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이모작 농사 이모작
십일월 둘째 목요일 날이 밝았다. 우리나라에서 한 날 한 시 가장 많은 수험생이 시험을 치르는 대학수학능력시험일이다. 십일월 둘째 목요일을 수능일로 지정함은 오래된 관행이다. 이날이 대학 입시와 연관된 이들한테는 연례행사임을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지난날 경주 지진과 코로나가 닥친 첫해는 사상 두 번 연기되었고 그 외는 부산에서 열렸던 아시아태평양 정상회담 정도다.
현직에서 떠나오니 수능과는 무관해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전날 은행에서 나도 고객이랍시고 1시간 밀려 늦추어 창구 업무를 본다는 문자를 받고서 알게 되었다. 수능일이면 중학교 교사들도 감독관으로 위촉되기에 하루 휴업인 학교도 있을 텐데 자연학교는 연중무휴라 당연히 정상 등교다. 내가 교직을 마무리 지은 거제에서 퇴직을 앞둔 마지막 해 수능일이 기억에 남는다.
수능일에 감독관으로 차출되지 않은 자는 아주 제한적이다. 임산부 여교사나 수험생 자녀를 둔 학부모인 교사이거나 고령 교사가 본인이 원하면 감독관에서 면제시켰다. 근무지 수능 고사장 업무를 보던 부서에서 감독관이 유고가 생기면 동원되는 예비 감독관에 이름을 올려두어 면제받음과 다름없었다. 나는 그날 무척 의미 있는 내 나름의 시간을 잘 보내 아련한 추억으로 남았다.
곧 이어진 겨울방학에 들면 정년을 맞는 즈음이라 그날 혼자 소매물도로 교직 졸업 소풍을 다녀왔다. 남부면 저구항으로 나가 통영 여객선 터미널보다 시간이 더 짧게 걸리는 여객선을 타고 대매물도를 거쳐 소매물도를 탐방하고 왔다. 우리나라 국립공원 제1호로 지정된 한려해상 난바다에 뜬 국토의 ‘진주’ 매물도를 거제살이 3년 중 마지막 일정으로 트레킹을 마쳐 의미가 컸다.
이제 자연인으로 돌아와 3년째라 학교 현장과 아무런 걸림이 없다. 현직 시절은 EBS 수능 교재 분석이나 평가를 위한 제한된 독서였는데 이제 펼쳐 읽는 책은 스펙트럼이 넓어졌다. 퇴직 이후 자주 들린 도서관에서 그간 밀려둔 여러 영역의 책을 맘껏 골라 펼칠 수 있어 행복하다. 지나간 올여름이 덥다고는 해도 상당 날짜와 시간을 냉방이 잘된 도서관에서 보내 더운 줄 몰랐다.
가을에 들어서는 자연학교는 실내에서 보내는 독서보다 현장을 누비는 일정이 많아졌다. 유난히도 더웠던 지난여름은 새벽이다시피 이른 시각 얼음 생수와 죽염을 챙겨 들판이나 강둑을 먼저 걷고 마을도서관 문이 열리기를 기다려 열람실에서 오전을 보냈다. 이후 국도변에서 부여된 아동안전지킴이 임무를 수행하고 오후도 도서관에서 보내다 열기가 식어갈 때 귀가함이 상례였다.
가을에 들어 날씨가 선선해져 자연학교 등교 시각을 조금 늦추어 첫새벽에 길을 나서지 않는다. 근래 며칠은 강변 들녘 아침 안개가 짙어 일찍 나서길 머뭇거렸다. 목요일 아침 수험생이 거의 입실을 마쳤을 시간대에 현관을 나서 자연학교 등굣길에 올랐다. 소답동으로 나가 창원역 기점 유등 강가로 가는 2번 마을버스를 탔다. 자주 다녀 운전기사나 승객들의 얼굴이 낯설지 않았다.
가술을 거쳐 모산을 지난 북부리 동부마을에서 마지막 손님으로 내렸다. 벼를 거둔 논바닥을 트랙터가 갈아둔 동구에서 팽나무가 바라보인 강둑으로 올랐다. 시야에는 물억새와 갈대가 무성한 둔치 풍광이 펼쳐졌다. 나목이 된 벚나무 가로수가 줄지어 선 둑길을 걸어 유청마을에서 들녘으로 걸었다. 비닐하우스에 자라는 토마토는 잎줄기가 꽃을 피워 한겨울에 열매를 따낼 듯했다.
죽동천이 흘러오는 우암리 넓은 들녘은 벼농사 뒷그루로 당근을 심어 키웠다. 논바닥을 갈아 흙을 잘게 부순 상태에서 철골을 세우고 비닐을 덮는 작업이 쉽지 않은데 농민들은 익숙하게 해냈다. 지난번 가을비는 강수량치고 많아 논바닥이 젖어 마르지 않은 구역은 트랙터가 진입 못해 진행이 늦어졌다. 대파를 심은 농장에는 베트남 청년들이 파를 뽑아 묶느라 손길이 분주했다. 24.1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