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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0월 16일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제1독서 : 로마 2,1-11
복 음 : 루카 11,42-46
그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42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는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천해야 한다.
43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회당에서는 윗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44 너희는 불행하여라! 너희가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같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 위를 밟고 다니면서도 무덤인 줄을 알지 못한다.”
45 율법 교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스승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희까지 모욕하시는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46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너희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고,
너희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행복도 선택이다
-열망, 회개, 선행, 행복-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자 기도의 계절이요 외로움과 그리움의 계절입니다.
무엇보다 기도의 계절이요 하느님을 찾는 계절입니다.
하느님을 찾아 만날 때 비로소 해소되는 근원적 외로움과 그리움입니다.
9월 순교자 성월, 10월 묵주기도 성월, 11월 위령성월이 기도의 계절,
하느님을 찾아야 하는 계절임을 웅변하고 있습니다.
요즘 제 관심사는 ‘성소’가 아니라 ‘죽음’입니다.
참으로 주변에서 이런저런 많은 죽음과 더불어 끊임없는 연미사 신청을 받아
연미사를 봉헌하다보면 죽음이 바로 눈앞에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사부 성 베네딕도 역시 “날마다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 말씀하셨습니다.
낙엽지듯 들려오는 죽음의 소식을 들을 때 마다
하루하루 충실히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살아야겠다는 각오를 새로이 하게 됩니다.
참으로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고 살 때 환상이나 허상에서 벗어나
오늘 지금 여기에서 열정을 다해 투명한 본질적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행복하게 사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자 책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
차라리’ 자포자기적 삶이 아니라 ‘그래도’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 갔을 때 묻는 물음은 단 하나, “너는 행복하게 살았느냐?” 일 것입니다.
행복도 선택입니다. 부단히 하느님을 선택할 때 참 행복입니다.
시편 16장 2절 고백이 생각납니다.
“주님께 아룁니다. 당신은 저의 주님, 저의 행복 당신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온갖 열정과 갈망, 열망 모두 하느님을 향한 열정과 갈망, 열망으로 전환할 때
참 행복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갈망과 배움에 대한 사랑’에 항구하고 충실할 때 참 행복입니다.
지난 10월15일 예수의 성녀 데레사 대축일 미사시 아름다운 본기도 마지막 말마디를 잊지 못합니다.
“저희가 언제나 그의 거룩한 가르침을 따라, 참된 성덕의 열망으로 불타오르게 하소서”.
끊임없이 참된 성덕의 열망으로 불타오를 때 참 행복입니다.
참된 성덕을 향한 열정이 열망이 우리를 회개에로 이끕니다.
분도 성인 역시 수도승들이 좋은 열정을 가져야 할 것을 촉구하며
규칙서에서 다음처럼 우리의 실천을 촉구합니다.
“하느님께로부터 분리시켜 지옥으로 이끄는 쓰고 나쁜 열정이 있듯이,
악습에서 분리시켜 하느님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끄는 좋은 열정이 있다.
그러므로 수도승들은 지극히 열렬한 사랑으로 이런 열정을 실천할 것이다.”
이런 열렬한 사랑이 성덕의 잣대입니다. 저절로 회개를 열망하게하고 하느님을 찾게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주님은 세 차례에 걸쳐 일부 바리사이들에게 불행을 선언합니다.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오늘 불행선언의 대상인 바리사이들은 별종의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의 보편적 모습일 수 있습니다.
새삼 회개를 통한 선택이 얼마나 본질적인지 깨닫습니다.
첫째, 분별의 지혜를 지닐 때 참 행복입니다.
십일조뿐 아니라 의로움과 사랑의 실천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균형과 조화의 문제입니다.
전례만 있고 삶이 없다면, 기도만 있고 일이 없다면 참 공허하기 짝이 없을 것입니다.
둘째, 허영이 아닌 진실한 삶을 살 때 참 행복입니다.
바리사이들처럼 윗자리나 인사받기를 좋아하는 것,
이 또한 알맹이가 아닌 껍데기의 허영을 쫓는 일입니다.
참으로 내적 빈곤을 반영하는 허영입니다.
참으로 진실하고 겸손한 속이 꽉 찬 사람들은 결코 허영에 휘말리지 않습니다.
셋째, 위선에서 벗어나 진실한 삶을 살 때 참 행복입니다.
겉과 속이 다른 표리부동의 삶이 아니라, 언행일치의 명실상부한 삶을 뜻합니다.
그 삶이 마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한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같다면
아무리 위장하고 가면을 써도 저절로 드러나기 마련이라
그 부정적인 영향은 분위기를 오염시켜 탁하게 할 것입니다.
넷째, 본연의 책무에 충실할 때 참 행복입니다.
율법학자가 질책 듣는 것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고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 하지 않는 무책임한 행위에 있습니다.
솔선수범의 참 행복을 잊어버린 이기적 어리석은 처사입니다.
그러고 보니 모든 불행은 무지의 어리석음에서 기인함을 깨닫게 됩니다.
무지에서 기인한, 무분별, 허영, 위선, 무책임한 행위입니다.
이런 무지에 대한 유일한 답이 회개의 열정과 실천임을 깨닫게 됩니다.
끊임없는 회개의 열정과 실천으로 참으로 분별력 좋은 지혜의 삶을, 진실과 겸손의 삶을,
또 솔선수범의 삶을 살 때 비로소 참 행복입니다.
제1독서 로마서에서 바오로 사도 역시 남을 심판하는 자들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바리사이들처럼 자기를 모르는 무지하고 교만한 자들이 남을 심판하지
진정 자기를 아는 지혜롭고 겸손한 사람들은 결코 남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마치 복음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물론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말씀처럼 들립니다.
자의적인 심판이 아니라 진리에 따른 심판입니다.
“그대는 하느님의 그 큰 호의와 관용과 인내를 업신여기는 것입니까?
그분의 호의가 그대를 회개에로 이끌려 한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그대는 회개할 줄 모르는 완고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심판의 날에 진노를 쌓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누구에게나 그 행실대로 공평무사하게 적용되는 각자 스스로 자초한 심판입니다.
화답송 역시 하느님의 공정한 심판을 강조합니다.
“주님, 당신은 사람마다 행실대로 갚으시나이다.”
어제 어느 정치가의 다산 정약용 선생의 말을 인용한 연설문 마지막 부분 역시
회개를 촉구하는 말처럼 들렸습니다.
"이 나라는 털끝 하나라도 병들지 않은 것이 없다.
지금 당장 개혁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하고 나서야 그칠 것이다."
그러니 참 좋은 열정으로, 열망으로, 갈망으로 끊임없는 회개와 더불어 행복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항구히 충실히 선행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를 향한 다음 주님의 말씀이 우리를 고무합니다.
복음의 예수님이 문제를 제기하고 독서의 바오로가 답을 줍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주님의 은총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꾸준히 선행을 하면서 영광과 명예와 불멸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참으로 선을 행하는 모든 이들에게는 영광과 명예와 평화가 내릴 것입니다.”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떤 소매치기가 있었습니다.
이 소매치기는 복잡한 전철에 타서는 그 안에서 남의 지갑을 훔쳤지요.
그런데 마침 잠복해있던 경찰이 있었고 현장에서 검거되고 말았습니다. 이 소매치기는 외칩니다.
“내가 얼마나 법을 잘 지키는 사람인데요. 소매치기만 몇 번 했을 뿐인데 왜 나만 가지고 그럽니까?
세상에 저 말고도 나쁜 사람이 얼마나 많아요?”
어떻습니까? 이 사람은 법을 잘 지키는 사람입니까? 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입니까?
물론 이 사람의 말대로 그는 다른 법을 잘 지켰습니다.
폭력을 써서 누구를 다치게 한 적도 없었고, 남의 여자를 강제적으로 탐내는 성범죄를 일으킨 적도 없습니다.
또 ‘말’로 사기를 쳐서 피해를 준적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사람을 두고 법을 잘 지키는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소매치기는 분명히 법을 어긴 것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에 나와 있는 계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계명 한 가지만 어긴 것이라면서 율법에 충실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오히려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게 되면서 외면당하게 될 것입니다.
하물며 하느님께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계명을 어기는 것은 어떨까요?
하느님으로부터도 외면을 당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을 향해 “불행하여라!”라고 시작되는 불행선언을 하십니다.
사실 그 누구보다도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면서 열심히 살았습니다.
이 모습을 따르기가 힘들기에 다른 유대인들은 큰 존경과 사랑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런데도 불행선언의 주인공이 되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 있지만 모든 율법을 잘 지키고 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가장 중요한 계명으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이야기해주셨지요.
그만큼 사랑의 실천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 같은, 반드시 실천해야 할 중요한 임무를 하찮게 여겼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들한테 이득이 될 계명들만 철저히 지키고, 사람들한테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윽박질렀습니다.
결국, 가장 중요한 율법을 어기는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이 불행하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율법을 어겨서 하느님으로부터 외면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습도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스스로 계명을 잘 지킨다고 말하지만, 계속해서 남들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판단하고 단죄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지금 이 자리에 사랑이 없다면 우리 역시 주님으로부터 외면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율법인 사랑 안에서 주님과 함께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꾸중을 감당하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
다행이란 목마른 이가 사막에서 우물을 발견한 것이고,
불행이란 너무 좋아 덤벙대다 그 우물에 빠져 죽는 것이랍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꾸중을 듣는 것은 불행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꾸중을 통해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면 다행입니다.
아니 그 꾸중은 행복입니다. 그러나 듣지 않는 이에게는 불행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아끼는 아들을 꾸짖듯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꾸짖으신다.”(잠언3,12).
“내 아들아, 너는 주님의 훈육을 하찮게 여기지 말고 그분께 책망을 받아도 낙심하지 마라.”(히브12,5).
오늘 복음의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루가11,42),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루가11,46)는
주님의 꾸중은 그들의 회개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았고 오히려 트집을 잡으려 했습니다.
그들은 정의를 행하는 일과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높은 자리를 찾고 인사 받기를 좋아하는 사람들,
남에게는 이러저러한 것을 요구하면서도 자기는 실천하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이 불행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불행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았으니 더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들은 의인처럼 보인 죄인이었습니다. 오히려 죄인처럼 보인 의인이 낫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실 것입니다”(로마2,6).
그런데 정작 저 자신이 율법학자요, 바리사이인 것을 잊고 삽니다.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가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마태26,25) 하신 음성이 들리는 듯합니다.
바리사이들도 율법학자도 예수님의 꾸중을 들을 수 있었으니 그의 사랑 안에 있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거부 하는 것은 주님도 어찌하지 못하셨습니다.
따라서 자유의지를 존중해 주시면 그것을 잘 활용해야 합니다.
“모든 훈육이 당장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것으로 훈육된 이들에게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가져다줍니다.”
(무슨 견책이든지 그 당장에는 즐겁기 보다는 오히려 괴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견책으로 훈련을 받은 사람은 마침내 평화의 열매를 맺어 올바르게 살아가게 됩니다)(히브12,11).
회개에로 이끌기 위한 예수님의 사랑의 표현을 잘 알아들어야 하겠습니다.
누군가 나를 꾸짖거든 행복한 줄 아십시오. 성경에 분명히 기록되어있습니다.
“미련한 자는 제 길이 바르다고 여기지만 지혜로운 이는 충고에 귀를 기울인다.”(잠언12,15).
꾸중을 듣는다는 것은 밝은 미래를 만들 수 있는 은총의 기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꾸중을 두려워 마십시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서울에 살 때입니다. 한강의 유람선도 거의 타보지 않았습니다.
남산 타워도 올라갈 기회가 거의 없었습니다.
늘 가까이 있어서, 언제든지 갈 수 있어서 굳이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유람선도, 남산 타워도 서울 사람보다는 타지에서 온 사람과 외국에서 온 사람이 더 많이 간다고 합니다.
일부러 시간 내서 왔기에 서울의 관광지를 보러 가는 겁니다.
뉴욕에 와서 ‘센트럴 파크’엘 다녀왔습니다.
숙소에서 지하철을 이용하면 쉽고 빠르게 갈 수 있습니다.
제가 외국에서 왔기 때문에 방문한 거 같습니다.
한국도 공원과 산책로를 아름답게 만들고 있습니다.
쓰레기 매립장이었던 난지도가 하늘공원, 노을공원을 변한 걸 보았습니다.
가을의 하늘공원의 억새는 정말 장관입니다.
차량과 소음으로 답답했던 청계천 고가도로는 시원한 물이 흐르는 산책로가 되었습니다.
명동에 있으면서 자주 걸었습니다.
발전과 성장보다 시민의 건강과 여가를 위한 아름다운 선택이었습니다.
뉴욕이 세계적인 관광지가 된 것은 자유의 여신상과 맨해튼의 고층 건물과
브로드웨이의 공연도 있겠지만 센트럴 파크가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뉴욕 시민이 가장 좋아하고, 자주 가는 곳도 센트럴 파크라고 합니다.
공원을 조성하면서 이렇게 비싸고, 좋은 땅에 빌딩을 세우자는 의견도 많았다고 합니다.
당시 공원을 설계하던 분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지금 이 땅에 건물을 세우면 당장 이익이 오겠지만 먼 훗날 이 땅만큼의 병원을 지어야 할 겁니다.”
뉴욕시는 설계자의 의견을 받아들였고,
센트럴 파크는 뉴욕 시민은 물론 세계인이 사랑하는 공원이 되었다고 합니다.
오전 11시에 도착해서 오후 4시까지 공원을 걸었습니다.
거리 연주자의 공연도 보았고, 새들의 노래도 들었고,
주변 건물과 조화를 이루는 탁 트인 호수가 아름다웠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신앙인이 가야 할 길과 신앙인이 가지 말아야 할 길을 이야기합니다.
교회의 지도자와 봉사자는 오늘 성서 말씀을 늘 마음에 담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신앙인이 가지 말아야 할 길을 명확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너희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고,
너희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너희가 회당에서는 윗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는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천해야 한다.”
신자들은 권위는 있으나 권위적이지 않은 사제를 존경합니다.
사제의 권위는 섬기는 삶에서, 십자가를 지는 삶에서 드러납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신앙인이 가야 할 길, 교회의 지도자와 봉사자가 가야 할 길을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꾸준히 선행하면서 영광과 명예와 불멸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선을 행하는 모든 이에게는 영광과 명예와 평화가 내릴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알찬 열매를 맺으면 좋겠습니다.
씨앗은 바람을 타고 날아가 어느 곳에선가 자리를 잡습니다.
어디에 자리를 잡는지는 바람만이 알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많은 씨앗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뿌리를 내리고, 꽃과 열매를 만들어 냅니다. 우리의 선행도 그래야합니다.
지치고 힘든 사람들의 가슴에 위로와 용기의 꽃을 피워야 합니다.
절망과 근심 중인 사람들의 마음에 희망과 기쁨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백성아, 언제나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 앞에 너희 마음을 쏟아 놓아라.
하느님은 우리의 피신처이시다.”
겉에서 속으로
이종훈 마카리오 신부
성찬례, 미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절정이고 중심이다.
예식으로서가 아니라 나눔 희생 사랑이라는 그 의미를 넘어 그 모범을 보여주신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특별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 시간은 너무 특별해서 사람들은 이 세상의 시간과 공간을 떠나
예수님이 사셨던 그 시간과 공간, 특히 그분의 최후의 만찬과 십자가 사건의 현장으로 이동한다.
사제가 제일 먼저 성체와 성혈을 먹고 마신다.
그가 높은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그것을 지켜보는 교우들에게 모범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그가 먹고 마셨으니 교우들도 먹고 마신다.
그가 주님의 계명대로 사랑하니 교우들도 서로 사랑한다.
그가 주님의 십자가 길을 따르니 교우들도 그 뒤를 따른다.
그러나 현실은 그 이상과 많이 다르다.
사제도 이기적인 인간이고 죄인이다.
하늘의 품성을 지닌 사람이신 예수님을 따르기가 말처럼 쉽지 않다.
그래도 교우들에게 모범이 돼야하니 겉으로라도 예수님처럼 살려고 하니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속이 부대끼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그것을 위선이라고 고발하지 않는다.
속이 깨끗하지 않으니 겉이라도 잘 닦으면 속도 그렇게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간절한 바람이 있기 때문이다.
세례가 아니라 그분의 계명을 지킴이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고,
수도서원과 사제수품이 아니라 그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실 정도의 친밀감이 그들을 예수님의 벗이 된다.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을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같다고 심하게 나무라셨다(루카 11,44).
겉은 깨끗하지만 그 속은 썩은 시체가 있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그런 줄 모르고 그들을 존경하고 부러워하고 따르려고 하는 위험을 고발하셨다.
수도자 성직자라고 월등하게 선하지 않고, 그렇다고 사악하지도 않다. 그저 평범한 죄인이다.
하느님이 그들을 돌보시는 것은 그들을 통해 예수님을 세상에 보여주려 하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사람들이 그렇게 만난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계명을 지켜 영원히 살게 하신다.
예수님, 주님만이 대사제이십니다.
여기서 사제라고 불리는 이들이 주님의 모습을 지금 여기에서 드러내 보여줍니다.
그 신성한 일을 죄인이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이 먹이시고 용서하시며 이렇게 매 번 큰 호의를 베풀어주시니 겉으로라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 선행들이 속에도 생기를 불어넣어 주리라 믿습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실망하거나 체념하지 말고 꾸준히 선행을 하게 도와주소서. 아멘.
자기 영광을 추구하면 누구나 불효자다
전삼용 요셉 신부
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노아는 포도주를 만들어 마시고는 더워서 벌거벗은 채로 잠을 잤습니다.
장막 안으로 들어온 함이 아버지의 알몸을 보고는 밖에 있던 두 형제, 셈과 야펫에게 알렸습니다.
셈과 야펫은 함과는 다르게 아버지의 알몸을 보지 않기 위해 뒷걸음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겉옷으로 아버지의 몸을 덮어드렸습니다.
노아가 잠에서 깨어 이 사실을 알고 함은 저주하고 셈과 야펫은 축복해 주었습니다.
왜 함은 저주를 받은 것일까요?
아버지 앞에서 당당할 수 있다면 그것 자체가 불효입니다.
아버지가 벌거벗고 자는 것은 물론 창피한 일입니다.
그러나 아버지 앞에서 자녀는 수도 없이 그런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것을 잊었으니 의롭지 못한 사람입니다.
의로움은 자신이 받을 것을 알고 합당한 반응을 하는 것입니다.
100억을 빚져 갚을 능력이 없다면 적어도 빚을 지지 않은 척은 하지 말아야합니다.
채권자 앞에서 채무자가 빚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 자체가 의롭지 못한 것입니다.
부모 앞에서 자기 힘으로 컸다고 말한다면 부모가 장하다고 칭찬해 주실까요?
자녀는 부모의 도움 없이는 태어날 수도 없고 성장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게 약하디 약한 존재로 태어나고 성장하지만 그 받은 사랑은 잘 기억하지 못합니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혼자 컸다고 말하면 그것이 의롭지 못한 것입니다.
의롭지 못한 사람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자기의 영광을 추구합니다.
빚을 진 것을 알면 채무자의 자세를 취하겠지만 채권자의 행세를 하는 것입니다.
채권자는 무언가 요구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사람은 부모 앞에서도 채권자의 자세를 취할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신을 위해 당연히 희생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자신들은 아파트에 살면서도 부모님은 시골집에 살아도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부모에게 받은 은혜를 아는 의로운 사람이라면 자신보다는 부모의 영광을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십계명에 부모를 공경하란 대목이 있는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면 하느님도 공경할 수 없습니다.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은 하느님 앞에서도 자신들의 영광을 추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회당에서는 윗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 누구도 자신의 영광을 추구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이 십일조는 잘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에는 무관심하다고 꾸짖으십니다.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는 사람은 의롭지도 못하고 하느님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미국의 보스톤 해변가에서 한 노인이 매일 새우를 갈매기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사람들은 사람 먹을 것도 없는데 비싼 새우를 갈매기들에게 준다고 그 노인을 나무랐습니다.
그런데 그 노인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국 해군 장군이었습니다.
독일군의 어뢰로 배가 격침되어 그와 그의 부하 일부만이 구명정에 간신히 올라탔습니다.
뜨거운 태양과 폭풍과 식량부족으로 바다 위에서 죽음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갈매기 한 마리가 구명정에 앉아 움직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떨리는 힘없는 손으로 갈매기를 잡았습니다. 갈매기는 희한하게 저항하지 않았습니다.
장군이 그때 갈매기를 먹지 않았다면 탈진하여 구조되기까지 버틸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은 갈매기 한 마리가 없어도 생명을 유지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우리에게 생명과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잘 것과 친구들을 마련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아버지라고 아드님의 살과 피를 양식으로 주셨습니다.
이것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분은 항상 나와 함께 계십니다.
그분이 나와 함께 계신대도 채권자의 자세로 산다면 그것이 의롭지 않고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나의 영광을 추구한다면 그것이 그분 앞에서 불효자가 되는 길입니다.
항상 주님의 기도에서 내 영광이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를 잊지 말고 살아갑시다.
수도자매일복음묵상
''너희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놓고,
너희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하나 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안 콘실리아 수녀
영화 기생충을 보셨나요?
이 영화에서 부자들은 가난한 이들을 괴롭히지 않는다.
그러나 부자나 가난한 이나 그들이 사는 세계를 철저히 구분한다.
그리고 부자의 세계에 사는 사람에게 가난한 이들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완전히 자기와 무관한 일이다.
가난한 이들의 세계에서 비는 반지하 방을 가득 채워 재앙이지만,
부자들의 세계에서는 미세먼지를 씻어주는 고마운 비다.
영화에서 부자들은 전혀 나쁜 짓을 하지 않고, 세상의 눈으로는 아무 문제없던 부자 가족도
하느님의 눈으로 보면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가난한 한 이들에 대한 선을 긋고 무관심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도 가난한 이들에게 나쁜 짓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난한 이들이 지고 있는 무거운 짐이 자신과는 무관한 짐 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오늘 날의 죄악이다.
영화 속에서 이선균은 선을 넘는 것에 대해 말한다.
선을 넘어오는 것이 싫다고 말한다.
오늘날 사람들이 보여주는 '손가락 하나 대지 않는 모습'과 상통한다.
예수님은 당시 지배 계층이 만들어놓았던 수많은 선을 기꺼이 넘어 다니셨다.
내가 머물고 있는 필리핀에서도내 주위의 선을 넘어오는 사람들이 많다.
직접적으로 돈을 요구하거나 또 다른 형태의 모습들로 힘겨운 짐을 메고 있는 사람들이 손을 내민다.
그들이 지고 있는 짐은 내 짐이다.
계속 십일조만 바칠 것인가?
윗자리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는 선택에서 그 선을 뛰어 넘는
혜안과 타인에 고통에 대한 공감의 은총을 청한다.
예수님이 그 수많은 선을 넘어 다니셨던 이유!
가난한 이들의 고통에 대한 연민.
그 마음을 청한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