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일날 예배때 찬송가 519장을 불렀다. 다음은 찬송가 519장의 가사다.
1. 십자가를 질수있나 주가 물어 보실때~~
죽기까지 따르오리 저들 대답하였다.
2. 너는 기억하고 있나 구원받은 강도를...
저가 회개 하였을때 낙원 허락받았다.
3. 주께 네혼 맡기겠나 최후승리 믿으며~~
걱정근심 어둔 그늘 너를 둘러 덮을때~~
4. 이런 일 다 할 수있나 주가 물어 보실때
용감한 자 옛날처럼 선뜻 대답하였다...
후렴: 우리의 심령 주의 것이니~~
당신의 형상 만드소서~~
주 인도 따라 살아갈 동안 사랑과 충성 늘 바치오리다. 아멘~~
이 곡은 지금까지 무심코 불렀던 찬송가이다. 때로는 이 곡을 부르면서 ‘베드로처럼 충성을 다하여 주님 인도 따라 가야지.’하는 다짐을 하곤 했다. 죽기까지 따르겠다는 가사와 충성을 바치겠다는 가사가 눈에 더 많이 들어 왔었다.
그런데 그 날 예배때 나이든 자매님의 간증을 듣고 이 찬송을 들으면서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죽기까지 따르겠다고 말한 사람은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였는데... 정작 예수님의 죽음에 끝까지 함께한 사람은 회개한 강도가 아닌가?’
나는 주저하지 않고 성경을 뒤져 보았다. 베드로와 모든 제자들의 고백이 보였다.
“베드로가 가로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찌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마 26:35)”
그런데 아이러니(irony)하게도 주와 함께 죽은 자는 두 명의 강도였고, 끝까지 주와 함께 한 자는 회개한 강도였던 것이다.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23:42,43)”
그 자매님의 간증을 요약해 보면,
그 자매님은 모태신앙으로 자랐고 젊을 때 성령의 은사를 체험하기도 하셨다고 했다. 교회에도 헌신된 신앙생활을 했었고. 그 때 이 찬송을 부르며‘내가 죽기까지 주님을 따르겠습니다’하는 고백도 하셨다고 했다. 이 후 결혼을 하게 되고 아기를 낳아 키우던 시기에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사정이 생겼다고 하셨다. 심지어 모유는 나오지 않는데 아기 우유 살 돈이 없어 안절부절 못하던 때였다고 했다. 그런데 그 자매님은 울면서 기도하기보다는 하나님을 심하게 원망했노라고 고백하셨다. 그 자매님은 지금 그 아들이 스물 여섯의 건장한 청년으로 자란 모습을 보며 하나님의 은혜에 다시 감사한 마음을 가진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지금은 회개하며 젊은시절 그 헌신의 고백과는 다른 헌신의 마음으로 이 찬송가를 부른다고 간증하셨다.
나도 돌이켜보니 주님께 헌신했던 기억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청년의 시기에 이 세계와 민족과 통일한국을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품으며 기도하고 헌신했었던 기억이다. 그런데 여름철 뜨거운 열기에 짙은 녹색의 잎사귀가 가을이 되어 아무런 열매 없이 낙옆이 되어 아스팔트위를 뒹구는 것처럼 내 신앙도 그렇게 식어지고 말았다.
십자가에서 함께 해야 할 사람을 그토록 열정적이었던 수제자 베드로보다 회개한 심정의 강도를 택하신 주님의 마음을 나도 나이좀 먹었기 때문일까? 조금은 알 것 같다.
첫댓글 귀한 발견이시네요 ^^
제 생각에는 베드로도 죽기 까지 주님을 따른 제자 입니다. 어느 때는 무섭고 두려워서 주님을 모른다고 배반도 했지만, 그러나 그의 생애를 전체적으로 볼때 베드로 역시 그의 말대로 죽기까지 주님을 따른 고귀한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가 힘들고 지칠 때 주님을 원망하고 세상으로 도망치고 싶은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귀한 믿음은 회개로 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회개야 말로 우리에게 주신 큰 믿음 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베드로는 회개하여 죽기까지 주님을 따른 제자입니다. 다만 저는 베드로가 똑같은 값을 치루긴 했지만 주님이 달리신 십자가 옆에서 죽을 기회는 살 수가 없었던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면 오히려 그는 무책임한 사람 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뜻은 베드로를 순교하게 하시는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에게는 주님께서 부탁하시고 명령하신 사명이 있었습니다.3년동안 베드로와 제자들을 훈련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 가시고 부활 하신후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되고 증거 하는 일로 그를 부르셨음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순교 하는것 보다 주님의뜻(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을 부르신 목적임을 기억해야 할 것 입니다.
베드로도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그 순간들을 평생 잊을 수 없었을 겁니다. 우리도 인생이라는 짧은 시간에 주님을 위해 죽을 수 있는 기회가 그리 자주 오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우리도 그런 기회가 왔을 때 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랬으면 좋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연약한 육신의 옷을 입었습니다. 주님께서 강하고 담대한 믿음을 주셔서 함께 하시기를 기도 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