니다.
노랑나비가 되니 모든 애벌레가 나비가 될 가능성이 있음을 봅니다.
모든 애벌레 속에서 자신과 같은 나비를 발견합니다.
하지만 애벌레들은 각기 ‘세속-육신-마귀’를 좇는 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노랑나비는 그들을 모른 체 할 수 없습니다.
양심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비가 되었다면 나를 위한 삶이 가치 없음을 알기 때문에 더는 개인적인 욕심을 추구할 수는 없는 일이고, 그러면 남는 일이 다른 애벌레들도 나비가 될 수 있음을 알리는 일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회개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우리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일은 ‘선교’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세례받으면 누구나 가정을 버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선교사가 되어야 하느냐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말이 아닙니다.
내가 결혼하고 자녀를 낳아도 그 영혼을 살리려는 마음으로 모든 일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모든 일의 목적이 우선 그 사람의 구원을 위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절대 세상에서도 실패하지 않습니다.
‘어쩌다 어른’ 프리미엄 특강쇼에서 김경일 인지심리학자는 전국 석차 0.1%의 공부 잘하는 아이들의 특징은 ‘착한 것’이라고 합니다.
2010년 EBS ‘학교란 무엇인가 – 0.1%의 비밀’이란 프로그램 제작자들이 다급하게 김경일 교수를 찾아왔다고 합니다.
분명히 이 프로그램은 공부를 잘하는 수재들의 비밀을 말해주어야 하는데, 전혀 그 비밀을 찾을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아이큐, 부모님 학력과 소득, 사는 지역, 특목고 여부까지 다 조사했는데 특징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김경일 교수는 이들이 분명히 착할 것이라는 예상을 하고 그들의 일상을 찍어보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들은 다른 학생들보다 자신이 공부한 것을 더 많은 친구에게 가르쳐주고 있었습니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은 물론이요, 공부를 아주 많이 못 하는 아이들에게까지 가르쳐주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남에게 가르쳐주면서 자신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명확히 깨닫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메타인지’라고 합니다.
하지만 공부를 못 하는 아이들은 본인들이 잘 알고 있다고 믿거나 혹은 알고 있는 것도 모른다고 여겼습니다.
저의 지도교수님께서도 “구체적으로 모든 이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알려주지 못하면 그건 네가 모르는 거다.”라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외롭다, 외롭다’를 반복할 때 한 친구가 “예수님이 너와 함께 있는데, 뭐가 외로워!”라고 했습니다.
그 친구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습니다.
아이큐가 98이었지만 쉬는 시간마다 공부 못하는 친구들이 그 친구에게 가서 공부했습니다.
저는 그 친구가 공부 못하는지 알았습니다.
그런데 등수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 친구는 서울대에 들어갔습니다.
먼저 착해지면 잘 안 될 수가 없습니다.
‘디팩 쵸프라’도 자녀들을 그렇게 교육했습니다.
“너희는 남들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만 생각해라. 나머지는 아버지가 다 책임질게.”
남을 많이 도와주었던 큰아들은 인도에서 큰 사업가가 되었고, 다른 이들의 공부를 도와주던 둘째는 아버지처럼 하버드대 교수가 되었습니다.
세상은 사랑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사랑으로 살면 오히려 잘 됩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고 사람 낚는 어부가 되려고 한 것인데, 심지어 이 세상에서도 잘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먼저 하느님 나라를 구하면 나머지도 덤으로 받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진 자는 더 가지고 가진 것이 없다고 하는 자는 자기가 가졌다고 믿는 것마저 빼앗기게 된다는 말도 이것입니다.
우리는 자녀들이 자신보다 이웃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으로 키워야 합니다.
제가 주일학교 교사를 할 때, 교안은 초등학교 대상이었습니다.
이때 수녀님은 하나하나 어린이들이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쓰지 못하게 고쳐주셨습니다.
이것이 제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더 소외된 이들을 도우려 하면 더 발전하게 됩니다.
세계 최초로 디지털카메라를 만든 사람은 ‘스티브 사쏜’이란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코닥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필름 카메라를 설명하다가 그 필름을 어린아이도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으로 설명하는 순간에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
필름을 보통 ‘빛에 노출되면 이미지를 형상화하기 위해 화학 반응하는 물질’ 정도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쏜은 ‘필름은 그릇이다’라고 말을 바꿔봅니다.
그렇다면 그릇이 굳이 필름일 필요는 없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는 카세트테이프에 이미지를 담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만듭니다.
그렇게 조금씩 디지털카메라 개발이 시작되었습니다.
0.1%의 비밀은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어쩔 수 없이 우리를 ‘서로 사랑하라’로 가게 합니다.
이웃 사랑을 위해 세속-육신-마귀의 욕망을 버리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이웃을 사랑해도 세상에서 저런 것들을 추구하는 이들보다 더 성공할 수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그래야 성공합니다.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성공하면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행복하니까 성공하게 됩니다.
도와주다 보면 내가 공부해야 합니다.
나의 부족함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더 도와주려고 더 노력합니다.
그러면서 성장합니다.
진정한 사람 낚는 어부는 그래서 행복합니다.
이것이 이 세상에서부터 하느님 나라를 누리는 방법입니다.
김연아 선수는 은퇴했음에도 전 세계 운동선수 선행왕 4위에 자리매김한 적이 있습니다.
2017년까지 기부액이 56억이었습니다.
가톨릭 신자이며 김수환 추기경의 바보 장학회 홍보위원이기도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믿으면 다 사람 낚는 어부가 됩니다.
사람 낚는 어부가 다 이태석 신부와 같은 삶을 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웃을 위해 살기 때문에 하는 모든 일이 잘되고 세상 사람들에게도 존경받습니다.
세상은 반드시 내가 주는 대로 되돌려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그렇게 되도록 가르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 수원교구 영성관장, 수원가톨릭대 교수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 나라의 선포>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40일간 지내시면서 당신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준비하셨고, 광야 생활을 마친 다음 세상으로 나가 활동을 시작하셨습니다.
그 시기는 요한이 잡힌 뒤입니다.
요한이 체포된 다음에 예수님의 활동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하느님을 전하는 힘찬 목소리가 위압에 의해 사라져 버린 암울한 시기에 그분이 등장하였음을 의미합니다.
어둠을 비추는 등불이 희미해지자 그 자리에 활활 타오르는 횃불이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세례를 받으신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 내용은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하느님의 통치, 하느님의 권위가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하느님의 법에 따라 다스려지는 나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걸어 다니는‘하느님의 나라’이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느님의 나라는 어떤 장소의 개념이 아니라 어떤 상태에 더 가깝습니다.
또한 하느님의 나라는 어떤 한정된 지역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의 마음 안에 건설되는 나라입니다.
먼 미래에 올 나라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 와 있는 나라요, 죽은 다음에 들어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니라 현재 우리 안에 현존하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회개’가 필요합니다.
회개는 후회와는 다릅니다.
회개는 한 번 하는 것이요, 후회는 두고두고 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생각을 바꾸고,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말이 아니라 행동입니다.
말하자면 도둑이 회개하였다는 것은 도둑질을 그만둔 것입니다.
그리고 그만둔 삶을 계속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회개의 삶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죽을 때까지 이어지는 삶입니다.
한마디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회개의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확실한 선택입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 그분 마음에 드는 것을 머뭇거림 없이 행하는 것입니다.
회개한다는 것은 인간적인 자기 이해 능력과 사고방식의 세계가 아닌 그 이상의 세계로 넘어간다는 뜻입니다.
이제는 인생을 이성의 잣대나 사고방식, 또는 지적인 능력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영의 세계로, 즉 복음적인 관점으로 보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회개는 영적 여정의 첫 출발이며 복음을 알아듣기 위해 취해야 할 기본자세입니다.
우리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 합니다.
복음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자신이며 그분이 선포하신 말씀, 보여주신 활동 모두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선포를 사는 것입니다.
내 마음과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복음이 바탕이 되지 않는 믿음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제자들에게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분명 사람을 끄는 강력한 힘, 애지중지하던 것마저 아낌없이 버리게 하는 신비로운 매력이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야고보와 요한도 그분을 따라나섰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낚였기 때문에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삶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삶은 바뀌었습니다.
그 삶은 ‘회개하라’는 주님의 선포에 대한 응답이었습니다.
분명 그들은 가족과 재물을 버렸기 때문에 예수님께 낚인 것이 아니라 먼저 낚였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그분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분이 나를 먼저 선택한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주님께 온전히 낚여있는지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얻기 위해 일상 안에서 버려야 할 것은 버려야 하겠습니다.
복음을 읽고 묵상은 하지 못해도 취미생활을 하거나 드라마를 보는 일, 운동을 하며, 쇼핑을 하는 데는 더 많은 시간을 갖지 못해 아쉬워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마태 13,44)
더 큰 것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를 버려야 됩니다.
버림으로써 얻게 됩니다.
“무엇을 얻는 데에는 크게 두 방법이 있습니다.
구해서 얻는 것과 버림으로써 얻는 방법입니다.
구해서 얻는 것은 그 얻음이 아무리 커도 다음에 더 큰 목표가 생기기 때문에 만족이 없습니다.
그러나 버려서 얻는 것은 아무리 작아도 덤으로 얻는 기분이기 때문에 만족과 기쁨이 큽니다.
마음의 평안과 행복을 원하는 사람은 버려서 얻는 방법을 택합니다.”
(고도원의 ‘아침편지’ 중에서)
“금을 얻기 위해서는 마음속에 가득 찬 은을 버려야 하고 다이아몬드를 얻기 위해서는 또 어렵게 얻은 그 금마저 버려야 한다.
버리면 얻는다.
그러나 버리면 얻는다는 것을 안다 해도 버리는 일은 그것이 무엇이든 쉬운 일이 아니다.
버리고 나서 오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까 봐.
그 미지의 공허가 무서워서 우리는 하찮은 오늘에 집착하기도 한다.
(공지영의 ‘수도원 기행’ 중에서)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나를 따라오너라.”>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는 말씀은 종말의 하느님 나라가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루카 17,21).
‘때가 차서’라는 말은 드디어 하느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종말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시작되었고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완성된다는 것이 우리 교회의 믿음입니다.
지금 우리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종말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방법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회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기 위해서 완전히 새롭게 변화되는 것입니다.
복음을 믿는 것은 회개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회개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믿는다고 생각만 하는 것도 아니고, 믿는다고 말만 하는 것도 아니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입니다(마태 7,21).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이렇게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셨다.”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시작되었다는 소식도 ‘기쁜 소식’(복음)이고,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면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소식도 ‘기쁜 소식’(복음)입니다.
지금 세상 사람들은 ‘일상의 회복’만 말하고 있지만, 신앙인은 ‘회개’를 말해야 합니다.
‘일상의 회복’만 말하는 것은 뒤를 돌아보면서 지나간 삶을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하느님 나라만 향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루카 9,62)
우리는 냉철하게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코로나 전의 삶’이 반드시 되찾아야 할 정도로 가치가 있었는가?
그게 정말로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선’이었는가?
우리 교회의 모습과 신앙인들의 모습도 냉정하게 반성해야 합니다.
‘코로나 전의 교회의 삶과 신앙인들의 삶’이 그것을 되찾게 해 달라고 하느님께 간청할만한 것이었는가?
정말로 그렇게 ‘좋은 것’(선한 것)이었는가?
예수님께서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신 이야기는 요한복음 1장 35절-42절에 있는 이야기와 함께 읽어야 합니다.
안드레아 사도는 원래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습니다.
그랬는데 요한의 인도로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요한 1,35-40).
하룻밤을 예수님과 함께 묵은 다음에 그는 자기 형 시몬 베드로를 예수님께 데리고 갔습니다(요한 1,41-42).
그 일이 있었던 때와 예수님께서 그들을 제자로 부르신 때 사이에는 적어도 몇 달의 간격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그 몇 달 동안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들었고,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들을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정식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원했을 것이고, 부르심에 응답할 준비를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와 요한 사도도 거의 같은 과정을 거쳤을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신 일은 갑작스러운 일이 아니라 그들을 계속 눈여겨보시다가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보시고 부르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어부들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자마자 곧바로 응답한 것은 이미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나를 따라오너라.”라는 말씀은, “내 뒤를 따라라.”, 또는 “내 뒤를 따라 걸어라.”인데, “나의 제자가 되어라.”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께서 가시는 대로 예수님의 뒤를 따라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라는 말씀은 “너희는 지금까지는 물고기나 잡아서 먹고 사는 어부로 살았지만, 이제부터는 내가 너희를 ‘사람들을 구원하는 사도’로 만들겠다.”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는 ‘그물을 버리고’, 또 ‘아버지를 버려두고’로 표현되어 있는데, 루카복음에는 어부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표현되어 있습니다(루카 5,11).
그런데 실제로 그들이 ‘모든 것’을 마치 쓰레기를 버리는 것처럼 버린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을 버렸다는 말은 인생을 완전히 바꿨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어부라는 ‘직업’은 버렸지만, 집과 가족은 버리지 않았고 그대로 유지했습니다.)
먹고사는 일만 신경 쓰던 인생에서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을 하는 인생으로 자기 인생을 바꾼 것은 모든 것을 버린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고 신앙인이 되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사도들처럼 인생을 완전히 바꿔야 합니다.
(물론 사도들처럼 직업을 버려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인생의 목표와 방향을 완전히 새롭게 바꿔야 한다는 뜻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콜로 3,1-2)
만일에 신앙생활을 현세에서 복을 누리기 위한 생활로만 생각한다면, 그래서 그런 복이나 빌고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딱하고 어리석은 일입니다(1코린 15,19).
지상의 인생은 잠시 거쳐 가는 ‘임시 천막집’일 뿐입니다(2코린 5,1).
신앙인은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집에서 살기를 희망하면서 지상의 천막집에 대한 미련과 집착을 버리는 사람입니다.
- 전주교구 금암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회개의 여정 - 늘 새로운 시작, 하느님 나라의 삶>
어제 점심식사 중 나눴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가장 좋은 복(福)이 뭐냐?’는 질문에 나는 식복(食福)이라, 인복(人福)이라, 천복(天福)이라 했고, 질문했던 수사는 전화위복(轉禍爲福)이라 했고, ‘아 그렇구나!’ 공감했습니다.
삶은 변화입니다.
더불어 '인간만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사자성어와 관련된 예화도 생각납니다.
현재의 지금이 전부가 아니니 상황에 일희일비할 것이 아니라 넓고 길게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나름대로 우리의 앞날을 예비하고 계시니 말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한나를 봐도 이해가 됩니다.
프닌나의 무시가 얼마나 마음 아프게 하는지, 남편 엘카나의 위로도 한계가 있는 듯 합니다.
그러나 기도의 사람, 한나는 슬픔을 하느님께 맡기며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합니다.
‘그러나 한나에게는 한몫밖에 줄 수 없었다.
엘카나는 한나를 사랑하였지만 주님께서 그의 태를 닫아 놓으셨기 때문이다.’
주님은 이런 와중에서 한나에게 사무엘 아들을 예비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끝까지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슬픔 중에도 해마다 주님의 집에 올라가는 한나의 한결같은 인내의 믿음을 하느님은 마음 깊이 담아 두셨음이 분명합니다.
전화위복, 새옹지마라는 말마디 안에 하느님의 개입을 감지합니다.
끝은 시작입니다.
어제로 성탄시기가 끝나고 오늘부터 연중시기의 첫날의 시작입니다.
제의 색깔도 백색에서 초록색으로 바뀌고 성무일도 찾기도 아주 단순하고 쉽습니다.
그렇습니다.
끝은 시작이요, 하루하루가 늘 새로운 시작입니다.
오늘 복음도 연중시기 첫날답게 참 신선합니다.
예수님의 공생애가 시작되는 복음입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언제나 현실성을 지닌 오늘 지금 여기서 우리에게도 그대로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는 언제나 지금의 때가 카이로스의 결정적인 유일한 때입니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에 임박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언젠가 그날의 때가 아닌 오늘 지금이 카이로스의 결정적 하느님의 때, 하느님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일상적이고 평범해 보이는 시간 낭비가 큰 죄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바야흐로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느님의 나라가 펼쳐지는 장입니다.
그러니 지금 여기서 주님을 만나야 하고 또 행복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결정적인 응답이 바로 우리의 회개요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한 두 번의 회개가 아니라 늘 끊임없는 회개요, 그리하여 우리 삶은 회개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끊임없는 회개와 더불어 늘 새로운 시작에 하느님 나라의 실현입니다.
회개의 자리에서 하느님은 당신의 계획을 우리와 함께 펼쳐가십니다.
막연한 회개가 아닌 구체적 실천을 의미합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네가 너희를 사람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주님의 은총의 부르심이 바로 구체적 회개를 촉발시켰고,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나서니 그대로 회개의 응답인 것입니다.
말 그대로 ‘구원의 출구(出口)’인 주님과의 결정적 만남입니다.
우리의 경우 외적 환경은 그대로이지만 내적 삶의 자세가 바뀜으로 이제부터는 하느님을 향한 부단한 자아초월(自我超越)의 내적 여정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하니 바로 이것이 정주영성의 핵심입니다.
환경이 아닌 관점이, 보는 눈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이 없었다면 평생을 갈릴래아 호수에서 출구없는 무의미한 반복의 어부의 삶을 살다가 허무하게 인생 마쳤을 것인데 주님을 만남으로 운명이 바뀐 것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의 주님을 선택함으로 늘 새롭게 시작하는 삶의 여정에 오른 시몬과 안드레아 형제요, 야고보와 요한 형제들입니다.
우리의 경우도 이와 흡사합니다.
부질없는 질문이지만, 우리가 주님을 만나 회개와 더불어 세례를 받고 주님을 따라나선 삶이 아니였다면 현재 어떤 삶을 살고 있었을지 상상이 안됩니다.
우연이 아닌 필연의 하느님 섭리이자 성소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은 알게 모르게 우리를 당신 최선, 최상의 방법으로 오늘 지금 여기까지 이끄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철석같이 믿습니다.
날마다 버리고 주님을 따라 나서는 버림의 여정, 따름의 여정은 그대로 회개의 여정이자 부단한 엑소더스(exodus), 탈출의 여정입니다.
한두 번의 버림이, 따름이, 회개가, 탈출이 아니라 늘 새로운 시작의 버림이자 따름이자 회개요 탈출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죽는 그날까지, 살아있는 그날까지 늘 새로운 시작의 버림의 여정, 따름의 여정, 회개의 여정, 탈출의 여정에 한결같이 항구할 때 비로소 하느님 나라의 실현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매일의 거룩한 미사 은총으로 우리 모두 이런 삶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제 좌우명 기도시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하느님 나라의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아멘.
- 성 베네딕토회 성 요셉 수도원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사형수에 관한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사형 집행 날짜를 모르는 사형수는 너무 불안한 나머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반면 자신의 죽을 날짜를 알고 있는 사형수는 불안해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생을 반성하며 슬퍼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기 삶을 정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분명한 진실은 우리 모두 예외 없이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날이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죽습니다.
그런데 정확한 날짜를 몰라서 지금 아무렇게나 사는 것이 아닐까요?
주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며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라고 하셨습니다.
회개는 곧 자기 반성입니다.
자기 반성으로 하느님께 되돌아가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자기 뜻만을 내세우는 삶이 아닌, 하느님 뜻이 드러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부르듯이 끊임없이 우리를 부르면서 “나를 따라라.”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하고 있습니까?
이에 대한 제자들의 모습을 우리가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자들은 시몬과 안드레아는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그리고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부모를 떠나 예수님을 따릅니다.
세상의 일과 가족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을 따르는 일임을 오늘 복음의 제자들은 보여줍니다.
불의의 사고로 하늘나라에 간 언니의 유품을 정리한 동생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유품을 정리하면서 깜짝 놀랐다는 것입니다.
평소에 짐이 없어서 유품 정리할 것이 있을까 싶었는데, 생각보다 정리할 짐들이 너무나도 많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은 언니보다 훨씬 많은 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꼭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하나하나 사들였던 물건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정작 하늘나라에 들어갈 준비는 하지 않고 이 세상이 영원한 것처럼 죽음 뒤에는 아무런 소용도 없는 것들을 애지중지했다는 반성을 하게 되었다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세상의 일이 제일 중요한 것 같지만 죽음 뒤에는 필요가 없습니다.
가족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가족들과도 이 세상에서 영원히 함께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분명해집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가장 힘센 분이시고, 그분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합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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