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 42기 중 첫 번째로 김포의 장릉을 소개합니다.
순서는 제가 직접 다녀왔던 순서대로 하겠습니다.
추존왕(追尊王)은 생전에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었으나, 사후에 추존 절차를 거쳐 국왕으로 묘호와 시호를 받은 인물이다.
주로 다음과 같은 경우에 왕으로 추존되었다.
1. 차기 국왕의 친부인 경우
왕위 계승자가 정식 국왕의 직계 자손이 아닌 방계에서 나와 즉위했을 때, 돌아가신 친아버지를 왕으로 높여 모시는 경우다.
대표적으로 조선시대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정원군), 철종의 아버지인 전계대원군 등이 있다.
2..세자 상태에서 사망한 경우
왕세자나 세손으로 책봉되었으나 왕위에 오르기 전에 일찍 사망한 후, 훗날 그의 아들이나 친족이 왕위에 오른 뒤 아버지를 왕으로 추존하는 경우다.
대표적으로 덕종(의경세자, 성종의 아버지), 진종(효장세자, 정조의 양부), 장조(사도세자, 정조의 친부), 문조(효명세자, 헌종의 아버지) 등이 있다.
3. 왕조 창업자의 조상인 경우
새로운 왕조를 연 태조가 자신의 정통성을 강화하고 가문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돌아가신 직계 조상들을 왕으로 높이는 경우다.
묘호와 시호는 동아시아 전통 사회에서 왕이나 왕비, 신하 등이 사망한 후 그 인물의 업적과 덕을 기리기 위해 붙인 호칭이다.
1. 묘호 (廟號)
의미: 왕이 사망한 후 종묘(宗廟)에 신주를 모실 때 붙이는 호칭이다.
구성: 보통 두 글자로 이루어지며, 뒤에 '조(祖)'나 '종(宗)'을 붙인다.
조(祖): 왕조를 창업했거나, 나라의 큰 위기를 극복하여 공이 큰 왕에게 주로 붙인다. (예: 태조, 세조, 선조, 인조)
종(宗): 왕위를 정통으로 계승하여 정치를 잘하고 덕을 쌓은 왕에게 주로 붙인다. (예: 태종, 세종, 성종, 숙종)
특징: 모든 왕에게 붙는 것이 아니라, 종묘에 신주가 모셔지는 왕에게만 부여된다. 연산군이나 광해군처럼 폐위된 왕은 묘호를 받지 못했다.
2. 시호 (諡號)
의미: 왕, 왕비, 또는 국가에 큰 공을 세운 신하가 사망했을 때 그 사람의 일생을 평가하여 국가에서 내리는 호칭이다.
구성: 그 인물의 업적이나 품성에 어울리는 한자를 조합하여 만든다.
세종의 경우 '세종'은 묘호이고, 정식 시호는 '장헌영문지무인성명효대왕(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이다.
신하의 경우 2글자의 시호를 받았다. (예: 이순신의 시호는 '충무(忠武)', 류성룡의 시호는 '문충(文忠)')
특징: 왕뿐만 아니라 신하나 양반 사대부도 국가나 임금으로부터 시호를 받을 수 있었다.
장릉(章陵, 추존 원종과 인헌왕후)
위치 : 경기 김포시 장릉로 79
조성 연도 : 1626년(인조 4), 1627년(인조 5), 1632년(인조 10)
왕릉 형식 : 쌍릉
쌍릉(雙陵)
쌍릉은 왕과 왕비의 봉분을 하나의 곡장 안에 나란히 조성한 능으로, 우상좌하(右上左下, 오른쪽에 왕, 왼쪽에 왕비)의 원칙에 따라 조성하였다. 대표적으로 명종 강릉, 영조 원릉, 철종 예릉 등 9기의 능이 있다.
▷ 장릉(章陵) 이야기
장릉은 왕으로 추존된 원종과 인헌왕후 구씨의 능이다. 장릉은 하나의 곡장 안에 봉분을 나란히 배치한 쌍릉(雙陵)의 형식으로, 앞에서 능을 바라보았을 때 왼쪽(서쪽)이 원종, 오른쪽(동쪽)이 인헌왕후의 능이다.
1619년(광해군 11) 선조의 아들 정원군(정원대원군, 원종)이 세상을 떠나자, 다음 해 양주 곡촌리(현 남양주시 금곡동)에 묘를 조성하였다. 1626년(인조 4) 계운궁(연주부부인, 인헌왕후)이 세상을 떠나자 김포 성산을 무덤 자리로 정하고, 무덤의 이름을 능보다는 낮고 묘보다는 높게 정하여 중국의 예에 따라 ‘원(園)’으로 정하였다. 이때 계운궁의 무덤 이름을 육경원(毓慶園)이라 하였고, 정원대원군의 무덤 이름을 흥경원(興慶園)이라 하였다. 이는 조선시대에 처음으로 왕의 생부모의 무덤을 ‘원’으로 정한 최초의 사례이다. 이후 1627년(인조 5) 흥경원과 육경원을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1632년(인조 10) 정원대원군이 원종으로 추존되면서 능의 이름을 장릉이라 하였고, 왕릉 제도에 맞게 무석인, 석마, 석양과 석호 등을 추가로 세웠다.
장릉 능침의 봉분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고 원의 형식에 따라 호석(護石)만 둘렀는데, 이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세우면 현궁(玄宮, 관을 묻는 방)의 훼손을 우려하였기 때문이다. 능침 아래에는 정자각과 비각이 있고, 비각 옆에는 땅에 묻혀있다가 노출되어 발굴·수습된 육경원 표석 받침돌이 있다.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어진 향로와 어로는 직선으로 경사가 졌으며, 지형에 따라 중간에 계단을 설치하였다. 재실 옆 연지(蓮池)는 현재 조선왕릉에 남아있는 연지 중 그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 원종(元宗) 이야기
원종(재세 : 1580년 음력 6월 22일 ~ 1619년 음력 12월 29일)은 선조와 인빈 김씨의 셋째 아들로 1580년(선조 13) 경복궁 별전에서 태어났다. 1587년(선조 20) 정원군(定遠君)에 봉해졌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버지 선조를 모신 공으로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후 셋째 아들 능창군이 역모죄로 죽임을 당하자, 그의 화병으로 1619년(광해군 11)에 40세로 세상을 떠났다.
1623년(인조 1) 첫째 아들 능양군이 반정으로 광해군을 폐위하고 왕위에 오르자 왕의 생부로서 정원대원군(定遠大院君)으로 신분이 높아졌고, 1632년(인조 10) 왕으로 추존되어 묘호(廟號, 종묘에 붙여지는 이름)를 원종이라 하였다.
인조는 처음 할아버지 선조의 아들로 왕위에 올랐는데, 이는 인조 본인의 정통성에 문제가 되었다. 재위 초반부터 아버지를 왕으로 추존하려고 하였으나, 대신들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하였다가 재위 10년 만에 아버지를 왕으로 추존하여 정통성(선조(祖父)-원종(父)-인조) 문제를 정리하였다.
▷ 인헌왕후(仁獻王后) 이야기
인헌왕후 구씨(재세 : 1578년 음력 4월 17일 ~ 1626년 음력 1월 14일)는 본관이 능성인 능안부원군 구사맹과 평산부부인 신씨의 다섯째 딸로 1578년(선조 11)에 태어났다. 1590년(선조 23)에 선조의 아들 정원군(원종)과 혼인하여 연주군부인(連珠郡夫人)이 되었고, 원종과의 사이에서 세 아들(인조, 능원대군, 능창대군)을 낳았다.
1623년(인조 1) 첫째 아들 인조가 반정으로 왕위에 오르자 계운궁(啟運宮) 연주부부인(連珠府夫人)으로 신분이 높아졌고, 1626년(인조 4) 경덕궁(현 경희궁) 회상전에서 49세로 세상을 떠났다. 1632년(인조 10) 원종이 왕으로 추존되자 인헌왕후로 추존되었다.
또한 모든 왕릉에는 같은 시설물들이 조성되어 있다.
가운데 돌길은 향로(향이 지나가는 길) 혹은 神道라 불리우는 길이고, 우측의 작은 돌길은 어로 혹은 王道라 하여 왕이 위를 따라가도록 만든 길임.
관람객들도 다 왕도로 관람하기를 권하고 있음
출입구 - 홍살문 혹은 홍살각이라 함.
조선의 궁궐이 정문(政門)과 정전(政殿)이 한 몸이듯 모든 릉은 앞의 홍살문과 뒤의 정자각 그리고 陵 세곳이 세트를 이루고 있음
능마다 하나씩 있는 관리사무실, 재실이라 부름
실제로 능마다 묘지킴이 공복이 상주하며 사시사철 묘를 돌보았다 함
첫댓글 확실히 어제랑 다르게 글도 커지고 사진도 확대되니 보기에 편하네요. 저도 늙어서 나름의 버킷리스트 중 한국에 있는 조선시대 왕릉을
직접가보고 블로그에 글도 남기는게 목표인데 사진으로 보니 한번은 꼭 가봐야 겠다는 생각이 더 확실하게 느껴지네요.
문화재 답사를 좋아해서 왕릉 42기, "산사, 한국의 산지 정원"등 유네스코문화유산답사 등을 다 다녀왔던 걸 연재해볼까 합니다. 즐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봤습니다
역사적 사실들을 알아서 좋습니다
매일 연재하겠습니다 ^^
현장에 가시면 코앞에 3400가구44개동 20층 아파트 공사중인거 답답합니다
그러게요 ㅠㅠ
심각합니다.
의견을 적었다가 지웠네요...
여기 쓰면 안될 듯해서요
국민학교 6년동안 소풍 간 곳.. ㅋㅋ
왕릉 근처의 학교들은 주로 왕릉으로 가더군요.
소풍장소로는 최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