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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전례
인간 존중과 인권 신장은 복음의 요구다. 그럼에도 인간의 존엄성이 무시되고 짓밟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에 따라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1982년부터 해마다 대림 제2주일을 ‘인권 주일’로 지내기로 하였다. 교회는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존엄한 인간이 그에 맞갖게 살아갈 수 있도록 끊임없이 보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인권 주일로 시작하는 대림 제2주간을 2011년부터 ‘사회 교리 주간’으로 지내고 있다. 오늘날 여러 가지 도전에 대응하며 새로운 방식으로 복음을 전해야 할 교회의 ‘새 복음화’ 노력이 바로 사회 교리의 실천이라는 사실을 신자들에게 일깨우려는 것이다.
본기도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
저희가 세상일에 얽매이지 않고 기꺼이 성자를 맞이하여
천상의 지혜로 성자와 하나 되게 하소서.
제1독서
<그는 힘없는 이들을 정의로 재판하리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11,1-10
그날 1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돋아나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움트리라.
2 그 위에 주님의 영이 머무르리니
지혜와 슬기의 영, 경륜과 용맹의 영, 지식의 영과 주님을 경외함이다.
3 그는 주님을 경외함으로 흐뭇해하리라.
그는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판결하지 않고
자기 귀에 들리는 대로 심판하지 않으리라.
4 힘없는 이들을 정의로 재판하고 이 땅의 가련한 이들을 정당하게 심판하리라.
그는 자기 입에서 나오는 막대로 무뢰배를 내리치고
자기 입술에서 나오는 바람으로 악인을 죽이리라.
5 정의가 그의 허리를 두르는 띠가 되고 신의가 그의 몸을 두르는 띠가 되리라.
6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 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7 암소와 곰이 나란히 풀을 뜯고 그 새끼들이 함께 지내리라.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 8 젖먹이가 독사 굴 위에서 장난하며
젖 떨어진 아이가 살무사 굴에 손을 디밀리라.
9 나의 거룩한 산 어디에서도 사람들은 악하게도 패덕하게도 행동하지 않으리니
바다를 덮는 물처럼 땅이 주님을 앎으로 가득할 것이기 때문이다.
10 그날에 이러한 일이 일어나리라.
이사이의 뿌리가 민족들의 깃발로 세워져
겨레들이 그에게 찾아들고 그의 거처는 영광스럽게 되리라.
제2독서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여 주십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15,4-9
형제 여러분, 4 성경에 미리 기록된 것은 우리를 가르치려고 기록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에서 인내를 배우고 위로를 받아 희망을 간직하게 됩니다.
5 인내와 위로의 하느님께서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님의 뜻에 따라 서로 뜻을 같이하게 하시어,
6 한마음 한목소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을
찬양하게 되기를 빕니다.
7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기꺼이 받아들이신 것처럼,
여러분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서로 기꺼이 받아들이십시오.
8 나는 단언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께서 진실하심을 드러내시려고
할례 받은 이들의 종이 되셨습니다.
그것은 조상들이 받은 약속을 확인하시고,
9 다른 민족들은 자비하신 하느님을 찬양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그러기에 제가 민족들 가운데에서 당신을 찬송하고
당신 이름에 찬미 노래 바칩니다.”
복음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3,1-12
1 그 무렵 세례자 요한이 나타나 유다 광야에서 이렇게 선포하였다.
2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3 요한은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바로 그 사람이다.
이사야는 이렇게 말하였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4 요한은 낙타 털로 된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둘렀다.
그의 음식은 메뚜기와 들꿀이었다.
5 그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요르단 부근 지방의 모든 사람이 그에게 나아가,
6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7 그러나 요한은 많은 바리사이와 사두가이가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
8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9 그리고 ‘우리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고 말할 생각일랑 하지 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드실 수 있다.
10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
11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시다.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12 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가장 큰 사랑은 가장 힘없는 자를 향한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이 나옵니다. 세례자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베푸는 분이었습니다.
회개란 ‘나’를 바라보는 것에서 또 다른 ‘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회개는 희랍어로 메타노이아라고 하는데 메타노이아는 방향을 바꾼다는 뜻입니다. 파라오로 상징되는 자아를 의지하는 삶에서 ‘나는 나’라고 하신 하느님께 의지하는 삶으로의 전환입니다.
이렇게 할 때 나오게 되는 장소가 ‘광야’입니다. 광야는 나를 의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저 주님께 모든 것을 의탁해야 하는 극도의 자기 무력화를 해야 하는 곳입니다. 세례자 요한도 광야에 살았습니다. 그는 낙타 털로 된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둘렀습니다. 낙타 털은 죽은 낙타가 썩어서 남겨놓은 것입니다. 길쌈을 한 것이 아닙니다. 가죽 띠는 동물의 거친 육체를 절제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메뚜기와 들꿀은 경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메뚜기는 잡기도 어렵습니다. 날아오면 먹고 없으면 굶어야 합니다. 들꿀도 마찬가지입니다. 발견도 어렵지만, 벌들이 허락해주어야 합니다. 왜 위대한 사제인 즈카르야의 아들이 그런 삶을 선택했을까요? 회개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자기를 의지하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요? 가장 대표적인 것이 ‘통장 액수’에 의존하는 삶입니다. 통장 액수 때문에 마음이 편해지거나 불안하다면 아직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자아, 곧 파라오를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돈이 있건 없건 이집트 안에서는 돈의 노예로 살아가야 합니다. 노예는 고통스럽습니다. 요한은 이러한 삶에서 벗어나라 외치는 것입니다. 광야에서만 모든 것을 마련해주시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저도 사제가 되면서 통장 액수를 어느 정도선에서 제한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한 달 생활할 돈만 남겨놓고 다 흘려버리는 것입니다. 사제만큼 철밥통이 있을까요? 죽기까지 먹고 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 액수를 유지하는 일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어느 순간 돈을 모으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지금은 다시 통장 액수 줄이기를 실현하려고 노력 중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는 점점 저 자신을 믿는 이집트로 회귀하는 삶을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기 자신을 믿지 않는 삶으로 나아가려면 작은 신앙 체험들이 필요합니다. 광야는 나의 힘을 뺄 때 주님께서 힘을 주시는 곳입니다. 파라오에 의지하지 않을 때 만나와 물을 주십니다. 광야에서 40년을 살아도 샌들이 떨어지지 않게 하십니다. 굶기지 않으십니다. 일론 머스크는 한 달을 30달러로 살아보고는 가진 재산을 다 투자할 용기를 낼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주님께 의탁하기 위해 나를 믿는 마음을 포기하고 그것으로 인해 주님께서 우리를 챙겨 주실 수밖에 없는 분이심을 체험할 때 조금 더 포기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 사회복지를 하시는 한 수녀님을 도와 주시는 두 봉사자분이 저를 찾아오셔서 함께 식사하였습니다. 그 수녀님은 노숙자들, 탈북자들, 독거노인들, 결손가정 아이들 등을 정신없이 도와 주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돈이 떨어져서 고기반찬도 올리지 못하고 멸치를 주시는데 작은 멸치도 못 사고 큰 멸치, 그것도 똥도 빼지 못해 쓴 멸치를 반찬으로 내어놓아야 하는 처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수녀님은 “어머, 걱정하면 안 되는데….”라며 주님께 의탁하려고 노력하신다고 했습니다. 끊임없이 나의 힘이 아닌 주님의 힘에 의지하려 광야에 머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볼 때 저의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그 전에 어떤 분이 저에게 겨울이 찾아오니 가난한 사람들에게 써 달라고 얼마의 돈을 맡기신 분이 계셨습니다. 저는 그분이 그것을 왜 안 쓰냐고 할까 봐 ‘어디다 써야 할까?’ 고민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뒤에 두 봉사자분이 오서서 그런 말씀을 하니 제 마음이 어땠겠습니까? 정말 기뻤습니다. 그리고 그 수녀님이 깜짝 놀랄 액수를 드렸습니다. 물론 수녀님은 깜짝 놀라셨습니다.
이것이 자기 힘을 빼고 광야로 나온 이에게 주님께서 가지시는 마음이 아닐까요? 물론 저와는 비교도 될 수 없는 마음일 것입니다. 하느님은 자기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부터 도와주십니다. 하느님께 더 맡길 줄 아는 사람부터 당신 모든 것을 쏟아주십니다.
우리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님을 고백하는 신앙은 무엇일까요? 기다리고 기다리던 ‘십일조’입니다. 통장 액수는 내 힘으로 사는 상징입니다. 내가 주님께 십일조를 바치려고 할 때 나는 광야에 살게 됩니다. 돈이 부족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주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살펴보면 선악과를 바쳤을 때의 에덴동산에 머무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다 챙겨주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십일조를 올바른 마음으로 바치는 사람은 결코 내일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선으로 당신 창고의 문을 그 사람을 위해 여실 것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구약을 통해 가져야 하는 가장 큰 교훈입니다.
저는 내년부터 초등학생부터 시작하여 모든 신자분에게 각자의 교무금 통장을 만들게 할 것입니다. 각자가 신앙 고백을 하는 만큼 광야로 나올 수 있고 그래야 주님을 만날 준비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피부병이 들어 털이 다 빠지고 먹지 못하여 죽어가는 강아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강아지를 사랑하는 한 사람이 그 죽어가는 강아지를 발견하였습니다. 그래서 동물보호소에 맡겼습니다. 강아지는 치료받았지만, 털이 나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도 그 강아지를 입양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누가 입양했겠습니까? 말하지 않아도 압니다. 자기에게 의탁하지 않으면 죽었을 바로 그 대상입니다. 그를 발견한 이가 그 강아지를 입양했습니다. 그에게는 이미 반려견들이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그 강아지는 자신이 아니면 또 외로이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입니다. 아무것도 할 능력이 없는 강아지입니다. 조금만 사랑이 있어도 양심상 그런 강아지를 그냥 버려둘 수 없습니다.
이런 예는 아주 많지만 ‘뼈만 남은 채 버려져 죽어가는 개에게 다가간 여성이 한 일’이란 ‘개감동이야’ 유튜브 채널을 시청해 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아르헨티나의 ‘피아’ 씨가 그 주인공입니다. 피아는 ‘자비롭다’라는 뜻입니다.
자비로운 자의 사랑은 가장 힘없는 자를 향합니다. 하느님은 자비 자체이십니다. 그러나 자기 힘으로 해 보려는 사람은 제쳐 놓으시고 가장 힘을 뺀 이를 먼저 찾으십니다.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로 가는 것, 이것이 회개입니다.
이 회개를 내년부터는 십일조로 시작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유튜브 묵상 동영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지난 10월의 어느 날, 갑자기 부모님이 뵙고 싶어졌습니다. 전화할 수도 없고, 편지를 써도 수신이 가능한 주소도 없습니다. 기도해도 부모님께서는 침묵 중이셨고, 꿈에서도 잘 등장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무작정 운전해서 부모님 산소에 갔습니다. 산소 앞에서 미사를 봉헌하고 연도를 바쳤습니다. 하지만 부모님에 대한 그림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움에 무기력한 마음마저 더해져 우울해졌습니다.
바로 그 순간 비가 쏟아졌습니다. 쌀쌀한 날씨였는데, 비까지 맞으니 추워서 도저히 산소에 머물 수 없었습니다. 미사 가방을 챙기고, 부모님께 인사한 뒤에 차 있는 곳까지 뛰었습니다. 전날 비가 많이 와서 산소까지 차를 끌고 갈 수 없었기에, 한참을 비 맞으며 뛰어야만 했습니다.
차에 도착해서 수건으로 젖은 몸을 닦는 순간, 우울한 마음이 사라졌음을 깨달았습니다. 차를 운전하는데 라디오에서 아주 멋진 노래가 흘러나옵니다. 저를 위로해주고 힘내라며 옆에서 가수가 불러주는 것만 같았습니다.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에 들어갔습니다. 식당 주인과 직원들이 함께 식사하고 있었습니다. 미안해서 나가려고 하자, 괜찮다면서 주문받습니다. 비 맞은 제 모습이 안돼 보였는지 음식이 나오기 전에, 자기들이 먹는 계란 후라이가 남았다면서 먹으라며 주십니다. 식당 주인의 배려에 감동하며 정말 맛있는 식사를 했습니다.
외로움은 해야 할 것을 하지 않아서 생겼음을 비 맞으며 뛰다 보니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멋진 노래를 듣고, 계란 후라이를 먹으며 저를 도와주는 사람이 많음을 그래서 외롭지 않음을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늘 함께하는 주님과 나의 이웃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으쌰~”를 외치며 힘차게 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 다른 사람에게 힘이 되어주어야 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유다 광야에서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선포합니다. 그는 자기만의 구원을 위해 이렇게 외쳤던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해 광야에서 낙타 털로 된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두르고, 메뚜기와 들 꿀을 먹으면서 필사적으로 외쳤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미리 알려준 주님께서도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와 함께하면서 우리에게 힘이 되어주시는 것입니다.
무기력함과 함께 희망 없는 삶이라며 절망 속에서 힘들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때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즉, 자기 삶을 되돌아보면서 주님께로 향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또 세례자 요한처럼 누군가의 희망이 될 수 있도록 함께해야 합니다.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행복한가? 그렇지 못한가? 결국 우리 자신에게 달려있다(아리스토텔레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