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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대인이현(必待人而顯)
반드시 사람을 기다려서 드러난다
必 : 반드시 필(心/1)
待 : 기다릴 대(彳/6)
人 : 사람 인(人/0)
而 : 어조사 이(而/0)
顯 : 나타날 현(頁/14)
결국 사람이다
山川者, 天地間無情之物也. 然必待人而顯.
산천은 천지간의 무정한 물건이다. 그러나 반드시 사람을 기다려서 드러난다.
- 소세양(蘇世讓), 양곡집(陽谷集) 권14, 면앙정기(俛仰亭記)
소세양(蘇世讓)이 송순(宋純)의 면앙정에 쓴 기문의 일부로, 명인(名人)과 명문(名文)을 통해 명승(名勝)이 되는 상관관계를 나타낸 문구로 더 유명하다. 소세양은 그 사례로 중국의 난정(蘭亭)과 적벽(赤壁)을 거론하였다.
난정(蘭亭)은 절강성 소흥에 있는 어느 연못의 작은 정자였다. 동진(東晉)의 서성(書聖) 왕희지(王羲之)가 우군장(右軍將)으로 부임해 벗들과 시회(詩會)를 열었으며, '난정집서(蘭亭集序)'를 지은 곳으로도 이름났다.
적벽(赤壁)은 호북성 황강(黃岡)에 있는 강가의 야트막한 절벽인데, 송나라의 문장가 소식(蘇軾)이 유람하고 지은 '전적벽부(前赤壁賦)'로 세상에 알려졌다.
난정(蘭亭)과 적벽(赤壁)은 그 자체의 경관이 빼어나고 아름다워서 이름난 것이 아니라, 왕희지와 소식이라는 명인과 두 편의 명작을 통해 천하에 명성을 드러내었다. 이런 만남이 없었다면, 두 곳은 궁벽한 시골의 그저 그런 물가에 불과했을 것이다. 결국 사물은 스스로 귀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통해서만 귀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늘 이런 운명적 만남을 기대하고 또 부러워한다. 누군가는 이를 요행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그것이 운명이든 요행이든, 난정과 적벽이 이 만남에 관여한 것이 있었던가. 요행이나 운명을 기다리기 보다는, 그저 그런 시골의 물가조차도 역대의 명승으로 만드는 명인의 그 안목을 배우는 것이 어떨지.
면앙정기(俛仰亭記)
소세양(蘇世讓) 양곡집(陽谷集) 권14
地之凝形於太虛空者。特一塊之物耳。其播之而爲水其隆之而爲山者。
又自流且峙於一塊之中也。人也命于天。質于地。而游處於山水之間。其目之而可愛。耳之而可悅者。又似造物者獻助而供奉之也。然而求其游之適。而不詘於
吾之耳目。則必凌峻阻出眇莾。然後有以得其全焉。若曠然數百里。山也水也。爭效奇呈異。而吾乃坐乎一丘之上。撫而有之。則其爲游之適也。而樂之全也。果如何哉。今完山府尹宋公。作亭於其居之後。斷麓之顚。名之以俛仰。向所謂遊之適樂之全者。固無以他求爲也。始公之先祖有諱某者。年老退仕。居于錡谷之里。子孫因而爲家。有老松堂舊基。自錡谷北行不能二三里。得小洞。負山而抱陽。土肥而泉甘。有一區之宅。公之所新築也。名企村。企村之山。盤紆蓊鬱。
其峯之秀麗者曰霽月。自企村穿霽月之腰。轉以北出。則山支稍迤。向乾維而蹙。勢如龍垂龜昴。蜿蜿然跂跂然看。卽亭之所在也。亭凡爲屋三間。駕長樑。樑倍於楣。故視其中。端豁平正。而其靡隅翼如也。虛其四面而欄檻之。檻外形皆微隤。而西北隅尤陡絶。屛以密竹。蕭槮蒨蔚。其下有村曰巖界。以其麓多石而巉削。故名之。東階下。因稍迤之勢廓之。構溫室四問。繚以周垣。植以佳卉。而充之以書史。循山眷以延于左右谷。長柗茂樹。蔥瓏以交加。亭之處地旣亢爽。
而竹木又回擁之。與人煙不相接。逈然若異境。憑虛以望。則見其淸汵之狀。突兀之勢。纚纚乎其宛轉踊躍而出。若有鬼神異物。陰來以相之也。山之自東而來者。至霽月而峙。其偏支按衍蜷屈。西臨大野。窮於三數里間者凡六曲。而亭之麓。左控右挹。最夭矯而軼出。自東北而馳。迤邐於西南數白里者。巍峨騰踔。嶻嶭週遭。谽呀崛崎。攅蹙奔迸。而巖危石醜。偃蹇雄踞者。龍龜山也。趾蟠頂尖。端重疏立者。夢仙山也。若瓮巖也。若金城也。龍泉也。秋月也。白巖也。佛臺也。修
緣也。湧珍也。魚登也。錦城也。象山。或如囷倉。或如城郭。如屛如防。如臥牛如馬耳。排靑掃黛。浮眉露髻。參差隱見。縹緲明滅。煙雲之開闔。草木之榮落。朝昏異態。冬夏殊候。而畸人之所騁術。烈婦之所成節。尤使人遐思而求想也。水之源於玉泉者。爲餘溪。正帶亭麓之前。漣漪澄瀅。不渴不溢。洋洋悠悠。去而若留。跳魚撥刺於夕陽。宿鷺聯奉於秋月。而源於龍泉者。至府治爲白灘。屈折橫流。汨濦渟洄。與餘溪竝行。過牛鳴地。合流西去。其發於瑞石者。則從亭左第三曲之
外。始效其色。而下灌於前二川。直抵龍山。以趨于穴浦。而蒼茫大野。首起於秋月山下。尾撇乎魚登之外。壇曼阤靡。洼然煥然。丘陵林藪之相蔽虧者。錯如圖畫。溝塍之刻鏤。聚落之雜襲。而人之趨事於其間者。春而耕。夏而耘。秋而獲。無一時之息也。而四時之景。亦與之無窮焉。幅巾短褐。徙倚乎欄檻之上。則山之高。水之遠。雲之浮。鳥獸魚之遨遊。擧熙熙然來供吾興。而扶藜躡屐。從容於階除之下。則翠煙自留。淸風時至。松檜蔌蔌有聲。而紛紅駭綠。香氣檢苒。施施乎
與形骸相忘。于于乎與造物者遊。而未始有極。美哉。亭乎。據其內。環合幽窅。足以專靚謐之觀。達其外。寥廓悠長。可以開浩蕩之襟。柳子曰。游之適。大率有二者。其不在玆歟。余嘗拜公於亭上。公爲余言曰。昔亭之未有也。有郭姓者居之。嘗得異夢。見金魚玉帶學士。聯翩盍簪於其上。意其家之將有興。而謂其子之膺是夢也。託之僧以學書。及其無成而且窮也。乃伐其樹而遷其居。僕於甲申年間。以財貨之。里人競來相賀曰。以玆地之奇勝。而公乃得之。豈郭之夢。有所
兆朕者歟。僕亦愛其溪山之勝。而繫官在朝。不敢引身。癸巳歲。遞職還鄕。始縳草亭。以蔽風日。優遊五載。旋復棄去。則亭不免爲風雨所揭。獨樹陰婆娑。而草菜蕪沒矣。庚戌。謫關西。揣慄窘束。百念不掛。猶以未克葺亭以終老。爲恨也。辛亥。蒙恩放歸。宿昔之抱。可以少償。而財力短乏。又無以爲計。一日。府使吳公謙。適來同登。勸僕成之。且許相助。遂於壬子春。起其役。不幾月而功訖。棟宇粗完。而林薄益茂。逍遙俛仰。以遣餘生。僕之素願。於是乎畢矣。嗚呼。僕之占此。于今
三十餘年。人事之得喪。固有難言。而亭之廢而起者。亦若有數存焉者。撫事興懷。不可不托于斯文。子其爲我記之。余以文拙辭不獲。則又以言于公曰。蒼蒼者。孰不仰而戴之。茫茫者。孰不俛而履之。然而知其所以然。而能反之於身者。蓋寡矣。今公旣以得之於心。而寓之於名。其浩然之興。固有人所不敢知者。然物變無窮。而人生有涯。以有涯之生。御無窮之變。則於其俛仰之間。而天地之盈虛。人物之榮悴者。亦不可不經于心。而以之自勵也。夫豈專於山水之樂而
已哉。噫。微吾公。孰能稱是名也哉。
■ 결국은 사람이다
뉴욕 맨해튼, 세상에서 가장 다양한 사람들이 오가는 곳이다. 하지만 군중 속에서 고독은 더 커진다고 했던가?
어느 가을, 39세 남자는 여자친구와 헤어진 뒤 외로움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가족도 친구도 없던 그는 망망대해 같은 세상에 구조 신호를 보냈다. 노란 종이 한 장에 자기 전화번호와 간단한 문장 하나를 적어 맨해튼 곳곳에 붙인 것이다. "뭐든 대화하고 싶은 사람은 저에게 전화하세요. 외로운 제프"
그 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단 몇 명의 대화 상대라도 생기길 바라던 그에게 실제 연락을 한 사람은 무려 7만 명. 뉴욕은 물론 영국, 캐나다, 나이지리아, 말레이시아... 심지어 한국에 사는 사람들까지도 제프를 찾았다. 자신도 외롭다는 하소연과 함께 힘내라는 응원 메세지도 줄을 이었다.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건 사람이다.
인간이 경험하는 가장 강렬한 고통과 기쁨은 모두 사람에게서 비롯된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 짝사랑... 인간을 시름시름 앓게 하는 고통스런 경험이다.
하지만 인간이 느끼는 가장 강력한 기쁨 또한 사람을 통해 온다. 사랑이 싹 틀 때, 오랜 이별 뒤의 만남, 칭찬과 인정..., 그래서 시대를 막론하고 인간이 치르는 가장 성대한 의식들은 사람과의 만남(결혼, 탄생) 혹은 이별(장례)을 위함인 것이다.
왜 이토록 인간은 서로를 필요로 할까?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막대한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바로 생존, 세상에 포식자들이 있는 한, 모든 동물의 생존 확률은 다른 개체와 함께 있을 때 높아진다.
물소들은 사자들이 우글거리는 아프리카 초원을 수십 만 마리의 동료들과 함께 횡단한다. 서로 살아남기 위해서... 매가 혼자 있는 비둘기를 습격할 때 성공할 확률은 약80%다. 하지만 다른 친구 10마리와 함께 있을 때는 60%, 50마리와 함께할 때는 10% 이하로 성공률이 떨어진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시카고 대학 교수의 오랜 연구에 의하면 현대인의 가장 총체적인 사망 요인은 사고나 암이 아니라 외로움이다.
인간의 뇌가 급격히 커진 시기가 있다. 호모사피엔스의 뇌가 급격히 커진 시기는 함께 생활하던 집단의 크기와 맞물려 있다. 낯선 이들과의 교류가 증가했고, 이들이 마음속에 숨긴 생각과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더 높은 지능이 필요해진 것이다. 이처럼 인간을 가장 인간스럽게 만드는 뇌, 한마디로 사람들과의 관계를 잘 맺기 위해 뇌가 발달했다는 것이다.
호모사피엔스 진화 여정에서 집단으로 부터의 소외나 고립은 죽음을 뜻했다. 뒤집어 말하면, 우리의 조상이 된 사람들은 연인과 친구들을 항상 곁에 두고 살았던 매우 사회적인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사회적 인간의 유전자를 받았고, 그것을 통해 '사회적 생존 비법'을 전수 받았다. 이 '생존 비법 패키지'를 뜯어보면 두가지 중요한 내용물이 나온다.
하나는 '고통'이라는 경험이다.
고통을 경험하지 못하는 동물은 오래 살 수 없다. 다리에 박힌 못이 아프지 않으면 치료하지 않을 것이고, 결국 목숨까지도 잃을 수 있다. 생존에 위협이 되는 작은 불씨를 미리 끄는, 일종의 호루라기 소리가 고통이다. "TV좀 그만보고 다리 좀 치료해!"라고 뇌가 고함을 치고 있기 때문이다.
고통의 정확한 진원지는 다리가 아니라 뇌다. 못이 박힌 순간 뇌의 '전방대상피질'이라는 부위가 활성화되고, 이것이 고통이라는 신호로 바뀌어 우리에게 전달된다. 진통제가 효력 있는 이유는 그 속에 함유된 '아세타미노펜' 성분이 '전방대상피질'을 비활성화시키기 때문이다.
치통 때문에 진통제를 먹는 것은 이가 아픈데 반창고는 머리에다 붙이는 격이다. 정말 아픈 곳은 뇌기 때문이다. 다리가 잘려나가는 것만큼 인간의 생존을 위협한 것이 집단으로부터 잘려나가는 것이었다.
이 때 뇌는 '사회적 고통'이라는 기제를 사용해 그 위협을 우리에게 알렸다. 외로움, 배신감, 이별의 아픔, 인간관계에 금이 가는 신호가 보일 때 뇌는 이런 마음의 아픔을 느끼도록 했고, 그 덕분에 더 치명적인 고립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다. 신체적 고통과 사회적 고통, 원인은 달라도 기능은 같다. "너 아직도 TV 보니? 당장 나가서 여자친구 붙잡아!" 사회적 고통이 전하는 메세지다.
그렇다면 손가락이 잘릴 때와 애인이 떠날 때의 고통, 어느 쪽이 더 심할까? 최근 연구들은 두가지 고통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뇌 영상 사진을 보면 신체적, 사회적 고통은 동일한 뇌 부위에서 발생한다. 손이 잘리든, 애인이 떠나든 뇌는 똑같은 곳에서 비상경보를 발동한다. 둘 다 생존을 위협한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는 뜻이다.
이 두가지 고통을 줄이는 방법도 동일할까? 몸이 아플 때 우리는 진통제를 먹는다. 그러면 마음이 아플 때도 진통제가 효력이 있을까?
심리학자 '네이든 드왈'과 동료들은 이 가능성을 검증하기 위해 대학생 62명을 모집해 그들이 느낀 사회적 고통의 정도를 21일 동안 기록하도록 했다. 이 기간 동안 한 그룹은 매일 '타이레놀'을 2알씩 복용했고, 통제집단은 아무런 약효가 없는 '흰 알약'을 복용했다.
놀라운 결과가 나온다. 매일 '타이레놀'을 복용한 집단은 통제집단에 비해 시간이 지날수록 일상의 사회적 상처를 덜 느꼈다. 마지막 두통을 없애주듯, 진통제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은 사회적 고통도 덜어준다는 것이다.
고통의 역할은 위협으로부터의 보호이다. 뇌의 입장에서는 그 위협이 신체적인지 사회적인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래서 뇌는 비슷한 방식으로 두 종류의 '고통 스위치'를 켜고 끄는 것이다. 혼자가 되는 것이 생존에 얼마나 치명적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연구다.
두번째는 '쾌감'이다.
고통과 같은 부정적 경험이 위협으로 부터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면, 긍정적 정서의 기능은 생존에 필요한 자원을 추구하도록 하는 것이다.
왜 우리는 매일 꼬박꼬박 밥을 챙겨 먹을까? 한마디로 먹는 즐거움 때문이다. 음식을 입에 넣어도 종이 맛밖에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이런 자들은 남에게 고기와 과일을 양보할 것이다. 고매한 인격 때문이 아니라 먹는 쾌감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젠틀맨들은 진화 과정에서 영양실조로 사라졌다.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은 동물들은 탐욕스러울 정도로 먹는 즐거움을 추구했다. 보기에는 썩 좋지 않아도 생존에는 반드시 필요한 모습이었다.
우리 뇌는 일종의 탐지기 같다는 비유를 했다. 이 탐지기는 우리가 생존에 필요한 경험을 하도록 유인하기 위해 신호를 방출하는데, 이 신호는 바로 다양한 모습의 쾌감으로 나타난다.
배고픈 사냥꾼은 눈앞에 토끼가 나타날 때, 토끼 고기가 맛있는 냄새를 풍기며 익어갈 때 한 입 뜯어 먹을 때 행복감을 느낀다. 이런 깨알같은 쾌감들을 흠뻑 느껴야 또 사냥을 나가게 되고, 이렇게 사냥을 꾸준히 해야만 생존할 수 있다.
중요한 점은 이 탐지기의 쾌감전구는 선별적으로 켜진다는 것이다. 이 탐지기의 쾌감 신호는 생존에 절실히 필요한 자원을 취할 때만 선별적으로 반응해야 한다. 며칠 굶주린 배를 채울때, 꽁꽁 언 몸을 온천물에 담글 때, 이렇게 몸을 보존하는 경험을 할 때 강력한 쾌감이 발생한다.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 확보해야 했던 또 하나의 절대적인 자원이 있다. 바로 '사람'이다. 먹는 쾌감을 느껴야 음식을 찾듯 사람이라는 절대적 생존 필수품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우선 인간을 아주 좋아해야 한다. 타인을 소 닭 보듯 바라보는 사람에게 친구나 연인이 생길 리 없다. 이런 '사회적 영양실조'를 막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왕성한 '사회적 식욕'을 갖는 것이다.
사람은 사회적이며 이 사회성 덕분에 놀라운 생존력을 갖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의 뇌는 온통 사람 생각 뿐이다. 희로애락의 원천은 대부분 사람이다. 또 일상의 대화를 엿들어 보면 70%가 다른 사람에 대한 이야기라고 한다.
행복감을 발생시키는 우리 뇌는 이처럼 사람에 '중독'되어 있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래서 사회적 경험과 행복은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 사회적 경험이 행복에 중요한 것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 행복감(쾌감)은 사회적 과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존재하게 되었다고까지 생각한다.
행복을 연구한 사람으로서 중요하고도 확고한 결론은 무엇일까? 첫째, 행복은 객관적인 삶의 조건들에 의해 크게 좌우되지 않는다. 둘째, 행복의 개인차를 결정적으로 좌우하는 것은 그가 물려받은 유전적 특성(외향성)이라는 성격특질이다.
■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검은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 정호승, '수선화에게' 전문
내 나이 마흔여덟일 때 오랜만에 찾아온 친구가 대뜸 물었다. "호승아, 니는 요즘 안 외롭나? 나는 요즘 외로워 죽겠다. 와 이렇게 외로운지 모르겠다. 집사람한테 외롭고, 자식들한테 외롭고, 친구들한테 외롭고, 회사 동료들한테 외롭고, 이웃들한테 외롭고... 내가 왜 이렇게 외로운지 모르겠다. 시인인 니는 어떻노?"
친구의 느닷없는 질문에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그러다가 약간 화가 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나도 집사람한테 외롭다. 그런데 니는 지금까지 헛살았다. 나이 오십이 다 됐으면서 아직도 '내가 왜 외롭나' 그런 생각하나? 니가 무슨 이십 대냐? 그러면 너는 요즘도 '인간에게 왜 죽음이 존재하나' 그런 고민 하나? 우리가 인간이니까 외로운 거야. 외로우니까 사람이야. 외로움은 인간의 본질이야, 본질. 죽음이 인간의 본질이듯이. 삼라만상(參羅萬像)에 안 외로운 존재가 어딨노? 본질을 가지고 '왜?'라고 생각하지 말란 말이야. 본질은 그냥 받아들이는 거야."
내가 한꺼번에 말을 쏟아놓자 친구가 내 얼굴만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잠자리도 봐. 꼭 나뭇가지 끝에 앉잖아? 왜 그런지 알아? 잠자리도 외로워서 그런 거야."
목소리를 조금 낮추어 빙긋이 웃으면서 하는 내 말에 친구도 빙긋이 미소를 띠었다. "그러니까 이제는 '왜 외로운가' 하고 생각하지 말고 외로움을 이해하는 거야. 앞으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더 뼈저린 외로움을 느끼게 될 거야. 그럴 때는 '아, 내가 인간이니까 외롭지. 외로움은 인간의 본질이지' 그렇게 생각해야 돼."
친구와 헤어지고 나서 친구한테 해준 말, '외로우니까 사람이야' 그 한마디가 오랫동안 내 가슴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시 '수선화에게'를 쓰게 되었다. 인간의 외로움에 빛깔이 있다면 어떤 빛깔일까. 연약한 꽃대 위에 핀 수선화의 연노란 빛이 인간의 외로움의 빛깔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제목을 '수선화에게'로 삼았다. 따라서 '수선화에게'는 수선화를 노래한 시가 아니다. 수선화를 은유해서 인간의 외로움을 노래한 시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외로운 존재다. 외롭게 혼자 태어나서 외롭게 혼자 죽어가는 존재다. 죽음을 기다리며 5년 동안이나 자리보전하고 있던 아버지의 외로움에 아들인 나는 조금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어머니 또한 마찬가지였다. "와 이렇게 안 죽노. 빨리 떠나야 되는데. 나는 내 할 일 다 했다. 너무 오래 살아 미안하다. 니가 얼마나 부담이 되겠노."
늘 이렇게 말씀하시던 아흔다섯 어머니의 죽음의 외로움을 아들인 내가 나눠 가질 방법은 없었다. 외로움은 인간 삶의 기본명제다. 인간이 외로운 존재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면 인간의 삶을 이해할 수 없다. 외롭기 때문에 인간인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 외로움은 우리가 매일 먹는 밥이나 물과 같다. 인간이니까 밥을 먹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외로움 또한 인간이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다. 인간 조건으로서의 그 당연한 외로움을 너무 아파하거나 고통스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요즘 가까운 이들한테 '외롭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그건 당연한 거야. 외로우니까 사람이잖아" 하고 말한다. 또한 "사람은 누구나 외로워. 나만 외로운 게 아니야. 외롭지 않은 사람은 없어" 하고 말한다. 그러면서 나 스스로 위안을 받는다.
나는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한테 가장 많은 외로움을 느낀다. 그것은 내가 그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만일 사랑하지 않으면 외롭지 않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나는 사랑하지 않을 때 혼자이고 혼자일 때 외로움을 느낀다.
그러나 단순히 물리적으로 혼자 있을 때 외로움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내가 외롭다는 것은 인간이 궁극적으로 혼자라는 사실을 의미하고, 내가 언제 혼자인가 하는 문제는 내가 언제 외로운가 하는 문제와 같다. 그렇지만 결국 아무도 진정으로 나를 사랑해주지 않을 때 외로움을 느끼고, 내가 진정으로 아무도 사랑하지 않을 때 외로움을 느낀다.
인간은 사랑의 존재다. 사랑받고 싶은 존재한테 사랑을 받지 못해도 외롭고, 사랑하고 싶은 존재를 진정 사랑해도 외롭다. 이 모순된 외로움의 본질을 내가 이해해야 한다. 사랑과 외로움의 모순적 본질을 이해하는 과정이 바로 내 삶의 과정이다.
만일 어머니가 나를 진정 사랑하지 않았다면, 만일 내가 어머니를 진정 사랑하지 않았다면, 나는 늘 외로움에 눈물 흘렸을 것이다. 나아가 절대자가 나를 진정 사랑하지 않았다면, 나 또한 그를 진정 사랑하지 않았다면, 나는 그가 사랑의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늘 외로움의 차가운 비바람에 떨었을 것이다.
비록 절대적 존재라 할지라도 하느님도 외로운 존재다. 인간인 내가 사랑하지 않음으로써 하느님도 외로움을 느끼는 존재다. '수선화에게'에서 여러 존재의 외로운 상황을 나타내면서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고 한 까닭은 '하느님도 외로운 때가 있는데 하물려 인간의 외로움은 당연하지 않느냐'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집트 카이로에 있는 아인삼스 대학에서 한국어과 학생들을 상대로 '시를 발견하는 마음'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할 때의 일이 떠오른다. 그날 나는 '수선화에게'를 낭독하고, 시를 쓰게 된 배경과 그 의미를 설명했다.
그러자 학생들이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는 구절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신이 눈물을 흘리다니!" 하며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신은 절대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신이 눈물을 흘리는 일은 있을 수도 없고 상상할 수도 없다"는 것이 학생들의 주장이었다.
나는 신도 얼마든지 인간의 자연적 면모를 지닐 수 있다는 범신론적 생각을 한다. 하느님도 인성(人性)을 부여하면 그렇다.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인 동시에 사람의 아들이지 않은가. 신의 절대성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인간적 상대성을 투영시킨다. 절대자에게 신적 존재성만 아니라 인간적 존재성도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런 주장을 하자 학생들 모두 "신은 눈물을 흘리지 않아요!" 하고 말했다. 시의 소통이 단절되는 순간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신은 인간성이 부재된 절대적 완전한 존재일 뿐이었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눈물을 흘리시는 하느님'을 이해시킬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것은 결국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벽이었다. 시의 이해는 결국 문화적 차이를 먼저 이해하는 데서 출발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기도 했다.
외로움과 고독은 유사하지만 서로 다른 영역이다. 외로움이 상대적이고 사회적인 영역이라면, 고독은 절대적이고 존재적인 영역이다. 너와 나의 상대적 관계는 외로움의 영역에 속하고, 신과 나의 절대적 관계는 고독의 영역에 속한다. 그래서 사회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외로운 이웃들’이라는 표현이 '고독한 이웃들'이라는 표현보다 더 옳다. 요즘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는 ‘고독사(孤獨死)’ 또한 ‘외로운 죽음’이라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혼자'와 '홀로'도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닌다. '혼자'는 상대적 영역이고 '홀로'는 절대적 영역이다. 법정스님께서 "사람은 때대로 홀로 있을 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에서 '홀로'는 절대적 영역이다. 내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생각하는 절대적 시간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만일 '홀로'를 '혼자'로 바꿔서 "사람은 때때로 혼자 있을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보면 법정스님께서 하시고자 한 말씀의 뜻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연인 관계에서도 "요즘 당신이 나를 사랑해주지 않으니까 내가 너무 고독해"라고 했다면, 그것은 "내가 너무 외로워"라고 해야 맞다.
나는 인간의 고독의 영역도 중요하지만 일상의 상대적 삶에서 오는 외로움의 영역이 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급변하는 현대사회의 다양성 속에서 개인주의가 만연해질수록 외로움 때문에 삶이 파괴되는 이들이 점차 늘어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는 외로움의 또 다른 이름이고, 상처와 고통의 또 다른 이름이며,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이다. 인생이 외로움과 상처와 고통과 사람으로 이루어지듯 시 또한 마찬가지다.
독자들이 시집에 사인을 해달라고 할 때 내가 가장 많이 쓰는 구절은 '외로우니까 사람입니다'이다. 그렇게 쓸 때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외로운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는 언제나 외로워도 외롭지 않다.
■ 결국은 사람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주의 모든 것에 본질과 목적이 있다고 보았다. 돌이 땅에 떨어지는 이유는 그 본질이 땅에 있기 때문이다. 불이 치솟는 이유는 그 본질이 하늘에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궁극적 본질은 행복이므로 인생의 목적은 행복이다. 이런 세계관은 꽤 오랜 시간 동안 우리를 지배했다. 하지만 최근 진화심리학은 행복에 대한 관점을 전환시키고 있다. 우주에는 딱히 목적이 없다. 그냥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다. 인간이 행복과 불행을 느끼는 이유는 그렇게 진화했기 때문이다. 행복은 목적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수단이다. 의식적인 이성이 아니라 무의식적인 알고리즘, 즉 감정인 것이다.
중요한 건 사람이다
허무한 이야기를 하나 하자. 행복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일까? 연구 결과에 따르면 유전자가 가장 중요하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외향적인 유전자를 가질수록 행복감을 더 느낀다.
우리의 뇌는 생존과 번식에 이득이 되는 행동을 했을 때 행복감으로 보상한다. 바로 모닥불에서 따듯함을 느끼거나, 사냥감을 잡는데 성공하거나, 노래를 부를 때(이성을 유혹하기 위해)이다.
나의 생존과 번식에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다른 사람이다. 호모 사피엔스는 무리 생활을 통해 약한 피부와 근력을 극복했다. 사람이라는 동물은 극도로 사회적이다. 희로애락의 원천은 대부분 사람이고 일상의 대화를 엿들어보면 70%가 다른 사람에 대한 이야기라고 한다. 우리의 뇌는 사람과의 관계(특히 이성)에서 가장 큰 쾌락을 느낀다.
불행도 사랑이다
사람과의 관계는 행복에 가장 강렬한 만큼 불행에도 격렬하다. 진화 심리학 연구는 한국, 일본, 싱가포르의 행복도가 매우 낮고 북유럽 국가들이 높은 이유가 문화라고 밝힌다. 국민 행복지수는 집단주의 문화가 강할수록 낮고 개인주의 문화가 강할수록 높다.
단순하게 표현하면 타인은 나에게 단맛과 쓴맛을 모두 느끼게 하는 존재다. 행복의 결정적 열쇠를 쥐고 있는 사람과의 관계가 일상에서 주로 어떤 맛으로 나타나느냐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문화가 가진 여러 가지 양념은 이 맛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자유감과 타인 중심적 사고가 특히 관련이 있다.
결국 자기중심 사고가 행복을 위한 중요한 요소라는 것이다. 우리나라, 일본에서는 타인의 평가를 과도하게 의식하는 문화가 있다. 이는 그만큼 불안감과 스트레스를 유발한다.
결국은 사람이다
물질적 조건은 행복과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한다. 어느 정도 수준까지는 소득과 행복의 관계가 정비례하다가 어느 수준을 넘어가면 상관관계가 없어진다. 물질적인 조건이 개선되는 만큼 기대 수치가 더 높아지는 게 핵심적인 이유이다. 또한 물질주의의 부작용도 크다.
예전에는 먹을 것이 다 떨어졌을 때 사냥 잘하는 친구가 반드시 필요했지만, 지금은 돈을 가지고 마트에 가면 된다. 그래서인지 돈에 대한 생각을 할수록 사람에 대한 관심은 줄어든다고 한다. (중략) 행복해지기 위해 돈에 집착할수록, 정작 행복의 원천이 되는 사람으로부터는 멀어지는 모순이 발생한다.
수렵, 채집 시대에 몸이 아프고 활동할 수 없으면 타인의 보호와 도움에 의지해야 했다. 그러나 현대에는 몸이 불편에도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 결국 돈에 집착할수록 사람을 찾지 않게 된다. 그리고 사람을 찾지 않으면 행복감을 느끼기가 더욱 어려워진다.
우리는 가끔 행복이 거창한 것이라는 환상에 젖을 때가 있다. 하지만 관점을 달리 보면 행복은 그냥 좋아하는 사람과 음식을 먹는 것 그것을 자주 하는 것일 수 있다.
■ 결국 사람이다
인사청문회로 정국이 떠들썩하다. 새 정부에 대한 관심과 기대가 큰 만큼 두 자릿수 시청률을 기록할 정도다. 법률상 '고도의 정책 결정 업무를 담당하거나 이러한 업무를 보조하는 공무원'은 청문회를 통해 그 자질을 국회로부터 검증받는다. 호통치기와 망신주기 등 부정적인 인식도 있지만, 국회가 행정부를 견제하는 헌법적 권한이다.
백악관 국세청 FBI까지 동원한 철저한 사전검증을 통해 소모적인 인신공격의 소지를 방지하는 미국식 청문회처럼 우리도 절차적 개선을 통해 도덕성 검증과 동시에 후보자의 국정에 대한 철학이나 열정 또한 알아볼 수 있는 성숙한 절차가 되길 바란다.
주나라 건국 공신 태공망의 "천하를 다투려거든 먼저 인재를 다투어라"고 한 교훈은 사람의 중요성을 말해준다. 갈수록 복잡성이 증대되고 전문성이 요구되는 기업환경에서는 인재 영입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특히 경영 패러다임이 물적 자산의 효율적 운영에 초점을 맞추는 생산자의 관점에서 고객, 나아가 내부 직원의 역량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변하고 있다.
기업마다 인재 발굴 및 육성 프로그램을 개발해 운영하고 있고, 이는 장기적으로 기업의 경쟁력과 맞닿아 있다. 마이크로소프트(MS)의 빌 게이츠는 "우리에게서 상위 20명의 인재를 스카우트해 간다면 MS는 전혀 무게감 없는 회사로 전락할 것이라"고 역설했다.
우선 경영자는 인재를 제대로 평가해 선발하는지 돌아봐야 한다. 현실적으로 인사 담당자는 짧은 시간 안에 수많은 지원자 중 최선이라 생각되는 인재를 효율적 선별해야 한다. 여전히 출신학교, 자격증, 어학시험 성적 등의 소위 '스펙'이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경영자부터 스펙에 대한 맹신에서 벗어나야 한다. 스펙과 업무 성과가 무관한 것은 여러 연구 결과로 나타나고 있다. 위험 회피적인 채용 절차를 통해 인재가 걸러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직원들의 성과에 영향을 미치는 동기 부여는 어떠한가? 인센티브와 같은 금전적 보상을 흔히 사용하고 있지만, 그 효과가 제한적이고, 때에 따라서 역효과를 낼 수도 있어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하다.
직원들의 적극적 참여를 통한 혁신 사례로 소개되는 사우스웨스트 항공도 항공업계 최고의 생산성과 이익률, 고객서비스 지수를 꾸준히 달성해 나가고 있지만, 급여는 업계 평균 수준에 근속연수에 따른 호봉제이다. 그 대신 직원들의 목표공유, 자율성과 같은 내적 동기에 관심을 가짐으로써 가능한 일이었다.
단거리 노선에 집중하는 저비용 항공사인 사우스웨스트항공은 상대적으로 지상에 대기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수익성에 악영향을 끼치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따라서 이륙 준비에 걸리는 시간을 단축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는 항공기 기종 단일화와 서비스 단순화와 같은 시스템 개선 이외에도, 조종사 승무원 지원인원 간의 공통의 목표를 설정해 각 담당 업무에서의 생산성 향상뿐 아니라 업무조율에서도 훌륭한 성과를 낼 수 있었다.
기업의 미래 투자 역시 장기적 관점에서 사람에 대한 투자로 이어져야 한다. 애플이 개인용 PC의 최초 성공작으로 평가받는 매킨토시를 출시할 당시 IBM은 100배가 넘는 연구 개발비를 투자하고 있었다.
이에 스티브 잡스는 "혁신은 기업이 좋은 사람을 얼마나 가졌는지, 그리고 경영진이 이를 어떻게 이끄는지에 따라 결정된다"고 설명했다. 아마존의 제프 베저스는 1997년 주주에게 "모든 것은 장기적 관점이다"고 하면서 인재 확보에 장기적으로 투자하겠다는 것을 천명했다.
학산의 경우 지방중소기업이 대부분 그렇듯 직원 채용이 쉽지 많다. 하지만 장기적 관점에서 인재를 발굴하기 위해 스펙보다 지원자의 열정이나 업무에 대한 애착과 자세를 중요 채용 포인트로 활용하고 있다.
최근에는 회의실을 일과 중에도 차를 마시며 회의할 수 있는 카페 형태나 빠르고 수평적 의사 결정을 위한 스탠딩 등으로 바꾸어 격식 없이 업무 몰입감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본인과 배우자 생일에는 오전 근무 후 퇴근하는 '점먹튀'(점심 먹고 튄다)를 적용하는 등 좀 더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일과 삶의 균형을 잡았다.
결국 일은 사람이 하는 것이다. 뜻이 맞는 사람을 얻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 삼국지의 유비와 조조가 천하를 두고 겨뤘던 것도 주위에 인재가 많아 가능했다. 완벽한 사람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공동의 목표를 통해 조직 내에서 서로의 단점을 보완하고 서로 조화될 수 있을 때 완전한 조직으로 거듭날 수 있다. 경영자는 다양한 직원이 서로 시너지를 일으킬 수 있도록 협업의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주 과업이다.
뛰어난 한두 사람의 성과로 기업의 성장이 장기적으로 지속하기는 어렵다. "당신이 있기 때문에 내가 있다"는 아프리카어 '우분투'처럼 인재가 있기 때문에 회사가 있고, 성장이 있고, 미래가 있다.
■ 결국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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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배경에 미국 제 16대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이 있다. 링컨은 미국의 노예해방을 시킨 위대한 대통령으로 잘 알려져 있다. 세계 인권사의 기념비적인 직선을 그은 노예해방을 위한 남북전쟁이 없었다면, 지금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탄생될 수 있었을까.
링컨 대통령은 전세계 역사를 통해 위대한 한 지도자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링컨 대통령을 노예해방 대통령으로만 알고 있지만 미국 정치사에서 링컨의 위대함은 그것을 뛰어넘는다.
링컨대통령이 남북전쟁을 선언한 것은 노예해방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노예제도를 둘러싼 경제적 갈등으로 인해 미국이 남북으로 분열되는 위기에 처하게 되었음을 직시한 것이었다. 노예제의 존폐를 둘러싸고 연방에서 탈퇴하는 주가 속출하면서 국가가 해체되기보다 하나의 국가로 통합되어야 한다는 신념이 링컨이 전쟁을 불사한 동기였다.
링컨은 '하나의 미국'을 주장하면서 결국 전쟁에서 승리하였고, 링컨 대통령 이후에 미합중국은 이제까지 썼던 'are'라는 복수동사를 버리고 'is'라는 단수동사를 사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의 대통령이 링컨이 아니었다면, 아마 미국은 분열되어 유럽연방정도의 나라가 되지 말라는 법도 없었을 것이다. 미국에서 링컨대통령의 위대함은 노예 해방이라기 보다는 미국의 통합이라는 정치적 측면에서 더 큰 빛을 발한다. 그러나 역사에는 그 역도 성립한다.
이라크를 보자. 사라센문명의 중심지요, 영원한 아랍의 문화적 수도 바그다드. 하지만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대통령은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독재를 계속하며 이란-이라크 전쟁, 쿠웨이트 침공등 국제정세를 역행하는 실패를 거듭하다가, 결국은 나라는 망하고 하루에도 몇 번씩 자살테러등으로 수십명의 무고한 백성이 목숨을 잃는 비참한 망국이 되고 말았다. 한 사람의 지도자는 이렇듯 상상을 초월하는 중요성을 갖는다.
사람을 키워야 한다.
정치적 발전과 경제적 성장을 동시에, 그것도 기적에 가까운 단기간에 이룩한 한국의 성공의 원인을 IMF와 월드뱅크같은 국제기구에서는 단연 사람을 키워내는 한국의 교육에서 그 요인을 찾는다.
자라나는 인재들을 유심히 관찰하여 소중히 가꾸고 나라의 동량이 될 양분을 충분히 공급하는 인재 양성제도, 각 분야의 지도자를 세심하게 선별하여 스스로와 지역의 발전을 위임하는 선거제도, 건전한 양식과 교양을 지속적으로 배양하고 선진의식을 고양시키는 시민의식 배양제도 등은 우리가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 누구에게도 또한 무엇에게도 양보할 없는 가장 중요한 가치인 것이다.
그리스 시대의 위대한 정치가 페리클레스가 했다는 말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정치를 천한 것이라 하여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들은 정치에 초연한 사람이라 하여 칭찬을 받을 일이 아니라, 그 사회의 미래에 무관심한 그 무책임성에 대해 비난을 받아야 한다."
세계문명의 꽃을 피워냈던 그리스 아테네에서는 개인적인 일에만 관심이 있고 공공의 일에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을 '무용한 사람'이라고 비판했었다.
결국은 사람이다.
사람을 키우고 사람을 통해 이 시대의 기적과 성공과 기념비적인 역사를 이루어내야 한다. 그것이 각자의 꿈, 만인의 소망을 이루는 가장 빠른 지름길인 것이다.
■ 결국은 사람이더라
'바둑 신(神)' 소리를 듣던 명인이 우연히 어느 시골 고수와 붙었다. 호선으로 백을 쥔 명인이 딱 한 집 이겼다. 시골 고수는 한 판 더 하자고 팔을 걷어붙였다. 명인은 또 한 집을 이겼다. 화가 난 촌장이 몇 번을 더 붙어 보았지만 그때마다 명인은 한 집만 이겼다. 시골 고수는 무릎을 꿇었다. "선생님!"
2016년 3월, 대한민국은 알파고(AiphaGo)의 충격에 휩싸였다.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인 알파고가 인간 바둑 최고수인 이세돌(33) 9단을 4:1로 이기며 '구글 딥마인드 챌린지'에서 우승을 거두었다. 바둑의 묘수는 인간만이 할 수 있다고 믿었던 창의의 공간이었다. 전문가들은 이번 대국을 계기로 인간과 기계의 협력을 연구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떼x이 번다"던가.
일주일 새 구글 회사 가치가 58조원 넘게 올랐다. 구글은 IBM, 애플 같은 경쟁사를 물리치고 인공지능 분야의 리더로 떠올랐다. 롭 하이 IBM 왓슨 기술개발책입자(CTO)는 "인공지능(AI) 기술이 5~10년 안에 인간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사람의 육체노동을 기계가 대신하는 시대가 '1차 기계 시대'라면 이제 사람의 정신노동을 대신하는 '2차 기계 시대'를 맞고 있다. 기계를 대하는 인간의 자세가 중요한 시점이다. 김동근 아주대 교수는 "인공지능 시대엔 주입식 교육으로는 안 된다. 스스로 무엇이 문제인가를 고민하고 어떻게 문제를 해결해야 되는지를 탐구하는 능력을 키우는 교육이 돼야한다"고 말했다.
"세돌이 목 뒤에 점 세 개가 있어요. 비금도에서 난 돌 세 개. 그래서 세돌이래요."
전남 신안군 비금도의 초등학교 교사였던 이세돌의 아버지 고(故) 이수오씨는 바둑에 조예가 깊었다. 5살부터 바둑을 배운 이세돌은 8살에 아버지의 실력을 뛰어넘어 서울 권갑용 바둑도장으로 유학을 하게 된다. 바둑을 생각하면 세돌이라는 이름이 잘 어울린다며 아버지는 만족해 했다고 한다.
이름은 그 사람의 전부를 상징한다. 좋은 이름을 짓기 위한 노력은 배운 집안일수록 더 신경을 기울인다. 심지어 작명가에게 두툼한 복채를 전하면서까지 좋은 이름을 지으려고 심혈을 기울인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도 태어나시기 전부터 이름이 예고 되어 왔다. '예수'는 이름으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실 분'이라는 뜻이고 '그리스도'는 직분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의미이다. 유대민족은 왕이나 제사장, 그리고 선지자를 임직할 때 머리에 기름을 붓는 예식을 가졌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창조하신 후 인간에게 천지만물을 위임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천지를 창조 하신 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축복의 말씀이다.
좋은 일을 하자(Do the right thing)는 게 구글 모회사 알파벳의 모토다. 하지만 하는 일들은 철저히 비밀에 부친다. 이번 대국에서도 구글은 알파고의 사전 정보를 제공하지 않았다. 알파고가 잇따라 승리한 후에야 딥 마인드 CEO 데미스 허사비스가 트위터에 일부의 정보를 흘리며 호기심을 자극했을 뿐이다. 이득을 앞세운 인간의 모습이다.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인공지능 중심의 4차 산업혁명은 이미 시작됐다. 만반의 준비가 필요하다. 인공지능 시대에는 무엇이 변하는가를 묻지 말고 변치 않는 것을 생각하는 게 더 빠르다고 한다. 절대 진리도 변치 않는 하나님의 뜻을 먼저 헤아리면 된다.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인심은 조석으로 변하지만 하나님은 절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계는 사람이 만든다. 알파고도 사람이 만들었다. 결국은 사람이다. 좋은 사람은 좋은 문제를 낳고 나쁜 사람은 나쁜 문제를 만든다. 사람은 크게 '의인'과 '죄인'으로 나누어진다. 예수를 믿으면 의인으로 인정받게 되고 예수를 믿지 않으면 그대로 죄인으로 낙인찍힐 뿐이다. 결과는 천국이냐 지옥이냐다. 이것이 하나님의 절대주권이고 절대은혜이다. 결국은 하나님을 대하는 인간의 자세가 문제다.
▶️ 必(반드시 필)은 ❶회의문자이나 형성문자로 보는 견해도 있다. 八(팔; 나눔, 필)과 주살익(弋; 줄 달린 화살)部의 합자(合字)이다. 땅을 나눌 때 말뚝을 세워 경계를 분명히 하여 나눈다는 데서 반드시의 뜻으로 쓰인다. ❷상형문자로 必자는 '반드시'나 '틀림없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必자는 心(마음 심)자가 부수로 지정되어 있지만 '심장'이나 '마음'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왜냐하면, 必자는 물을 퍼 담는 바가지를 그린 것이기 때문이다. 갑골문에 나온 必자를 보면 바가지 주위로 물이 튄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그래서 必자는 바가지나 두레박을 뜻했었다. 하지만 후에 '반드시'나 '틀림없이'라는 뜻으로 가차(假借)되면서 지금은 여기에 木(나무 목)자를 더한 柲(자루 비)자가 뜻을 대신하고 있다. 참고로 必자는 心자에서 유래한 글자가 아니므로 글자를 쓰는 획의 순서도 다르다. 그래서 必(필)은 ①반드시, 틀림없이, 꼭 ②오로지 ③가벼이, 소홀히 ④기필하다, 이루어 내다 ⑤오로지, 전일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없어서는 아니 됨을 필요(必要), 그리 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음을 필연(必然), 반드시 없으면 안 됨을 필수(必需), 꼭 이김이나 반드시 이김을 필승(必勝), 필연이나 반드시를 필시(必是), 반드시 패함을 필패(必敗), 반드시 읽어야 함을 필독(必讀), 장차 반드시 이름이나 필연적으로 그렇게 됨을 필지(必至), 반드시 죽임 또는 그런 마음가짐을 필살(必殺), 꼭 얻음 또는 꼭 자기의 물건이 됨을 필득(必得), 필요하게 씀을 필용(必用), 반드시나 틀림없이 꼭을 필위(必爲), 꼭 그리 됨을 필정(必定), 반드시 명중함을 필중(必中), 반드시 앎을 필지(必知), 우편물 따위가 정해진 기일까지 틀림없이 도착함을 필착(必着), 꼭 이루기를 기약함을 기필(期必), 다른 방도를 취하지 아니하고 어찌 꼭 또는 어찌하여 반드시를 하필(何必), 필요가 없음을 불필(不必), 생각하건대 반드시를 상필(想必), 다른 방도를 취하지 아니하고 어찌 꼭을 해필(奚必), 죽기를 각오하면 살 것이다는 뜻으로 이순신 장군의 임진왜란 임전훈을 일컫는 말을 필사즉생(必死則生), 살고자 하면 죽는다는 뜻으로 이순신 장군의 임진왜란 임전훈을 일컫는 말을 필생즉사(必生則死), 반드시 무슨 까닭이 있음을 이르는 말을 필유사단(必有事端), 틀림 없이 꼭 망하고야 맒이나 패멸을 면할 길이 없음을 일컫는 말을 필망내이(必亡乃已), 반드시 무슨 까닭이 있음을 이르는 말을 필유곡절(必有曲折), 품은 원망을 반드시 풀어 없애고자 애씀을 일컫는 말을 필욕감심(必欲甘心), 결코 이러할 이치가 없음을 일컫는 말을 필무시리(必無是理), 아내는 반드시 남편의 뜻을 좇아야 한다는 말을 여필종부(女必從夫), 생명이 있는 것은 반드시 죽게 마련이라는 뜻으로 불교에서 세상만사가 덧없음을 이르는 말을 생자필멸(生者必滅), 처음에는 시비 곡직을 가리지 못하여 그릇되더라도 모든 일은 결국에 가서는 반드시 정리로 돌아감을 일컫는 말을 사필귀정(事必歸正), 헤어진 사람은 언젠가 반드시 돌아오게 된다는 말을 거자필반(去者必返), 덕이 있으면 따르는 사람이 있어 외롭지 않음을 이르는 말을 덕필유린(德必有隣), 누구나 허물이 있는 것이니 허물을 알면 즉시 고쳐야 함을 이르는 말을 지과필개(知過必改), 세상일은 무상하여 한번 성한 것은 반드시 쇠하게 마련이라는 말을 성자필쇠(盛者必衰), 어찌 꼭 이익만을 말하는가 라는 뜻으로 오직 인의에 입각해서 일을 하면 이익을 추구하지 않더라도 이익이 돌아온다는 말을 하필왈이(何必曰利), 황하가 수없이 꺾여 흘러가도 결국은 동쪽으로 흘러간다는 뜻으로 결국은 본뜻대로 됨을 이르는 말 또는 충신의 절개는 꺾을 수 없다는 말을 만절필동(萬折必東) 등에 쓰인다.
▶️ 待(기다릴 대)는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두인변(彳; 걷다, 자축거리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寺(사, 대)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寸(촌)은 손, 寺(사, 대)는 손에 물건을 가짐으로, 가만히 멈춰 있음과 손으로 무엇인가 함을 나타낸다. 두인변(彳; 걷다, 자축거리다)部는 행동하는 일, 즉 무엇인가 행동하기 위하여 준비를 갖추고 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일을 나타낸다. ❷회의문자로 待자는 '기다리다'나 '대우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待자는 彳(조금 걸을 척)자와 寺(절 사)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중국이 불교를 받아들이기 이전까지는 寺자가 '관청'이라는 뜻으로 쓰였었다. 待자는 이렇게 '관청'을 뜻하던 寺자에 彳자가 결합한 것으로 '관청을 가다'라는 뜻으로 만들어졌었다. 그런데 지금의 待자는 왜 '기다리다'라는 뜻을 갖게 된 것일까? 관청은 행정을 담당하던 곳이었으나 업무를 처리하는 속도가 매우 더디었다. 그래서 待자는 '관청을 가다'를 뜻하다가 후에 '기다리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待(대)는 ①기다리다 ②대비하다, 갖추어 놓고 기다리다 ③대접하다, 대우하다 ④모시다, 시중들다 ⑤돕다, 거들다 ⑥의지하다, 기대다 ⑦더하다, 더해 주다 ⑧저축하다, 비축하다 ⑨기대(期待)를 걸다 ⑩지속하다, 지탱하다 ⑪임용하다 ⑫막다, 방비하다 ⑬때, 기다리는 때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손님을 맞음으로 음식을 차려서 손님을 대우함을 대접(待接), 접대로 예의를 갖추어 대함을 대우(待遇), 기회가 오기를 기다림을 대기(待機), 위험이나 난을 피하여 기다리는 일을 대피(待避), 바라고 기다림을 대망(待望), 약속을 기다림을 대기(待期), 명령을 기다림을 대령(待令), 관원이 과실이 있을 때에 처분의 명령을 기다림을 대명(待命), 죄인이 처벌을 기다림을 대죄(待罪), 손님을 대접함을 대객(待客), 시기를 기다림을 대시(待時), 병세가 대단하여 살아날 가망이 없게 됨을 대변(待變), 사람을 기다림을 대인(待人), 반갑게 맞아 대접함을 환대(歡待), 희망을 가지고 기약한 것을 기다림을 기대(期待), 몹시 괴롭히거나 사납게 대우함을 학대(虐待), 푸대접으로 소홀히 대접함을 홀대(忽待), 특별히 잘 대우함을 우대(優待), 업신여기어서 푸대접함을 천대(賤待), 매우 기다림을 고대(苦待), 사람을 불러서 대접함을 초대(招待), 손을 맞아서 대접함을 접대(接待), 정성을 들이지 않고 아무렇게나 하는 대접을 냉대(冷待), 후하게 대접함 또는 그러한 대접을 후대(厚待), 너그럽게 대접함을 관대(寬待), 높이 받들어 대접하는 것을 존대(尊待), 손님을 대접함을 객대(客待), 예로써 정중히 맞음을 예대(禮待), 불친절한 대우를 박대(薄待), 그루터기를 지켜 토끼를 기다린다는 뜻으로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없어 구습과 전례만 고집함을 일컫는 말을 수주대토(守株待兔), 학처럼 목을 길게 빼고 기다린다는 뜻으로 몹시 기다림을 이르는 말을 학수고대(鶴首苦待), 거적을 깔고 엎드려 벌 주기를 기다린다는 뜻으로 죄과에 대한 처분을 기다림을 이르는 말을 석고대죄(席藁待罪), 오래 서서 분부를 기다린다는 뜻으로 권문세가에 빌붙어 이익을 얻고자 하는 사람을 조롱해 이르는 말을 장립대명(長立待命), 세월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는 뜻으로 세월을 아껴라는 의미의 말을 세월부대인(歲月不待人), 어찌 명년을 기다리랴의 뜻으로 기다리기가 매우 지루함을 이르는 말을 하대명년(何待明年), 가만히 앉아서 죽기만을 기다린다는 뜻으로 처지가 몹시 궁박하여 어찌할 대책도 강구할 길이 없어 될 대로 되라는 태도로 기다림을 이르는 말을 좌이대사(坐而待死), 창을 베고 기다린다는 뜻으로 항상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는 군인의 자세를 비유하는 말을 침과이대(枕戈以待), 정당한 이유없이 남보다 나쁜 대우를 함 또는 그 차별을 두고 하는 대우를 일컫는 말을 차별대우(差別待遇), 말에 기대어 서서 기다리는 동안이라는 뜻으로 다른 사람의 빠르게 잘 짓는 글재주를 부러워하여 이르는 말을 의마가대(倚馬可待), 인정없이 몹시 모질게 대함을 일컫는 말을 문전박대(門前薄待), 편안함으로써 피로해지기를 기다린다는 뜻으로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여 전력을 비축하고 나서 피로해진 적을 상대한다는 말을 이일대로(以佚待勞) 등에 쓰인다.
▶️ 人(사람 인)은 ❶상형문자로 亻(인)은 동자(同字)이다. 사람이 허리를 굽히고 서 있는 것을 옆에서 본 모양을 본뜬 글자. 옛날에는 사람을 나타내는 글자를 여러 가지 모양으로 썼으나 뜻의 구별은 없었다. ❷상형문자로 人자는 '사람'이나 '인간'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人자는 한자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글자이기도 하다. 상용한자에서 人자가 부수로 쓰인 글자만 해도 88자가 있을 정도로 고대 중국인들은 人자를 응용해 다양한 글자를 만들어냈다. 이전에는 人자가 두 사람이 등을 서로 맞대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라고 해석을 했었지만, 갑골문에 나온 人자를 보면 팔을 지긋이 내리고 있는 사람을 그린 것이었다. 소전에서는 팔이 좀 더 늘어진 모습으로 바뀌게 되어 지금의 人자가 되었다. 이처럼 人자는 사람을 그린 것이기 때문에 부수로 쓰일 때는 주로 사람의 행동이나 신체의 모습, 성품과 관련된 의미를 전달하게 된다. 그래서 人(인)은 (1)사람 (2)어떤 명사(名詞) 아래 쓰이어, 그러한 사람을 나타내는 말 등의 뜻으로 ①사람, 인간(人間) ②다른 사람, 타인(他人), 남 ③딴 사람 ④그 사람 ⑤남자(男子) ⑥어른, 성인(成人) ⑦백성(百姓) ⑧인격(人格) ⑨낯, 체면(體面), 명예(名譽) ⑩사람의 품성(稟性), 사람됨 ⑪몸, 건강(健康), 의식(意識) ⑫아랫사람, 부하(部下), 동류(同類)의 사람 ⑬어떤 특정한 일에 종사(從事)하는 사람 ⑭일손, 인재(人才)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어진 사람 인(儿),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짐승 수(兽), 짐승 수(獣), 짐승 수(獸), 짐승 축(畜)이다. 용례로는 뛰어난 사람이나 인재를 인물(人物), 안부를 묻거나 공경의 뜻을 표하는 일을 인사(人事), 사람으로서의 권리를 인권(人權), 한 나라 또는 일정 지역에 사는 사람의 총수를 인구(人口), 세상 사람의 좋은 평판을 인기(人氣), 사람을 다른 동물과 구별하여 이르는 말을 인류(人類), 사람의 힘이나 사람의 능력을 인력(人力), 이 세상에서의 인간 생활을 인생(人生), 학식과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인재(人材), 사람의 수효를 인원(人員), 사람으로서의 됨됨이나 사람의 품격을 인격(人格), 사람에 관한 것을 인적(人的), 사람을 가리어 뽑음을 인선(人選), 사람의 힘이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일을 인위(人爲), 사람의 몸을 인체(人體), 사람의 얼굴의 생김새를 인상(人相), 한 사람 한 사람이나 각자를 개인(個人), 나이가 많은 사람을 노인(老人), 남의 아내의 높임말을 부인(夫人), 결혼한 여자를 부인(婦人), 죽은 사람을 고인(故人), 한집안 사람을 가인(家人), 장사하는 사람을 상인(商人), 다른 사람을 타인(他人), 널리 세상 사람의 이야깃거리가 됨을 일컫는 말을 인구회자(人口膾炙), 인간 생활에 있어서 겪는 중대한 일을 이르는 말을 인륜대사(人倫大事), 사람은 죽고 집은 결딴남 아주 망해 버림을 이르는 말을 인망가폐(人亡家廢), 사람의 목숨은 하늘에 있다는 뜻으로 사람이 살고 죽는 것이나 오래 살고 못 살고 하는 것이 다 하늘에 달려 있어 사람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음을 이르는 말을 인명재천(人命在天), 사람의 산과 사람의 바다라는 뜻으로 사람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모인 모양을 이르는 말을 인산인해(人山人海), 사람마다 마음이 다 다른 것은 얼굴 모양이 저마다 다른 것과 같음을 이르는 말을 인심여면(人心如面), 여러 사람 중에 뛰어나게 잘난 사람을 두고 이르는 말을 인중사자(人中獅子), 여러 사람 중에 가장 못난 사람을 이르는 말을 인중지말(人中之末), 사람의 죽음을 몹시 슬퍼함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인금지탄(人琴之歎),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뜻으로 사람의 삶이 헛되지 아니하면 그 이름이 길이 남음을 이르는 말을 인사유명(人死留名), 사람은 곤궁하면 근본으로 돌아간다는 뜻으로 사람은 궁해지면 부모를 생각하게 됨을 이르는 말을 인궁반본(人窮反本), 사람이면서 사람이 아니라는 뜻으로 사람의 도리를 벗어난 사람을 일컫는 말을 인비인(人非人), 인생이 덧없음을 이르는 말을 인생무상(人生無常), 사람의 근본은 부지런함에 있음을 이르는 말을 인생재근(人生在勤), 인생은 아침 이슬과 같이 짧고 덧없다는 말을 인생조로(人生朝露), 남의 신상에 관한 일을 들어 비난함을 이르는 말을 인신공격(人身攻擊), 아주 못된 사람의 씨알머리라는 뜻으로 태도나 행실이 사람답지 아니하고 막된 사람을 욕하는 말을 인종지말(人種之末), 남이 굶주리면 자기가 굶주리게 한 것과 같이 생각한다는 뜻으로 다른 사람의 고통을 자기의 고통으로 여겨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최선을 다함을 이르는 말을 인기기기(人飢己飢), 인마의 왕래가 빈번하여 잇닿았다는 뜻으로 번화한 도시를 이르는 말을 인마낙역(人馬絡繹), 얼굴은 사람의 모습을 하였으나 마음은 짐승과 같다는 뜻으로 남의 은혜를 모름 또는 마음이 몹시 흉악함을 이르는 말을 인면수심(人面獸心), 사람은 목석이 아니라는 뜻으로 사람은 모두 희로애락의 감정을 가지고 있으며 목석과 같이 무정하지 않음을 이르는 말을 인비목석(人非木石), 정신을 잃고 의식을 모름이란 뜻으로 사람으로서의 예절을 차릴 줄 모름을 이르는 말을 인사불성(人事不省) 등에 쓰인다.
▶️ 而(말 이을 이, 능히 능)는 ❶상형문자로 턱 수염의 모양으로, 구레나룻 즉, 귀밑에서 턱까지 잇따라 난 수염을 말한다. 음(音)을 빌어 어조사로도 쓰인다. ❷상형문자로 而자는 '말을 잇다'나 '자네', '~로서'와 같은 뜻으로 쓰이는 글자이다. 而자의 갑골문을 보면 턱 아래에 길게 드리워진 수염이 그려져 있었다. 그래서 而자는 본래 '턱수염'이라는 뜻으로 쓰였었다. 그러나 지금의 而자는 '자네'나 '그대'처럼 인칭대명사로 쓰이거나 '~로써'나 '~하면서'와 같은 접속사로 가차(假借)되어 있다. 하지만 而자가 부수 역할을 할 때는 여전히 '턱수염'과 관련된 의미를 전달한다. 그래서 而(이, 능)는 ①말을 잇다 ②같다 ③너, 자네, 그대 ④구레나룻(귀밑에서 턱까지 잇따라 난 수염) ⑤만약(萬若), 만일 ⑥뿐, 따름 ⑦그리고 ⑧~로서, ~에 ⑨~하면서 ⑩그러나, 그런데도, 그리고 ⓐ능(能)히(능) ⓑ재능(才能), 능력(能力)(능)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30세를 일컬는 말을 이립(而立), 이제 와서를 일컫는 말을 이금(而今), 지금부터를 일컫는 말을 이후(而後), 그러나 또는 그러고 나서를 이르는 말을 연이(然而), 이로부터 앞으로 차후라는 말을 이금이후(而今以後), 온화한 낯빛을 이르는 말을 이강지색(而康之色), 목이 말라야 비로소 샘을 판다는 뜻으로 미리 준비를 하지 않고 있다가 일이 지나간 뒤에는 아무리 서둘러 봐도 아무 소용이 없음 또는 자기가 급해야 서둘러서 일을 함을 이르는 말을 갈이천정(渴而穿井), 겉으로 보기에는 비슷한 듯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아주 다른 것을 이르는 말을 사이비(似而非), 공경하되 가까이하지는 아니함 또는 겉으로는 공경하는 체하면서 속으로는 꺼리어 멀리함을 이르는 말을 경이원지(敬而遠之), 뾰족한 송곳 끝이 주머니를 뚫고 나온다는 뜻으로 뛰어나고 훌륭한 재능이 밖으로 드러남을 이르는 말을 영탈이출(穎脫而出), 서른 살이 되어 자립한다는 뜻으로 학문이나 견식이 일가를 이루어 도덕 상으로 흔들리지 아니함을 이르는 말을 삼십이립(三十而立), 베개를 높이 하고 누웠다는 뜻으로 마음을 편안히 하고 잠잘 수 있음을 이르는 말을 고침이와(高枕而臥), 형체를 초월한 영역에 관한 과학이라는 뜻으로 철학을 일컫는 말을 형이상학(形而上學), 성인의 덕이 커서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유능한 인재를 얻어 천하가 저절로 잘 다스려짐을 이르는 말을 무위이치(無爲而治) 등에 쓰인다.
▶️ 顯(나타날 현)은 ❶형성문자로 顕(현)의 본자(本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머리 혈(頁; 머리)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에 감다의 뜻을 나타내는 글자 㬎(현)으로 이루어졌다. 머리에 감은 아름다운 장식물, 전(轉)하여 '매우 밝다'의 뜻이 있다. ❷회의문자로 顯자는 '나타나다'나 '드러나다'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顯자는 㬎(드러날 현)자과 頁(머리 혈)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㬎자는 햇볕에 실타래를 널어 말리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드러나다'나 '밝다'는 뜻을 갖고 있다. 顯자의 금문을 보면 햇빛에 널은 실타래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태양이 밝게 빛나는 곳에서는 사물이 제대로 모습을 드러낸다는 뜻이다. 그래서 顯(현)은 ①나타나다 ②드러나다 ③뚜렷하다 ④명확하다 ⑤분명하다 ⑥명백하다 ⑦높다 ⑧귀하다 ⑨명성(名聲)이 있다 ⑩지위(地位)가 높다 ⑪밝다 ⑫돌아가신 부모(父母)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로 나타날 현(現), 볼 시(視), 나타날 저(著), 바라볼 조(眺) 볼 견(見), 볼 관(觀)이 있고,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빽빽할 밀(密), 숨을 은(隱)이 있다. 용례로는 뚜렷이 심하게 드러남을 현저(顯著), 나타나 있음을 현재(顯在), 지위와 이름이 함께 높아서 드러남을 현달(顯達), 큰 병이나 사고를 현경(顯警), 이름이 세상에 드러남을 현명(顯名), 뚜렷이 드러나 보이는 색깔을 현색(顯色), 지위가 드러나게 높음을 현귀(顯貴), 두드러진 공로 또는 공적을 세상에 드러냄을 현공(顯功), 지금 살아 있는 세상을 현계(顯界), 겉으로 드러남을 현로(顯露), 나타남과 나타나지 않음을 현부(顯否), 나타내 보임을 현시(顯示), 이름이나 지위를 세상에 높이 드러냄을 현양(顯揚), 분명하게 나타나거나 알려지는 정도가 뚜렷함을 현연(顯然), 올바른 법리를 나타내어 보임을 현정(顯正), 두드러지게 드러나거나 드러냄을 현출(顯出), 뚜렷이 나타나거나 나타냄을 현현(顯現), 존귀하고 이름이 높음을 귀현(貴顯), 열어서 드러냄을 개현(開顯), 뚜렷이 나타남을 명현(明顯), 죽은 사람 영혼의 높임말을 영현(英顯), 불교에서 부처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사악한 도리를 깨뜨리고 바른 도리를 드러낸다는 뜻으로 그릇된 생각을 버리고 올바른 도리를 행함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파사현정(破邪顯正), 문득 나타났다가 문득 없어짐을 이르는 말을 홀현홀몰(忽顯忽沒) 등에 쓰인다. 그리고 신주神主나 축문祝文에서 돌아간 아버지를 현고(顯考), 어머니를 현비(顯妣), 증조 할아버지를 현증조고(顯曾祖考), 고조 할아버지를 현고조고(顯高祖考)라고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