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자(追跡者)-47-마지막회
34.
에드몬드 강의 집 정원 한구석에서, 전설처럼 비통한 한을 가진 한 여인의 역사를 간직한 채 버티고 있던 지은 지 오래된 낡은 창고는 해체되었다. 에드의 정원 집은 지붕에서 부터 옆 벽을 이룬 plank of wood(나무판자)들을 하나 하나 뜯어 내어졌다. 조심스럽게. 그 여인의 집은 그렇게 해체되었다. 남은 바닥은 지금 드러나고 있었다. 그 옆에서 박인서 할머니는 언니의 유골이 드러나는 것을 보며 한 손에 들고 있는 흰 수건으로 연신 눈가를 훔치고 있었다. 에드몬드가 직접 그 일을 하고 있었다. 에드몬드는 뼈를 하나 하나 잘 수습하여 정원 집이 있던 자리 옆 한 켠에 숯과 참나무 장작으로 쌓아서 만든 임시 화장대로 옮겼다. 그는 흰 장갑을 끼고 천천히 조심스럽게 그 일을 하고 있었다. 머잖아 그는 또 한 번의 이런 일을 할 것이었다. 쌓아놓은 화장대 위에 박인혜의 유골이 하나 하나 쌓일 때마다 박인서 할머니는 언니 박인혜의 해골을 잡고 흐느꼈다. 그것을 엘리자벳은 그녀의 집 뒤 정원에 홀로 나목이 되어 서 있는 단풍나무를 잡고 울며 바라보고 있었다.
바람은 없었다. 주변은 고요하였다. 건조한 겨울 하늘에 맑은 연기를 내 뿜으며 불은 활활 잘 타고 있었다. 희고 맑은 연기는 일직선으로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다. 하늘 끝에 닿을 듯이.
다 타버린 뼈는 가루로 만들어져 작고 투박한 항아리에 담겨서 메이플 나무로 만든 하얀 상자에 담겼고 에드는 그 상자를 흰색 천에 잘 싸서 곁에서 꼼짝 않고 지켜보고 서 있던 박인서 할머니의 손에 들려주었다.
박인서 할머니는 놓칠세라 다시 한번 흰 보자기에 쌓인 상자를 가슴에 꼭 안았다. 앞으로 몇 번이고 더 그렇게 할 것이었다. 내 할머니 권아지는 불쌍해서 눈 못 감겠다고 하시던 그 손주를 이렇게 여기까지 잡고 계셨구나 생각하니 흰 보자기에 쌓인 상자를 보는 내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엘리자벳의 정원 한쪽 그늘진 곳에 서서 이것을 지켜보던 노인 한 사람이 지팡이에 의지한 채 쓸쓸히 돌아서 길가로 천천히 걸어가고 있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고 보았다.
홀스 스탁톤 아니 사르지에 홀스였다. 그는 걸어가면서 한 손에 쥔 하얀 손수건으로 연신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그는 혼자 살아왔다. 그의 모습은 죽어가고 있었다.
나를 부축하고 있던 쎄지로가 내 팔에 힘을 주며 그렁 그렁 눈물 어린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현재의 이 여자. 쎄지로는 박인혜의 울지도 못한 시간들을 얼마나 느끼고 있을까? 쎄지로는 같은 여성으로 이 시대에 살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하였다.
35.
제임스는 왼쪽 어깨에 흰 붕대를 감고 왼쪽 다리에는 깁스를 한 채 오른손에 지팡이(crutch)를 짚고 있었다. 쎄지로는 제임스의 붕대가 감기지 않은 다른 한쪽 팔을 잡고 부축하고 있었다.
비수기라서 피어선 공항의 한국행 출국장에는 그렇게 사람이 많지 않았다.
“얼마 동안이나 이 고생을 해야 하는 거예요?”
제임스를 바라보는 쎄지로의 애처로운 눈빛은 젖어 있었다.
“아마. 한 달. 아니면 두 달. 곧 크러치도 버리고 붕대도 풀게 될 것입니다. 걱정 마십시오.”
제임스는 쎄지로의 맑은 두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공항의 승객이 들어가야 하는 첫 입구에 선 쎄지로는 형언할 수 없는 이별에 대한 슬픔과 고마움 사랑의 감정들이 뒤엉켜 눈물이 눈에 가득 고였고 마침내 두 뺨을 타고 아래로 흐르고 있었다.
“이곳까지 와서도 힘든 일들을 죽음을 불사하고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쎄지로.”
제임스는 그녀 앞으로 한발 다가서며 겨우 들어 올린 왼 손등으로 그 눈물을 닦아주려 하였지만, 그녀의 뺨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에 대한 감당이 그 손등으로는 불감당이었다.
“이것 좀 잡아주십시오.”
제임스는 잡고 있던 크라치를 쎄지로에게 건네주었다. 엉겁결에 쎄지로는 그가 자기 눈물을 닦으려고 그런가 보다 생각하며 손에 든 핸드백을 어깨에 메고 왼손으로 그 크라치를 받았지만 어리둥절하였다.
“이건 한국 첨단 국방과학연구소 소장에게 전해주십시오. 직접 전해주셔야 합니다. 봉투
속에는 이름과 전화번호가 있습니다.”
그는 왼쪽 속 주머니에서 가로 12 센티 세로18 센티쯤 되는 얇고 딱딱한 푸른색의 작은 봉투를 꺼내 쎄지로에게 건네주었다. 쎄지로가 빈 오른손으로 그 봉투를 받아 조심스럽게 핸드백 속 지퍼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제임스는 다시 바지 주머니에서 작은 바이닐 지퍼빽을 꺼냈다. 크라치를 잡고 있는 쎄지로의 왼손을 살며시 잡고 가슴께로 올려 지퍼빽에서 꺼낸 반지를 무명지에 끼웠다. 쎄지로는크라치를 놓을 수 있었다. 그러나 크라치는 쎄지로의 손에 잡혀 있었다. 반지는 맞춤같이 쎄지로의 무명지에 꼭 맞았다.
“쎄지로. 사랑합니다. 영원토록 사랑합니다... 이제 크라치를 주십시오.”
쎄지로는 크라치를 다시 돌려주고 반지가 끼워진 손을 들어 올렸다. 피어슨 공항 출구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의 불빛으로 다이아몬드는 푸른색을 띤 연한 황금색으로 찬란하고 황홀한 빛을 발하였다.
“쎄지로. 당신이 힘겹고 어려울 때는 ‘유부타아부타 제부타! 까르마!’ 라고 말하십시오. 내 영혼이 당신을 찾아가서 당신을 도울 것입니다.”
쎄지로는 고개를 숙여 바닥을 보며 끓어 오르는 감격을 참느라 숨을 가다듬고 있었다. 눈물은 바닥에도 떨어졌다. 이윽고 고개를 든 쎄지로는 두 손을 다시 들어 가슴에 모은 채 눈물 가득한 눈으로 제임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유부타 아부타 제부타 까르마! 벌써 이렇게 힘겹고 어려운데 어떡해요. 사랑해요. 제임스. 저는 영원히 당신만을 사랑하며 기다리겠어요.”
에어포트 로드를 벗어나 401 하이웨이를타고 서쪽으로 가면서 말리부 앞 차창을 통해 서쪽 하늘을 보았다. 큰 여객기가 막 비상하여 높은 하늘을향하고 있었다.
이제 어디로 가나?
막연히 공항을 벗어났지만 나는 갈 곳이 없었다.-끝-
그 동안 읽어주신 선생님들께 두손 가슴에 모으고 깊이 감사드립니다. 늘 건강하시고 즐거우십시요. 글쓴이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