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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여러분은 임금 때문에 울부짖겠지만, 주님께서는 응답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사무엘기 상권의 말씀 8,4-7.10-22ㄱ>
그 무렵
4 모든 이스라엘 원로들이 모여 라마로 사무엘을 찾아가
5 청하였다.
“어르신께서는 이미 나이가 많으시고 아드님들은 당신의 길을 따라 걷지 않고 있으니, 이제 다른 모든 민족들처럼 우리를 통치할 임금을 우리에게 세워 주십시오.”
6 사무엘은 “우리를 통치할 임금을 정해 주십시오.” 하는 그들의 말을 듣고, 마음이 언짢아 주님께 기도하였다.
7 주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백성이 너에게 하는 말을 다 들어 주어라.
그들은 사실 너를 배척한 것이 아니라 나를 배척하여, 더 이상 나를 자기네 임금으로 삼지 않으려는 것이다.”
10 사무엘은 자기한테 임금을 요구하는 백성에게 주님의 말씀을 모두 전하였다.
11 사무엘은 이렇게 말하였다.
“이것이 여러분을 다스릴 임금의 권한이오.
그는 여러분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자기 병거와 말 다루는 일을 시키고, 병거 앞에서 달리게 할 것이오.
12 천인대장이나 오십인대장으로 삼기도 하고, 그의 밭을 갈고 수확하게 할 것이며, 무기와 병거의 장비를 만들게도 할 것이오.
13 또한 그는 여러분의 딸들을 데려다가, 향 제조사와 요리사와 제빵 기술자로 삼을 것이오.
14 그는 여러분의 가장 좋은 밭과 포도원과 올리브 밭을 빼앗아 자기 신하들에게 주고,
15 여러분의 곡식과 포도밭에서도 십일조를 거두어, 자기 내시들과 신하들에게 줄 것이오.
16 여러분의 남종과 여종과 가장 뛰어난 젊은이들, 그리고 여러분의 나귀들을 끌어다가 자기 일을 시킬 것이오.
17 여러분의 양 떼에서도 십일조를 거두어 갈 것이며, 여러분마저 그의 종이 될 것이오.
18 그제야 여러분은 스스로 뽑은 임금 때문에 울부짖겠지만, 그때에 주님께서는 응답하지 않으실 것이오.”
19 그러나 백성은 사무엘의 말을 듣기를 마다하며 말하였다.
“상관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임금이 꼭 있어야 하겠습니다.
20 그래야 우리도 다른 모든 민족들처럼, 임금이 우리를 통치하고 우리 앞에 나서서 전쟁을 이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21 사무엘은 백성의 말을 다 듣고 나서 그대로 주님께 아뢰었다.
22 주님께서는 사무엘에게, “그들의 말을 들어 그들에게 임금을 세워 주어라.” 하고 이르셨다.
✠ 복음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 2,1-12>
1 며칠 뒤에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으로 들어가셨다.
그분께서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퍼지자,
2 문 앞까지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음 말씀을 전하셨다.
3 그때에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그분께 데리고 왔다.
그 병자는 네 사람이 들것에 들고 있었는데,
4 군중 때문에 그분께 가까이 데려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분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 내려보냈다.
5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6 율법 학자 몇 사람이 거기에 앉아 있다가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7 ‘이자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8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그들이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을 당신 영으로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9 중풍 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10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러고 나서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11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12 그러자 그는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에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며 말하였다.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가 그토록 혐오하는 약함, 결핍, 무력함이 결코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좀 더 자주 드는 느낌이기에, 보다 자주 사용하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연민(憐憫)입니다.
이웃의 딱한 처지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상대방의 슬픔을 함께 공감하는 감정이기도 합니다.
어려운 시절을 함께 동고동락했던 아이들, 머릿속에 떠올리기만 해도 거의 자동으로 연민의 정이 솟구칩니다.
부모가 뒷받침해줘도 살아가기 벅찬 이 세상, 의지 가지 하나 없이 홀로 서려니 얼마나 고생일까?
부모 없다는 이유로 어디선가 혹독한 상처나 차별대우를 받고 있지는 않을까?
그러면서 한 가지 든 생각.
‘하느님께서도 나를 바라보실 때 그런 마음이시겠지.’
오랜 세월 그토록 발버둥 쳐왔지만, 아직도 나라는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나, 다양한 결핍과 상처로 허덕이는 나, 과감히 털고 하느님께로 나아가야 함을 머리로서는 잘 알고 있지만, 단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가련한 나를 바라보시는 하느님의 심정도 연민의 정으로 가득하시리라 확신합니다.
오늘 복음 장면을 관통하고 있는 핵심 단어 역시 연민입니다.
중병이 깊어져 꼼짝 못하고 누워만 있는 병자를 향한 친구들의 연민이 그를 치유와 회복의 현장으로 이끌었습니다.
예수님의 강한 연민의 시선을 중풍 병자를 향했습니다.
즉시 연민의 시선은 구원의 손길을 불러왔습니다.
따지고 보니 우리가 그토록 혐오하는 약함, 결핍, 무력함이 결코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의 약함이 이웃과 하느님으로부터 연민의 정을 불러일으키고, 그 결과 치유와 회복, 자유와 구원으로 연결되니 말입니다.
이 세상 살아가면서 어떤 순간 진정한 위로와 위안을 받습니까?
감미롭고 따뜻한 위로의 말 한마디?
예쁜 꽃다발?
고급지고 맛있는 간식?
물론 위로가 될 것이겠지만, 지극히 한시적인 위로입니다.
가장 큰 위로는 극심한 고통의 순간, 누군가가 내 옆을 지켜주는 것입니다.
긴 어둠의 터널 속을 지날 때, 옆에 있어 주는 것입니다.
무익한 것처럼 여겨지지만 함께 괴로운 시간을 허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주 느끼는 바이지만 어려운 순간 동고동락한 사람들, 위기의 순간 함께 했던 사람들은 종종 혈육보다 더 가까워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들은 내가 깊고 어두컴컴한 인생의 동굴 속에 갇혀있을 때, 기꺼이 그 동굴 속으로 들어와 줌으로써 굳은 결속 의지를 보여주었기에 혈연보다 더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의 하느님께서도 그러하십니다.
그분은 임마누엘 하느님,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이시기에 그렇습니다.
꽃피는 좋은 시절은 물론 폭풍의 계절에도 언제나 함께 하십니다.
혼돈과 방황의 시절에도 우리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죽음의 골짜기를 걸어갈 때도 함께 하십니다.
이보다 더 좋은 친구가 어디 있겠습니까?
세상살이가 힘들면 힘들수록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하느님을 머릿속에 떠올려야겠습니다.
그분은 어떻게든 우리와 굳게 결속되기 위해 노력하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언제나 우리와 기쁨은 물론 슬픔까지도 함께 나누고자 하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틈만 나면 우리를 보호하고 변호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는 분이십니다.
- 살레시오회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 선언되었습니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마르 2,5)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에게 ‘죄의 용서’를 선언하십니다.
그러나 이 엄청난 사실 앞에, 율법학자들은 어안이 벙벙해져 말합니다.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마르 2,7)
유다인은 예로부터 죄의 용서를 하느님의 고유 권한으로 여겼습니다(탈출 37,4; 이사 43,25;44,22).
그런데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단 한 분, 오직 하느님이 아니고서야 그 누구도 용서할 수가 없거늘, 감히 누가 “죄를 용서받았다.”고 선언할 수 있을까?
더구나 하느님께서 용서하셨다는 것을 대체 누가 알 수 있을까?
하느님이 아니고서야 말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마르 2,10)
그리고 그 증거로 중풍병자를 치유하십니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러자 그는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습니다. (마르 2,11-12)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미 치유 받은 이들입니다.
이미 용서받은 이들이요, 그러나 그 상처는 지니고 다닙니다.
왜냐하면 상처는 제거해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 치유 받았음을 보여주는 표지인 까닭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할례’라는 상처를 ‘하느님 백성의 표지’로 지니고 다녔듯이 말입니다.
야곱이 ‘엉덩이뼈의 상처’를 ‘축복의 표지’로 지니고 다녔듯이 말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상처’를 ‘구원의 표지’로 몸에 지니고 다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더 이상 '들것'에 매여 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는 기꺼이 들고 다녀야 합니다.
아니, 들것에 아픈 형제들을 태워 들고 집으로 가야 합니다.
마치 내 형제들이 나를 '들것'에 태워 예수님께 데려왔듯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 인류를 태워 들고 아버지께로 가셨듯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가 바로 우리의 ‘들것’입니다.
진정 상처에서 흐르는 용서의 피를 마실 때라야 우리는 그 상처로부터 자유로워지고, 그것을 구원의 표지로 지니게 됩니다.
용서야말로 진정한 치유를 가져오는 권능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치유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용서하십시오.
용서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하느님께서 용서하셨음을 믿으십시오.
그러면 이미 치유 받은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마르 2,11)
주님!
들것에서 일어나게 하소서.
일어나 들것을 들고 가게 하소서.
들것 위에 당신의 사랑을 들고 다니게 하소서.
십자가에서 사랑을 드러내듯 저를 일으키신 그 사랑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토 수도회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치유 기적이 줄어들면 고해성사도 줄어든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를 고쳐주시며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율법학자들은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생각하며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여깁니다.
예수님은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라고 하시며 병자를 치유해주십니다.
병자의 치유가 곧 죄의 용서 증거로 사용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 ‘고해성사’와 ‘병자성사’는 서로 믿음을 보완한다는 뜻입니다.
병을 고치는 기적이 정말 고해성사에 대한 믿음을 증가시킬 수 있을까요?
당연합니다.
오상의 비오 신부님께 미사와 고해성사를 하려고 사람들은 성당이 열리기 몇 시간 전부터 기다렸습니다.
사람들은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이 죄를 용서해주면 더 완전히 용서받는다고 여깁니다.
누구에게 고해성사를 받아도 죄가 용서받는데 말입니다.
이것은 병을 고쳐주는 기적과 죄를 용서해주는 기적이 별개가 아님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하지만 저는 신학교에서 “기적을 일으키지 않아도 거룩하지 않아서 그런 것은 아니다. 세례자 요한을 봐라. 그는 기적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지만 성인이다.”라고 교육받았습니다.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이것이 어쩌면 기적을 하지 않아도 나의 의로움과는 상관이 없다는 식으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 같습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은 아직 성사 이전의 회개를 외치는 이이기에 그가 기적을 한다면 굳이 예수님께 갈 필요가 없어서 기적을 하면 안 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기적의 힘을 주시지 않은 것입니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기적’을 ‘믿음의 증거’로 보았습니다.
누군가를 복자품에 오르게 하려면 공식적으로 인정받을만한 기적이 적어도 하나는 있어야 하고 성인이 되려면 두 개가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그 사람이 의인이었는지 알려주는 방식은 곧 ‘기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지니고 세상에 파견하실 때 악령을 쫓아내고 질병을 고쳐주는 능력까지 주시며 보내셨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미사나 고해성사를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면 그 이전에 병을 고치는 능력까지 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사제들은 그것을 잘 믿지 못합니다.
‘나 같은 죄인에게서 이런 기적이 나올 수는 없을 거야!’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는 신부님도 당신에게서는 기적이 나올 수 없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자들이 마귀가 심하게 들린 사람이 있다고 고쳐달라고 청했습니다.
신부님은 ‘난 안 되는데!’라며 어쩔 수 없이 그들에게 끌려가다시피 하였습니다.
구마경을 외우고 하니까 마귀가 신부님을 비웃었습니다.
마귀는 신부님의 죄를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신부님은 기가 죽으면서도 ‘어찌 네가 감히 교회의 사제를?’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신자들을 그 마귀들린 사람 둘레로 빙 둘러앉게 하신 다음 묵주기도를 함께 바치자고 하였습니다.
처음에 비웃던 마귀는 점점 말이 없어지더니 식은땀을 흘리고 괴성을 질러대더니 결국은 그 사람에게서 도망쳤습니다.
예수님 당시 병과 죄는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병을 고치는 것이 죄를 용서하는 것이고 죄를 용서하는 것이 병을 고치는 것이었습니다.
요즘은 사제가 고해성사는 주면서 병을 고칠 수 있는 능력은 없다고 여깁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만약 이 믿음이 확고하였다면 아버지가 췌장암으로 길어야 3개월이라는 의사의 말을 들었을 때 몇 번이고 병자성사를 드리며 치유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의사의 말을 더 믿고 치유 기도를 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저 자신이 스스로 의인이 아님을 시인한 셈입니다
정말 기적이 없다면 의인이 없는 것입니다.
사제도 그렇지만 신자들도 그렇습니다.
사제가 기적을 하지 못한다고 여겨 가만히 있으면 안 됩니다.
안수를 달라고 머리를 들이밀어야 하고 병자성사를 또 달라며 병이 낫지 않으면 한 달에 한 번은 또 병자성사를 달라고 청해야 합니다.
물론 병자성사를 남용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도 한 번에 안 되면 곧바로 또 하셨습니다.
벳사이다에서 사람들이 소경을 고쳐달라고 할 때 예수님은 먼저 그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안수를 주신 다음 “무엇이 보이느냐?”(마르 8,23)라고 물으십니다.
그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걸어 다니는 나무처럼 보입니다.”(마르 8,24)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번에는 그의 두 눈에 손을 얹으셨습니다.
그제야 ‘그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마르 8,25) 되었습니다.
물론 이 치유는 상징적인 다른 의미도 있지만, 어쨌건 예수님께서 될 때까지 여러 번 노력하셨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러니 신자들도 사제에게 될 때까지 병자성사를 청해야 합니다.
병자성사의 한 부분이 돌아가시기 직전의 ‘종부성사’가 되는 것이지 병자성사의 본래 의미는 아픈 이에게 기름을 발라 치유해주는 성사입니다.
제가 수원교구 영성관에 있지만, 작년 죽산성지도 잠깐 맡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미사를 자주 나오시는 어떤 분이 병자성사를 신청하셨습니다.
솔직한 심정으로 ‘아, 병자성사는 자신의 본당에서 하시지 왜 나에게?’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병자성사를 부탁받으면 무조건 해 드려야 한다는 사제의식이 있기에 미사 후에 따로 병자성사를 해 드렸습니다.
갑상선 암을 수술하기 며칠 전이어서 병자성사를 드리는 중에 병이 나아 수술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얼마 뒤 미사를 하고 있는데 한 분이 한없이 울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목에 스카프를 한 것을 보니 그분인 것이 확실했습니다.
‘수술하셨구나. 그런대 왜 저렇게 많이 울고 계시지? 잘못 됐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미사가 끝나고 그분과 남편이 남아계셨는데, “신부님, 기적이에요.”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왜요?”라고 물으니 “조직검사까지 다 끝나서 암이 확실했는데, 의사가 열어보니 암이 아니라 염증이었다고 해요. 그래서 항암도 안 해도 된대요. 염증만 제거했습니다.”라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주님께서 해 주셨구나!’라고 생각하면서도 “자매님이 믿음이 강해서 은총 받으셨네요.”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서도 ‘아, 아버지가 아프셨을 때도 이렇게 할 수 있었다면!’이란 생각이 다시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만약에 본당에 가게 된다면 한 달에 한 번은 아프신 모든 분에게 병자성사를 주어야겠다.’라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습니다.
기적이 없다면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다면 의인이 없는 것입니다.
사제도 그렇지만 신자도 그렇습니다.
사제가 그런 믿음이 없다면 신자들이 청해야 합니다.
사제를 귀찮게 해야 합니다.
예전에 “남편은 아내 하기 나름이에요.”라는 광고도 있지 않았습니까?
기적이 많아져야 고해성사도 많이 보고 성체성사도 많이 하게 될 것입니다.
인간은 보지 않으면 믿지 못하는 습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전엔 지금보다 더 많은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가톨릭교회에서 지금보다 훨씬 많은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대해 봅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수원가톨릭대 교수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영적 중풍 병자>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기도를 하지 않는 영혼은 중풍 병에 걸렸거나 손발이 부자유스럽게 된 사람과 같아서, 손과 발에게 아무리 명령을 내려도 듣지 않는 것과 똑같은 이치이다…. 만약에 이런 영혼들이 그 커다란 비참을 깨닫지 못하고, 따라서 스스로 바로 잡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롯의 아내가 고개를 돌리다가 소금 기둥이 된 것처럼 자기한테서 머리를 돌린 탓으로 소금 기둥이 되어 버리고 말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영적인 중풍 병자, 즉 영적인 감각을 상실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성경을 통해 주님의 말씀을 접하고도 아무런 깨달음을 갖지 못하고 은총에 감사할 줄 모른다면 장애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가지고 있지만 읽지 않고 보관만 하고 있거나 또 설령 읽었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말씀으로 듣고 그대로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 상태가 중풍 병자나 다름없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에게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마르 2,5.11)
그러자 그는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습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그 말씀대로 이루어집니다.
사실 들것에 누워있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일어난다는 것은 부활을 뜻합니다.
그리고 일어나야 할 사람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들것에 누워있습니다.
이제 일어나십시오.
말씀에 따르십시오.
그러면 영적인 감각을 발휘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중풍 병자를 예수님께 데려간 것은 이웃을 향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넘어야 할 장벽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많아서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가 누워있는 들것을 달아내려 보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희생적인 사랑을 믿음으로 받아주시고 중풍 병자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사랑은 믿음의 구체적인 표현입니다.
믿음은 이렇게 위대합니다.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고 기적을 낳습니다.
그 믿음이 내 믿음이든 다른 사람의 믿음이든, 믿음을 갖고 하는 일에는 그에 상응하는 하느님의 능력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죄를 용서받았다.’는 선언은 우리에게 큰 희망을 줍니다.
용서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아무리 큰 잘못이라도 언제나 기회를 주십니다.
그럼에도 주님을 심판관으로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자주 심판관 노릇을 하고 살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시인하고 인정하는 것이며 마음과 영혼에, 삶 속에 받아들이는 것이고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맡긴다는 것은 끊임없이 매 순간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근심 걱정을, 인생 여정을, 앞으로의 미래를 온전히 맡겨야겠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믿음을 성장시킬 수 없습니다.
“기도를 하지 않는 사람은 숨을 곳을 찾아 땅을 파는 두더지처럼 몸과 마음을 땅으로 굽힙니다.
그들은 현세적이고 지나가는 세상 것에 집착하기 때문에 높고 푸른 하늘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성 요한 비안네)
열심히 기도함으로써 영혼의 중풍 병자가 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한 신부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사무실 중앙에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킨다!”라는 글귀를 크게 붙여놓았습니다.
제가 기도에 너무 소홀했다는 반성이 되었습니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마르코 복음사가는 계속해서 병자들을 치유하시는 예수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어제의 나병 환자 치유에 이어 오늘은 중풍 병자 치유 이야기입니다.
나병 환자와 중풍 병자는 예수님의 치유기사의 단골 메뉴로 자주 등장하는데, 그 이유는 당시 가장 무섭고 힘든 병으로 알려졌고, 그래서 이는 자기나 조상들의 죄 때문에 하늘이 내린 벌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하느님도 외면하는 공적인 죄인이었고, 하늘 나라에는 절대로 들어갈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천형(天刑)을 받는다고 여겨졌던 사람들을 그 고통에서 치유시켜 주십니다.
그러나 육신의 치유가 곧 구원은 아니었습니다.
반쪽짜리 구원일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 2,5)고 하십니다.
육신은 치유되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어 기쁠지는 몰라도 그는 여전히 천형을 받은 죄인이라는 사실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를 용서받았다고 하심으로써 이제는 영육이 온전히 치유되어 구원을 받게 되었고 하늘 나라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배려요 안배입니까?
사람들은 의아해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니 "병이 나아 걸어가라" 하면 이해하겠는데 "죄를 용서받았다니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할 수밖에 없겠지요.
예수님의 목표는 단순히 육신의 병 치유가 아닙니다.
그분의 목표는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 모두 하느님의 안식처에 들어가도록 힘쓰자."(히브 4,11)고 독려합니다.
"하느님의 안식처에 우리 모두가 들어갈 수 있다는 약속이 유효한데도 이미 탈락하였다고 여겨지는 일이 없도록 주의를 기울이자."(히브 4,1)고 강조합니다.
이 기쁜 소식을 모두 들었는데, 그걸 믿고 확신하는 사람은 안식처로 들어가게 되고(히브 4,2-3 참조), 불신하고 불순종하는 이들은 그 안식처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느님 친히 맹세하셨다고 전해줍니다(히브 4,3. 5 참조).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여러분은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확신하시나요?
아직도 자신이 없으신가요?
왜요?
여러분이 지은 죄와 허물 때문입니까?
여러분이 더 많이 기도하고 자선을 베풀지 못하였기 때문입니까?
성질이 더러워서 혹은 성당에 잘 못나가서 그렇습니까?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이 이 모든 죄와 허물과 악습을 덮지 못할 것으로 여기십니까?
아닙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우리 모든 죄가 사함을 받고 하느님의 자녀가 된 이상 우리는 모두 하늘 나라의 상속자들입니다.
이것을 믿기만 하면 하늘 나라는 우리 가까이에 와 있습니다.
이것을 믿지 않는다면 하늘 나라는 우리에게서 점점 멀어질 뿐입니다.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총을 믿고 그 믿음으로 한 걸음 내딛는 사이 어느새 우리는 안식처에 가 닿습니다.
그래서 모든 과정이 소중합니다.
오르막길이건 내리막길이건 꽃길이건 가시밭길이건 진흙탕이건 이 과정이 하느님께로 가는 길목임을 믿고 견딘다면, 모든 과정은 우리가 안식처에 들어가도록 지탱해 줄 버팀목이 될 것입니다.
"믿음을 가진 우리는 안식처로 들어갑니다."(히브 4,3)
여러분도 그러하시길 축원합니다.
중풍 병자는 예수님을 만나러 올 때 제 발로 걸어오지 못했습니다.
그 병이 워낙 사람의 일부분이나 전체를 마비시켜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게 만드니까요.
그는 자신의 건강을 회복시켜 주려는 벗들에 의해 들것에 실려왔고, 예수님이 계시던 집에 이르러서는 지붕까지 올려졌다가 밑으로 달아서 내려지는 조마조마한 순간을 겪습니다.
이 과정은 우리 삶에서도 종종 일어납니다.
우리는 미처 깨닫지 못해도 부지불식간에 벗들의 믿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난관에 부딪혀 더 나아가지 못할 때 위험천만하게 들어 올려졌다가 달아 내려지기도 합니다.
그리고는 모두의 노력을 가상히 보신 예수님 덕분에 치유받고 용서받습니다.
이제는 그동안 자기의 병을 상징했던 들것을 직접 들고 성큼성큼 걸어나갈 수 있습니다.
오늘 나를 주님 앞으로 데려와 치유와 죄사함의 은총을 받도록 도와준 벗님들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나의 죄와 허물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당신의 자비로 하해와도 같은 치유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어 하늘 나라로 초대해 주신 주님께 깊은 감사의 기도를 올립니다.
벗님들, 고맙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 작은형제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예수님처럼 삽시다 - 현실주의적 이상주의자로>
하루하루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하루하루가 새롭고 좋고 아름답고 고맙습니다.
날마다 잠깨어 문밖을 나서면 맨먼져 바라보는 것이 언제나 거기 그 자리 밤하늘의 북두칠성과 수도원 배경의 불암산입니다.
겨울 날씨가 차니 공기도 맑고 하늘의 별들도 초롱초롱 맑고 밝습니다.
아주 예전 ‘소망(所望)’이란 짧은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차가운 날씨
청정淸淨해서 좋다
맑고 깨끗하다
살짝 덮인
회새 구름 사이에서
쏟아지는 햇빛
온유溫柔해서 좋다
따뜻하고 부드럽다
청정淸淨과 온유溫柔를
겸할 수 있다면”
어제 세상을 떠난 어느 분의 부음을 듣고 저절로 나온 말마디가 생각납니다.
‘삶의 끈을 놓지 말고 살았어야 하는데. 삶과 죽음이 별 차이가 없어 보이네.'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지 거의 확인이 안되는 존재감이 아주 약해 보였던 참 안타깝게 생각되는 분입니다.
두문불출하기에 살아 계시는 동안 거의 볼 수 없었던 분입니다.
반면 삶의 귀감이 되는 노익장(老益壯)의 두 분 삶의 내용도 잊지 못합니다.
노령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한결같이, 모순적이지만 말그대로 현실주의적 이상주의자로, 청정과 온유를 겸해 살아가는 분들입니다.
‘구순 조각가, 최종태 “일할 때는 청년이고, 일 안하면 환자예요.” 조각가의 삶을 산 지 67년째, 평생 사람 조각하며 “아름다움” 고민. “하느님과 노는 게 일하는 것”. 요즘도 하루 10시간씩 작업 몰두.’
(가톨릭평화신문 2021.12.12.15쪽)
참 치열하고 한결같은 삶, 나이를 초월한 영원한 청춘의 아름다운 삶입니다.
또 한분의 학자 또한 대동소이입니다.
길다 싶지만 유익하고 사랑이 가득 담긴 미담이기에 인용합니다.
“보스코는 보통 새벽 4시에 일어나 책상에 앉는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하루 10시간 이상 끈기있게 의자를 덥힌다.
번역을 하거나 글을 쓴다.
그의 직업이 번역작가이다 보니 번역하는 이들의 노고도 알고, 원문에 충실해야 한다는 사명감도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니 본문에 충실하며 그 내용을 성실하게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가는 요즘도 80 노인이 책상 앞에서 한 줄 라틴어 문장을 놓고 반나절을 푹푹거리며 이곳저곳 책들을 뒤지면서 한숨을 내쉬는 모습에서 안다.
동네에 들어서니 리디아 아주마를 비롯하여 동네 아짐들이 약속이나 한 듯 고추대를 지팡이 삼아 마을길을 한 바퀴 돌고 있다.
작년에 상처한 허영감도 모처럼 지팡이를 짚고 산보를 다녀오는 중이다.
‘걸으면 살고 누우면 죽는다!’는 구호가 문정 마을에도 들어온 것 같다.
내가 기필코 보스코를 산보길에 떠밀며 걷게 하는 까닭도 이 구호 때문이다.
더구나 여든 나이에 하루 10시간 이상 책상에 앉아 있는 사람이다.”
(휴천재;전순란)
참 치열한, 한결같은, 진짜 살아 있는 삶입니다.
옛 사막교부들의 유일한 관심사도 ‘참으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누어 있기보다는 앉아 있는 것이, 앉아 있기보다는 서있는 것이, 서있기보다는 걷는 것이 더욱 살아 있다 생각됩니다.
삶이 무기력해질 때는 벌떡 일어나 하늘 보며 묵주기도를 바치며 걷기를 권합니다.
우울증과 치매 예방에는 걷기가 제일이라 합니다.
위에 소개한 두 독실한 가톨릭 형제들은 참으로 현실주의적 이상주의자들입니다.
참으로 하느님께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두고 살아가는 신망애의 노인이 아닌 어른들입니다.
“예수님처럼 삽시다-현실주의적 이상주의자로-”
바로 오늘 강론 제목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논쟁이 참 재미있습니다.
이상과 현실, 명분과 실리의 갈등처럼 보입니다.
이 모순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자신들을 통치할 임금을 세워달라는 백성들의 현실주의적 관점도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하느님을 대리한 사무엘에게 하느님은 말씀하십니다.
“백성이 너에게 하는 말을 다 들어 주어라.
그들은 사실 너를 배척한 것이 아니라 나를 배척하여, 더 이상 나를 자기네 임금으로 삼지 않으려는 것이다.”
이어지는 사무엘의 설득은 왕권주의, 국가주의, 병영 군국주의, 제국주의가 얼마나 사람들을 노예화하고 비인간화 하는지 역사를 통해서는 물론 지금도 공감하는 현실입니다.
참으로 성군같은 임금이나 지도자보다는 폭군같은 임금이나 지도자들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을 다스릴 임금의 권한이오.
그는 여러분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자기 병거와 말 다루는 일을 시키고, 병거 앞에서 달리게 할 것이요.”
이어지는 사무엘의 설득은 구구절절 공감이 가고 부정적 인류 역사가 이에 대한 생생한 증거가 됩니다.
현실을 택한 결과 산산조각 나는 이상이요 인간의 노예화, 비인간화입니다.
“상관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임금이 꼭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우리도 다른 모든 민족들처럼, 임금이 우리를 통치하고 우리 앞에 나서서 전쟁을 이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참 어려운 과제입니다.
난제중의 난제입니다.
힘없는 정의가, 힘없는 평화가, 힘없는 진리가 때로 탐욕의 힘 앞에 얼마나 무력한지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은 막무가내 현실주의적 관점을 주장하며 하느님을 대변한 사무엘의 설득에 승복하지 않았고 마침내 이들의 승리로 끝납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백성을 이길 수 없는 하느님이십니다.
참으로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입니다.
참으로 성군같은 지도자에 깨어 있는 시민의식의 민주주의 국가가 궁극의 답이겠습니다만 참 힘든 숙제입니다.
여기에 거의 근접하고 있는 나라가 아마도 현재의 독일일 것입니다.
답은 오직 하나!
현실주의적 이상주의자인 예수님을 공부하고 실천하여 닮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성숙한 분별력의 지혜와 용기와 사랑, 믿음을 배우는 것입니다.
이래야 현실과 이상, 명분과 실리의 갈등을 지혜롭게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중풍병자 동료들의 지극 정성의 형제애의 믿음에 감동하신 예수님은 지체없이 죄의 용서를 통한 영혼의 치유와 더불어 육신의 치유를 명하십니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대로 우리의 무지를 일깨우는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예수님의 치유 기적을 통한 하느님 체험입니다.
중풍병자는 물론 동료들과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이런 예수님을 통해 크게 깨닫고 배웠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치유 기적을 체험한 모든 사람은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며 고백합니다.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
이런 예수님같은 성군의 지도자에, 이런 체험의 사람들이라면 참된 민주주의의 실현도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예수님을 닮아 현실주의적 이상주의자로,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며 참된 성숙한 민주주의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참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훈련이, 진리의 지혜의 훈련이 참으로 우리를 현실주의적 이상주의자로 변모시킬 것입니다.
그대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바로 다음 화답송 시편이 오늘 강론에 답을 줍니다.
“행복하여라, 축제의 기쁨을 아는 백성!
주님, 그들은 당신 얼굴 그 빛 속을 걷나이다.
그들은 날마다 당신 이름으로 기뻐하고, 당신 정의로 힘차게 일어서나이다.”
(시편 89,16-17)
아멘.
- 성 베네딕토회 성 요셉 수도원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자신이 하는 일을 바라보는 모습에 따라 크게 소명(Calling)과 생업(Job)으로 나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두 부류의 차이는 너무나 큽니다.
소명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가 하는 일은 필요한 것이고,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며 세상에 무언가 이바지를 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생업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보다 즐거움과 만족감이 훨씬 높았습니다.
이렇게 소명(Calling)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의 행복도는 훨씬 더 높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소명으로 받아들이기까지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을까요?
자기 일에 얼마나 많은 의미를 찾아 나갔을까요?
이 모든 것이 자기 일에 대한 믿음을 가져온 것입니다.
바로 믿음은 커다란 의미를 우리에게 제공합니다.
온 갈릴래아 땅은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로 가득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근처에 왔다는 말만 들으면, 하던 일도 모두 팽개치고 예수님을 향해 떠났습니다.
이렇게 많은 군중이 모여들면 겁이 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정치인입니다.
군중을 모으고 있는 사람이 자기네 편이면 상관없지만, 자기네 편이 아니면 큰일이기에 신중하게 살펴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사회의 정치 지도자들은 예루살렘 제관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이 이 제관들에게 예수님의 발언과 행동을 보고하면서 뜻을 함께 했습니다.
그런데 사건이 하나 생겼습니다.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서 들것을 달아 내려보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를 신성모독으로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얘야”라고 부르는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특별히 믿음을 가상히 여길 때 이 사랑스러운 말씀을 쓰셨습니다.
그런데 중풍 병자의 믿음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라고 복음은 이야기합니다.
중풍 병자를 데리고 온 이들의 믿음을 보시고 고쳐주셨으며 죄의 용서까지 해주셨습니다.
물론 죄의 용서는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해 이제부터는 이 세상에서도 죄가 사해진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이를 신성모독이라고 생각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인간적인 방법으로 치유하지 않으십니다.
말씀 한마디로 병을 고쳤다는 것은 하느님의 방법으로 치유해 주신 것입니다.
무조건 믿고 중풍 병자를 들것에 실어 내려보낸 사람들의 믿음과 자신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다는 이유로 따져보지도 않고 무조건 반대만 하는 종교 지도자들의 불신이 크게 대조가 됩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나요?
계속 묵상하면서 주님과 자신의 관계를 생각하며 굳은 믿음을 키워야 합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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