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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덕암서예 원문보기 글쓴이: 행복해덕암
1. 김환기 '매화와 항아리'
- 달빛 품은 매화 터질 듯 터질듯하더니... 봄에 쫓길세라 붉은 망울 터뜨려
김환기 ‘매화와 항아리’ 1957년작, 캔버스에 유채, 55x35cm /사진제공=(재)환기재단·환기미술관
터진다, 터진다 하더니 마침내 터졌다. 지난 설날, 한옥 안뜰에 청매를 키우는 지인이 갓 나온 매화 꽃망울 사진으로 신년인사를 대신했다. 한파가 매섭던 겨울 한복판에서, 아무리 추워도 봄은 기어이 오고야 만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매화 한 떨기에 딱 그만한 눈물이 맺혔다. 그러니 선비의 꽃 치고 절(雅致高節)이라 하지 않겠는가. 바야흐로 매와 철이다.
봄은 짧고 그 봄을 끌고 나오는 매화를 마주할 시간은 더욱 짧다. 그래서 애가 탄다. 1956년 당시 예술의 메카이던 파리로 간 김환기(1913~1974)도 그렇게 매화를 그리워했고 매화를 그렸다. 수직으로 뻗은 줄기에서 피어난 화사한 홍매 꽃 위로 둥근 백자 항아리와 보름달이 겹쳐 떠올랐다.
그 구도는 흡사 조선 중기의 문인 화가 어몽룡(1566~1617)의 ‘월매도’(국립중앙박물관 소장)를 떠올리게 한다. 위로 곧게 뻗어 올라간 가늘고 긴 매화가지 너머로 휘영청 둥근 달이 은은하게 비추는 운치 있는 그림이다. 어
떤 그림인지 퍼뜩 생각나지 않는다면 지갑을 열어 신사임당이 그려진 5만 원권 지폐 뒷면을 보자. 비록 지폐 도안에는 공간의 한계 때문에 ‘휘영청’ 대신 옹색하게 매화 가지 끝 가까이로 달을 끌어내려 적잖은 비판이 따랐지만, 그래도 지갑 속에 그런 그림 한 장 들어 있으면 이래저래 마음이 그득하다.
다시 김환기의 그림으로 돌아오니 조선 문인의 운치와는 또 다른 청아한 격조가 흐른다. 파리에 머무르던 중년의 김환기에게 지중해의 푸른빛은 고향 신안 계좌도(현 안좌도)나 피난시절 부산에서 봤던 고국산천의 푸르름과는 사뭇 달랐다.
타국에서 자신의 근본을 끌어낸 그는 프랑스 언론 인터뷰에서 “한국의 하늘과 동해바다는 푸르고 맑으며 이런 나라에 사는 한국 사람들은 깨끗하고 단순한 것을 좋아한다"라고 했다. 고국의 산하이기에 바다든 하늘이든 그에게 푸름은 ‘하나’였다.
화가는 “사람이 어떻게 흙에다 체온을 넣었을까” 감탄하며 백자 달 항아리를 유독 사랑했다. 그 푸근한 모양이 상 차리는 어머니의 둥근 등짝 같지만 초라하지 않으며, 돌아앉은 마누라의 엉덩이 같다고 해도 천박하지 않다. 그렇게 말한들 백자의 아름다움이 퇴색할 리 없어서다. 화려한 수사는 미인의 두꺼운 화장에 불과하다.
화가는 둥근 달과 백자 항아리를 겹쳐 하늘에 띄웠다. 파리에서 지인에게 편지를 쓴 김환기는 “내 예술은 하나 변하지가 않았소. 여전히 항아리를 그리고 있는데 이러다간 종생 항아리 귀신만 될 것 같소” 하더니, 훗날 달을 두고는 “프랑스에서는 달 보고 바보라는 말이 있다…그렇다면 달은 동양의 것일까. 불원해서 달도 정복될 모양이니 달의 신비가 깨뜨려지는 날에는 나도 태양이나 별을 그리게 될지도 모른다"라고 했다.
흔히 김환기를 두고 추상미술에 한국적 서정성을 더한 사람이라고 한다. 1963년 미국으로 가 록펠러재단이 후원하는 뉴욕 맨해튼 73가의 예술가 아파트에 살면서 그는 거대한 문명 앞에서 청연 한 자연을 노래했고 회화의 순수 그 자체를 탐구했다.
미국의 ‘추상표현주의’가 전후 미술가들의 희망·분노·공포의 감정을 드러냈고, 그 일파인 ‘색면 추상’이 색만으로 사색을 이끌어냈다면 김환기의 추상은 감정적이지 않으나 은근한 한국의 정서를 담았고 점·선·면을 반복하는 노고를 통해 정신성을 보여줬다.
키보다 큰 화폭을 수만 개의 점으로 채운 1970년대 전면 점화(點畵)가 연거푸 4번이나 한국 미술 경매 최고가를 경신한 이유다. 조국과 고향을 생각하며 김광섭의 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읊조리며 찍은 점. 실제 그림을 보면 점은 그냥 점이 아니라 그리운 이의 눈동자다. 단번에 찍은 게 아니라 한번 찍고 그 번짐과 울림을 관찰하며 또 찍고 바라보다 마르면 또 찍기를 예닐곱 번 거듭해 점 하나가 완성된다.
어떤 눈은 기뻐서 울고 어떤 눈은 서러워 울고, 어떤 눈은 호기심으로 가득하고 어떤 눈은 기쁨으로 충만하다. 물론 개중에는 원망하는 눈동자, 외면하는 눈동자가 없으랴만. 공감이나 서정성은 50~60년대 반(半) 구상 반(半) 추상의 그림이 탁월하지만 미술시장은 말년 작히 된 전면 점화에게 승기를 안겼다. 과거의 자신을 버려낸 “자기(自己)를 이긴 화가”임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출처] :조상인 서울경제신문기자 : <조상인의 예 > / 서울경제신문, 2017. 3.3.
1956년대 팔짱을 끼고 파리 시내를 걷고 있는 김환기(왼쪽)와 김향안 부부 /사진제공=환기미술관
[출처] : 조상인 서울경제신문 기자 : <조상인의 예-김환기'매화와 항아리> / 서울경제신문,2017.3.3.
이름을 주고받아 영혼을 나눈 김환기 부부
“당신의 아호 향안(鄕岸)을 나한테 주면 평생 그 이름으로 살겠어요.”
시인 이상(1910~1937)의 부인이었던 변동림 여사는 남편과 사별 후 한 일본 여류시인의 소개로 김환기를 만났다. 남도 부농의 외아들인 김환기는 일찍 결혼해 딸 셋을 뒀으나 당시 이혼한 상태였다. 키 큰 사내 옆에서 반밖에 안되어 보이던 작은 여인이 강단 있게 이름을 달라 청했다. 지식인이자 신여성이었던 김향안(1916~2004)은 실제로 이름의 주인을 위해 살았다.
그녀는 1955년 홍익대 미술대학 학장이자 한국미술가 협회 회장이던 남편에게 “우리 바깥세상으로 나가야 해요. 파리로 갑시다” 과감하게 권했고 그때부터 불어를 공부해 1년 먼저 파리로 가 남편의 작업실을 마련했다.
그런 아내를 ‘산처(山妻)’라고도 부른 김환기는 “세상이 귀찮고 그림을 못 그릴 때면 부지중 아내에게 신경질을 부리지만 그럴 때면 찻값을 주어 내보내든지 술을 사들고 와서 한 잔 권할 때도 있다"라고 적었다.
1974년 남편을 먼저 보낸 김향안은 딱 30년을 더 살면서 작가를 기리는 ‘환기 재단’을 설립했고 미술관을 지었다. 종로구 부암동 환기미술관에는 두 사람을 닮은 나란한 소나무 두 그루가 높이 뻗어있고, 별관은 둘의 이름을 딴 ‘수향 산방’이라 불린다.
본관에서는 주로 대작 중심의 기획전이 열리지만, 아담한 수향 산방에서는 김환기의 드로잉과 소품들이 전시된다. 김환기는 떠오르는 작품을 손바닥보다 좀 더 큰 스케치북에 메모하듯 그려 자랑하듯 김향안에게 선물했고 때로는 그림으로 엽서를 만들어 보냈다. 지금은 그 엽서 크기가 수 천만 원의 값어치다.
환기미술관은 다음 달 14일 김환기의 1963~69년 작품을 중심으로 작가의 실험정신에 주목한 기획전을 연다. 같은 시기 삼성미술관 리움이 ‘김환기 특별전’을 개막한다는 것 또한 봄소식만큼이나 반갑다.
[출처] : 조상인 서울경제신문 기자 : <조선의 예> / 서울경제신문 ,2017.3.3.
2.유영국 '작품' - 흔들리지 않는 굳건함…"山은 내 안에 있다"
어릴 적 고향 울진의 山, 마음에 품고 곱씹어 화폭에 담아
유영국의 ‘작품(Work)’. 캔버스에 유채로 그린 130×30cm 크기의 1967년작.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세상이 요동치니 절대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무언가가 절실했다. 그런 묵직함이 산(山)만한 게 또 있으랴. 아침이면 인왕산을 스쳐지나 출근하고 저녁나절이면 광화문 너머로 북악산을 보며 퇴근하는, 꽤 많은 이들이 부럽다고 하는 길을 매일 오간다. 시국이니 세파니 시끄러워도, 사람은 들고 날지언정 산은 늘 묵묵하게 자리를 지킨다.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랬으며 내일도 분명 그럴 것이다.
그 산 만큼이나 한결같은 화가가 유영국(1916~2002)이다. 평생을, 심지어 가슴에 심장박동기를 단 채 병고와 싸워가면서까지 추상(抽象·Abstraction)에만 매달려 산을 그리고 또 그린 작가다. 그저 ‘작품’이라 이름 붙인 이 1967년작은 부연 설명 없이도 세모난 노란색이 산으로 보이는 그림이다.
삼각형은 이제 막 크레파스를 쥐기 시작한 아이도 그렇게 그릴 정도로 산의 근원적 형태다. 저 순수한 샛노랑은 갓 피어난 개나리의 노란 꽃잎부터 저무는 해가 드리우는 석양빛 황금색까지 모두 아우르는 색이다.
그 색으로 인해 빛이 산을 비추는 게 아니라 산 스스로 태양이 되어 빛을 발산하는 것 같다. 산 아래로 푸른 계곡물이 흐르고 싱그러운 초록 벌판이 펼쳐진다. 기막힌 것은 산 그림자를 대신하는 보랏빛이다.
얇게 산을 에워싼 보라는 노란 산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동시에 절대적 존재감을 부각시킨다. 산의 왼쪽 위로, 오른쪽 아래로 선을 삐쳐 표현한 한 줄기 빛의 흔적 또한 절묘하다.
유영국의 산을 보노라면 눈물 닦으며 본 것 같은 촉촉한 겸재 정선(1676~1759)의 인왕산이 겹쳐진다. 눈으로 보는 풍경이 아닌 마음에 읽히는 풍광을 그렸다는 점에서 유영국은 정선을 닮았다. 겸재 이전의 조선 그림은 중국 화첩을 보고 따라 그리는 게 대부분이었고 이로 인해 사생화보다는 상상화에 가까운 ‘관념산수’가 유행했다.
하지만 겸재는 실제 경치를 보고 그린다는 뜻의 실경(實景)에서 한발 더 나아가 보이는 형태 너머의 본질을 꿰뚫은 ‘진경(眞景)산수’로 독자 노선을 개척했다. 국보 제216호 ‘인왕제색도’는 지금의 청와대 쪽에서 인왕산을 바라보고 그린 그림이다.
비 갤 제(霽)자를 쓴 ‘제색(霽色)’은 큰비가 후 맑게 갰다는 뜻이다. 산을 지나던 겸재는 병석에 누운 친구 이병연(1671~1751)을 떠올렸다. 이병연이 시를 쓰면 정선이 그에 맞춰 그림을 그릴 정도로 둘은 각별했다.
그날따라 쏟아진 초여름 장맛비가 어쩌면 화가의 눈물이었을지 모른다. 붓을 꺼내 든 그는 개인 하늘처럼 지우(知友)의 병이 낫기를 바랐다.
사실 인왕산은 거대한 백색 화강암 산이라 실제는 흰 기운이 많지만 겸재는 굵은 선과 강렬한 농담을 섞어 진하게 그렸다. 시커먼 인왕산 바위가 무서울 정도다. 화가의 먹먹한 마음이 색으로 표현됐다.
국보 제216호인 겸재 정선 ‘인왕제색도’ 종이에 수묵, 79.2 X 138.2 cm 1751년작 /
사진제공=삼성미술관 리움
“산은 내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
이렇게 말한 유영국은 일본을 거쳐 서양미술을 받아들인 탓에 자칫 남의 것에 함몰될 수도 있었지만 자기 안에 자신만의 산을 가진 사람으로서 뚝심을 지켰다. 경북 울진에서 태어난 유영국은 얼마나 부자였던지 강원도에까지 소문이 퍼진 ‘유부자 집’의 셋째였다.
서울서 학교를 다니고 일본에서 유학했지만 그의 그리움은 늘 고향을 향했다. 작품 대부분은 고향 울진의 산을 마음에 품고 되씹고 곱씹은 결과다.
후기 인상주의 화가 폴 세잔(1839~1906)도 그토록 고향과 산을 그렸다. 프랑스 남부 엑상프로방스 출신인 세잔은 생빅투아르산을 즐겨 그려 60점 이상의 그림을 남겼다.
자연을 원통·구·원뿔 같은 기하학적 형태로 간주하고 단순하게 색채의 면으로 묘사한 것이나 보색대비로 그림자 효과를 준 것까지 여러모로 흡사하다.
겸재든 세잔이든 유영국이든 그들이 추구한 것은 보이는 것 이면의 본질이었고 거기서 숭고하고 장엄한 절대적인 어떤 것을 찾는 일이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주인공 스칼렛 오하라는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고 했다.
유영국의 저 태양 같은 산은 흔들리지 않고, 내일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이라는 확고한 약속을 건넨다. 든든하다.[출처] : 조상인 서울경제신문기자 : <조상인의 얘-유영국'쟉품> / 서울경제신문,2017.3.10.
[藝] 느리지만 묵묵하게…거북이 같았던 화가 유영국
유영국 ‘작품(work)’ 캔버스에 유채 105x105cm, 1999년작,
유영국미술문화재단 소장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유영국은 거북이 같은 화가였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그는 참 느렸다. 첫 개인전이 화단 데뷔 27년째이던 1964년에 열렸다. 일찍이 1948년 해방 직후에 김환기·이중섭·장욱진 등과 더불어 ‘신사실파’를 결성했고 ‘모던아트협회’를 통한 예술운동을 전개하고 1963년 ‘상파울로 비엔날레’에도 출품한 유명 작가였지만 개인전은 무척 늦었다. 그 정도로 신중한 인물이었다.
작품이 공감을 얻어 판매되기까지는 더욱 시간이 걸렸다. 예순이던 1975년 5번째 개인전에서 작품이 처음 팔렸다. 스스로 “60세까지는 기초 공부를 좀 하고 그 후 부드럽게 자연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던 그다.
느리지만 묵묵하게 한결같이 산을 그렸다. 아침 7시에 일어나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작업하는 규칙적인 화가였던 그는 1977년 발병한 심근경색으로 37번이나 수술을 받는 등 숱하게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굳건하게 붓을 쥐었다. 절필작이 된 ‘작품’은 1999년의 마지막 붓질을 담고 있다. 오직 그림 뿐인 삶이었다.
[출처] : 조상인 서울경제신문기자 : <조상인의 예' 유영국'작품'> / 서울경제신문,2017.3.10.
3.이응노 '군상' -흥을 부르는 群舞...통일과 화합을 염원하다
바람에 나부끼는 댓잎 기반으로 - 인간군상 어우러지는 모습 표현 - 간략한 먹선으로 삼라만상 담아
이응노 ‘군상’ 1986년작, 167×266cm, 한지에 수묵화, 이응노미술관 소장 /사진제공=이응노미술관
광장의 함성이 걷힌 자리에 일상이 내려앉았다. 사람들이 모였다 흩어지는 것, 원래 광장이 그런 곳이고 그게 제 역할 아니겠나. 여기 한지(韓紙)를 광장 삼아 모인 군중이 있다. 양팔을 크게 벌려 가슴을 열어젖힌 사람이 있는가 하면 두발로 힘껏 땅을 박차 하늘로 솟구치는 사람도 있다. 재불화가 고암 이응노(1904~1989)의 1986년작 ‘군상’이다.
멀리서는 새카만 개미떼인가 싶지만 사람이다. ‘군상’이 아니라 ‘군무(群舞)’라 했어도 좋았겠다 싶은 작품이다. 뛰고 솟고 얼싸안고 구르는 모양새가 음표가 되어 흥을 부르는 듯하다. 혼자인 사람도 있지만 둘 혹은 서넛이 짝을 이뤄 기쁨에 몸을 놀린다.
수백 명 군상 중에 어느 하나도 같은 게 없으니 이게 삼라만상인가보다. 삐죽한 먹선 몇 개 놀리고 점 하나 찍어 이토록 다채롭게 인간사를 보여주다니 참으로 기발하다. 가로 266㎝의 대작이라 한 아름에 다 닿을 수 없으니 이리저리 화폭을 누비며 그렸을 화가도 대단하다.
이응노의 군상은 대나무에서 나왔다. 그의 1970년대 ‘대나무’ 작품을 보면 바람에 흔들리는 댓잎이 휘고 굴러 얼핏 사람 형상을 이룬다. 1904년 충남 홍성의 의병장 가문에서 태어난 이응노가 대나무를 화제(畵題)로 택한 것은 숙명이었던 것 같다.
그림을 배우고 싶어 열다섯에 집을 나와 충남 당진의 송태회 선생 문하생으로 처음 먹을 배웠다. 큰 뜻을 품고 서울로 가 ‘장안 최고의 화가’가 누구냐고 물었다. 한결같은 대답은 해강 김규진(1868~1933)이었다.
이응노의 스승인 해강 김규진의 ‘묵죽도’ /사진제공=호림박물관
당시 조선의 황태자 영친왕에게 서법을 가르쳤던 김규진은 중국에 유학한 서예가이자 묵화에 뛰어난 인물이었다. 국내 최초의 상업사진관인 천연당사진관을 설립해 황실 사진사로 고종의 어진 사진을 찍기도 했다.
그의 그림은 창덕궁 희정당에서 볼 수 있다. 여러 번 화재에 시달려 수차례 재건된 희정당은 당시 왕의 응접실로 쓰였다. 그림 의뢰를 받은 김규진은 ‘해금강 총석정 절경’과 ‘금강산 만물 초승경’으로 양 벽을 채웠다.
표현이 다소 과장된 듯하면서도 채색이 화려한 이 그림들은 왕실의 위엄을 떠받들기 손색없다. 하지만 김규진의 기량은 ‘묵죽도’, 즉 대나무에서 최고로 드러난다. 굵은 통죽의 중간 부분에 바람에 나부끼는 잎을 배합하는가 하면 중간먹으로 줄기를 그리고 진하고 가는 선으로 죽간을 표현했다.
세찬 바람에 나부끼는 짧은 댓잎을 그리고 그 소리가 마치 “가을비 내리는 소리와 같아 사람의 속됨을 치료해 준다”며 ‘여우추성(如雨秋聲)’이라 적었을 정도로 그의 대나무는 눈뿐 아니라 귀도 즐겁게 하는 그림이었다.
그런 김규진에게 그림을 배우고자 이응노는 무보수로 허드렛일을 해주며 주변을 맴돌았다. 낭중지추라 곧 문하생이 된 이응노는 대나무에 탁월하고 죽순처럼 빠르게 배운다 하여 스승에게 죽사(竹史)라는 호를 받았다. 더한 영광이 어딨으랴. 1933년 ‘고암’이라는 호를 쓰기 전까지 그는 죽사였다.
1924년에는 ‘조선미전’에 출품한 ‘청죽(晴竹)’으로 입선했고 1931년에는 대나무 그림으로 황실 최고상인 특선을 받았다. 그러다 문득, 그간 서법의 규범에 맞춰 그렸던 대나무가 아니라 내 마음이 본 것을 그려야겠다고 생각했고 사의적(寫意的) 대나무가 시작됐다.
또 무작정 떠난 일본 유학에서는 당대 거장인 마쓰바야시 게이게쓰(松林桂月)를 사사하고자 그가 지나는 길에 눈에 띄도록 자신의 그림을 놓아뒀다는 뒷얘기가 전한다.
해방 후 서울로 돌아온 이응노는 일본미술의 잔재를 청산하고 민족 고유 화풍을 강조하는 ‘단구미술원’을 조직했고 남산에 ‘고암화숙’을 차려 제자들을 가르쳤다. 한국전쟁 전까지 홍익대 교수로도 활동했다.
고암은 1957년 미국 뉴욕에서 열린 ‘한국현대미술전’에 내놓은 작품이 록펠러재단을 통해 뉴욕현대미술관(MoMA)에 소장된 것에 자신감을 얻어 해외로 눈을 돌린다.
이듬해 미술사를 전공한 독일 대사의 호의로 1년간 카셀·본·프랑크프루트 순회전을 열었는데 그 과정에 전후 독일의 이미지를 씻고자 마련된 국제미술제인 카셀도쿠멘타를 접했다. 캔버스를 찢은 루치오 폰타나, 캔버스 위에 돌을 매달아 놓은 라우센버그 등의 작품은 충격 그 자체였다.
자신의 생각을 펼치기 위해 세상 무엇이든 재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이응노는 59년에 프랑스에 정착했고 이듬해 종이와 먹을 잠시 내려놓고 실험적 미술인 꼴라주 작업을 시작했다.
1972년 파리 아틀리에에서 작업 중인 이응노 화백 /사진제공=이응노미술관
이응노의 작품을 굳이 서양미술사의 맥락에 이어붙이자면 “앵포르멜의 영향을 받아 추상 양식을 발전시켰다”(이지호 이응노미술관장)고 볼 수 있다. 온갖 재료를 다 갖다 쓰면서 형태를 부정하고 오히려 질감에 집중한 2차대전 전후 미술인 ‘앵포르멜’의 근거저인 파케티 화랑이 그를 전속화가로 꿰어찰 정도였다.
그러나 이응노는 1967년 동베를린 공작단 사건인 ‘동백림 사건’에 걸려들었다. 월북한 아들을 만나게 해 준다는 말에 베를린으로 찾아나선 촌부의 순진함이 화근이 됐다.
미술사학자 최열의 ‘화전’(청년사 펴냄) 등 기록에 따르면 박정희 전 대통령이 해외에서 민족문화를 알린 공로자로 초청했고 이응노는 김포공항에서 체포돼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뒤 2년을 복역했다.
꽉 막힌 감옥에서도 화가는 휴지에 간장으로 그림을 그리고 밥풀을 뭉쳐 조각을 만들었다. 조각을 제외한 ‘옥중화’만 300여 점에 이른다. 스스로도 “나에게 학교는 교도소였다”고 한 이응노는 동양화가에서 사회에 대한 의식을 가진 작가로 변모해 있었다.
1969년 그는 프랑스로 돌아갔지만 한국 정부의 탄압이 계속돼 결국 프랑스 정부의 설득으로 1983년에 프랑스로 귀화했다. 그토록 간절히 고향을 그리다 1989년 호암미술관의 대규모 회고전을 귀국의 계기로 생각했지만 전시가 개막하던 날 파리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기구한 이응노가 댓잎에서 끌어낸 군상은 우리 민족을 의미한다. 허리 잘려 두 동강난 조국을 안타까워 하며 통일을 염원한 것이 그림에 담겼다. 정치적 갈등이 첨예한 요즘의 한국사회에 절실한 화합의 메시지일 수도 있다.
뒤엉킨 이들에게는 날 선 논쟁도 이념도 없다. 그저 어울렁더울렁 기쁘기 그지없다. 대담하면서도 치밀하고 단순한 반복성에도 불구하고 탁월한 구성력을 펼쳐 보였기에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
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
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김수영의 1968년 시 ‘풀’)
바람이 불었고 흐렸고 울었으니 이제 ‘먼저’ 일어날 때다. 바람에 밀리지 말고 바람보다 먼저 말이다.
/조상인기자
이응노의 1976년작 ‘대나무’ /사진제공=이응노미술관
[출처] : 조인상 서울경제신문 기자 < 조선의 예-이응노'군상'> / 서울경제신문, 2017.
4.변상벽 '묘작도' - 마주한 눈길에 애틋한 母情·간절한 孝心이...
검은 털끝에 윤기 흐르는 고양이 -뾰족한 귀 속살까지 화폭에 담아
일상 속 특별함 발견 진리 실천
화재 변상벽 ‘묘작도(猫雀圖)’, 18세기 조선 그림으로 크기는 93.9×43.0cm,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를 삼원삼재(三圓三齋)라 하여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 관아재 조영석과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오원 장승업을 꼽는다. 이를 ‘삼원사재(三圓四齋)’라 고쳐 칭해야 한다면 그 이유는 이 사람, 화재(和齋) 변상벽을 놓쳤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동물 그림인 영모도에 뛰어났고 그중에서도 고양이와 닭을 어찌나 잘 그렸는지 ‘변고양이’, ‘변닭’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던 화가다.
고양이 두 마리와 참새 여섯 마리를 그린 ‘묘작도(猫雀圖·사진)’가 변상벽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나무 밑에 앉아 위를 치켜 보는 고양이의 검은 털끝에서 자르르 윤기가 흐른다. 터럭 한 올까지 생생하게 일호일발(一毫一髮)도 틀리지 않게 그리려 한 조선 시대 묘사력의 성실함과 출중함이 어디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만 있겠는가.
변상벽은 검은색과 회색이 교차하는 털의 표현을 위해 붓을 바꿔가며 그림을 그렸다. 다소곳이 앉은 검은 고양이의 둥글고 새초롬한 발가락과 달리 나무를 타고 오르는 회색 줄무늬 고양이의 발가락은 날카로운 발톱을 치켜세워 긴장감이 역력하다.
힘주어 나무를 오르는 뒷다리 근육의 팽팽함이 손끝에 닿는 듯하다. 화가는 도도한 고양이의 하얀 콧수염에, 번뜩이는 노란 눈동자 뿐 아니라 말랑하고 축축한 콧구멍에다, 심지어 뾰족한 귀 속살까지 놓치지 않고 화폭에 담았다.
고양이를 뜻하는 한자 묘(猫)는 70세를 지칭하는 모(늙을 로 老 +털 모 毛)와 중국어 발음이 같아 ‘장수’를 뜻한다. 참새 작(雀) 자는 까치 작(鵲) 자와 더불어 그 음이 벼슬 작(爵) 자와 같기 때문에 장원급제와 출세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 그림은 그 자체로 무병장수와 부귀공명을 뜻한다. 고양이가 참새를 바라보는 구도이기에 오래 사신 늙은 부모님이 자녀들의 출세를 바란다는 것으로도 풀이하는 이도 있다. 게다가 고양이는 책을 갉아먹는 쥐의 천적이기에 선비들이 이런 고양이 그림을 방에 걸어두곤 했다.
조선 시대 후기인 18세기 영조 재위기에 활동한 것으로 미루어 변상벽은 대략 1726년 이전 태어나 1775년까지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정확한 생몰연도가 기록으로 전하지는 않는다.
약관에 이미 왕실 그림을 전담하던 도화서 화원이 된 그는 이른바 국가대표급 화가인 국수(國手)가 되었고 도화서 후배인 김홍도와 함께 당대 최고의 화원만이 맡을 수 있었던 왕의 초상, 즉 영조의 어진(御眞) 제작에 참여했다.
당시 변상벽이 용안(왕의 얼굴)을 그리고, 김홍도는 용신(왕의 몸)을 맡았다. 변상벽은 어진을 잘 그린 공으로 현감직 벼슬도 받았을 정도다.
그런 변상벽은 왜 그토록 고양이를 그렸을까? 도화서 화원에도 나름의 서열이 있었는데 산수 분야의 등급이 가장 높고 짐승을 묘사하는 ‘영모’와 사람을 그리는 ‘초상’이 그 다음이었다.
그도 원래는 산수화를 즐겨 그렸지만 “지금의 화가를 압도해 그 위로 올라설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면서 소재를 바꿨고 “고양이는 사람과 친근하기 때문에 관찰을 통해 익숙해질 수 있으며 생리(生理)를 깨치고 그 모습을 익히면 그 형태를 자연히 그릴 수 있다”고 밝혔다.
유심히 살펴본 일상에서 특별한 가치를 찾아낼 수 있다는 진리를 실천한 셈이다. 전해지는 그의 영모화조화가 총 34점인데 그중 고양이 그림이 15점, 닭을 소재로 한 것이 14점이나 된다.
그림 속 고양이가 사진처럼 생생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나무는 대충 그린 듯 매우 거칠게 표현됐다. 세밀함과 대범함의 조화를 따져 부드러운 세련미를 노린 까닭이다.
이 같은 느낌은 삼성문화재단 호암미술관이 소장한 조선 최고의 호랑이 그림인 ‘송하맹호도’에서나 경험할 수 있다. 김홍도가 섬세한 필치로 그린 호랑이와 강세황이 호방하게 그린 소나무가 하나의 화폭을 채우고 있는데, 변상벽은 이를 혼자 구현한 것이다.
강세황과 김홍도가 그린 ‘송하맹호도(松下猛虎圖)’, 호암미술관 소장. /서울경제DB
한편으로는 조선 중후기 왕실을 중심으로 고양이를 기르는 ‘애묘’ 문화가 발달해 의뢰가 많았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조선 19대 임금인 숙종이 금묘(金猫)라는 고양이를 애지중지 길렀다는 기록도 전한다.
봄을 희롱하는 분위기는 변상벽의 닭 그림 또한 고양이 그림 못지않다. 노란 병아리들의 삐악거리는 소리가 들릴 듯하다. 토종 닭임을 강조해 닭 깃털을 부위별로 달리 표현한 것에서 화가의 기량이 돋보인다.
어미 닭이 벌 한 마리를 입에 물고 다가오자 병아리들이 입맛을 다시며 모여든다. 새끼들 모두 배불리 먹이고 싶은 어미 마음이야 오죽하겠냐만 그 중 딱 한 마리, 엄마와 눈이 마주친 녀석은 말없이 제 차례를 알고 다가서는 순간이다.
변상벽의 닭과 고양이 그림을 본 실학자 정약용은 다소 호들갑스러운 시(詩)를 ‘여유당전서’에 적었다.
“변상벽을 변고양이라고 부르듯이 고양이 그림으로 유명하네 /
이번에 다시 닭과 병아리의 그림을 보니 마리마다 살아있는 듯하네 /
(중략)
형형의 세세 묘사가 핍진하고 도도한 기운이 생동하네 /
후문에 듣건대 처음 그릴 때 수탉이 오인할 정도였다네 /
역시 그가 고양이를 그렸을 때 쥐들도 마찬가지였을까 /
뛰어난 솜씨 그런 경지에 이르니 떠나고 싶은 생각이 없네 /
못된 화가들이 산수를 그리면서 거친 필치만 보여주네.”
마침 작품들이 새롭게 회화실을 개편한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에 걸렸다.
/조상인기자
변상벽 ‘자웅장추(雌雄將雛)’, 암수탉이 병아리를 거느린다는 내용의 그림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서울경제DB
변상벽 ‘계도(鷄圖)’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
[출처] : 조인상 서울경제신문 기자 : <조선의 예-변상벽의 '묘작도'> / 서울경제신문 . 2017. 3.24.
5. 고람 전기 ‘매화초옥도’
- 겨울산에 만발한 꽃송이...붓끝에 담긴 생명의 기운
매화에 묻혀 벗 기다리는 초옥속 사내 - 짧지만 강렬했던 천재화가의 삶 닮아
현대적 추상화풍 떠오르는 과감한 생략 - 단순하지만 미숙하지 않은 감각 돋보여
조선 후기 중인화가 고람 전기(1825~1854)가 겨울 산 속의 매화에 둘러싸인 서옥을 그린 ‘매화초옥도(梅花草屋圖)’. 29.4x33.3cm의 작은 그림이지만 서른을 채 못 살고 요절한 천재화가의 남다른 감각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
눈송이인가 싶어 봤더니 꽃송이다. 나뭇가지에 눈이 소복하게 내려앉은 듯한 것이 알고 보니 만개한 매화다. 드문드문 꽃 곁에 돋은 나뭇잎이, 얌전하게 등 돌린 산 중턱의 푸릇푸릇한 녹색 빛이 봄을 먼저 불러온 매화를 떠받들고 있다.
“만 송이 꽃이 용감히 눈 속을 뚫고 나오니 한 그루 나무가 홀로 온 세상의 봄을 앞선다”는 ‘선천하춘(先天下春)’ 시구처럼 한겨울 추위도 두려워하지 않는 매화나무는 하늘을 열어 봄을 이끄는 선구자의 기상을 상징한다. 매화 숲에 집 짓고 사는 벗을 찾아 집을 나선 사내는 곱디고운 붉은 옷을 차려입고 거문고를 어깨에 매고선 들뜬 마음으로 발길을 재촉한다.
그의 옷 색깔과 감각적으로 대구를 이루는 게 숲 속 작은 집 ‘초옥’의 노을빛 지붕이다. 일출의 붉은 기운일 수도 있겠으나 이토록 깊고 외진 숲까지 찾아오려면 필경 시간깨나 걸렸을 터, 풍류와 아취를 나누기에도 석양 무렵이 더 적당하지 않겠나 싶다. 몸에 맞춘 듯 작은 집안에 앉은 녹색 옷의 사내는 이미 매화 풍광에 취한 모양이다.
매화 만발한 숲에 서재 하나 짓고 사는 것은 시인 묵객이라면 누구나 바라던 꿈이었다. 이렇게 산속 서재에서 책 읽는 인물을 자연배경과 숨겨놓듯 그려넣은 그림을 서옥도(書屋圖) 혹은 초옥도(草屋圖)라고 한다.
매화 꽃 속에 지은 집이라 ‘매화초옥도’인데, 그린 이는 조선 후기의 중인 출신 서화가 고람(古藍) 전기(田琦·1825~1854)이다. 채 서른을 넘기지 못하고 요절한 화가인 동시에 당대의 걸출한 문인과 서화가들이 입을 모아 극찬한 천재 작가였다.
산은 단정하고 초목의 표현은 현대적 추상 화풍을 떠올릴 정도로 과감하고 생략적이다. 단순하지만 결코 미숙해 보이지 않는다. 그저 붓질 한번 점 하나에 생명의 기운이 다 담긴 듯하니 을 담은 듯하니 선비들이 지향한 졸박(拙樸)한 아름다움이 이런 것 아니었을까.
재주는 많았으나 허약했고 짧지만 강렬하게 살았던 전기는 화가인 동시에 약재상을 운영했고, 그림 중개상으로도 유명했다. 지금의 종로구 수송동 어디쯤에 그의 집이자 약방인 ‘이초당(二草堂)’이 있었다.
처음에는 “땅이 비습하고 집도 비뚤어져서 손댈 곳이 많아 걱정”이라고 했다지만 나중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명소가 됐다. 지금도 미술관·갤러리들이 모인 화랑가에 사람들이 몰리듯 말이다.
본업이 약재상이고 그림 중개는 안목이 알려져 뒤따른 부업이었다. 전기는 자신이 쓴 시 ‘설옥(雪屋)’에서
“문밖에 찾아오는 이 드물고/
정원에 쌓인 눈은 빈 창에 비치는구나/
질화로에 불이 식고 황혼이 찾아와도/
오히려 나는 책상머리에 앉아 고서를 감정하노라”라
고 적기도 했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전기의 활약상은 19세기 조선 후기의 사회상 변화와 맞물린다. 전기는 그 유명한 추사 김정희(1786~1856)에게서 그림을 익혔으되 눈이 아닌 마음으로 보고 그리는 사의적(寫意的) 그림에 가장 특출했던 인물로 꼽힌다.
추사는 양반이었지만 고람은 중인이었다. 당시 중인들은 경제적 역량은 커졌지만 신분의 장벽이 여전해 그 답답함을 해소할 방편으로 ‘문화’에 눈 돌리던 중이었다. 국립중앙박물관 장진아 학예연구관은 “이 같은 경향을 여항(閭巷)문화라고 하는데 마치 18세기 프랑스에서 등장한 ‘살롱문화’처럼 번져갔다”고 설명한다.
여항은 궁궐이나 관가가 아닌 민간인이 살아가는 도시를 가리키는 것이며, 여항인이란 조선 후기 도시에서 부상해 문화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두각을 나타낸 중인을 가리킨다. 소양과 취향은 사대부 관료와 비슷하나 신분만 다를 뿐이었다.
이들 중인들은 무리를 지어 문인 모임, 서화가 모임을 만들었는데 전기가 몸담았던 조직이 벽오사(碧梧社)였다. 지금으로 치면 의사, 통역사, 공무원 등이 구성원이었고 비교적 어린 축이었던 전기는 나이는 20~30년 아래지만 기량 면에서는 결코 뒤지지 않았다.
조희룡이 그린 ‘매화서옥도’의 세부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
이처럼 ‘매화초옥’을 그린 그림은 본래 송나라 때 임포(967~1028)의 일화에서 시작됐다. 자연을 이상향으로 삼은 임포는 벼슬도 가족도 다 버린 채 절강성 항주 서호의 고산에 초옥을 지어 매화를 심어 놓고 20년 동안 숨어지냈다.
스스로 택한 감옥 생활이 아니었나 싶지만, 그는 숨어지내는 것을 즐겼다. 매화를 벗삼아 시를 지으며 세월을 보내고, 술을 마시고 싶으면 사슴의 목에 술병을 걸어 술 심부름을 보내고 손님의 기별은 학이 하늘로 날아올라 알렸다고 전한다.
매화를 아내처럼 학을 아들 삼아 살았다고 해서 ‘매처학자(梅妻鶴子)’라 불린 임포는 은둔처사의 대표였다. 임포를 동경한 ‘매화서옥도’는 조선 후기 청과 교류한 추사 김정희 등이 주축이 돼 즐겨 그렸다.
임포 못지않게 매화를 사랑한 이가 조선에 또 있었으니 스스로를 매화에 미친 사람이라며 호를 매수(梅수)라 짓고 살던 집을 ‘매화백영루’라 칭했던 조희룡(1789~1866)이다. 조희룡은 같은 김정희파이면서도 거의 아들뻘인 전기의 실력을 높이 평가했다.
호암미술관이 소장한 전기의 1849년작 ‘추산심처도’를 본 조희룡은
“고람이란 사람을 알게 된 뒤론/
막대끌고 산구경 다시 안가네/
무더기 봉우리같은 열 손가락에/
구름 안개 한없이 피어난다네”
라는 시를 적으며 극찬했다.
전기의 ‘매화초옥도’와 더불어 조희룡의 ‘매화서옥도’ 또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인데, 젊고 감각적인 전기의 그림이 맑은 물을 홀로 튀기며 노니는 잉어의 청아함이 빛난다면 장수한 조희룡의 매화에서는 세상풍파 다 겪고 꿈틀대며 승천하는 용의 기운이 느껴진다.
전기화첩 중 유숙이 그린 ‘이형사산상’(왼쪽)과 전기가 그린 ‘한북약고’
는 종이 한장에 나눠 제작된 작품이다.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
전기가 그린 ‘매화초옥도’는 역관이자 동인이던 역매(亦梅) 오경석(1831~1879)을 위한 그림이었다. 작품 오른쪽 아래에 이 같은 내용이 적혀있으니 초록색 의관으로 집에 들어앉은 이는 오경석이요, 붉은 옷을 차려입고 나선 이는 바로 전기 자신이다.
요절한 천재화가의 모습을 그림으로나마 볼 수 있다. 전기의 또다른 대표작은 간송미술관이 소장한 ‘매화서옥도’이다. 여기서는 붉은 옷을 입은 서옥의 주인이 함께 즐거이 매화를 감상하고 돌아가는 푸른 옷차림 벗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원
래 전형적인 ‘매화서옥도’는 자연 속에 나홀로 머무는 사람이 주인공이지만 전기는 두 사람을 등장시켜 우정을 더했다. 자연이 좋다지만 곁에 둔 친구 또한 소중하지 않겠는가. 매화가 떨어져 가는 봄이 아쉽다면 잠시 짬을 내 소원했던 벗을 불러보자. 혼자 즐기기엔 짧은 봄이 아깝다.
/조상인기자
고람 전기의 ‘매화서옥’은 간송미술관 소장품으로 폭 124cm의 대작이다. /서울경제DB
매화 숲 속의 작은 집과 그 안에 머물던 선비를 그린 같은 주제의 다른 그림인 ‘매화서옥도’도 있다.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
[출처] : 조인상 서울경게신문 기자 : <조선의 예 -고람 전기 매화초옥도> / 서울경제신문, 2017.3.31.
6. 김종학 '설악의 숲' - 살 부비며 살아가는 야생화
…자유와 공존의 어울림
산으로 간 화백, 야생화에서 생명 의지 찾아 - '자연속에 추상·구상 모두 존재' 신념, 화폭에
'뒤엉켜 지내는 식물' 국회회관에 5m 대작
김종학 ‘설악의 숲’ 1997년작, 캔버스에 아크릴, 150x500cm /사진제공=국회사무처
시원한 계곡을 따라 날렵하게 날아오른 물총새가 향하는 곳은 한 무더기 꽃밭이다. 새의 날갯짓 아래로 물고기떼가 미끄러지듯 몸을 놀린다. 새는 어딘가 숨었을 먹잇감 벌레를 찾아 꽃잎을 뒤적인다. 이에 질세라 꽃 속에 얼굴을 처박은 벌은 꿀에 취한 듯 고개를 들 줄 모른다.
자연의 생명력과 자연다운 자연스러움이 넘쳐나는 원로화가 김종학(80)의 1997년작 ‘설악의 숲’이다. 인공으로 조성한 정원에서는 맛볼 수 없는 자유분방함과 공존의 미학이 꿈틀댄다. 꽃을 품종과 모양으로 나눠 골라심은 이는 누구인가.
인공적으로 관리한 정원과 달리 야생화는 키도 제각각 종도 다양하게 부대끼며 살아간다. 각자 제 색깔 저마다의 향기를 내뿜지만 돋보이기 위해 일부러 옆의 것을 누르는 놈은 없다. 부딪히면 좀 피해 가면 그만이다.
햇빛을 덜 받는다 싶으면 줄기와 가지의 방향을 틀어 각자의 방식으로 하늘을 향하는 게 식물의 습성이다. 땅이 좁아 그마저도 힘들면 살부비듯 뒤엉켜 지낸다.
이 그림을 볼 수 있는 곳은 서울 여의도 국회 제2 의원회관 정현관 2층이다. 입구에서 들어서자마자 오른쪽으로 벽면 전체를 차지한 가로 5m의 대작을 만날 수 있다. 화려한 색감의 김종학 그림은 회색빛 도시를 사는 현대인에게 생명력을 선사하기에 인기다.
그런 그의 대표작이 국회 안에 걸려 있으니 정쟁이 치열한 정치 현실 속에서 화합과 공존을 제언하는 듯하다. 색깔 논쟁, 출신 공방은 내려놓고 어우렁더우렁 잘 지내라고 다독이듯 말이다.
김종학은 1937년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태어났다. 서당 훈장 집안의 꼬장꼬장한 가난이 싫어 그의 부친은 일본으로 건너갔고 와세다 대학을 졸업한 후 고향으로 돌아와 사업으로 일가를 이뤘다.
그러나 1940년 미군의 폭격으로 할아버지의 고향인 평북 선천으로 옮겨가야 했고, 급기야 1948년에는 북한 정권의 숙청을 피해 보따리 하나 제대로 챙기지 못한 채 하룻밤 만에 온 가족이 월남했다.
근대사의 격변을 온몸으로 겪고 살아남은 그는 경기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회화과에 들어갔다. 전후(戰後) 미술대학은 척박함 속에서도 호기로운 분위기였다.
전공인 서양화과의 장욱진(1917~1990) 교수는 “잘 그렸다 싶으면 틀렸다 하고, 잘못 그렸다 싶으면 잘 그렸다”고 하는 엉뚱한 도인 같아서 그의 수업이 늘 기다려졌다.
당시 미술대학 장발(1901~2001) 학장은 전공에 관계없이 조각이나 동양화도 다양하게 실습하라 권했고, 여든이 넘은 노화가는 그때 동양화과 장우성(1915~2005) 교수의 “붓은 뼈의 연장”이란 말을 지금도 가슴에 새기고 산다.
1960~70년대 화단에는 엄정한 추상미술과 전위적 실험예술이라는 두 개의 큰 흐름이 존재했다. 젊은 시절 김종학은 추상회화의 경향이 강했다. 1960년대 초반에는 윤명로·박서보·김창열 등과 함께 ‘악뛰엘’의 창립 동인으로 활동했다. 이들은 서양의 전후미술인 ‘앵포르멜(Informel)’의 영향을 받은 추상화가로 형태보다는 색을 강조해 격정을 표현했다.
최근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개막한 소장품 특별전 ‘균열’에 선보인 그의 1963년작 ‘작품 603’은 전혀 다른 화가의 그림처럼 보일 정도다. 근접해서 본 곤충의 머리를 거대하게 확대한 것 같다는 이도 있는데, 뼈만 앙상하게 남은 두 사람이 등 맞대고 기댄 형상으로도 보인다.
전구처럼 밝게 빛나는 이들의 머리는 피폐한 몸으로 쥐어짰던 생과 실존에 대한 고뇌를 엿보게 한다. 요즘은 ‘단색화 거장’으로 불리는 윤명로, 박서보 등의 같은 시기 작품이 나란히 걸려 있다.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작업하던 그에게 ‘변모’의 시기가 닥쳤다. 긴 무명시절을 보내며 가정불화까지 겪게 된 그가 1979년, 돌연 설악산으로 들어가 버렸다. 반쯤은 죽을 마음으로 산마루에 올라간 것은 이 즈음한 봄날이었다.
인생의 밑바닥까지 떨어졌다고 여기고 엎드렸던 그가 힘겹게 눈을 떴을 때 흙이, 거기서 제멋대로 자라난 생명들이 보였다. 꽃무더기가 피어난 달밤에, 야생화의 아름다움에서 위안을 얻었다. 설악동에 집과 작업실을 짓고 꽃을 그리기 시작했다.
‘모더니즘’을 표방하는 추상미술이 대세였으니 “꽃을 그리면 타락한 작가”라 하던 시절이었다. “네가 추상을 얼마나 잘 그리는데, 정신차려라” 설득하는 친구도 있었지만 그는 묵묵히 “마음 가는 대로 그리겠다”는 자세를 밀고 나갔다.
그렇게 자연이, 꽃이 화폭에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 어떤 유파에도 속하지 않은 그에게 ‘설악산 화가’라는 별명이 붙었다.
개화만발한 산을 반 추상적으로 표현한 김종학 ‘철쭉산’ 2006년작,
캔버스에 오일, 91x145cm /사진제공=조현화랑
김종학 ‘가을’ 2002년, 캔버스에 오일, 53x72.7cm /사진제공=조현화랑
김종학 ‘겨울 설악 바다’ 1993년, 캔버스에 유채, 80.3x100cm /사진제공=조현화랑
“자연 속에 추상, 구상 모두 존재한다”고 한 그의 그림 속에는 서양화와 동양화가 공존한다. 전형적인 서양미술의 재료와 색감으로 그리지만 투시도법을 배제한 채 동양화처럼 원근과 시점을 초월해 대상을 배치한 까닭도 있고, 추상화풍이 근간에 있는 터라 과감한 생략과 여백으로 구성한 것도 이유다.
색으로 보자면 고상한 문인화풍에서 먼 화려한 채색의 민화에 가깝다. 그러나 그 안에는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나 겸재 정선의 ‘박연폭포’ 같은 여백의 운치, 과감함과 생략의 미학이 있다.
“설악산 눈 내리는 물이 무섭구나. 여름에 애들이 수영도 하고 고기 잡는 둑에 지나지 않는데 이렇게 힘차고 물살이 빠른지 몰랐다. 바람 센 둑에 털썩 주저앉아 내가 마치 반 고흐처럼, 아니 팔대산인처럼, 아니 김홍도처럼 비록 연필이지만 손으로 꼭 붙잡고 급하게 그렸다.” (2001년 2월23일 쓴 글 ‘김종학의 편지’(마로니에북스 펴냄)에서 발췌)
김종학이 ‘꽃’으로 유명하지만 그에게 꽃은 특정한 식물이라기보다 존재 그 자체다. 새는 날아다니는 꽃이라 했고, 꽃은 그저 계절의 한 자락이니 딱히 무얼 그렸나 따지기보다는 그것들이 어우러지며 이루는 조화와 느낌 자체를 음미하는 게 낫다.
의원회관에 걸린 이 그림은 작가가 지인을 통해 국회에 기증한 작품이다. 십 수년간 수장고에 있던 그림은 2012년 제19대 국회 개원에 맞춰 완공된 제2 의원회관을 위해 밖으로 나왔다.
문화예술진흥법 제9조에 의해 건축비의 1%를 미술작품 설치에 사용해야 하는데 예산이 여의치 않던 중 예전에 기증받은 ‘설악의 숲’이 평가액 5억원으로 산정돼 준공 불발의 위기를 넘기게 했다는 뒷얘기가 전한다. 그림은 드나드는 사람들이 보기 좋게 입구 널찍한 벽을 독차지하게 됐다.
선거 열기가 뜨거워지면서 정쟁이 네거티브 공세로 불붙었다. 정치는 생물이기에 상황에 따라 판단과 주장이 달라지기도 하고 적과 동지가 뒤바뀌기도 한다지만, 생물에 과도한 인위적 조작을 가하면 기형이 되고 만다.
자연이 자연답게 넘실대는 그림 속 풍경처럼 우리 정치판에도 공존과 화합의 아름다움이 피어나기를 꿈꾼다. 무릉도원 같은 이 그림이 국회에 있다는 게 퍽 다행스럽다.
[출처] : 조상인 서울경제신문기자 :<조상인의 예- 김종학'설악의 숲'> / 서울경제신문,2017.
7. 박고석 '도봉산 - 푸른기운 도는 암벽의 서슬
...하늘에 닿고 숲으로 퍼지다
몸소 산 오르며 일치된 경험 화폭에 담아 - 과감한 생략·대담한 붓질, 절친 이중섭 버금
피란지 일상 그린 1951년작 '범일동 풍경' - 전쟁 속 살아남고자 하는 생명력 보여줘
박고석 ‘도봉산’ 캔버스에 유채, 45.5x53cm, 1980년대 /사진제공=현대화랑
여기 맑은 푸른색으로 한국의 산세를 그린 화가 박고석(1917~2002)이 있다. 그의 눈에는 도봉산 암벽의 서슬이 푸른빛 그 자체였다. 산세를 타고 흐르는 푸른 기운은 하늘에 닿았고 숲으로 퍼졌다.
조국의 산하를 푸른색에 담아 그린 김환기(1913~1974)의 푸른색 ‘환기블루’가 동양적 기품의 애잔함으로 심금을 울린다면 박고석의 맑은 파랑은 테너의 음성처럼 힘차게 감각을 자극하고 뇌리를 스쳐 정신을 깨운다. 뚝심으로 고집스럽게 산을 파고들기는 유영국(1916~2002) 못지않았던 박고석이다.
마음에 품은 산을 그리며 산의 추상성을 완성한 이가 유영국이라면, 박고석은 몸소 산을 오르며 산과 일치된 경험을 화폭에 옮겼다. 오죽했으면 산에서 내려와 등산화를 벗지도 않은 채 그 생생한 발의 기운을 느끼며 그림을 그렸을까. 과감한 생략과 선과 색 몇 개만을 다루는 대담한 붓질로 대상의 특징부터 분위기와 속내까지 끄집어내는 구상(具像) 능력으로는 이중섭(1916~1956)에 버금가는 화가다. 한
국전쟁 당시 부산으로 피난가서는 한집에 살았을 정도로 절친했던 중섭을 먼저 보냈고, 그 유골을 1년이나 집에 두고 살았다. 절망과 허무에 휩싸였던 이중섭의 울부짖음과 시대 정신은 화석처럼 신화가 됐고, 그 두 배의 시간을 살았던 박고석은 중년 이후 산을 오르기 시작해 돌아가 안길 자연에 눈을 떴다.
사진작가 강운구가 동행한 1978년 외설악에서의 박고석 /사진제공=현대화랑
우리나라 근대화단에서 묵직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에도 박고석의 이름은 대중적으로 덜 알려진 편이다. 목사였던 아버지가 그에게 준 원래 이름은 박요셉, 한자로는 요섭(耀燮)이다.
오래된 옛 돌이라는 뜻의 고석(古石)이라는 예명은 1935년 일본으로 건너가기 전 스스로 지어 붙인 이름이다. 되짚어보면 그의 인생은 딱 그 이름같이 우직했다.
그림으로는 피난지의 일상을 그린 1951년작 ‘범일동 풍경’이 제일 유명하다.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으로 교과서에서도 등장한다.
해질 무렵 철길 주변으로 나와 선 피난민들을 어둑한 갈색조에 검고 굵은 선으로 표현했다. 특히 전봇대나 지붕, 옷자락 등에 선명하고 강렬한 붉은색 선을 그려 전쟁의 을씨년스러운 분위기 속에 끝까지 살아남고자 하는 생명력과 치열함을 보여줬다.
평양 태생인 그는 김환기의 4년 후배로 일본대 미술과를 졸업했다. 한 10년 일본에 머무르며 초기 화풍을 다졌는데, 도쿄가 폭격을 당하면서 그 시절 작품들은 모조리 사라져 버렸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화가는 장사를 하며 식솔을 건사했고 1·4후퇴 때 부산으로 피난 가 공동묘지 근처인 범일동에 자리를 잡았다.
음식 솜씨가 좋았던 아내가 개천 위에 간이식당을 열어 카레라이스를 팔아 생계를 이었고, 박고석은 그 부근에 나무를 얼기설기 엮어 단출하지만 운치있는 작업실을 지었다. 부산 최초의 아틀리에였던 셈이다.
그 시절 부산은 당대의 예술인들의 집합지였다. 박고석은 동인 활동의 중심에 있었다. 이중섭·이봉상 등과 함께 광복동 르네상스다방에서 열었던 ‘기조전’은 피난 시기의 몇 안되는 그룹전으로 미술사에 기록됐다. 1956년 결성된 ‘모던아트협회’를 통해 유영국·한묵·황염수·문신·천경자 등과 교류했다.
1951년 한국전쟁 중 부산 피난시절에 그린 ‘범일동 풍경’은 선과 색
몇개로 분위기까지 드러낸 구상성이 탁월한 작품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사진제공=현대화랑
지금 생각하면 전쟁 통에서도 이어간 예술활동이 다행스럽지만, 그 곁을 지켜온 아내는 고생을 감내해야 했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부산에서 가난하게 살았는데 그때 이중섭 선생이 와 계셨어요. 남편이 나더러 ‘중섭이 방 굴뚝에 연기라도 한번 내보라’ 역정을 내는 게 화가 나 이중섭 선생 방 청소를 하면서 은박지 그림 그리다 만 것, 부인한테 그림 편지 쓰다가 만 것들 다 쓸어다 아궁이에 넣고 불을 땠어요. 수십 년 지나 그 미안한 마음을 고백했더니 ‘당신이 안 태웠으면 지금 그게 돌아다녔을텐데, 잘 태웠어. 그림이 너무 많으면 희소가치가 없어’라고 해 뜻밖이었어요.”
박고석의 미망인 김순자(89) 여사는 이화여대 미술과 출신의 재원이 화가와 결혼하겠다고 하는 바람에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혔다. 전쟁 중이던 1950년 가을 아버지 불참 속에서 친구 몇과 조촐하게 식 올리던 날 결혼사진을 찍어준 남동생이 바로 건축가 김수근(1931~1986)이다.
서울대 건축학과를 다니던 동생 김수근이 징집되자 반지를 팔아 일본으로 밀항시킨 게 이 누이다. 어쩌면 그 덕에 우리는 시대를 대표하는 건축가를 지키게 된 것인지 모른다.
88서울올림픽 주경기장을 비롯해 기념비적 건축물을 설계하던 말년의 김수근은 누이의 부탁으로 명륜동 집을 지었다. 박고석은 ‘고석공간’이라는 문패를 단 이 주택의 지하 아틀리에에서 마지막까지 붓을 들었다.
박고석이 대청봉에 걸터앉아 그렸을 1977년작 ‘외설악’.
바다같은 하늘을 표현한 맑은 푸른색은 화가를 대표하는 색깔이다. /사진제공=현대화랑
박고석의 부인은 평생 자기가 손해 본 결혼생활이라 속으로 투덜거렸건만 이제서야 아깝지 않은 인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고 털어 놓았다. 그의 집에서 사라진 게 이중섭의 그림 뿐 아니다. 고은 시인도 한때 그들의 집에서 지냈다.
‘세노야’를 비롯해 원고지에 적은 시의 원본은 아이들의 실수였는지 종이뭉치 통째로 화장실에서 쓰였다고 한다.
고은은 박고석을 기억하며 1974년 쓴 글에서 “그의 데상은 고도의 자유에 입각한 자유 그 자체”라며 “그는 지금 여행자다. 산과 산의 여행자이며 산의 애인으로서의 여행자일 뿐 아니라 그 자신의 세속의 삶을 하나의 여행으로 가정하고 있다”고 했다.
초반에는 추상미술을 시도하다 1960년대 초반 잠시 작품 활동을 중단하기도 했던 박고석은 1968년 산행을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산을 그리기 시작했다. 산에서 떨어져 다치기도 여러 번이건만 거듭 산으로 향했다. 도봉산 연작을 비롯해 백암산, 내설악, 외설악, 세존봉, 백학봉 등 산 시리즈가 탄생했다.
오래된 돌이 구르고 굴러 결국 돌아갈 제 집은 아마도 산이었으리라. 시대정신을 품고 다양한 시도를 했던 화가는 산을 택했다. 동시에 시대를 풍미한 예인 박고석도 굳건히 곁을 지켜준 산 같은 아내 품으로 향했다.
미국에서 의상디자이너로 3남1녀를 공부시킨 아내가 귀국한 뒤 박고석 부부는 요양 핑계로 설악산에서 2년간 살았다.
김 여사는 “항상 이방인 같았고 내 남편이라기 보다는 손님 같던 그이가 남의 애인도 아닌 오롯한 ‘내 남편’이었고 정말 행복했던 시절”이라고 떠올렸다.
박고석의 1982년작 ‘쌍계사 길’에는 찐득한 질감의 유화물감이 보내기 아쉬운 봄을 붙들어두고 있다.
/사진제공=현대화랑
박고석은 과작(寡作)한 작가였다. 밥먹고 이야기하듯 일상적으로 그린 스케치류는 3,000점 이상으로 추산되지만 그가 남긴 유화는 300점 정도다. 아내는 ‘게으른 남편’이라고 타박했지만 과묵한 화가는 감동이 오기를 기다렸다 몰아치듯 그림을 그리는 게 다였다. 그
를 오래 전부터 보아온 엄중구 샘터화랑 대표는 “그림 사겠다는 사람은 100명인데 그림은 열 점이 채 안돼 속 태우던 분”이라고 소개했다. 일찍이 박고석을 알아본 박명자 현대화랑 회장은 “집에 가 보면 팔아줄 그림은 안 걸려 있고 등산 장비만 잔뜩이었다”고 회고한다.
이들은 박고석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박고석과 산’ 전을 기획했고 소장가들을 수소문해 전 시대를 아우르는 유화 40여 점을 모아 현대화랑에서 선보이고 있다. 귀한 작품들을 빌려온 것이라 작품을 판매하지는 않는다.
박고석의 그림은 푸른색 드리운 산이 최고로 꼽히지만 전시된 그림들은 하나하나 보석같다. 표현주의적인 색의 사용이 과감하고 특별했다. 홍도나 울릉도 등을 그린 그림에서 그는 노란색으로 바다를 그렸다.
해질무렵 노을이 드리운 물결이라고만 여기기에는 너무도 샛노랗다. 이따금 태양의 기운을 머금은 분홍 구름, 흙빛 하늘의 파란 구름이 뜻밖의 활력을 더한다. 그 기발함이 박고석이다.
“산이 보인다는 것은 산 자체나 산의 명암, 광선, 산세들이 드라마틱하게 나와 만난다는 얘기다. 거기서 보이는 산을 ‘가슴에 오는 산’이라고 할 수도 있다.”
[출처] : 조상인 서울경제신문 기자 : <조상인의 예-박고석'도봉산> / 서울경제신문,2017,4.28.
8. 이중섭의 황소- 일어나라 일어나라...'힘찬 소'에 담은 민족의 기상
비쩍 마른 몸이지만 꼿꼿한 모습 - 일제강점기 시련에도 희망 품은
한국인 표상 그려낸 '저항의 붓질' - 몽당붓에서 탄생한 현란한 드로잉
흉내낼 수 없는 미학의 격조 담겨 -
이중섭 ‘황소’ 1953년작, 종이에 애나멜과 유채, 35.5x52cm, 서울미술관 소장 /사진제공=서울미술관
일어나라. 다시 일어나라. 단단한 발로 굳은 땅을 밀어내라. 그러면 너는 우뚝 설 수 있다. 두 무릎에 힘을 주고 머리를 들어라, 황소여. 달려라, 너의 새로운 한 발짝이 새 시대의 시작이다.
이중섭(1916~1956)의 ‘황소’는 옹골찬 골격에 강인한 힘을 내뿜지만 늘 보는 이를 응원하고 기원하게 만든다. 느리게 걸어가던 소는 앞발을 들어 올렸다가 내디디려는 그 찰나, 고개를 돌려 관객을 쳐다본다.
타고난 몸집이 컸으나 삐쩍 말라 살 없는 가죽이 뼈에 찰싹 들러붙었다. 소는 어깨를 올려 뿔로 치받으려는 자세를 취했다. 어떠한 역경도 견디고 이겨낼 수 있다는 단호한 외침이다.
소는 땅을 누비며 한평생 밭을 갈다 마지막에는 제 살과 뼈까지 사람에게 내어주는 희생의 동물이다. 정신과 전문의 김동화 박사는 “소의 황토색은 대지의 빛깔과 상통하며 그 뿔은 달의 모양과 흡사해 문화인류학·분석심리학적으로 볼 때 어머니에 대한 표상이라 볼 수 있다”면서 “거세되지 않은 수소로 표현된 이중섭의 소는 모성의 상징 위에 힘차고 강인한 자기 자신의 표상을 덧씌운 것”이라고 분석했다.
흰 소의 경우 좀 더 직접적으로 백의민족을 대변한다. 이중섭이 일제강점기 몸담았던 도쿄 유학생 모임의 이름 ‘백우회(白牛會)’는 흰 소라는 이름으로 우리 민족 전체를 대신했다.
이중섭은 이외에도 싸우는 소, 싸워서 피 흘리는 소도 그렸다. 병원을 들락거리며 힙겹게 버티던 1955년 무렵의 이중섭은 분노와 슬픔으로 뒤엉킨 두 마리 소를 푸른 색조 배경 위에 올려 극렬한 싸움을 붙였다.
전쟁의 암울함 속에 우리 민족이 겪어내야 했던 수난과 개인사적 시련을 함축했다. 상흔으로 ‘피 흘리는 소’는 좌절과 절망으로 몸부림친다. 유난히 슬픔에 젖은 두 눈이 인상적이다.
평양에서 태어나 어릴 적 부친을 여의었지만 비교적 유복한 집안의 막내로 자란 이중섭은 ‘행운’에 가까운 학창시절을 보냈다. 일제 시대 사회적 제약의 틈에서도 오산고등보통학교, 일본 문화학원 등 예술을 꿈꿀 수 있는 자유로운 학풍에서 공부할 수 있었고, 졸업 후 학도병으로 징집되지도 않은 졀묘한 시기의 주인공이 바로 그였다.
그의 호는 대향(大鄕). 어머니가 지어준 ‘큰 고향’이라는 뜻으로 초기작 서명에도 종종 등장한다. ‘대향’이든 ‘중섭’이든 그의 사인은 늘 반듯하고 멋스럽게 적은 한글이었는데, 일본에서 출품한 작품에도 꼭 한글로 서명했다.
이중섭은 한국적인 것에 대한 자부심과 노력이 대단했다. 학창시절부터 그리기 시작한 그 만의 ‘은지화’는 고려자기의 상감기법, 금속공예의 은입사 기법을 응용한 셈이다. 은지를 긁어냈을 때 나오는 그 오래되고 “촌스러운 느낌”을 작가는 무척 좋아했다 한다.
특히 평양에서 어린 시절 보고 자란 고구려 벽화의 영향이 컸다. 게다가 유려한 선(線)을 중시한 드로잉, 서예의 일필휘지를 연상하게 하는 필법으로 그려낸 골격은 ‘한국인 이중섭’ 만이 구현한 경지였다. 김
인혜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는 “고구려 고분벽화처럼 오래된 태고의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표면처리법은 매우 의도적인 고전 연구의 결과”라며 “재료에서도 먹을 즐겨 활용하거나 종이의 지속력을 높이기 위해 황톳물을 발라 사용하기도 했다”고 설명한다.
재료뿐 아니라 미학적 측면에서도 그는 풍속화 같은 해학적 표현에 흉내낼 수 없는 격조를 얹었다. 그의 유골을 1년이나 집에 뒀을 정도로 절친했던 동료 화가 박고석(1917~2002)은 “이중섭은 전란으로 인한 극심한 재료난에도 위축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의 이질적인 예술양식을 극대화했다”고 평가했다.
이중섭의 그림은 전쟁통에 많이 사라졌다. 친구이자 동료였던 시인 구상(1919~2004)은 이중섭의 유작을 유채 200여 점에 은지화 300여점으로 추산했다.
이중섭에 대한 ‘팩트체크’에 수 년을 걸고 철저히 고증한 미술사학자 최열의 2014년 출간 저서 ‘이중섭 평전:신화가 된 화가, 그 진실을 찾아서’에 따르면 작품은 340여점 정도가 전한다.
가뜩이나 작품 수도 적은 이중섭이건만 보통의 서양화가와 달리 캔버스 작품은 거의 없다. 전쟁시기 물자 부족 탓이겠지만 이마저도 상당 부분은 작가의 예술적 선택으로 보인다. 그는 종이를 선호했고, 붓도 새것 보다는 닳고 거칠어진 몽당붓을 좋아했다.
종이 위에 강렬하게 과감하게 칠하는 표현주의적 채색방식을 보여주는가 하면 물감을 겹쳐 칠한 뒤 긁어내거나 연필로 누르듯 드로잉하는 방식이 날카로운 심경과 절망의 몸부림을 그려냈다. 저항적이고 강인하게 느껴지는 붓질은 딱 그만큼의 불안함,힘겨움과도 맞먹는 것이니 희망과 애수가 동시에 가슴을 치는 이유다.
이중섭 ‘투계’ 1955년작, 카드보드에 유채, 28.5x40.5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이중섭이 즐겨 그린 동물은 소가 으뜸이지만 닭과 까마귀도 자주 다뤘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한 ‘투계’는 닭 두 마리가 아래위로 싸우듯 대립하는 그림이다. 두 마리 새가 과격한 몸짓으로 극도의 긴장감을 이룬다.
그러나 둘은 싸우더라도 죽이지는 않을 요량으로 교묘하게, 서로에게 피해를 덜 주지 않으려 애쓰는 면이 엿보인다. 사랑하면서도 싸우는 부부처럼, 만나지 못하는 애타는 절망감이 미움이 된 듯하다.
그러고 보니 마치 태극의 붉은 색과 푸른색이 서로를 휘감은 것 같다. 이 그림은 1955년 미도파화랑에서 열린 개인전 출품작이다. 동족상잔의 비극을 경험하던 시기에 제작된 그림이라 일부 평론가들은 이 작품이 남북 분단의 불행한 모습을 그린 것이라는 해석을 내놓기도 한다.
이듬해 이중섭의 타계 두 달 후에 출간된 1956년 11월호 ‘신미술’은 외로이 떠난 작가의 소식과 함께 이 그림을 특별 도판으로 내놓기도 했다. 물감을 바른 뒤 전통화의 몰골법으로 닭을 그린 다음 다시 잿빛 안료를 바른 다음 다시 나이프로 긁어낸 것이라 색조는 어둡지만 칠이 얇아 투명한 느낌도 풍긴다.
40년에 불과한 짧은 삶과 천재성, 광기까지 더해진 이중섭의 생은 일견 부풀려진 신화적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빈센트 반 고흐가 그러하듯 말이다. 정신병원에서 사망한 이중섭이지만 정신이상까지는 아니었고 신경쇠약에 가까웠다고 한다.
하도 주변에서 미쳤다고 하니 멀쩡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자화상’을 그려 돌려본 일화도 유명하다. 그의 경우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깊었다.
그림을 팔아 번 돈으로 일본에 가 볼 요량이었으나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하게 사는 것은커녕 해후조차 불가능하게 된 상황에서의 절망감, 어찌할 수 없는 무능감, 이별에 대한 두려움까지 심신을 병들게 했다.
외롭게 죽은 그를 허망한 풍선에 태운 건 미술시장이었다. 구하기도 어려운 작품값이 치솟았고 위작이 대거 유통돼 홍역을 치렀다. 거품이 꺼진 자리에서 작가와 작품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진 게 이중섭 탄생 100주년 즈음한 최근 몇 년 새 일이다.
종로구 부암동 서울미술관이 소장한 이 ‘황소’도 사연이 많다. 안병광 유니온약품 회장은 영업사원 초년병 시절 비를 피해 뛰어든 남의 집 처마 밑에서 본 이 ‘황소’의 포스터 이미지에서, 비바람 칠지라도 넓은 세상에 한번 뛰어들어보라는 격려와 위로를 얻었고 미술품 수집의 계기가 됐다.
이후 2010년 서울옥션 경매에 나온 이 그림은 이중섭 작품 중 최고가 기록인 35억6,000만 원에 안 회장의 품에 안겼다. 안 회장은 2년 뒤 ‘황소’를 비롯한 평생의 수집품으로 미술관을 열었다.
지금은 유작들이 걸린 미술관이 곧 이중섭의 집이지만, 망우리 공원묘지에 추모비 하나 없는 그의 안식처는 쓸쓸하다. 전쟁통에 비루하게 유지한 삶 속에서 허무와 실존을 얘기했던 그는 초라해도 당당했기에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가 됐다. 생전 이중섭은 바다 건너 떨어져 지내던 일본인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적었다.
“어디까지나 나는 한국인으로서 한국의 모든 것을 전 세계에 올바르고 당당하게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되오. 나는 한국이 낳은 정직한 화공이라오.”
/조상인기자
이중섭 ‘싸우는 소’ /사진제공=서울미술관
이중섭 ‘피 묻은 소’ /사진제공=서울미술관
[출처] : 조상인 서울경제신문 기자 : <조상인의 예-이중섭'황소'> / 서울경제신문, 2017.5.5.
9. 장욱진 '가족도'] 고달픈 삶…그 안식처는 '가족'
한국전쟁에 피폐해진 일상 - 자식들과 생이별했던 상처
반어적 붓질로 화폭에 담아 - '자화상' 속 멋부린 옷차림은 - 시대극복 위한 화백의 고뇌 담겨
장욱진 ‘가족도’ 1972년작, 캔버스에 유채, 7.5x14.8cm,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소장 /사진제공=장욱진미술문화재단
유학 등 불가피한 이유로 가족들을 멀리 보내고 홀로 남아 생계를 책임지는 ‘기러기 아빠’가 일상어로 쓰이기 훨씬 전, 일찍이 ‘까치 아빠’를 자처한 이가 있으니 바로 화가 장욱진(1917~1990)이다. 통도사 암자 앞에서 만난 스님이 “뭐 하는 사람이오?” 묻자 “까치 그리는 사람”이라며 선문답을 주고받다
‘비공(非空)’이라는 법명을 받은 일화에도 등장하듯 장욱진은 까치를 즐겨 그렸다. 까치 혹은 참새로도 보이는 줄지어 나는 4마리 새를 두고 부부와 두 아이, 혹은 네 명의 딸이라는 등 해석이 분분하지만 꼭 누구를 몇이나 그린 것인지는 중요치 않다. 화가는 식구가 다 모여 같은 곳을 보며 한 곳을 향해 날아갈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흡족했다.
네 가족이 들어앉자 어깨 돌리기도 힘들 만큼 꽉 차버린 작은 집 주변이 온통 붉은 것으로 보아 해질녘 노을을 같이 바라보는 모양이다. 동글동글한 식구들 얼굴이 태양처럼 붉다. 하얀 옷을 입은 아내 옆으로 좀 큰 아이는 아들, 빨간 원피스 차림의 작은 아이는 딸인 성 싶다. 뒤로 나앉은 콧수염 난 아빠는 장욱진이 분명하다.
장욱진 ‘자화상’ 1951년작. 14.8x10.8cm, 개인소장. /사진제공=장욱진미술문화재단
화가에게는 처자식을 한 품에 안을 수 있는 이 시간이 한없이 좋고 더없이 행복했다. 한국전쟁 당시 헤어졌던 상처가 큰 탓이다. 충남 연기군(현 세종시)이 고향인 장욱진은 6·25전쟁이 터지자 장남 정순과 장녀 경수를 어머니에게 맡긴 채 아내와 함께 부산으로 갔다.
핍진한 피란 생활에, 아이들을 멀리 떼어둔 아비는 폐인이 됐다. 심성 여린 예술가라 더 그랬을 터 빈속에 매일 술로 끼니를 때우다시피 했다. 보다 못한 아내 이순경(97) 여사가 “당신이라도 고향집으로 가라”며 등을 떠밀었다.
그렇게 돌아온 고향에서 다시 붓을 들 수 있었다. 이즈음에 그린 ‘자화상’은 황금빛 들녘을 가로지르는 붉은 길을 따라 세련된 연미복 차림으로 걸어온 신사를 앞세우고 있다. 장욱진의 또 다른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이 화사한 그림은 실상 처절할 만큼 반어적이고 지독하게 해학적이다.
발끝을 쫓아온 강아지도 있고, 머리 위로 새들도 날아다니지만 그는 외롭다. 부산에서 홀로 고향으로 달리던 그 길이 화가에게는 두렵고 끝 모를 고독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목가적이고 낭만적이라 칭송받는 이 황금들판은 전쟁통에 피폐해진 현실을 떨치고자 작가가 택한 반어적 풍경이다.
다가올 풍요로운 미래에 대한 작가의 꿈이기도 했다. 지금은 포탄이 넘나드는 하늘에 ‘우리 네 식구’를 닮은 까치를 그려넣어 다 같이 만날 날을 기약했다. 장욱진은 전쟁의 아픔과 불안과 혼란을 모조리 그림 안으로 숨겨 넣었다. 피폐하고 궁핍한 전쟁통에 예술이 줄 수 있는 유일한 해법, 희망을 담았다.
“1950년대 피란 중의 무질서와 혼란은 바로 나 자신의 혼란과 무질서의 생활로 반영됐다.…이 그림은 대자연의 완전 고독 속에 있는 자기를 발견한 그때의 내 모습이다. 하늘엔 오색구름이 찬란하고 좌우로는 자연 속에 나 홀로 걸어오고 있지만 공중에선 새들이 나를 따르고 길에는 강아지가 나를 따른다. 완전고독은 외롭지 않다.” (계간지 ‘화랑’ 1979년 여름호 중에서)
배경도 그렇거니와 한껏 차려입은 주인공의 옷차림이 눈길을 끈다. 그 시절 멋쟁이들의 필수품인 우산과 모자가 양손에 들렸다. 멋 부리고 나선 팔자걸음의 그가 배우 찰리 채플린을 떠올리게 한다. 이 호기로운 모습은 어쩌면 희극배우의 연기일지 모른다.
전쟁의 비극적 상황을 화가는 해학적으로 표현했고 멋을 부려 두려움을 지웠다. 동시에 양복 차림은 토속적인 농촌 배경에 완전히 섞일 수 없는 존재, 즉 전통과의 단절을 경험하고 자신을 성찰하고 있는 근대인의 단면을 보여준다.
이 그림이 시대정신이 투영된 성찰적인 작품이라 평가받는 이유다. 시대를 견뎌낸 젊은 화가의 고뇌가 처절하게 빛난다.
장욱진 ‘가로수’ 1978년작, 30x40cm, 개인소장. /사진제공=장욱진미술문화재단
그런 고독과 성찰의 시절을 보냈기에 화가는 가족들이 한울타리 안에 모여 있는 시간을 소중히 여겼고 ‘가족’이라는 주제를 다양한 작품으로 남겼다. 1972년에 그린 이 ‘가족도’는 손바닥 만한 앙증맞은 크기의 그림이다.
작가 자신이 각별히 아껴 유족이 보관해오던 대표작인데, 올해 초 장남 장정순 씨가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에 기증했다. 화가는 팔로 부둥켜 안듯 벽을 둘러 가족을 꼬옥 끌어안았다. 두 손 모으고 앉은 아이들이 무언가를 간절히 기다리는 듯해 여러 번 더 눈이 간다.
김환기·이중섭 등과 더불어 근대 한국화단을 대표하는 장욱진은 올해로 탄생 100주년을 맞았다. 지주 집안에서 태어난 덕에 교육 여건이 좋은 서울로 올라와 경성사범보통학교를 다니던 장욱진은 3학년 때 일본인 미술교사가 그의 그림을 전국 학생그림대회(일제 치하 ‘전일본소학생미전’)에 출품해 1등상을 받은 것을 계기로 미술에 빠져들었다.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경성제2고등보통학교(현 경복중고교)에 진학해 미술반 활동을 했는데 일본인 역사 교사에게 대들다 3학년 때 퇴학을 당한다. 학교를 그만둔 게 화실에서 그림만 그릴 수 있는 구실이 됐지만 성홍열을 앓아 충남 예산의 수덕사로 요양을 떠난다.
이곳에서 우연히 만난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1896~1948)이 장욱진의 그림을 보고 “작가의 주관이 살아있는 좋은 그림”이라고 칭찬한 일화가 전해진다. 3년 수양 후 양정고등보통학교에 체육특기생으로 편입한 그는 4학년이던 1938년 전국학생미전에서 ‘공기놀이’로 최고상을 받았다.
수상을 계기로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제국미술학교(현 무사시노미술대학) 서양화과에 진학했다. 학교 수업과는 별개로 하숙집에서는 고향을 소재로 줄창 그림을 그리던 장욱진은 졸업과 동시에 귀국해 광복을 맞았고 다시는 일본 땅을 밟지 않았다.
1945년 가을 그는 새로 생긴 국립박물관에 취직해 일제로부터 넘겨받은 유물을 분류하는 일을 했다. 2년 근무기간 조선 최고의 회화와 불상을 눈과 손으로 경험한 것이 작가의 그림에 밴 전통성의 밑거름이 된 것은 분명하다.
박물관을 사직한 그는 1947년 김환기·유영국·이중섭·백영수와 함께 ‘신사실파’를 결성했다. 아카데미즘이라 불리는 틀에 박힌 미술을 거부하고 서양식 기법으로 우리 전통의 요소를 현대적으로 해석해 보여주고자 한 모임이었다. 이후 장욱진은 서울대 미술대학 교수가 됐다.
술을 워낙 좋아하고 기분 내키면 어디서든 쭈그리고 앉아 그림을 그리곤 한 그를 서울대 경비원이 노숙인인 줄 알고 끌어내 쫓으려 했다는 전설같은 얘기가 전한다. 결국 6년 만에 학교마저 떨쳐낸 그는 문명이 장악한 서울을 뒤로하고 전기도 안 들어오는 덕소에 작업실을 짓고 그림만 그렸다.
남편을 대신해 생계를 맡은 부인은 역사학자 이병도 전 문교부 장관의 딸인데 ‘학자 집안의 딸이 아무 일이나 하면 안된다’고 해서 책방을 운영하며 1남 4녀를 키웠다. 평일에는 책방을 꾸리다 주말이면 반찬거리를 만들어 주렁주렁 아이들 손을 붙들고 시외버스를 타고 작업실로 향했다.
이 ‘가족도’가 바로 그 덕소의 어느 주말 풍경이다. 화가라는 천형(天刑) 때문에 그리운 가족과 떨어져 지내니 모두가 슬펐다. 그래서 한가득 행복한 이 그림 한 켠이 애잔하다.
“오직 그림과 술밖에 모르고 살아온 인생에서 그림은 내가 살아가는 의미요, 술은 그 휴식이었다”고 한 그는 시인처럼 함축적으로 그림을 그린 화가였고, 순진무구한 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본 기인(奇人)이었다.
[출처] : 조상인 서울경제신문 기자 : <조상인의 예-장욱진'가족도'> / 서울경제신문, 2017.5.12.
10. 하종현 '접합' - 벽을 뚫고 나온 땀방울...흙빛 마대를 빛내다
얼기설기 올 굵은 마대 뒷면서 - 오일 물감 밀어올려 작품 완성
재료·작가행위 물아일체 이뤄 - 철조망·용수철·신문지 등 활용
분단조국·답답한 사회상 투영도
하종현 ‘접합(Conjunction) 79-31’ 1979년작, 150x226cm. 마대 천에 유화, 시
카고아트인스티튜트 소장 /사진제공=국제갤러리
키를 훨씬 웃도는 벽을 맞닥뜨렸다. 그것도 앞뒤 좌우가 꽉 막혀 오도 가도 못하는 벽이다. 어떻게 해도 벗어나지 못할 벽 같은 막막한 느낌은 삶 속 여기저기에 도사리고 있다. 뛰어넘기는 버겁고 깨부술 엄두도 나지 않는다. 하종현(82)의 그림은 그 암담한 벽을 뚫는 기분이다.
세계적 미술 명문인 시카고아트인스티튜트(SAIC) 박물관이 소장한 그의 1979년작 ‘접합(Conjunction) 79-31’을 접한 첫인상은 새벽에 소복이 맺힌 이슬 같았다. 동글동글 작은 물감 알갱이들이, 어릴 적 뛰놀던 앞마당 흙을 퍼담아 놓은 듯한 화판 위에 자리잡은 모습은 그림 가까이에 다가서야만 보인다.
그러나 매끈한 캔버스가 아니라 얼기설기한 마대로 만든 화판임을 눈치채고, 그 뒷면에서 오일 물감을 밀어올려 완성한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림이 달리 보인다. 이슬이 아니라 땀이다. 벽을 뚫고 나온 그 고된 얼굴에 맺힌 땀방울이다.
마대 뒷면에서 짓이겨 배어난 물감은 삐죽거리며 저마다의 표정을 담아 얼굴을 내민다. 뒤엉킨 마대의 직조를 통과해야만 앞으로 나설 수 있고 관람객과 마주할 수 있으니 인격 없는 물감이지만 하나같이 당당하다. 재료의 물성과 작가의 행위가 그야말로 물아일체를 이루며 작품이 됐다.
1935년 경남 산청에서 태어난 하종현은 일본의 패망과 한국전쟁을 겪으며 자랐다.
“나와 내 부모뿐 아니라 거의 모든 사람들이 못 먹고 가난하고 참담하던 폐허 속에서 살아남았고, 그 상황에서 미술대학에 가기는 했지만 물감이나 캔버스를 사서 여유롭게 작업할 형편은 아니었소.”
젊은 화가에게는 그러나 물질적 궁핍보다도 정신적 빈곤이 더 괴로웠다. “아무리 잘 그려본들 서양 물감, 서양식 기법으로 서양을 닮은 그림을 그린 것에 나는 없지 않은가”라는 고민은 그의 숱한 밤을 어지럽혔고 “서양식 그림에서 독립해 나만의 독자적 길을 찾아내야 한다”는 생각은 강박에 가까울 정도였다.
하종현 ‘작품(Work) 73-13’ 1973년작, 마대 패널 위에 철조망, 120x240cm,
솔로몬 R.구겐하임 재단 소장 /사진제공=국제갤러리
하종현 ‘무제 72-3(A)’ 1972년작으로 74 x 150 cm 패널에 용수철을 붙여 제작했다.
/사진제공=국제갤러리
등단 초창기이던 1960년대의 그는 당시 화단의 주류이던 국전(國展)에 매달리지 않고 파격의 전위예술을 시도하는 아방가르드협회를 조직해 활동했다. 인물·정물·풍경 같은 구상회화는 일찌감치 접었다. 구체적인 형상 없이 재료 그 자체와 작가의 즉흥적 표현을 강조한 ‘앵포르멜(informel·비정형미술)’ 경향이 강했다.
오히려 입체적인 추상 작업에 몰두해 용수철·철조망·신문 따위를 그림 위에 붙였다. “답답한 시대와 더불어 살았을 따름이지 적극적으로 운동을 하지는 않았다”고 선을 그었지만 철조망 박힌 흙빛 그림이 품은 분단 조국의 아픔, 다 끊어져 가는 밧줄을 이어놓은 작품에 드리운 남북의 긴장감은 사회상을 투영하고 있다.
유신 체제 아래 늘 검열을 받아야만 했던 신문과 인쇄되기 전 신문을 나란히 쌓은 ‘신문지’를 비롯해 어디로 튈지 모르나 결국 제자리로 돌아오는 용수철, 힘겨워도 파고드는 나사, 눈물도 더러움도 닦아내 준 휴지 등의 소재도 마찬가지다.
프랑스 르몽드지 기자 출신의 평론가 필립 다장은 그의 초기작에 대해 “철사는 마치 육체를 가두고 상처를 내듯이 캔버스를 조이고 뚫는다. 철사가 한쪽 끝에서 다른 끝으로 펼쳐지면서 도처에 억압의 기운이 깔리고 작가와 그의 동시대 사람들은 물론 그 누구에게도 자유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는 것이 되며 수용소·감옥·노선·군법·선언·전시상황과 같은 정치적인 성격을 지니게 된다”고 평했다.
하종현이 1970년대 중반 마대를 택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모래 마대는 전투진지를 구축하지만 전후 미군은 마대 자루에 밀·보리 같은 구호물품을 담아다 주곤 했지요. 다 쓴 마대를 털고 말아서 남대문 시장에서 싸게 파는 걸 사다가 캔버스 대신 재료로 삼았지요.”
그렇게 평범한 마대 천은 시대상과 일상성을 투영하며 그를 대표하는 재료가 됐다. 세워 놓으니 벽 같은 마대 화판 앞에서 그는 갑갑함에 가슴 치다 깨쳤다. 어떻게든 그 마대의 틈을 파고들어 보리라. 뒷면에서 유화 물감을 밀어냈고 앞으로 배어 나온 것을 자유롭게 변주해 역작인 ‘접합’ 시리즈가 탄생했다.
중국화나 한국화의 전통기법으로 뒷면에서 안료를 밀어내는 ‘배압법’, 뒷면에 색칠해 앞에서 그 비친 모습을 보는 ‘배채법’ 등이 있지만 재료나 의도 면에서는 전혀 다르다.
안동 하회마을의 담벼락 색깔 같은 암갈색, 비 갠 지리산 중턱의 안개 같은 하얀색 등은 작가가 직접 배합하는 하종현 만의 색이다. 붓을 대신해 물감을 짓이기고 밀어내고 펴바르는 ‘도구’ 또한 노화가가 손수 만들어 쓴다.
하종현 화백 /사진제공=국제갤러리
지금은 ‘단색화’라는 이름으로 박서보·이우환·정상화 등과 함께 세계 미술계의 주목을 받고 유수의 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돼 있지만 정작 발표 당시 국내 반응은 시큰둥했다. 작품은 오히려 일본에서 먼저, 더 많이 팔렸고 지금은 이우환과 더불어 일본미술관이 가장 많이 소장한 한국인 화가로 꼽힌다.
일본 평론가 나카하라 유스케(1931-2011)는 “근대화 과정에서 재주있는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서양으로 유학 가 서구를 받아들이는 바람에 소중한 동양의 미술을 팽개쳤을 때 하종현에게서 진짜 동양을 발견했다”고 호평했다.
홍익대 미술대학 교수로 30년 재직하고 서울시립미술관장(2001~2006년)을 지낸 그가 모든 직함을 내려놓고 오직 화가로 돌아오자 때마침 세계 미술계가 그를 불러냈다.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린 대규모 회고전에 이어 2014년에는 뉴욕의 블럼앤포 갤러리에서 개인전이 열렸다.
2015년 베니스비엔날레 기간에 관련 특별전으로 열린 ‘단색화’ 전시는 하종현의 작품을 세계 전역으로 알리는 분수령이 됐다. 지금은 유럽화랑 알민레쉬갤러리 파리 전시장에서 개인전이 열리고, 다음 달에는 런던 전시장으로 옮겨간다. 이미 뉴욕현대미술관(MoMA)을 비롯해 솔로몬 R.구겐하임미술관, 홍콩 M+ 시각문화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삼성미술관 리움 등이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얼마전 유럽 전시 때 파블로 피카소의 손자인 베르나르 피카소와 큐레이터, 컬렉터들의 초대를 받아 함께 얘기를 나누는데 이 사람들은 하나같이 ‘하종현의 작품은 서양미술의 사조 중 어디에 끼워넣어야 하나, 어디에서 영향을 받았는가’를 찾아내려고 애쓰더군요. 그래서 내가 답했죠. 내가 어디서 배워서 계승했는가만 보려 하지 말고 당신들과 내가 어떻게 다른가, 그 다른 점을 찾아보면 오히려 연결시키기고 이해하고 설명하기 좋을 것이라고요.”
하종현은 2015년부터 선보인 신작에서 홀연히 사라지는 연기(smoke)를 그림 속으로 붙들었다. 마대 위로 밀려나온 물감에 연기를 쏘이면 그 표면에 자연스럽게 연기가 부착되는 원리다. 뿌연 연기와 그을림은 자연스러운 그림자처럼 물감 위에 내려앉는다. 여전히 청춘이다.
/조상인기자
하종현의 2014년작 ‘접합(conjunction) 14-154’ /사진제공=국제갤러리
[출처] : 조상인 서울경제신문 기자 : <조상인의 예- 하종현'접합'> / 서울경제신문, 2017.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