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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된 고려공산당 창당 대회
(김홍일의 주장하는 자유시참변 원인을 살펴보면) 이동휘계의 상해파는 대한국민의회와 결탁한 이르쿠츠크파와의 치열한 분쟁으로 결국 1921년 3월에 소집될 예정이었던 총회는 할 수 없이 5월로 미룰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1921년 3월 당시의 추세로는 상해파가 우세하였기 때문에 이르쿠츠크파가 농간을 부린 것이다. 또한 총회 소집 장소도 치타로 하자는 주장이 나돌던 판이라 이르쿠츠크파 측에선 마땅치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이르쿠츠크파가 주장한 대로 총회는 1921년 5월경에, 그리고 장소는 이르쿠츠크에서 개최하게 되었으니 우선 첫 단계에서 이르쿠츠크파가 승리한 셈이다. 이르쿠츠크파는 그 여세를 몰아 코민테른 원동 책임자인 슈먀츠키(Шумяцкий) 를 업고 대회 참가 대표에 관한 자격 심사를 하자고 제의했던 바, 동양비서부(혹은 달뷰라) 당국자가 그 제안을 받아들임으로써 결국 이르쿠츠크파의 일방적인 심사가 진행되었으니 사실 그 대회의 승패는 사전에 이미 결정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때문에 나 보고 먼저 시베리아에 가서 기다리라던 노백린은 물론 이동휘도 화가 나서 끝내 대회 참가를 거부했다.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장 슈먀츠키가 달뷰라의 간부를 겸임한 적도 있다.) 그리하여 대회는 누구나 예상했던 대로 이르쿠츠크파의 압도적인 승리로 막을 내림으로써 박애와 장도정 등엔 반당이란 죄명을 씌워 징역형을 선언하고 기타 상해파 인사들에게 구류 처분을 내렸다. 대회에서 결정된 당명인 고려공산당의 정식 대표로는 한명세와 남만춘 그리고 장건상 등을 선발하여 그들을 모스크바에 파견시켰으며, 또한 대회에서의 결정에 따라 소련의 까란다리시비리(Каландаришвили Несто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1876년 출생 ~ 1922년 사망)와 최고려 그리고 류동열 등 세 사람을 군정위원으로 선임하여 국제군을 직접 지휘하도록 자유시로 파견하였다. 사태가 그런즉 상해파는 대회에서의 참패로 맥이 풀린 데다가 그 위에 가장 중요한 군사력마저 속절없이 반대파에게 빼앗길 위기에 봉착했으니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그들은 모스크바의 중앙정부에 대해 대회가 불법이라고 통보하고 무효를 주장하였던 바 모스크바 당국에서는 동양비서부(혹은 달뷰라(러시아공산당 중앙위원회 극동국))의 책임자를 교체했다. (※김홍일의 주장은 틀리는 부분이 다수 있는데 실제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장 슈먀츠키가 교체된 것은 1921. 6. 28. 자유시참변이후 독립군들의 반발 때문이다.) 이상 말한 것이 자유시 사건을 발발케한 원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며, 그 직접적인 원인은 사할린부대와 자유대대간의 충돌 사건이다. ... 중략... (김홍일 자서전. 대륙의 분노 116쪽) 당시 소련정부측에서는 독립군들의 연해주 진출을 적극 방지하지 않으면 안될 그런 딱한 입장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소위 그 니항사건 이후 즉 1920년 가을부터 열렸다가 1921년 10월경에 결렬된 대련회의에서 일본군이 그들의 철병 조건의 하나로 시베리아 한인 독립군의 해산을 강경히 요구한 바가 있었고 또한 소련정부 주재 중국 북경 대표인 카라한과 일본 공사 방택유길(芳澤有吉)간에 어업협정을 맺어 앞으로 다시는 니항사건과 같은 그런 불상사를 방지하여 어로 활동을 보장해 줘야 한다는 데 합의를 본 탓이다. 그 협정의 체결석상에서 일본 대표 방택유길이란 자는 니항사건의 도발자는 분명히 한인 독립군들이라고 생떼를 쓰면서 시베리아 영내의 한인 무장부대들을 즉각 해산시키라고 소련측에 강경히 요구했던 것이다....(중략) 러시아령에 있는... 그 때 군정위원회를 통하여 전독립군부대들을 무장해제시켜 이르쿠츠크로 강제 이송키로 결정을 본 것이다. (※김홍일의 주장은 근래 공개되는 사실과 다른 점이 있으나, 오늘날 남한에서 유사한 주장이 인용되고 있어 참고하려고 올리는 것입니다. 최근 갑자기 자유시 참변과 관련하여 사실인 것으로 인정되는 이지택, 최호림,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의 주장들은 2000년 초반까지는 남한에서 주류 이론이 아니었으며, 김홍일과 이범석 등의 주장들이 더 신뢰성 있는 자료로 인용되기도 하였습니다.) |
러시아령 독립군 부대의 지도권을 코민테른 동양비서부로 이관
한인 보병자유대대 및 간도•만주•연해주 지방 양 의병대 대표로 김하석(金夏錫), 최고려, 김규찬(金奎燦) 등 6명이 1921년 2월 27일에 자유시를 출발하여 치타에 도착한 것은 그해 3월 8일경이었다고 한다. (※6명은 간도 총군부 및 국민군 대표와 한인보병자유대대의 대표라 한다.)
(※필자가 자유시참변과 관련하여 주로 참고하는 구술 진술을 남긴 000선생도 이 무렵 양파 다툼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000선생은 자유시 참변과 관련된 자료에는 한두번 밖에 등장하지 않는다. 당시에는 중요한 인물로 평가되지 않았으나, 1920년대 연해주와 1930년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중국 신문 등에는 자주 보도된다.)
이들은 (상해파인) 한인부의 간부 박애와 회담하였다. 그러나 박애와 김하석, 최고려 등은 합의를 하지 못한다.
김하석과 최고려는 자유시에서 벌어진 여러 가지 사건들을 설명하고, 어지러운 국면을 원만히 수습하도록 협의하자고 제의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회담에서도 군대의 통합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조국 독립의 목적은 동일하나 파당이 많은 양대 파의 다툼이 있던중, 당대회 소집이 일치한 명의 및 방법으로 동일한 장소에서 되지 못하고 동양비서부에서는 이르쿠츠크, 달뷰라의 한인부 잔류 인물과 상해파에서는 치타를 주장하였고, 3월 1일에 당대회를 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각 지방 공산당 조선인 대표들은 쌍방의 소집에 각응하여 치타에 40여명이 집중되었다.
그런데 상해파와 달뷰라 한인부 잔류인물들은 대회 소집장소를 블라가베셴스크로 변경하고, 한인부 관련자였던 계봉우, 김진, 장도정 등은 치타에 온 대표들을 대동하고 고려 공산당대회 소집 준비를 하였다.
그리고 군사대표회를 소집하려고 블라가베셴스크로 향하였다는 것을 알아차린 이르쿠츠크파에서는 즉시 박애에게 사실임을 질문하니 사실로 확인되었다고 한다.
(간혹 아무르주의 주도인 블라가베셴스크(Благовещенск)를 흑하로 잘못 기재한 자료도 있다. 이범석도 자신의 자서전 우등불에서 블라가베셴스크를 '흑하시'라고 주장하고 자유시참변을 '흑하사변'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중국령 흑하시와 러시아령 블라가베셴스크는 다른 도시이며, 두 도시 모두 자유시참변이 일어난 '자유시'가 아니다.)
(※ 중화인민공화국 흑하시와 마주보는 러시아령 아무르주의 주도인 블라가베셴스크는 1921년경 전혀 다른 도시였다.
제야강일대에 있는 암각화 시대나 단군 할아버지 때부터 한국 역사 어디에도 동일한 도시라는 증거는 없다.
더군다나 자유시(러시아명 스바보드니)는 블라가베셴스크와는 다른 도시이다. 자유시 참변을 일으킨 자들이 참극을 축소하기 위해 전혀 다른 도시의 명칭을 사용한 것이다. '흑하사변'이라고 하면 전세계적으로 중국과 러시아간의 잦은 국경분쟁으로 흑하시나 애혼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을 가르킨다.
자유시 참변은 자유시에서 일어난 것이며, '흑하사변'이라는 사건의 진실을 밝히겠다고 적고서는 자유시의 참극을 속이기 위해 다른 명칭을 지어낸 것이 명백하다. 이범석도 자서전 '우등불'에서 '흑하시가 블라가베셴스크이며 자유시 참변이 일어난 곳'이라고 하지만 3개의 도시 모두 다른 지역이다.)
청나라 강희제 때 발생한 알바진 요새 전투도. 청나라 때 지도를 봐도 흑하시와 블라가베셴스크는 다른 도시였다.
상해파에서는 공산당대회에 관하여는 계봉우와 김진에게 군사대회에 관하여는 장도정에게 책임을 각단하여 파송하였다함으로 군대 대표들과 공산당 대표들은 당대회에 관한 문제와 각 독립군부대에 대한 처리를 위하여 특별당원회를 개하고 상해파 및 한인부측으로는 박애, 박밀양, 최성우를 이르쿠츠크파측으로는 이성, 김철훈 등이 당에 대한 양측의 보고를 경하고 전후 호상충돌상 숙시숙비는 오는 당대회의 판결에 부하기로하고 다만 당대회소집에 통일의 방책과 군대에 대한 응급문제 2대 안건을 아래와 같이 결정하였다고 한다.
1. 공산당대회 소집에 대하여 동양비서부와 한인부가 각자 주창을 제하는 내용은 우리 지방당원들이 이해키도 난하고 또는 상당한 이유가 당대회에서 판명되려니와 다만 주의상 혁명단체로 볼지라도 당기관을 각자 설립하라함은 원칙에 벗어날 뿐만 아니라 혁명전도에 막대한 불행의 조짐이니 일반당원은 이와 같은 이유로 동양비서부와 한인부에 건의하여 쌍방의 조화를 도함이 원만한 방침이라고 결의하고 공산당대회 조화책에 대하여 대표5인을 선정하되 김하석, 엄윤, 최고려, 최성우(당시 한인부 책임비서)로 이르쿠츠크에, 선우정으로 블라가베셴스크(Благовещенск)에 파송하기로 하고, 우선 한인부 당국의 박애는 전보로 블라가베셴스크에 파견한 장도정, 김진, 계봉우 등을 소환할 것, 상해에 대하여는 서신 또는 전보로 이 사유를 통지할 것으로 선정 또는 결정한 것으로 보여진다.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에서 인용함) 2. 군대 응급문제에 대하여는 (러시아 공산당의 허수아비인)원동공화국 군부에 교섭하기로 결의하고 교섭대표로 박애, 오하묵, 최고려, 김표돌 이상 4인으로 하였다. 그리고 총사령관은 오하묵 군정위원장은 최성우로 선정하여 해(該)군부에 교섭할 것이고 완전통일에 대하여는 또한 당대회 및 장래 군사대회에 부하여 하기로 역시 합의를 보았다고 한다 |
합의에 따라 군사 교섭대표는 극동공화국(원동정부) 군부 총사령관 에이히(Эйхе)를 면회하고 여태까지의 경과보고를 한 뒤에, 앞으로의 방침을 하달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고 한다. 극동공화국 총사령관은 자주 바뀌었지만 당시의 총사령관은 우선 박애를 향하여 대략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한다.
박애는 어떠한 주의와 무슨 방법으로 사위(事爲)를 진행하려 함인지 요령을 이해치 못하겠노라. 기왕에는 김민선(金敏先, 김인노겐치 미하일로비치)이 아니면 고려군대를 운전치 못한다 하였고 그다음에는 박창은과 그리고리예프가 상당하다 하였고, 오하묵은 절대로 부적당하다고 비방하며 또는 누차 보고까지 있음으로 나의 짐작에는 오늘날 주의변으로 군대를 지휘함에 대하여 어느정도 불만한 점이 있을까하는 의아가 있었을 뿐이였고 오하묵이는 군계에 경험이 있는 장교로 군사상 상당한 지식이 있음은 박군의 소개로서 처음 아는것이 아니며, 고려군대 장교들을 자기 임의로 좌우하고 지금 와서 오하묵이가 상당하다 하니 박군의 말은 참으로 신종(信從)치 못할 뿐 아니라 고려군대에 대하여 어떠한 낭패를 끼칠는지 모를 것이다. |
그리고 그밖의 대표들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고려군대의 다소분쟁은 자기들 내막 여하에 관한 바이어니와 현금 고려군대를 함부로 처리하다가는 고려혁명계에 대하여 막대한 책임을 담(擔)할 것이니, 금번 요구에 경솔히 응종(應從)키도 불능할 뿐 아니라, 의회정부 중앙명령에 고려혁명에 대한 원조상 제반 주책(籌策)과 지휘는 국제공산당에서 직접 관계하게 되어, 국제공산당지부로 설립된 동양비서부가 이르쿠츠크에 있는 바 고려군대에 대하여서도 그 비서부에서 인도하게 되었으므로 본 군부에서는 처리와 인도할 권리가 없음이다. (극동공화국 군부 총사령관 에이히의 말이라고 함. 에이히는 고려군대 군권은 상급부서의 합의하에 동양비서부로 이관되었다고 주장한다.) (*일부 글자를 오늘날 표현으로 변경하였습니다.) |
이르쿠츠크파의 일방적인 주장인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에 따르면 극동공화국 군대 총사령관 에이히는 (한때 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극동국 달뷰라 산하) 한인부의 일원이었던 박애를 비판했다.
그러나 극동공화국의 군부총장 에이히(Эйхе)는 극동공화국이 아닌 모스크바 공산당 정부 혹은 달뷰라의 명령에 따라 코민테른 동양비서부로 고려군대 지도권이 넘어갔으므로, 동양비서부의 지도하에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판의 협의와 대화를 통한 군대통합, 주둔지 문제 등을 해결하고, 독립군 부대의 교육을 시키고, 만일 일본군과의 전투는 극동공화국외에도 모스크바의 중앙정부, 코민테른, 달뷰라 등과도 상의할 것을 요구한 것으로 보여진다.
에이히(Эйхе)는 후임으로 극동공화국 군대 총사령관이 되는 블류헤르와는 달리 이 시기 양파의 화합을 주장한 것으로 보여지며, 특정 파를 지원하고 이르쿠츠크파에게 독립군의 군권을 넘겼다고 볼만한 행동은 하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달뷰라(러시아공산당 극동국)라는 공산당 기관 역시 등장하여 독립군 부대의 지도에 나서니,
이 무렵 독립군 부대는
(1) 극동공화국 군부 (나중에는 동양비서부와 결탁하여 이르쿠츠크파를 지지하였고, 자유시 참변 당시 2군단 휘하 부대 등을 동원해 기습한다. 군사령관이 자주 교체되었다.) (2)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동양비서부장 슈먀츠키가 이르쿠츠크파를 지지) (3) 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레닌이 상해임시정부 주로 지원) (4) 달뷰라(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극동국) :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장 슈먀츠키가 간부를 겸임하였다. 모스크바 공산당 중앙의 지시를 극동공화국에서 지도하였다. (5) 코민테른(제3국제공산당) 본부 (지노비예프, 사파라프가 상해파를 지지) (6) 극동공화국 정부 (행정수반인 크라스나쇼코프가 상해파 지지) (7) 달뷰라 소속 한인부 (한국계로 구성되었다. 상해파를 지지하였으나 해체되어 코민테른 동양비서부로 한국계 독립군부대 지도권을 넘겨준다.) |
의 지도를 받게 된 것이다.
따라서,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 김홍일의 저서, 리인섭의 기록들, 오광선 증언, 이청천 증언, 홍범도 증언, 안무 증언, 이범석 자서전, (이르쿠츠크파에 대한 일방적인 기록을 남기고, 독립운동 행적이 불확실한) 최호림의 기록, 러시아 내전기 중국 참전군 기록 등등을 살펴봤을 때 러시아측 지도 기관이 자주 바뀌며, 러시아측 지도 기관내부에서 고려군대의 지도 방향을 둘러싼 잦은 변경과 다툼이 있었다.
볼셰비키들은 처음에는 일본군과의 전투를 도와 주겠다고 하여 만주•연해주지방 독립군의 러시아령으로의 이동이 시작되었으나, 시베리아를 침략한 일제와 볼셰비키와의 교섭이 시작되자, 중립적 태도를 보이다가 1920년 4월 참변이후 일제의 공격이 강해지자, 다시 독립군들을 지원하였다.
당시 독립군들도 간도 토벌 등으로 이동할만한 곳을 찾아야 했던 절박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 무렵 시베리아를 침략해 괴뢰 정부를 수립한 일제와 극동공화국 혹은 모스크바 공산정부와의 교섭은 계속되고 있었다.
일제도 시베리아에서의 반일 파르티잔 활동의 강화와 미국, 체코군 등 연합군의 철수, 한국내에서의 3•1운동으로 인한 세계 민심의 변화, 중국의 5•4운동으로 인한 일제의 만주•대만•중국본토에 대한 침략정책 고발, 다른 연합군은 철군을 하였으나 침략주의 야욕을 버리지 못하다가 결국 1920년 2월 29일경 니항사건 등에서의 일제 침략군중 일부가 전멸, 동시베리아에서 잦은 민간인 학살로 인한 돌이킬 수 없는 러시아계 민족의 반발, 친일파와 백파들의 만행으로 인한 러시아•중국•한국 민중의 거센 반발로 계속 볼셰비키와 교섭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과 극동공화국간 1920년부터 시작되어~ 1921년 8월 21일경 열린 대련회의(大連會議) 본회담 등으로 러시아측과 일본과의 교섭이 계속 진행되었음에도, 러시아령 한국 독립군 부대에서는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간의 다툼이 쉽게 해결되지 않고, 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이 양파의 싸움은 레닌정부 및 극동공화국 정부 등과 연계를 갖고 있는 이동휘파와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에 기반을 두고 있는 문창범, 김하석 등의 이르쿠츠크파 사이의 주도권 다툼이었기에 극동공화국 군부로서는 독립군 부대 관리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 왔음을 오늘날 공개되는 러시아측 문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참고자료
구트만 아나톨리 야코블레비치(Гутман Анатолий Яковлевич, 영문명 Gutman, Anatoly Yakovlevich, 필명 Gan, A. (Anatoly) 등을 사용함, 1889년경 출생~1950년경 사망) : 1918년경 러시아 내전기 백파로 활동하였으며, 시베리아에서는 악명 높은 러시아계 친일파 셰묘노프 등과 협력하였다. 일본으로 도피후 니항사건과 관련된 책을 일본에서 출판(영문도서명 The destruction of Nikolaevsk-on-Amur : an episode in the Russian Civil War in the Far East, 1920)하고 반볼셰비키 신문을 도쿄에서 발행했다. 구트만의 책은 일본 등지에서 자주 출판된다. (한국인 이지택의 주장도 일본에서 자주 인용된다.)
그러나 현재 러시아에서는 일본 천황에게 볼셰비키를 타도해 달라는 청원서를 작성한 러시아계 친일파 102명에 대한 주장이나, 1920년 5월 22일에서 24일까지 3일간 니항 감옥에 한꺼번에 1,500여명이 수용되었으며 감옥에서만 3,000여명이 학살당하고, 결국 1만여명의 니항 주민이 학살되었다는 구트만의 주장에 대하여 반박을 거의 하지 않는다. (너무 황당한 거짓말이니 반박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지원으로 저술 활동한 적이 있는 유명한 미국 교수 존J 스테판 등이 구트만의 주장을 사실로 최근에 인용하였다.
구트만은 한국계인 박병길과 이지택 등을 상대적으로 높이 평가하여, 이르쿠츠크파의 일부가 친일파라는 상해파 독립운동가들의 주장이 일부 맞을 가능성을 뒷받침해 준다.
구춘선(具春先, 1957~1944)
김알렉산드라(Ким Александра Петровна, 1885~1918)
김홍일(金弘壹, 1898~1980) : 유명한 독립운동가
나우모프(Наумов Тихон Иванович, 1895 ~ 1920. 3. 12.) : 이르쿠츠크에서 볼셰비키에 가담. 1918년 일제 침략군과의 전투에 참여. 니항사건 당시 트리피츤 부대의 참모장으로 일본군의 기습공격으로 사망. 트리피츤 부대는 대략 100~500여명 사망으로 알려짐.
니항사건(尼港事件, Николаевский инцидент, にこうじけん)
레비제바(혹은 키야슈카) 니나 미하일로브나(Лебедева (혹은 Кияшко) Нина Михайловна, 1895 ~ 1920. 7. 9.) 1895년경 모스크바에서 출생하였다. 펜자지방에서 태어나 어린시절을 보냈다는 소리도 있다. 1914년경부터 무정부주의적 사회주의자 활동을 하였다. 동시베리아 치타에서 아들을 출산하였다는 소리가 있다. 아무르주 블라가베셴스크, 하바로프스크 등지에서 소비에트 건설에 참여하였다. 1919년 하바로프스크 인근의 아나스타시요프카(Анастасьевка) 마을에서 열린 볼셰비키 회의의 비서였다.
레비제바는 키야슈카(Кияшко)라는 성을 쓰기도 하였는데, 백파와 일제 시베리아 침략군은 키야슈카 주지사의 친척 혹은 양딸이라는 소문을 퍼트렸다. 가족관계 문서에 따르면 키야슈카 주지사와는 별 관계가 없을 가능성이 크다. 니항사건 기간중 트리피츤과 동거하였다. 1920. 7. 9. 께르비에서 트리피츤과 함께 처형되었다.
한국 독립운동사에는 트리피츤의 부인 『레베데바』라고 나오며 최호림, 이지택은 일본의 주장과 일치되게 총독(주지사)의 딸이라고 주장한다. 최호림과 이지택의 1945년 해방이후 니항 사건과 관련된 주장들은 일제침략기 일제의 주장과 일치되는 점이 많고, 오늘날 러시아 기록과는 정반대되는 경우가 많다.
마충걸
미즌(Мизин Григорий Семёнович) : 1919년경부터 사할린주 니항에서 공산주의자로 활동. 1920. 5. 24.일경 트리피츤의 지시에 의해 명령 불복종을 이유로 총살되었다.
바라비요프(Воробьёв Пётр Яковлевич) : 께르비 인근 광산에서 백파군대에 있다가 러시아 내전기 볼셰비키에 가담함. 1920년 니항사건 당시 니항 방화에 참가하였다. 께르비에서 103명 법원의 부의장으로 트리피츤을 처형후 일본측으로 도피함. 1921년 6월 6일 볼셰비키에 의해 체포되었다. 20년 강제노동형을 선고 받았다. 구트만의 책에 중요 증인으로 등장한다.
박병길(朴秉吉, 박바실리, Пак Василий, ワシリー朴. 1921. 1. 28. 일경 사망) 1918년경 일본의 시베리아 침략기 일본군이 점령했던 니항의 한인회 서기였다. 이지택, 최호림, 김창순,000 등의 대략적인 주장에 따르면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조선인 니항부대 380여명을 조직한 사람으로 니항을 평화적으로 해방시키는데 가담하였으며, 성품이 원만하고 살인과 약탈을 안했다고 한다.
그러나 박일리야와 니항에 거주했던 일본인들의 다수 기록에는 과거를 알 수 없는 부랑인으로 일본인 상점에서 일했으며, 1919년 3.1운동 이후에도 일본인 및 친일파들과 결탁하였다가 1920. 2. 29.일경 트리피츤의 니항해방 이후 파르티잔에 의해 일제에 협력한 죄목으로 처형대상자 명단에 올랐으나 조선인 부대장 박일리야의 비호로 처형을 모면하였다.
박병길은 박일리야의 사촌여동생의 약혼자였다는 소리도 있다. 박병길은 니항해방 이후에서야 조선인부대에 가담하였다.
1920. 7월경 께르비로 대피하여, 친일파 안드레예브, 조선인 김낙현 등과 트리피츤 등을 ‘무정부주의 강도떼’로 몰아 일본군의 방조아래 기습공격해 결국 살해하였다. 박일리야를 중심으로 한 조선인 니항부대원들의 반발 때문에 아무르주 자유시로 도피하여 이르쿠츠크파인 오하묵, 최호림의 한인보병자유대대에 가담하였으나, 여기서도 과거 트리피츤 부대였던 제19연대를 무력으로 강제 해산하는데 관여하였고 결국 조선인 사할린부대원들에 의해 1921. 1. 28.일경 살해되었다. 자유시 참변의 원인이 되는 중요 인물이며, 1920년 니항사건 당시 김홍일, 이범석, 리인섭, 박일리야, 이용 등과 사할린부대원들의 평가와 오늘날 남한의 000 등의 이론이 정반대 의견으로 대립된다.
박일리야(박윤천, 朴允天, Пак Илья Харитонович) : 일제의 시베리아 침략사에 등장하는 니항사건 당시 조선인 니항부대를 조직한 유명한 독립운동가.
북경군사통일회(北京軍事統一會) : 1921년경 북경 인근에서 상해임시정부와 대립되는 측에서 만주, 연해주 일대의 독립군 부대 통일을 위해 개최하였던 회의였으나 독립군부대 통합에 실패하였다.
비첸카(Биценко (Орлянковский)) : 니항 인근 백파군대에 있다가 트리피츤 부대에 항복하였다. 일본군의 재공격으로 께르비로 대피하면서 볼셰비키인척하고 사람들을 살해함. 1920년 6월경 볼셰비키에 의해 처형됨
부진-비치(Бузин-Бич Дмитрий Семёнович, 1887년경 출생 ~1938년경 하바로프스크에서 처형. 1957년 구소련에서 복권됨) : 1908년경 이르쿠츠크 사범학교 졸업, 하바로프스크 인근에서 교사 생활. 1차 세계대전에 차르군대 장교로 출전. 러시아 내전기 니항에서 볼셰비키에 가담함. 1920년 3월 12일경 니항에서 일본군의 기습공격으로 트리피츤이 부상당한 후 함께 사진 촬영한 사람이다. 트리피츤 부대의 간부로 께르비에서 처형되지 않고 생존하여 니항사건에 관한 회고록을 남김.
사소프(34세쯤에 사망. Сасов-Беспощадный Ефим Варфоломеевич) : 니항사건 당시 조선인으로 구성되었던 부대의 부대장(1920 г. - командир корейского партизанского отряда, 부지휘관은 박일리야 및 류소심), 니항의 징발위원회 위원장. 1920년 5월경 사할린주 바가로드스크 지역 지휘관(командовал Богородским фронтом). 1920년 7월 9일경 께르비에서 트리피츤과 함께 처형됨
시마다(島田元太郎, Симада(Мототаро) Петр Николаевич, 일본인. 1870년경 일본 나가사키현 출생 ~ 1945년경 조선 평양에서 사망) : 니항에서 시마다 상회를 운영하며, 화폐까지 발행했다. 당시 자원의 보고였던 사할린주와 니항의 일본 민간인 진출을 이끈 사람이다.
1920년경 니항사건 당시 니항의 일본인회 회장. 생환한 여성들의 구제와 일본정부에 대한 보상소송에 앞장섰다. 일본군의 시베리아 침략에 동원되었던 조선인 여성이 일본으로 귀환했는지 여부는 잘 확인되지 않는다. 니항의 조선인회 서기였던 박병길 등에 대한 진술을 남겼다.
슈먀츠키(Шумяцкий Борис Захарович, 1886년경 출생 ~ 1938년경 사망) : 오늘날의 동시베리아 울란우데에서 출생하였다. 1905년경부터 볼셰비키에 가담하였다. 1921년경 코민테른(제3국제공산당) 동양비서부장을 지낼 당시, 한국계 이르쿠츠크파 독립군을 편들어 자유시에서 기습공격을 감행하였다. 1921년 자유시 참변이후 한국계 독립운동가들의 반발로 동양비서부장에서는 해임되었고 한국의 독립운동과 직접 관련된 분야에서 제외되었다.
셰르쇼프(Серышево Степан Михайлович, 1889 ~1928년 사망) 차르 러시아 장교출신이다. 러시아 내전기 볼셰비키에 가담하여 동시베리아 아무르주 지역에서 군대 지휘관이 되었다. 1921. 6. 27.일경 자유시를 관할하던 볼셰비키 군대 제2군단장이었다. 자유시 참변의 현장에 셰르쇼프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다. 1926년경 일본주재 대사관 무관으로 일했다. 모스크바에서 병사하였다.
안드레예브(Андреев Иван Тихонович, 1884~1933) : 안드레예브가 주장하기를 제정러시아 시대 니항인근 치니르라흐 요새에서 포병부대 장교를 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 확인 결과 장교도 아니었다고 한다.
1920년경 볼세비키에 가담하여 트리피츤 부대에서 간부가 된다. 1920년 7월경 일본군의 재공격으로 대피해 께르비 인근에 머무르던 중 일본군의 방조 아래 바라비요프, 압친니코프, 000 등과 께르비의 트리피츤과 동료들을 기습공격해 체포후 살해하였다.
이후 트리피츤 부대가 해산되기 시작하였으며, 아무르주 블라가베셴스크로 이동하여 경찰서장을 했다고 안드레예브의 가족이 주장하나 오늘날 러시아측 학자들 연구결과 거짓말이라고 한다.
1921년 한국독립운동사에 등장하는 자유시참변 무렵, 아무르주 자유시에서 포병부대 지휘관을 한 것은 맞는 것으로 보인다. 자유시 일대에서 트리피츤 지지자들로부터 3차례 정도의 살해공격을 받았으며. 일제측으로 도피하였다가 중국 상해에서 사망하였다. 직계후손들은 현재 미국에서 구트만과 같은 각종 주장을 하고 있다.
이르쿠츠크파 독립유공자로 알려진 최호림은 일제 앞잡이 안드레예브의 존재를 숨기기 위해 트리피츤이 니항에서 포병대장으로 5년~6년간 근무했다고 거짓말했으나 이것은 남한에서 과거 인정조차 되지 않았으나, 오늘날 남한의 000 교수 등이 논문에서 인용한다.
(참고자료 : 윤상원 교수의 고려대학교 2010년 박사학위논문(논문명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1918-1922) 115쪽과 118쪽 및 2001년 석사학위논문(논문명: 自由市事變 前後 朝鮮人 武裝部隊 統合運動) 7쪽, 24쪽 살펴보면 이지택과 최호림의 ‘박병길, 이지택, 김낙현, 고명수, 임호, 류소심, 엄지영에 의한 니항해방설’을 비롯한 허위 주장을 전부 인정한 것외에도, 니콜라옙스크 시의 공식 홈페이지를 인용하여 남한의 경기도보다 훨씬 넓은 니항의 1917년 인구는 1만 5천여명이었는데 니항사건 이후 니항에는 잔류 인원 2천여명만 남게 되었다고 기술하였다. 만일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트리피츤과 함께 상류 마가촌과 께르비 등지로 대피하지 않고 백파와 일본군에게 투항한 니항 인구가 2천명 정도가 되면 트리피츤에 의한 니항사건의 민간인 희생자 수는 100명도 되지 않는다는 오늘날의 러시아 역사학계의 주장이 사실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최호림•이지택이 주장하는 트리피츤이 니항 포병대장을 했다는 설 등은 오늘날 러시아 역사학계에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는 거짓말이다.)
압친니코프(А. Овчинников) : 께르비(Керби)에서 트피피츤을 처형한 법원의 간부. 일제측으로 도피후 1935년경 미국에서 니항사건 관련 도서 출판
야한토프(Яхонтов Иван Андреевич, 1894년경 출생) 1918년경 아무르즈 자유시와 블라가베셴스크에서 볼셰비키 활동. 1920년경 니항에서 트리피츤과 함께 볼셰비키 활동. 니항에서 체포되었으나 블라가베셴스크로 조선인들과 이동중 탈출. 1923년 하바로프스크에서 복권되어 공산당 활동
오하묵(吳夏默, Огай Христофор Николаевич, 1895~1937) : 제정 러시아 차르군대의 일원으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으며, 볼셰비키에 가담하였다.
1920년경 러시아 시베리아 아무르주 자유시에서 한인 보병자유대대장을 지냈다. 자유시 참변에 얼마우재 부대로 불려지는 한인보병자유대대 병력을 동원하여 대립했던 사할린부대 및 독립군들을 기습 공격하였으며, 이후 독립운동 역사상 보기 드물게 이르쿠츠크에서 2,000여명 이상의 한국계 독립군 부대의 여단장을 지냈다. 소련군 최종계급은 대령 정도였으며, 장령은 아니었다. 1937년 소련 대숙청 당시 처형되었다.
이범석(李範奭, 1900~1972) : 중국 운남에서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1920년경 김좌진 장군과 청산리 전투에 가담하였다. 1971년 자서전 『우등불』을 출판하였다.
김좌진과 청산리 전투 참가 사실은 일제 강점기 중국계 반일투사들에게도 사실로 인정되었다. 1945년 해방이후 남한에 와서 대한민국 건국 당시 초대 국무총리 등의 고위직 관리를 지냈다.
1970년대부터 1990년대에 이르러 남한에서 청산리 전투 등에 관한 이범석의 주장이 과장되었음이 밝혀져 신뢰성이 많이 줄어들었으나, 만주에서는 중국의 000과 관련된 적이 있음을 사실대로 진술하였고, 독립운동가로 알려진 일부 한국계가 만주의 친일파들과 결탁하였음을 인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령과 만주지역에서의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주장을 검증함에 있어서, 과장된 허위주장들을 교차검증해 볼 수 있는 기록중 하나이다.
이범석은 주목받고 있는 000의 독립유공자 서훈에 반대하였다고 한다. 러시아령에서의 독립운동 연구에 있어서는 최호림, 이지택, 김낙현, 최고려 등의 주장 등에 비해서는 사실대로 쓴 부분도 많이 확인된다.
이용(李鏞, 1888~1954년경 북한에서 세거)
이지택(李智澤, 1899~1976) : 독립유공자. 이르쿠츠크파. 남한에 온 후 1947년경부터 1920년도에 동아일보 등에 1면 톱뉴스로 수백차례 이미 보도되었던 니항 사건에 대한 다른 주장을 하였다. 다른 화요파 공산당 관계자들과는 다르게 ‘삼천리’, ‘신동아’ 등의 잡지에 대립하였던 박일리야 부대에 의한 대규모 민간인 학살설을 줄기차게 주장하며, 오늘날 일본 역사학계에서 시베리아 출병사를 다룸에 있어서 니항조선인회서기(韓人会書記) 박병길과 함께 자주 인용되는 인물이다. 한국에서 1926년 6.10만세 운동에 가담한 것 외에 러시아 기록 등과 대조하면 확인되지 않는 주장을 많이 하였다.
화요파 공산당내에서도 이지택이 주장이 사실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으나, 최근 남한의 박경리, 김창순, 000 등은 사실로 인정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1920년도 한국의 신문은 니항사건에 관해 이지택의 주장과는 정반대되는 내용을 제1면 특별보도로 수십차례 이상 보도하였다.
이오키료조(五百木良三. 일본의 유명한 시인) : 침략주의 이론가로 러일전쟁 개전, 히비야방화사건, 한일합방 여론 조성, 장작림폭살에 관여하였다. 1920년경 니항사건에 관한 책을 출판하였다.
하나테루유키(原暉之, 원휘지) : 일본인으로 『尼港事件 の諸問題』 등을 저술함. 니항사건에 관계된 조선인 박병길과 이지택을 언급하였고 일본에서 니항사건과 관련되어 자주 인용됨
파포프 니콜라이 이바나비치(Попов 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 1924 ~ 2005) : 남한의 동아일보 1989. 8. 15. 일자 7면은 파포프와의 인터뷰 내용을 보도하였다. 이 기사에서 파포프는 1921. 6. 28. 자유시 참변이 자유시 수라제프카 구역의 미하일로-체스나코프스카야 기차역 급수탑 주변과 제야강 쪽인 오늘날의 셰르쇼바 장군의 거리 등에서 일어났다고 주장하였다. 또 기사는 러시아계 유명 파르티잔 까란다리시비리 등이 관계되어 발생하였음을 보도하였다. 파포프는 수라제프카 구역 타타르스코예 묘지 주변에 독립군이 매장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최고려(崔高麗) : 이르쿠츠크파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제정 러시아 시대 예수교 전도사까지 한 적이 있다고 자서전에서 진술하였다. 본인의 주장으로는 시베리아에서 독립운동을 하였고, 볼셰비키들을 지원하였다고 하지만, 대립하던 측에서는 연해주에서 친일파라고 소문이 나서 조선인들이 살지 않은 이르쿠츠크 등지로 도피하여 볼셰비키에 가담하였고 권력을 누리기 위해 종파를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
1921년 5월경 자유시 참변 무렵,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장 슈먀츠키, 최호림, 오하묵, 류동열, 이청천 등과 고려혁명군정의회를 조직하고 군정위원장의 요직에 앉았다. 자유시 참변 직전에는 홍범도가 동조한 데 이어, 안무 등도 고려혁명군정의회에 한 때 협조하였다.
사실상 자유시 참변의 주도한 최고 지휘관이었다.
한국어를 전혀 모르던 러시아계 까란다리시비리, 슈먀츠키, 오홀라의 통역사로 활동하였다. 러시아측 기록에 따르면 자유시 일대 독립군 부대 조직에 관계한 것은 사실이다.
최고려는 자유시 참변이후 잠시 득세하여 공산주의 서적 등을 번역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최계립
최호림(1896~1960, Цой Хорим) : 러시아에서 자유시 참변에 관계하였고, 이르쿠츠크파에게 일방적인 기록을 남겼다. 최호림 본인은 자유시 참변 이전에는 독립운동을 했다고 주장하나 일본군과의 교전 기록이 확실하지 않다. 러시아측 기록에 따르면 자유시 일대 독립군 부대 조직에 관계한 것은 사실이다.
000 교수 등에 의해서 자주 인용되고 있으나, 대립하였던 다른 독립운동가들의 기록들이나 러시아의 트리피츤 기록에는 대립하였던 독립군들을 ‘무정부주의자, 강도, 강간범, 아편중독자, 학살자’ 등으로 참무하고 살해한 ‘독립운동도 한 적이 없는 친일파’라고도 한 때 불려졌다.
최근 공개된 기록물에서 최호림은 1920년 니항사건을 주도한 트리피츤을 니항에서 포병부대 장교를 수년간 지낸 인물로 묘사하여, 이지택, 000 교수 등에 의해서 사실로 인정되었으나 오늘날 러시아에서는 그런 허위 주장을 하는 사람은 전혀 없다.
1921년 6월 자유시참변 이후 거센 반발에 결국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소련시대 결국 최고려 등과 수년에서 수십년간 투옥되었다고 한다.
트리피츤(Тряпицын Яков Иванович, 1897년경 출생 ~ 1920. 7. 9. 사망) : 니항사건 당시 사할린주와 오호츠크해 지역의 파르티잔 대장. 트리피츤은 1920. 2. 29.일경 니항을 해방시켰고, 약2주 후인 1920. 3. 12. 일경 일본군의 기습공격으로 중상을 입었다. 니항사건의 최고 책임자로 수천여명 빨치산 대장이었고 오호츠크해 방면 파르티잔 사령관이었던 트리피츤은 2주정도의 기간안에 000 등이 주장하듯이 당시 러시아말도 모르던 조선인 000과는 알고지낼 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다.
1920. 7.월경 대피한 께르비에서 일제의 방조아래 안드레예브, 000 등의 기습공격을 받고 저항조차 하지 못한 채 체포되어 부인 및 파르티잔 동료들과 함께 7월 9일경 처형되었다.
까란다리시비리(Каландаришвили Несто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1876년 출생 ~ 1922년 사망) : 1921. 5월경 고려군정의회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자유시 참변 무렵 사할린부대를 기습공격하여 무력으로 무장해제시키려다가 자유시 참변이 발생하였다.
(오탈자 등 수정중입니다.)
첫댓글 러시아령 독립군 부대의 지도권을 코민테른 동양비서부로 이관했군요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신룡기2 제가 오히려 더 고맙죠 이런 좋은글 올려주셔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