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단어는 ‘사랑’이다.
그것도 무조건적인 사랑(unconditional love)이라는 의미의 아가페라고 강조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기독교인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들이 말하는 아가페적 사랑은 온데간데 없거나,
지나치게 추상적이다. 타자에 대한 환대 조차도 그러하다.
사랑을 그렇게 강조하는데, 나는 왜 그 단어가 왜 이리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실체가 없거나, 자기들만의 사랑을 강조하기 때문이 아닐까.
주변의 약자들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거나 배척하면서 자기들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
같은 교인들만이 사랑의 대상으로 한정짓기 때문이 아닐까.
오늘 더 당황스러운 것은, 사랑을 이야기하는데 갑자기 부흥집회 얘기를 꺼내는 것이었다.
순간 욱했다. 초대교회 사랑과 부흥집회가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고 싶어서였을까?
초대교회의 사랑을 말하면서 여전히 부흥, 성장, 축복, 번영 등을 염두에 두고 있다.
자기를 비우고, 낮아지고,
사회에서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정치적이라는 이유로 멀리하면서 말이다.
콘스탄틴주의를 비판하면서 콘스탄틴 시대의 화려했던 리즈 시절을 갈망하고 있다.
<옮긴글>
[출처] 사랑을 말하는데 사랑이 없다 (은혜성서교회) | 작성자 사무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