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운드의 선생님 | 심판이 하는 일 가운데에는 선수들이 경기장에서 규칙을 지키고 모범적인 행동을 하게끔 ‘가르치는’ 것도 포함된다. 이규석 기술이사는 박정태(롯데 2군 감독)의 현역 시절 일화를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당시 신인인 박정태가 선발 2루수로 나왔다. 그런데 2루에서 태그를 하는 게 아마추어 야구 때 하던 식으로 멋을 부리지 뭔가. 아마추어에서는 그렇게 해도 타이밍 상 아웃 판정을 받았겠지만 프로에서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걸 알려 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다음에는 그렇게 하면 세이프다’라고 단단히 주의를 줬다.”
이규석 이사는 “초창기 프로야구에서는 신인이 바로 1군에서 주전으로 뛰는 경우가 많았다”며 “그런 선수들은 감독이나 선배들도 길들이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심판이 대신 길들이는 일을 많이 했다”고 말한다. “일본이나 미국이나 다 마찬가지다. 신인이 건방을 떨거나 프로답지 못한 행동을 하면 심판이 제재를 하고 교육한다. 프로에서는 그런 행동을 하면 안 된다는 걸 가르치는 거다.”
심판도 훈련을 한다 | 선수들만 훈련을 하는 게 아니다. 심판도 훈련을 한다. “며칠이라도 쉬면 판정 감각과 집중력이 떨어진다”는 게 심판들의 공통적인 얘기다. 또한 투수들이 던지는 공의 궤적이나 구질을 파악하기 위해서도 훈련은 반드시 필요하다. 비시즌 기간 심판들이 구단 전지훈련에 참가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조종규 KBO 심판위원장의 설명을 들어보자. "전지훈련을 가지 않으면 포스트시즌 끝나고 다음 시즌까지 3개월 정도를 공을 안 보게 되는데, 공을 자꾸 보면서 익히기 위해 따라간다. 또 외국인이나 신인 선수의 주무기, 투구폼, 보크 등을 잡아내기 위해 준비를 하는 목적도 있다."
지금은 익숙해진 장면이지만 프로야구 출범 초기에는 심판이 훈련을 받아야 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 구단 고위층 때문에 어려움도 있었다. 한 원로 심판은 “동계훈련 참관을 관철하기까지 (구단의)반대가 많았다”며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심판도 훈련을 해야 똑바로 볼 수 있다고 했더니 ‘훈련지에 가서 구단한테 뭐 받아먹으려는 것 아니냐’ ‘위험한 짓이다’는 반응이 돌아왔다. 부정적인 면에 대해서만 생각한 거다. 그래서 처음에는 싸움도 많이 했다.”
전지훈련 기간은 심판과 현장 관계자들이 마음을 터놓고 대화할 수 있는 유일한 시기이기도 하다. “시즌에 들어가면 대화하기가 어려워진다.” 이규석 이사의 말이다. “선수나 코칭 스태프와 격의 없이 서로의 생각을 나눈다. 시즌 동안 생긴 문제나 아쉬운 점에 대해 지적하기도 하고 심판도 심판대로 이야기를 한다. 그래서 다음 시즌에는 같은 문제가 생기지 않게끔 하는 거다.”
조정자로서 심판의 역량
선수 평가 | 신인 선수나 새 외국인 선수에 대해 심판만큼 정확한 평가를 할 수 있는 이도 없다. 가령 지난 시즌 크게 실패한 뒤 퇴출된 한 외국인 투수는 전지훈련 당시 심판들 사이에서 부정적인 평가가 많았다. 반면 대성공을 거두고 일본으로 진출한 투수에 대해 한 베테랑 심판은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성공을 장담했고 그대로 이루어졌다.
날카로운 감식안을 지닌 심판은 투수의 공을 보면 대충 몇 승 정도가 가능할지도 정확하게 예측해 낸다. 한 원로 심판은 SK 정대현의 신인 시절을 회고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마추어에서 굉장했던 투수라고 해서 유심히 봤는데 공이 정말 형편없었다. 그래서 코치에게 ‘저 투수가 올해 5승을 하면 손에 장을 지진다’고까지 했을 정도다. 실제로 그해 정대현은 1승도 하지 못했다. 알고 보니 데뷔 초 몸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았다고 하더라.”
투수 유망주의 올해 성적이 궁금한가? 전지훈련을 다녀온 심판에게 물어보면 틀림없다. 부상에서 회복한 투수의 상태를 알고 싶은가? 복귀전 주심을 본 심판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귀로 듣는다 | 심판들을 위한 교본에는 1루심의 세이프, 아웃 판정에 대해 “눈으로는 타자주자의 발을 보면서 귀로 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돼 있다. 한 심판은 “여유 있는 타이밍이면 몰라도 ‘뱅뱅 플레이(bang-bang play)’ 상황에서 눈으로 공을 쫓다가는 주자의 발이 베이스를 밟는 것을 볼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과연 만원 관중이 내는 엄청난 소음 속에서도 1루수 미트에 공이 닿는 소리를 제대로 들을 수 있을까? 가능하다. “나도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그런데 해보니까 정말로 되더라. 아무리 응원 소리가 시끄러워도 집중력만 잃지 않으면 다 들린다.” 베테랑 심판원의 경험담이다. 조종규 심판위원장은 "소리로 듣고 판정하기 위해서는 반복된 훈련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또한 파울팁이나 몸에 맞는 공 판정도 소리가 큰 도움이 된다고. 그의 설명을 들어보자. "파울팁이 되는 것과 포수가 곧바로 잡는 경우는 소리가 다르다. 몸에 맞는 공도 옷에 스치면 칙!하는 소리가 난 뒤에 포수 미트에 '퍽'하고 꽂히는 소리가 들린다. '퍽'하는 소리만 들렸을 때는 몸에 맞지 않고 바로 잡은 거고, 스쳤을 때는 '칙'하는 소리가 난다."
오심 | 미국의 빌 클렘이라는 심판은 “나는 여태껏 단 한번도 오심을 한 적이 없다”고 떠벌였다. 반면 이규석 이사 같은 이는 “내가 출장한 2,000여 경기 가운데 완벽하게 심판을 본 경기는 단 한 경기도 없었다”고 말한다. 사실을 말하고 있는 사람은 어느 쪽일까.
사실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영역에는 한계가 있다. 조종규 위원장은 "심판들도 이따금 스트라이크를 놓칠 때가 있다"며 이렇게 설명한다. "스트라이크를 놓치는 게 한 경기 세 개 이하면 좋은 심판으로 보는데 그것도 더 줄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최근 미국에 도입된 홈런 비디오 판독만 해도 4~5번에 한 번 꼴로 선심 판정이 번복되곤 한다. 지난해 메이저리그에서는 9회 투아웃에 나온 1루심의 어이없는 오심으로 퍼펙트게임이 무산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인간이 심판을 보는 이상 오심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마도 빌 클렘의 말은 심판으로서 자신의 판정에 대한 자부심과 자신감을 표현하기 위한 허세였을 것이다. 선수와 감독, 관중에게 전방위로 압력을 받는 심판의 처지를 고려하면 그런 자신감도 어느 정도 필요하긴 하다.
이규석 이사는 “어떤 상황에서 오심이 나왔느냐가 문제”라며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큰 점수 차에서 오심이 나왔다면 별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접전인 상황에서 오심이 나온다면 그건 심각한 문제다. 심판이 어느 때보다 집중력을 발휘해야 하는 시점이기 때문다.”
또 오심이 나오더라도 절대 고의성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심판의 오심이 실수가 아닌 의도적인 것일 경우 경기장에 있는 선수와 감독은 즉시 알아챈다. 만일 감독의 항의가 평상시 수준을 넘어 지나치게 과격하다 싶은 느낌이 든다면 필시 그는 심판이 일부러 상대에게 유리한 판정을 한다고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홈런에 대한 비디오 판독을 제외하고 심판 판정이 번복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판정 번복은 상황을 더 잘 볼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다른 심판의 판정이 더 정확하다는 확신이 있을 때만 이루어진다. 그 외의 경우 심판은 자기가 내린 판정에 대해 자신을 가져야 한다. 심판이 스스로를 확신하지 못하고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면 그 경기는 엉망진창이 될 수밖에 없다. 물론 이게 심판에게 반성이 전혀 필요하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규석 이사는 이렇게 말한다. “경기 끝난 뒤에는 반드시 그날 경기를 돌아보며 복기를 했다. 어떤 상황에서 실수를 했는지 스트라이크존은 문제가 없었는지. 그래서 다음 경기에서는 같은 오심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심판도 경기의 일부’라는 말은 선수나 팬은 할 수 있어도 심판은 해서는 안 된다. 심판이 그런 말을 하는 건 무책임한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