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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그 시절에 그렇게 ...
1, 탄 불을 피워서 팔던 내 동무
권영심
지난 번에 옛날의 간식을 가지고 글을 썼는데 놀라운 댓글들이 있었다. 나와 동년배의 사람들이, 나와는 너무나 다른 세상을 살아온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던 것이다. 충청도가 고향인 어떤 이는 국민학교 4학년 때 처음 서울에 왔는데, 휘황한 불빛으로 가득 찬 밤거리의 풍경을 보고 충격을 받을 정도로 감명을 받았다고 했다.
그의 마을까지 전기가 들어온 것은, 그가 중학교를 졸업할 때라고 했으니 나야말로 깜짝 놀랄 일이었다. 어렸을 때 시골 외가에 갔을 때, 밤에 호야불을 켜고 마당에는 관솔불을 켜서 밝혔던 것은 기억이 난다. 밀랍으로 만든 노르스름한 촛불은 사랑방에 서만 켰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니까 내 나이 또래의 많은 시골 아이들이, 전기라는 것을 모르고 어린 시절을 보냈던 것이다. 그 사실이 너무 놀라워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전기가 있는 것이 당연한, 부산의 가시내였다. 지금보다 모든 곳들이 어두웠지만, 연탄광에도 촉 낮은 알전구가 달려 있었다.
그러나 부산이라고 다 그랬었던 것이 아니었음을 학교에 다니면서 알게 되었다. 도시에서 살았어도 수돗물도 없었고, 심지어 화장실도 없는 빈민촌의 아이로 자란 사람들의 깊은 회한은 누구도 감히 건드릴 수 없는 아픔이었다.
그러니 자라면서 먹는 것, 입는 것, 생활의 어떤 것도 부족함을 모르고 자란 나는 진정 행운의 별 아래서 태어났다고 할수 있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부족함이 뭔지 몰랐던 어린 시절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이 있는 것도 알았고, 거지들이 매일 밥을 얻으러 오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 가난을 인식하진 않았으니, 내가 무신경한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마음이 강팍한 사람이었을까? 어릴 때의 그 마음을 지금 도무지 짐작도 못하겠다. 그러나 내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는 것은, 몇 가지의 기억으로 남아있다.
아버지를 잘 따라 다니기도 했지만, 아버지가 다른 사람에게 뭔가를 주고 또 사람들을 많이 도와주는 모습들이 아주 자연스럽게 내게 스며든 것을 어른이 되어 알았다. 나는 나누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데, 그것이 아버지의 유산이었다.
이제 볼을 스치는 바람이 서늘하다 못해 싸늘해지는데, 이맘때 기억나는 일화가 있다. 다른 곳에서도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우리 시장의 끝 골목 들어가기 전, 천막을 친 난전에서 연탄 불을 팔았었다. 그 당시는 모두 연탄불을 사용했고, 한 번 불을 꺼트리면 다시 피우기가 난감한 일이었다.
요즘처럼 번개탄도 없었고, 꺼진 연탄불은 다시 피우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연탄불을 피워서 파는 집이 많았는데, 겨울이 되면 수 십 개의 불을 피워서 팔고는 했다. 탄불을 사는 사람은 집게만 가지고 가서,적당하게 불이 붙은 연탄불을 사가지고 새 연탄을 넣어 불을 만들었다.
별다른 난방기구가 없었던 그 때, 연탄 1구를 넣는 작은 난로가 있었는데 겨울에 정말 요긴했다. 1구만 넣는 난로는 불을 피울 수 없기에, 반드시 불이 붙은 연탄만 사용하게 되어 있었다. 불구멍을 조절하면 장사 마칠 때까지 쓸수 있었 고, 다음날 아침에 하얗게 사윈 연탄재를 버리고 다시 불 붙은 탄을 넣어 사용했다.
가게 안 쪽에 반 평 남짓 장판을 깔아 놓은 공간은, 밑이 비어 있어 겨울에 그 속으로 연탄난로를 넣고 담요를 깔아 보온을 대신했다. 가게 입구에 또 하나 놓고, 손을 녹이거나 무엇을 데워 먹거나 구워 먹는 등 용도가 다양했다.
시장 상인들은 그렇게 연탄불 난로 한두개로 겨울을 보냈다. 그러니 연탄불집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문전성시였다. 온 식구들이 번갈아 하루 종일 연탄불을 피우느라 몹시 분주했는데, 가끔 나보다 어린 여자아이가 탄불을 갈무리 할 때가 있었다.
능숙하게 탄불을 들고 빼고 넣고 하지만 누가 봐도 힘든 일이었다. 연탄과 연탄이 딱 붙어 있어 그것을 식칼로 내리쳐야 분리가 되어서 어른도 힘겨웠다. 불 조절을 잘못해서 탄불이 많이 타버 린 것은 사 가지 않았기에, 불구멍 조절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많이 탔느니 아니니 하고 다툼이 나는 것은 흔한 광경이었다.
엄마되는 여자가 집게로 아이를 때리며 불구멍 관리를 잘못했다고 고래고래 소리 질렀으나, 아무도 그 아이의 편을 들어주거나 말리지 않았다. 어느 날 하교를 하고 가게에 갔더니, 그 여자아이가 아버지와 함께 있었다.
허술한 옷은 그 겨울에 너무 추워 보였는데, 한 쪽 팔을 드러내 놓고 아버지가 약을 발라주고 있었다. 깡마른 팔뚝은 얼마나 씻지 않았는지 거므스레 했고, 여기저기 벌건 흔적이 있었다. 아이의 엄마가 자기 분에 못 이겨, 뜨거운 집게로 때려서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울면서 도망치는 아이를 아버지가 마침 발견해서, 가게로 데려 온 상황이었다. 알고 보니 나와 동갑이었는데 학교도 다니지 못했다. 연고를 손에 쥐어 주며 매일 바르라고 말하며 아이가 돌아간 뒤, 아버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때 그렇게 부모에게 학대당하는 아이들이 있어도, 주위 사람 들은 전혀 무엇을 어쩌지 못했다. 학교도 보내지 않고 노예처럼 일을 시키고 밥을 굶겨도, 법조차도 아무 것도 해줄 수 없었다.
그 후 나는 그 아이에게 참 많은 신경을 썼던 것 같다. 오며 가며 과자나 사탕을 쥐어 주고 먹을 것을 챙겨 주면서 이름을 알게 되고 말을 나누게 되었는데, 학교는 삼 학년까지 다니고 그만 두었다고 했다.
집의 모든 살림을 그 아이가 맡아서 했고 동생 셋 돌봄까지, 겨울 밤에는 천막에서 불 관리까지 전부 그 아이의 몫이었다. 나는 그 아이가 너무 불쌍하다고, 아버지에게 울면서 말했던 것 같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 아이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노라고 했다.
부모가 있기 때문에, 그 부모가 아이의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학교에 다니고 싶다고 힘 없이 웃으며,
"마리야, 나는 니가 젤로 부럽데이, 나는 나중에 너거 아부지같은 사람한테 시집가서 살았으믄 좋겄다, 너거 아부지는 세상에서 제일 좋은 사람인기라 "
그렇게 말했던 아이, 내 동무... 그 아이는 12살을 넘기지 못하고, 추운 겨울 밤 천막 안에서 가스 중독으로 죽었다. 그랬어도 아무도 그 부모를 비난하지 못했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