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오늘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gentle) 겸손하니(humble),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온라인 사전을 찾아 보니 모두 16개의 다른 뜻이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고귀한’, ‘고상한’의 의미를 가진
중세 영어 ‘gentile’ 또는 ‘gentil’에서 유래되었으며
‘같은 가족에 속한다’는 의미를 가진
라틴어 ‘gentilis’에서 유래되었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이 단어의 라틴어 어원인 ‘gens’는 ‘사람들’, ‘가족’, ‘나라’를 뜻합니다.
일반적으로 ‘<기질·성격이> 상냥한, 부드러운, 친절한(mild, kindly);
<자연현상 등이> 온화한, 조용한;
<지배·처벌·비판 등이> 너그러운
<행동·몸가짐이> 예의 바른(courteous),
점잖은 적당한
<경사·흐름 등이> 완만한, 뜬
점잖은 집안에 태어난, 양가(良家)의,
문벌[가문]이 좋은(wellborn)’ 등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트라피스트 수사(修士)였던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 신부님에 관한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그가 바깥에서 묵상을 하며 앉아 있는데
좀 벌레가 그의 손에 앉았습니다.
좀 벌레는 꼼짝하지 않고 앉아 있다가
신부님이 가볍게 부니까 날아갔습니다.
그것이 ‘온유한(gentle)’
것입니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손으로 탁 쳐서 죽여버렸을 것입니다.
나는 자신의 온유하지
못함에 대해서
한 번도 자책해
본 적이 없습니다.
뭔가 단단히 잘못됐습니다.
온유한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살도록 해야 합니다.
나는 정신적인 장애를 가진 형제를 돌볼 때 온유해짐을 알았습니다.
그 장애자는 다른 사람들을 고무시키면서 온유했습니다.
온유한 사람과 같이
있으면 온유해집니다.
나의 경우 아내가 병중에 있을 때
아내에게 온유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너무나 자주 난폭하고 거칠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온유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온유함을 보여주셨던 첫 번째 예가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그들이 줄곧 물어 대자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어 그들에게 이르셨습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리고 다시 몸을 굽히시어 땅에 무엇인가 쓰셨습니다.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습니다.
마침내 예수님만 남으시고 여자는 가운데에 그대로 서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고 그 여자에게,
“여인아,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그 여자가 “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습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요한 8,7-11)
예수님께서는 얼마나 온유하신 분인가요?
나는 무척 인내심이 부족한 인간이기에
오늘 하루 만이라도 온유해져 보려고 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오늘 복음을 읽고 말했습니다.
“여러분이
높은 곳에 오르려면 가장 낮은 데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큰 건물을
지으려면 기초부터 튼튼히 해야 합니다.
겸손은 바로 이와
같습니다.
여러분이 아주
큰 건물을 설계하고 세우려고 할 때에는
높은 건물일수록
기초를 더 깊이 파야 합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하게 되면 높은 건물도 처음에는 낮았고
탑도 굴욕을 받은
후에야 만 세워진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다른 곳에서
“하느님께서는
겸손의 제단(祭壇)에서만
제물(祭物)을 받아들이십니다.”하고
말했습니다.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 성인(St. Bernard of Clairvaux, 1090-1153)은
가장 중요한 네
덕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고는
“겸손, 겸손, 겸손, 겸손”이라고 답했습니다.
이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말한 것으로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에고를 버려야 함을 깨우쳐주고 있습니다.
에고는 아무리
가장을 하더라도 겸손하게 보일 수가 없습니다.
‘새빨간 거짓’일
뿐입니다.
에고는 ‘거짓 나’로 진리는 가차없이 에고를 망신시킵니다.
따라서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반면에 겸손은
아무 가식이 없는 진리입니다.
겸손은 깔보거나
구석에 숨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겸손은 진실을
그대로 보여주려고만 합니다.
페르시아의 성인
루미(Rumi, 1207-1273)는 거짓 겸손을
‘비뚤어진 자기 낮춤’이라고 말했습니다.
(『마스나비(Masnawi)』의
<모세와 목자> 참조)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듯이 겸손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리하여 누구나
겸손의 가면을 쓰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고백록』에서
이렇게 ‘거짓 나’를 숨기려는 인간의 심보를 말하고 있습니다.
“비열하게
부끄러워하는 마음은 숨기기를 좋아하지만
한편으로는 모든
것을 까발리고 싶어하기도 합니다.”
에고를 아주 잘
표현한 것 같습니다.
온 세상 사람들은
독재자를 주시하게 됩니다.
독재자는 모든
것이 밝혀지게 되면 상황이 완전히 역전됨에 따라
“진리로부터
에고를 숨길 수는 없지만
진리는 에고에
숨겨져 있기도 합니다.”하고 볼멘 목소리를 합니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습니다.”
겸손은 교만보다 훨씬 더 지고 다니기가
편합니다.
‘Humility(겸손)’이라는 단어는 ‘땅’을 의미하는 ‘humus’에서 나왔습니다.
‘땅’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봅니다.
‘땅’은
‘안식’, ‘안전’, ‘기초’, ‘실체’, ‘원천’ 등을
뜻합니다.
에고에는 ‘안전’이
없습니다. 에고에 매달리게 되면
발을 헛디디게 됩니다.
거짓말에는 ‘하얀 거짓말’과
‘새빨간 거짓말’이 있습니다.
‘새빨간 거짓말’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거짓으로 말하는 것이며
‘하얀 거짓말’은 내용 자체는 거짓이 아니지만
진실 가운데 중요한 부분을 빼버린 말로,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을 원하지 않을 때’ 흔히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거짓으로 말하는 것을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한다면
자신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을 거짓으로 말하는 것은 거짓말이 아닐까요?
그것도 거짓말입니다.
진리가 아닌 것은 모두 틀린 말이 됩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얀 거짓말’에 대하여 거부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사회적 인간 관계가 대부분 피상적이라는
슬픈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정신병의 근본적인 원인 중의 하나는
자신이 남으로부터 들은 거짓말과
자기 자신에게 해온 거짓말이 서로 엉키는 것입니다.
남에게 정직하고 자신에게 정직하지 않으면 정신병을 고칠 수 없습니다.
첫댓글 겸손의 가면을 벗어버리고 정직한 모습으로 살게하소서. 아멘.
감사합니다.
정직한 삶을 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좋은 글 항상 감사하는 마음에 담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