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단 4년만에 2번의 한국시리즈 우승(V2)을 거머쥐었던 LG트윈스
'89 해태 - '90 LG - '91 해태 - '93 해태 - '94 LG
1989~1994년까지 6년동안 단 한차례('92롯데)를 제외하고는
해태와 LG가 번갈아 가며 우승컵을 양분하던 시절이었다.
물론 두 팀의 상황은 조금 달랐다.
당시 해태는 노장급이 중심이 된 전통의 강호였고
LG는 신인과 고참이 조화된 신흥 강호의 모습이었다.
창단 4년만에 2번의 우승컵을 거머쥔 LG의 전성시대 도래를
그 누구도 의심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후 LG는 단 한번도 우승컵을 얻지 못하고,
준우승 3회라는 씁쓸한 기록만 남긴채
어느덧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러버렸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2번째 우승 후 맞이한 95년, 한대화의 노쇠에도 불구하고 LG는 최강이었다.
그러나 후반기 해이해진 정신력와 부진으로
사상 초유의 0.5게임차(승률4리차)로 6할승률을 올리고도 1위를 놓치고 만다.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준플레이오프의 한정적 폐지규정이 생김에 따라
3위 롯데가 그 첫 수혜자로서, 플레이오프에 직행하는 악재를 맞게 된다.
1위와 다름없는 2위였던 LG는 순식간에 4위나 진배없는 처지가 되어 버린셈.
LG라면 누구도 잊지못할 악몽같은 '송구홍 송구 사건'과 함께
팀의 운명도, 송구홍의 운명도.. 예측하지 못한 수렁의 늪으로 빠져들게 되는데
95년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최강이라는 착각은
에이스 이상훈의 척추분리증이라는 불치병과 함께 산산조각 나고 만다.
연고선수 조성민의 일본행에 이어,
갖은 공을 들인 유망주 김선우와의 협상결렬과
제2의 선동렬이라 불리던 임선동의 입단실패와 1년에 걸친 지리한 법정다툼..
96년..모든 악재는 동시에 터지고 말았다.
현대피닉스 임선동 파문으로 대표되는 신인수급 실패와
(결과적으로 임선동에게도 그것은 인생 최대의 악재가 되고 말았다.)
'먹튀'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만들어낸 이정길 계약..
전반기에만 선발 8승을 거두고도 은퇴를 선언해버린 정삼흠의 공백도
장기적으로 이후 수년간 계속될 마운드 붕괴의 전주곡이었다.
96년 신인수급의 완벽한 실패과 맞물려
오랜 세월 마운드를 버텨온 정삼흠,김태원,김기범의 급격한 노쇠와 은퇴는
LG라는 팀에게 결정타를 날려버렸다.
이후 LG는 연이은 엇박자를 타게 되는데...(물론 2년간 再전성기를 맞긴한다)
97년 LG는 최향남,손혁 등 전력가세와 임선동-장문석-전승남 등의 입단,
에이스 이상훈의 마무리 전환 및 김용수의 선발전환이 대성공하게 되면서
새로이 마운드를 재건한다.
한편 96시즌을 부상으로 쉰 서용빈의 부활과 신인왕 이병규의 입단으로
타력에서도 한층 힘을 받게 된다.
그러나 後신인3인방이라 불렸던 임선동-이병규-전승남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김재현의 전력이탈과 에이스의 부재 탓인지
결국 1.5게임 차라는 또 한번의 진기록을 세우며 1위수성에 실패한다.
어떻게 보면 사상유례가 없는 0.5게임차, 1.5게임차의 2위를 거듭하면서
LG는 맥이 풀리고, 진이 빠져버린 상황에 처해 버린다.
97년 LG팀이 해태와 피를 말리는 1위 다툼을 하는 사이에도
이상훈은 미국 스카우터들과의 해외진출 협상에 여념이 없었는데..
경기가 있는 날에도 미국 스카우터들이 찾아와 이상훈과 이야기를 나누곤했다.
국내리그에 대해서 집중력을 잃어가고 있었던 이상훈은
한국시리즈 난조를 보이며 더이상 팀을 우승으로 이끌지 못했다. 준우승.
선수협 파동 등으로 LG 최종준 단장(현SK단장)과 악감정을 남기고 있던
이상훈은 결국 일본 주니치 드래곤즈로 떠나버린다.
이어진 98년 LG는 2년연속 한국시리즈 준우승으로
後전성기('97~98)의 아쉬운 마지막 페이지를 장식한다.
(**前전성기는 아마 '93~95년일 것이다. 이후 다시 전성기를 맞지 못하고 있으니 제1,제2라고 분리하기 어렵고, 포괄하여 전-후로만 구분하였다.)
98년 LG는 더이상 우승전력이 아니었다.
이상훈의 해외진출과 서용빈의 병역파동, 이병규의 2년차 징크스 등으로
전력이 크게 약화된 상태였다.
그러나 부자가 망해도 3년은 간다고 했던가?
96년에 이미 한차례 망했던 LG는 97년 준우승, 98년 준우승으로
망한 부자가 3년가는 모습의 전형을 보여준다.
(해태의 97년 우승도 크게 다르지 않다.)
어찌돼었건, 38세의 老松 김용수가 18승으로 생애 첫 다승왕에 오르고
김재현이 골든글러브 수상과 플레이오프MVP에 선정되고
새로운 에이스(?) 최향남과 함께 손혁이 2년 연속 10승을 거두고
중간에서 장문석,전승남 듀오가 기대이상의 활약을 선보이고
불안하지만 그런대로 버티는 마무리 앤더슨과
막판 가세한 용병 펠릭스의 대활약에 힘입어 플레이오프를 거쳐
한국시리즈에 이르르게 된다. (물론 떠오르는 샛별 현대에게 참패)
약한 전력으로 화려한 시즌을 보낸 셈이다.
이같은 98시즌은 LG 전성기의 마지막 불꽃이 되어 팀역사의 한페이지를 덮었다.
99년부터 LG는 엉망이 되어버린다.
소위 '이병규'로 대두되는 스타플레이어의 활약과
그에 상반되는 유리처럼 약한 팀 전력을 LG의 빛과 그림자를 드리운다.
99년 한국 최단기간 20-20 달성 및 프로3번째 30-30 가입에 성공한 이병규는
3할5푼의 타율과 192안타로 일거에 최고의 스타플레이어의 자리에 오른다.
언론에서는 모두 이병규를 한국의 이치로라 극찬하며
이승엽과 함께 한국야구를 짊어갈 천재로 평가된다.
(이병규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에 묻혀, 김재현이 그 해 이병규 못지않은 20여 홈런을 때렸다는 사실은 심지어 LG팬들조차 잘 알지 못한다.
이후 김재현은 (00).308 - (01).325 - (02).334 - (03).424 로 급성장한다.)
마운드의 완전붕괴로 결국 3년만의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
그리고 10년간 LG를 이끌었던 김동수가 팀을 떠났다.
2000년은 LG 행운과 불운의 한 해였다.
투타의 핵 해리거,양준혁,스미스의 입단은 행운이었고,
포스트시즌 장문석의 악몽은 불운이었다.
이병규(.324)-양준혁(.313)-김재현(.308)-스미스(.300) 등의 타력은 막강했으나
투수력은 해리거-장문석에 의존해 연명하고 있었다.
그나마 아직도 김용수가 은퇴하지 않고 호투한 것이 버팀목이었다. (대단함!!)
(2001년에 김용수가 구단의 권유로 은퇴하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지금도 뛰고 있을지 모른다는 망상을 나는 간혹 한다.)
결국 플레이오프에서 두산에게 악몽같은 연속홈런 역전패배.
(우즈의 입단과 함께 역학관계가 역전되기 시작한 잠실의 두 팀은 99~01 극과극을 달렸다. 떠오른 해와 지는 해라고 표현해야 할까)
2001년은 말이 필요없는 LG 역사에 남을 한 해였다.
홍현우,로마이어의 영입으로 LG는 사상 최고(이름만)의 타선을 구축한다.
캐리어상으로만 볼 때
1명의 40홈런타자(로마이어)와
3명의 30홈런타자(홍현우,이병규,양준혁)와
1명의 20홈런타자(김재현)와
무려 6명의 검증된 3할급타자(유지현,홍현우,이병규,양준혁,김재현,서용빈)는
분명 리그를 뒤흔들법한 타선.
물론 그 전 해 무리한 해리거와 장문석은 여지없이 나가 떨어졌다.
완전히 무너진 마운드를 구한 '구세주'는 수호신(?) 신윤호였다.
혼자서 투수부문 3관왕(다승,구원,승률)에 방어율2위까지 기록한 그는
심지어 구대성과 비교되기까지 했다.
(e스포츠에도 백호님의 칼럼이 남아있다. 구대성VS신윤호...물론 결과는 뻔하게 구대성의 승리지만, 당시에는 신윤호와 구대성을 비교하기 위해 장문의 칼럼까지 써야할 만큼 신윤호는 대단했다는 점이다.)
어찌되었건 신윤호-발데스 2명의 10승투수에도 불구하고
초반의 9승26패 삽질을 극복하지 못한채 4강다툼에 탈락하게 되었고
(그러나 2001년 LG는 엄청 화려했다. 적어도 개인기록에 있어서만큼은,,,
타격왕,다승왕,구원왕,승률왕,최다안타와,득점왕이 모두 한 팀에서 나왔다면?
정상적이라면 그 팀은 분명 못해도 4등은 했어야 한다. 그러나,,결과는,.,.)
2000년초 10년을 지켜오던 김동수가 팀을 떠나고,
2001년초 16년을 지켜오던 김용수가 팀을 떠났다.
팀을 지탱해오던 정신적 지주와도 같은 두 선수가
한 해 간격으로 팀을 떠나버렸다.
어쩌면 2001년에 LG가 무너지지 않았다면 도리어 이상한 일일지도 모른다.
'김용수만 있었더라면,,'김동수만 있었더라면..'하는 생각이
머릿 속을 떠나지 않는 2001년을 것이다.
LG는 2002시즌도 상당히 암울한 시즌초를 맞이하고 있었다.
어쩌면 4년반만에 이상훈이란 투수가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팀은 아직도 시커먼 암흑기를 보내고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린 나이에 리그를 호령하던 야심만만했던 투수가 어느새 백전노장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놀랍게도 어수선하고 혼란스러웠던 팀은 다시 전열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2002년 준우승의 과정은 다 알다시피 휴먼드라마틱한 아름다운 패배를 기록.
2003년 현재??
씨발~ 그 놈의 4위가 뭔지......이리도 어렵단 말인가
(언제 다시올지 모르는 전성기..그 날을 기다리며 잠 못드는 밤 한심한 LG팬이........)
(ps) 이상훈은 LG팬들에게 진 빚을 갚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용수는 오래도록 뛰면서 팬들에게 2번의 우승을 안겨주고 떠났다.
이상훈은 그림을 김용수보다 더 잘 그렸을지는 몰라도
마지막 '(마침표)점'을 찍어주지 못했다. 그것도 무려 3번이나...(95,97,02)
차라리 그림을 잘 그리지 못했다면 갚아야 할 빚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상훈은 그림을 너무 잘 그려주고도 점을 제대로 찍지 않았다.
그럼에도 팬들은 이상훈에게 김용수보다 더 큰 사랑을 보내주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한가지다.
언제가 되었든
은퇴하기 전까지 이상훈 선수가
엘지 팬들의 가슴 속에
3번째 '점'을 찍은 후에서야
비로소 잠실구장 외야 한구석의 41번 정 반대편에
등번호 47번을 걸고 떠나는 것이다.
그러기 전까지는.. 나는
빚 못받은게 억울해서라도 도저히
이상훈 선수를 떠나보낼 수 없을 것이다.
첫댓글 정말 멋진 글입니다. 감동이 확~~~~~
감동 안 받을수가 없군...ㅜ.ㅜ
감동이옵니다..ㅠ.ㅜ
90년 재창단후 엘지의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네여..간혹 잊고있던 이름들과 기록들까지 볼수있네여.정말 우리 엘지를 사랑하는 팬이시군요..저도 엘지의 오랜 팬의 한사람으로서 올해 후반기를 시작으로해서(플레이오프를 거쳐...) 엘지의 제 3의 전성기가 5년간 펼쳐지기를 바랍니다...5년동안 우승4회준우승 1회!!!!
엘지의 역사를 깔끔하게 한번에 객관적으로 정리해주셨네요...마지막에도 깔끔한 감정처리...박수!
감동감동감동.....................정말 감동입니다............ㅠㅠ
오!!!!!!!!!충격,,감동..이상훈선수가 꼭꼭,점을찍고 그림을완성시키리라.믿씀니다.엘지홧팅^^*
감동입니다.....
이상훈선수..지난해 준우승으로...베이스는 달성한거 같네요...물론 94,95년의 화려함은 아니지만...포스트 전성기를 맞고 있는듯...이상훈 선수의 책임이 상당히 무겁네요 아무튼...
마지막 글들이 멋지네여..
우아 멋지다....정말 감동입니당...이렇게 엘지를 생각해주는 팬이 있는데..한국시리즈 꼬옥 진출해야져~~~^^
정말 잘읽었습니다!!! 그래요 암요~~ 암~~그렇고말고요~~ 암요,..꼭 그렇게 될겁니다. 암요
멋집니다. 이런글 마니마니 부탁해요.
이런분 때문에 글을 얄팍하게 쓰는 엘지의 새발의 피밖에 모르는 조잡한 글들이 안올라 왔으면 합니다. 대단합니다.꾸벅 진정한 엘지팬이시군요
LG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제가 부끄러워지네요.....
저거 이스포츠에서 본 글...........자세한 아디는 몰라도 어쩌다 글 남겨도 평은 좋던데
정말 감동적이군요... 앞으로 또다른 엘지의 전성기를 위해 열심히 응원할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