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예프스키는 그의 작품 <백치>의 주인공으로 아름다운 사람인 <그리스도>를 택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전면에 내세우며 그를 그려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며 다음과 같이 술회한다.
“이 소설의 주요한 의도는 아름다운 사람을 긍정적으로 그려내는 것이다. 세상에서 이 보다 더 어려운 일은 없다. 특히 지금이 그러하다. 우리나라 작가뿐만이 아니라 모든 유럽 작가들까지 긍정적으로 아름다운 인물을 묘사해 보려 시도했지만 항상 실패했을 뿐이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과제는 끝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것은 이상理想이다. 그러나 우리의 이상이나 문명화된 유럽의 이상이 만들어지기까지는 아직도 요원하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미쉬낀 공작은 백지장처럼 깨끗하고 어린이처럼 티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때가 묻지 않은 공작의 정신은 순백純白하다. 그러나 때가 없는 순백함은 사람들에게 일종의 비정상적인 병이기 때문에 백치白痴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다. 하지만 공작과 같은 사람이 백치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정상인이라고 하자. 그렇다면 이 소설 속 다른 인물들은 작품의 주인공인 공작과는 정 반대로 도덕적道德的인 면에서 심각한 미숙아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도덕적 백치라고 볼 수 있고 그 때나 지금이나 도덕적 백치가 너무 많은 게 탈이다.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부자가 천국으로 들어가는 게 더 어렵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구절이다. 그렇다면 지금 현대판 부자들은 아무리 큰 교회, 성당. 절을 다닐지라도 그 어느 누구도 천국 근처도 가지 못할 것이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다 내게로 오라. 천국이 그대들의 것이니라.” 하고 예전에는 광야에서 부르짖는 사람이 있었으나, 그 광야에는 바람만이 불고 있다.
지금은 지하철 입구나 사람 많은 거리에서 부르짖고, 노래 부르고 절하고, 그게 광야의 소리가 변화한 것이다.
누구나 가고자 하는 천국은 현세의 것인가? 내세의 것인가? 그러나 그 누구도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을 본 적이 없고, 또 천국을 보았다는 사람도 없다. 그런데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천국을 꿈꾼다. 그렇다면 그 천국으로 가는 사람은 정해져 있는가? 여기에 의문점이 남는다. 그 천국에 가는 길에도 과연 심사위원이 있다는 것인가?
있다면 나는 다른 건 몰라도(천국의 담당자님이 임명해주기만 한다면) 천국에 가는 사람들을 심사하는 천국심사위원이 되고 싶다. 그래서 지금의 내 명함 한 편에 <천국 입 출입 심사위원> 신정일‘이라고 삽입하고 제대로 심사하고 싶다.
“문제는 끊임없이 그 삶을 추구하는데 있지, 그 삶을 발견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라는 작가의 말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그 종교가 추구하는 정신과는 별개로 살면서 오직 천국만을 꿈꾸는, 그것도 지상의 천국만을)이 많은 이 사회가 심히 걱정스러운 것은 비단 몇 사람만이 아닐 것이다.
지금 이 시간 문득 아름다운 삶을 살았던 사람들(그리스도. 붓다. 등 옛 선인들)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