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장흥에 갔다. 1993년 <사람과 산>이라는 잡지에 동학농민혁명 백주견을 맞아 동학을 주제로 연재를 할 당시 장흥에 혼자 와서 억불산을 오르다가 길을 잃고 헤맸던 추억이 있는 억불산은 그대로인데, 그때로부터 오랜 세월이 흐르고 흘렀구나.
”내가 억불산 산정에 도착했을 때, 산정은 구름속에 떠 있었다. 구름은 산을 감싸고 나를 감싸고 이미 이곳은 구름에 점령당해 있다. 낯은 곳에서 이 산정을 향하여 불어오는 바람 소리. 들렸다. 휘-. 바람이 몰아오는 소리 들리고, 쌔-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 들렸다. 그리고 어느새 구름은 저만큼 내려가서 푸른 평야를 덮고 나는 바위위에 앉아 땀을 닦았다. 볼 수는 있으나 잡을 수 없는 구름. 그 속에서 나는 보이지 않는 먼 곳을 바라본다. 억불산 연대봉 해발 518m라고 쓰여진 표지석이 바람을 맞고 있고 나는 바람이 몰아오는 이 산정에 서서 온 몸으로 흔들리는 풀잎들을 바라다 본다. 억불산은 장흥읍의 동남쪽에서 장흥읍을 바라보고 있는 아름다운 산이다. 길 건너로 사자산과 제암산을 바라보고 자푸재를 향하여 길게 끌고 내려가는 산 능선이 부드럽게 내려와 있다. 어쩌면 아름다운 여인이 치마자락을 펄럭이며 걸어가는 것과 흡사한 억불산 정상에는 그 옛날 봉수대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 그 자취를 찾을 수는 없다. 그 정상 아래, 애기를 업은 여자처럼 다소곳이 서 있는 바위가 슬픈 전설이 서려있는 며느리바위다. 그 며느리 바위의 치마자락이 동, 서, 북쪽으로 부드럽게 느려졌기에 억부산(億婦山) 혹은 억부산(億夫山)이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그 며느리 바위에 얽힌 전설은 이러하다. 옛날 아주 옛날 장흥 고을에 마음씨 곱고 효성이 지극한 며느리가 시아버지를 모시고 어린 아들과 오손도손 살고 있었다. 그런데 비단결처럼 고운 며느리와는 정반대로 시아버지는 자린고비보다 더한 구두쇠로 인근에 소문이 자자했다. 밥을 지을 때는 쌀알을 세어서 내줄 정도로 구두쇠였다. 어느날 남루한 옷을 입은 거지가 동냥을 하러 왔다. 그러자 그 노인은 동냥바가지에 곡식은 커녕 매까지 때려서 쫒아 보냈다. 다음날 다른 거지가 가도 마찬가지였고, 그 다음 그 다음도 마찬가지였다. 그 말을 전해들은 어느 거지가 장흥고을 사또에게 그 노인의 나쁜 심성을 일러바치자 사또는 관아로 불러들였다. 명령을 받고 관아에 들어온 그 노인에게 사또는 이렇게 말했다. “네 이놈 듣거라. 네가 동냥을 하러온 사람을 도와주기는 커녕 매를 때리고 못살게 군 일이 있느냐”하고 말하자 노인은 “아닙니다. 절대로 그런 일이 없습니다”하고 대답했다. 사또는 “앞으로는 절대 그런 일이 없도록 해라” 말하고 노인은 돌려 보냈다. 그 일이 있은 후 어느 스님이 탁발승으로 가장을 하고 그 집에 갔다. 목탁을 두드리며 “절에서 나왔습니다. 시주 좀 하십시요”하고 말하자 “네 이놈 여기가 어디라고 얼씬 거리느냐, 썩 물러가지 못하겠느냐”하고는 시주는 하지 않고 똥을 한 바가지 퍼가지고 탁발승의 온 몸에다 끼얹어 버렸다. 그리고는 “저기 쌀통에서 쌀을 한번만 퍼가지고 가라” 하고 들어 갔는데 그 통은 못을 박고 철사로 둘둘 뭉쳐있어서 한 웅큼밖에는 꺼낼 수 없도록 만든 통이었다. 배가 고픈 탁발승은 그 때 나온 며느리에게 배가 고프다고 말하자, 며느리는 밥과 쌀을 내가지고 와서 시아버지의 용서를 빌었다. 그러자 탁발승은 말하였다. “부처님의 뜻을 따라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는데도 회개할 기미를 안보이니 어쩔 수 없습니다. 지금 내 말을 잘 들으시요. 어느날 어느 시에 천둥번개가 내리치고 장대같은 소나기가 쏟아질 것입니다. 그때는 주저말고 저 억불산으로 올라가시요. 그러나 절대로 어떤 경우에도 뒤를 돌아보면 안됩니다. 명심하십시요” 말하고는 몇 발자국 걸어갔는데 무슨 말을 물어보려고 하자 눈 깜짝할 사이에 그 스님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며칠이 지났다. 탁발승이 예언한 그날이었다. 금새 맑았던 날씨였는데 먹장구름이 하늘 가득 덮혀왔다. 천둥번개가 몰아치고, 동이로 물을 퍼붓듯 소나기가 쏟아졌다. 며느리는 탁발승이 예언했던 억불산으로 가기 위해 시아버지에게 함께 가자고 말하였으나 구두쇠 그 시아버지는 재산이 아까워서 막무가내였다. 며느리는 하는 수 없이 어린아이를 데리고 산으로 올라갔다. 얼마만큼 올라갔을까. 산 아래에서 시아버지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애야, 며느리야, 나좀 구해다오, 나좀 살려다오” 너무나 애절한 그 울부짖음에 탁발승의 간고한 말을 잊고 며느리는 뒤를 돌아 보았다. 그때 “우르르 꽝꽝” 천둥 번개가 하늘을 가르고, 그 순간 며느리는 돌로 변하여 바위가 되었다. 또한 그 아랫마을은 온통 물바다가 되고 말았다. 그 바위를 그때부터 며느리 바위라 불렀으며 그 물난리에 생긴 쏘를 박씨와 임씨의 두 성씨가 살았다고 해서 박림쏘라고 이름 붙었다고 한다. 그리고 며느리가 돌로 변할 때 며느리의 수건이 날아간 곳에 수건 건자(巾)에 뫼 산(山)자를 써서 건산리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지금도 그 자취로 탐진강 중류 장흥읍 연산리, 창랑정 앞에는 깊게 패인 쏘가 남아 있고 건산리라는 마을이 있어 그 옛날의 전설을 생각나게 한다고 한다. 억불산에서 뻗어내린 능선의 끝에 작은 고개가 있는데 말의 안장같은 고개를 덕림재라고 한다. 여러 길이 뚫리기 전에는 그길은 장흥의 남부지방으로 통하는 길이었다. 덕림재에서 떠오르는 보름달과 예양강 낚시군의 호봉불이 한데 어우러짐을 바라보고 장흥 팔경의 하나로 이름하였고 장흥 읍내를 지나는 탐진강에 억불산의 그림자가 거꾸로 비치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과 같았다고 한다. 나는 구름아래 펼쳐진 장흥읍과 굽이져 흐르는 이 나라 산천을 보며 장흥을 떠올린다. 장흥은 유난히 산세가 아릅답다. 지척에 보이는 사자산은 머리가 흡사 사자의 모양을 하고 있다. 그 허리가 길게 뻗어 안양면의 월계골까지 이어져 있다. 고개를 들고 먼 산을 바라보는 사자모양의 이 산은 장흥읍내를지키고 있는 수문장, 즉 스핑크스와 닮았다. 옛부터 이 고장 사람들은 이 산을 사자산으로 이름하였고 일제때 장흥에 살았던 일본인들은 이 산의 모습에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그들은 일본의 후지산과 닮았다고 하여 장흥후지산으로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사자산을 지나 높게 치솟은 산이 제암산이다. 장흥의 진산답게 웅장한 모습을 자랑하고 골짜기가 많으며 그 골짜기마다 샘이 많다. 장흥인근의 모든 산들이 이 산을 향하여 기립하고 있는 듯하고, 모든 산들이 이 산을 바라보고 있는 듯하여 제암(帝岩)이란 산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그리고 관산읍과 대덕읍을 사이에 두고 솟아오른 산이 천관산이다. 예전에는 천풍산 혹은 지세산이라고 불렀던 천관산은 가끔씩 흰 연기와 같은 이상한 기운이 서리는 산이라 하여 신산(申山)이라고 하였다 한다. 고려때까지만해도 울창한 산림이 우거져서 천관사, 옥림사, 보현사 등 89곳의 암자가 남아있었다고 하고, 지금은 몇개의 폐사지와 몇개의 석불이 남아 있을 뿐이다. 나는 그 산들을 바라보며 지금도 그리운 회진항과 몇 사람의 이름을 떠올린다. 소설가 이청준, 한승원, 송기숙, 이승우가 그들이고 내 어릴적 친구였던 윤남식이가 그 한사람이다. 국민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장흥군 대덕면으로 이사를 갔었던 그는 지금쯤 어디서 살고 있을까. 올망졸망하던 그의 동생들과 기와를 만들었던 그의 아버지는 지금도 살아 계실까? 그러면서 나는 이청준 선생의 슬픈 소설 「눈길」과 서편제 중의 한편이었던 「선학동 나그네」를 생각한다. 소설속에서 그가 K중학을 다닐 무렵 술버릇이 사나왔던 형은 전답과 선산을 팔았고 마침내는 그가 살았던 집까지 팔아 넘긴다. 그는 고향에 갔다. 갈 곳이 없어 친척 누님을 찾아갔는데 어머니가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 들렸다. 어머니는 그를 집으로 데려가서 옛날과 똑갈이 밥을 지어 내왔고, 그날 밤을 모자가 함께 지냈다. 훗날 그는 들었다. 어머니는 그밤을 같이 지내고 싶어 새주인에게 양해를 얻었고 그 집에서 그를 기다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침 눈길을 두 모자가 넘어지며 부축해가며 걸어가서 그 아들은 K시에 돌아갔고 그 어머니가 눈길을 되짚어 돌아 갈때 그놈의 빨간 햇살이 부끄러워서 동네 골목을 들어설 수가 없었다는 이야기가 눈물겨운 소설 「눈길」이다. 남도의 한과 질펀한 노랫가락이 절절이 스민 장흥은 아무렇지도 않게 흰구름 아래에 있고, 나는 구름 속에서 억불산 봉화대위에 피어 오르는 봉화불이 광주로 전주로 서울로 올라 가는 것을 환각처럼 보았다. 그리고 어느산 기슭에선가 노래소리 들리고 그 소리는 육자배기가 되고 울부짖음이 되고 파랑새 노래가 되고 함성이 되어 봉화불을 따라 온 나라로 번져가는 것을 나는 보았다. 지천에 피어난 패랭이꽃이 산정에서 아직도 고개를 숙이고 있고, 그 옆에 찔레꽃이며 싸리꽃들은 이 구름속에서 얼마나 태양을 그리워 하고 있는가. 내려가는 길은 왔던 길보다 다른 길로 내려가야지. 마음먹고 능선길을 따랐다. 그러나 한참을 작은 나무 숲들을 따라 내려 오다가, 나는 또다시 길을 잃었다. 「길 없는 길」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일까? 「길은 어디에나 있고 길은 어디에도 없다.」 다시 평화마을로 내려가리라던 나는 정반대방향인 보성으로 회천으로 빠지는 여암마을 입구에 도착하고 말았으니..... 개울물도 없다. 나는 푸른 벼이삭이 넘실대는 논배미에서 논물로 얼굴을 씻고 손을 씻었다. 지레짐작으로는 논물이라 뜨끈 미지근 하리라 생각했는데 웬걸 논물이 시원한 개울물 이상이다. 피곤한 나는 내게 남은 마지막 힘까지 지금도 구름덮힌 저 억불산에 두고 왔다. 이슬에 젖고 땀에 젖은 몸을 이끌고 장흥읍쪽으로 난 길을 천천히 따라가며 나는 생각했다. 길은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예정된 길을 내가 부정했을 뿐이다. 구름의 탓이라고 혹은 길을 잘못 알려준 택시기사의 잘못이라고 내가 생각할 뿐이다. 나는 억불산을 다시 한번 바라 보았다. 그때까지도 억불산 산정은 구름이 머무르고 있었다. 무슨 연유일까. 억불산(518m)보다 높은 제암산(779m)이나 사자산(666m)은 구름이 머무르지 않는데 억불산 산정에는 저리도 구름이 떠나지 않고 머무는 이유는····· 나는 장흥읍내를 휘돌아 가는 탐진강변에 서서 물끄러미 강물을 들여다 보았다. 저 강물은 흘러서 바다로 들어가리라. 신정일의 <동학의 산 그 산들을 가다> 중에서
벌써 3십여 년 저편의 일이라서 그러니, 그 때의 일을 까마득하게 잊고 살았다가 장흥에 가서 옛 추억을 불러내는데, 억불산도 평화마을도 그대로 남아 있으니, 나는 또 언제 이곳에 와서 지금을 회상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