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시한의 본관은 압해(押海)다. 자는 군익(君翊)이오, 호가 우담(愚潭)이다. 그는 대대로 당상관(堂上官)을 배출한 명문가의 후손이었다.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지낸 5대조 정옥형(丁玉亨)을 필두로, 좌찬성(左贊成) 정응두(丁應斗)와 대사헌(大司憲) 정윤복(丁胤福)이 대를 이어 집안을 빛냈다. 그리고 사성(司成)을 지낸 조부 정호관(丁好寬)과 관찰사를 지낸 부친 정언황(丁彦璜)이 뒤따랐다.
그런데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났다. 속된 말로 잘 나가던 우담 집안에 제동이 걸렸다. 광해군(光海君) 시절 대관(臺官)을 지낸 정호관의 전력이 문제였다.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내쫓는 일에 간여했다는 혐의로 그는 반정 이후 관직을 빼앗겼다. 덩달아 아들 정언황 역시 벼슬길이 순탄치 못했다. 그는 결국 강원도 관찰사 자리를 내놓았다. 그리고 원주(原州)의 법천(法泉)으로 내려가 은휴정(恩休亭)을 짓고, 독서로 소일하며 일생을 마쳤다.
우담은 평생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26세로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33세로 문과(文科)에 한 번 응시한 이후 그는 꿈을 접었다. 그는 법천에서 부모를 극진히 섬기면서, 독서와 자녀 교육에 전념하였다. 몇 번인가 조정의 부름이 있었지만, 그는 끝내 응하지 않았다. 다만 부친의 뜻을 이어 조부의 억울한 행적을 밝히는 한편, 성리학에 깊이 침잠하였다. 그 결과 문집 안에 남은 「사칠변증(四七辨證)」을 훑어보면, 우담이 퇴계(退溪) 학설의 계승자임이 명확해진다.
효자로 명성 높던 우담은 48세에 부친상을, 59세에 모친상을 당했다. 1686년 모친상을 마친 우담은 어느 날 자식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마침내 “책을 지니고 산으로 들어가리라.[携書入山]” 선언하였다. 당시로써는 결코 적지 않은 나이라 할 수 있는 환갑 노익장(老益壯)의 독립선언(獨立宣言)이었다.
우담은 그 길로 길을 떠났다. 3월 13일부터 이듬해 1687년 1월 23일까지 속리산(俗離山)과 황악산(黃嶽山)ㆍ가야산(伽倻山)ㆍ지리산(智異山) 일대를 두루 구경하고 상주와 충주를 거쳐 법천으로 돌아왔다. 한 달 보름이 지난 3월 8일 우담은 다시 길을 나섰다. 가까운 치악산(雉嶽山)을 한 바퀴 도는 행보였다. 열흘 걸린 이 여행은 17일부로 끝났다. 5개월 뒤인 8월 2일 우담은 또 집을 나섰다. 횡성과 춘천을 거쳐 금강산(金剛山) 일대를 유람하고, 강릉 경포대(鏡浦臺)와 오대산(五臺山)까지 내친걸음이었다. 이 세 번째 여행은 10월 20일에 끝났다. 이듬해 4월 10일 우담은 다시 집을 나와, 문경과 안동ㆍ경주ㆍ대구ㆍ봉화 등을 거쳐 9월 19일 귀가하였다.
우담은 도합 600일 가까운 이 네 차례 여행길을 「산중일기(山中日記)」에 고스란히 담았다. 그리고 1687년 10월 20일 자 일기에 아래와 같은 소감을 달았다.
이번에 말을 타고 간 길이 1,860리였고, 산중으로 440리를 걸어서 갔으니, 모두 2,300리였다. 지나온 여러 산 가운데 청평산(淸平山)은 비록 규모가 작다지만, 폭포와 영지(影池)의 빼어난 경관이 있었다. 그윽한 식암(息庵)은 옛 현인이 깃들어 은거하며 맑은 복을 누리고, 백세에 향기를 끼치기 마땅한 곳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금강산은 천하에 명성을 독차지해서 내 형용할 바 아니라지만, 내산(內山)의 진면목은 장안사(長安寺)ㆍ극락암(極樂庵)ㆍ표훈사(表訓寺)ㆍ정양사(正陽寺)ㆍ동각암(東閣庵)과 천덕암(天德庵)이 남김없이 갖추고 있다. 산의 정기가 모인 곳은 마하연(摩訶衍)과 영원암(靈源庵)이다. 외산(外山)의 빼어난 경치로는 은선대(隱仙臺)요, 기이한 장관으로는 발연폭포(鉢淵瀑布)와 동구(洞口)에 소재한 폭포와 못을 들 수 있다. 사람들이 국도(國島)가 금강산과 서로 우열을 다툴만하다고 말하지만, 애초에 믿을 수 없었다. 그런데 가서 보니 일단의 기이한 경치로, 금강산에서도 볼 수 없던 조화옹(造化翁)의 무궁한 재주가 다 펼쳐진 곳이었다. 학포(鶴浦)와 경호(鏡湖)는 선두를 겨루었고, 시중대(侍中臺)와 삼일호(三日湖)ㆍ영랑호(永郎湖)는 모두 절경으로 우리 동방에서 보기 드문 곳이었다. 오대산은 매우 그윽하고 깊어 좋기는 하였으나, 달리 볼만한 곳이 없었다. [今番,騎馬行一千八百六十里, 山中步行四百四十里, 合二千三百里。所歷諸山, 淸平山雖小, 有瀑流影池之勝。息庵之幽, 宜前賢之栖息隱居, 以享淸福, 而流芳百世也。金剛山擅名天下, 非我所可形容, 內山面目, 長安ㆍ極樂庵ㆍ表訓ㆍ正陽ㆍ東閣及天德, 盡收無餘。精氣所聚, 摩訶衍ㆍ靈源庵。外山形勝, 隱仙臺。奇觀, 鉢淵瀑布及洞口瀑潭也。人言“國島與金剛相上下, 初不足信。及見則一段奇景, 金剛所無, 造化儘無窮也。鶴浦與鏡湖伯仲, 侍中臺ㆍ三日湖ㆍ永郎湖, 皆足絶景, 我東之所罕有也。五臺山則最幽深可愛, 而無他可觀也。] | 우담의 입산은 이후로도 계속된다. 1688년 겨울에는 황산(黃山)의 정수암(淨水庵)을, 이듬해에는 다시 치악산과 소백산(小白山)을 찾아갔다. 1690년에는 청량산(淸凉山)과 치악산에 들어갔고, 다음 해에는 미륵산(彌勒山)과 영주 봉황산(鳳凰山)의 부석사(浮石寺)를 유람하였다. 1692년에는 68세의 나이로 풍기(豐基) 쌍악사(雙嶽寺)의 휴휴암(休休庵)에 찾아들었다.
바나프라스타(vanaprastha)는 인도(印度)에서 50세 지천명(知天命)을 일컫는 말로, ‘산을 바라보기 시작할 때’라는 의미가 담겨있다고 한다. 우담은 만60의 나이에 본격적으로 산을 찾기 시작했다. 30살 무렵 법천에 터를 잡은 뒤 꼬박 30년이란 세월동안 부모 봉양과 조부의 신원(伸冤) 에다 자녀 교육에 얽매여 살았던 그가 드디어 자유를 찾아 훌훌 떠난 것이다. 『숫타니파타』의 “추위와 더위ㆍ굶주림ㆍ갈증ㆍ바람 그리고 뜨거운 햇볕과 쇠파리ㆍ뱀. 이러한 것들을 이겨내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라는 구절처럼. 아무튼 그는 대자유를 만끽하며 조국의 산하를 실컷 누볐다. 그리고 1693년 69세가 되자 법천 인근에 구담정사(龜潭精舍)를 짓고, 이곳에서 저술에 열중하다가 14년 뒤 세상을 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