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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0년 오스만 투르크의 3대 술탄으로 무라드 1세가 즉위했습니다. 무라드 1세는 그의 할아버지이자 오스만 투르크의 창시자인 오스만 베이 그리고 그의 아버지인 오르한의 뜻을 이어가며 오스만 투르크의 팽창을 더욱 가속화시켰습니다. 이 무라드 1세는 신중하면서도 대담한 군주였으며 일관적 정치적 목적을 지닌 유능한 전투 지휘관이었습니다. 이 무라드 1세의 치세 동안 오스만 제국은 처음으로 자신들의 힘을 유럽에 최초로 알렸습니다. 무라드 1세는 대단한 정복 군주였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넓어진 제국을 통치할 기반을 마련한 군주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중앙집권적인 행정조직을 정착시켜 후에 술래이만 1세 때 절정을 맞게 될 오스만 투르크의 기초를 다져 놓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오스만 투르크를 부르면 바로 생각이 나게 할 정도로 유명한 ‘예니체리(Yenicheri)’를 처음으로 창설했습니다. 터키어로 ‘신식 군대’를 뜻하는 예니체리는 무라드 1세가 창설한 이래 1826년 마흐무드 3세에 의해 해체될 때까지 약 450년간 오스만 투르크의 정예 보병 군단으로써 활약하게 됩니다.
예니체리는 전쟁포로로 잡힌 청소년과 기독교 소년들(혹은 발칸 반도의 그리스도교 가정의 소년들)을 중심으로 조직되었습니다. 이들은 ‘데브쉬르메(Devshirme)‘라는 제도에 의해 우선 투르크 인 가정으로 보내져서, 투르크-이슬람적인 문화적 환경에서 교육과 습속을 익히고, 개종을 시킨 후에 예니체리의 근간인 ’아제미(Ajemi)’ 부대에 보내졌습니다. 이곳에서 그들은 최고의 신체단련 교육을 받았으며 무기를 다루는 고도의 훈련 그리고 엄격한 정신 교육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그들은 술탄의 근위대인 예니체리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술탄의 개인 호위병으로서 다른 정부 부서에 복속되지 않은 채 수도의 질서를 유지하는 책임을 맡았습니다. 그와 동시에 예니체리는 엄격한 규칙을 준수하고 자유를 제한당하며 사회의 일반인 동안 높은 도덕적 기준을 지향해야만 했습니다. 창설 초창기부터 이후 2세기까지 그들에게 결혼은 허용되지 않았으며 자유민의 상징은 턱수염을 기르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엄격한 규정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의 충직함을 정당화하고 강화해주기 위해 주어지는 높은 생활수준과 사회적 지위를 만끽했습니다.
예니체리의 명성과 규모가 절정에 달했던 16세기 전반에 그들의 수는 1만 2천에서 1만 5천명에 이르렀습니다. 평시에는 그 중 절반은 각 정복지에 주둔했고 또 절반은 수도에 주둔하였습니다.
예니체리의 편제
예니체리는 예전 몽골군과 유사하게 편제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10명 단위, 100명 단위, 1000명 단위 식으로 말입니다. 100명 단위의 부대를 지휘하는 지휘관은 ‘볼룩스 바시스’라고 불렸으며 1000명 단위의 부대를 지휘하는 지휘관은 ‘셰샤야 또는 프로토게로’라고 불렸습니다. 그리고 예니체리 부대 전체를 지휘하는 지휘관은 '아가(agha)'라고 불리며 강력한 권위와 상징성을 지녔습니다.
예니체리 안에는 또 여러 부대가 존재했습니다. 예니체리를 위한 활, 화살, 칼, 총 같은 무기를 제작, 관리하며 전시에는 무기 수송과 무기 수거, 수선 등의 업무까지 담당하는 ‘제베지’ 부대와 포병 부대인 ‘톱추 오작’ 그리고 대포 제작과 관리를 맡은 ‘훔바라즈’, 공성 전투를 담당하는 ‘라음즈’로 나뉘었습니다. 그리고 이 밖에 갑주병사인 ‘지르힐 네페르’, 머스킷 사수인 ‘투페케치’와 궁수인 ‘오크추’ 그리고 굴궐경비대인 보스탄지와 예니체리 내에서도 정예 부대인 ‘솔락, 페익’이 있었습니다.
예니체리의 무장
예니체리의 무장은 그 소속된 부대에 따라 달랐습니다.
갑주병사인 지르힐 네페르 같은 경우에는 작은 철판들로 보강된 사슬갑옷과 투구를 착용하고 다양한 종류의 검과 전투도끼, 폴 암, 갈고리 창, 메이스, 단검과 작은 원형 방패부터 장방형의 발칸식 방패를 포함한 다양한 무기들을 소지했습니다.
정예 부대인 솔락과 페익은 투구는 착용했지만 결코 갑옷은 입지 않았으며, ‘가다라‘라고 불리는 미늘창과 단검을 소지하거나 복합궁과 창을 휴대했습니다.
머스킷 사수인 투페케치는 여러 종류의 머스킷과 검, 도끼, 단검으로 무장했습니다. 15세기만 하더라도 화승총이 더 일반적이었습니다만 16세기에 이르러서는 머스킷의 종류가 급격하게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머스킷 중에는 참호거치식 머스킷과(청나라 중후반 기에 사용된 태창이 이와 비슷한 케이스라고 봅니다.) 부싯돌 격발식 머스킷, 화승식 머스킷, 기병을 위한 머스킷 이외에도 여러 종류의 머스킷이 존재했습니다.
궁수인 오크추의 장비 역시 머스킷 사수들의 것들과 유사했습니다. 차이점이 있다면 이들은 복합궁을 사용했다는 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15세기에 이르러서는 대부분 머스킷 사수로 편성되었습니다. 오크추는 복합궁뿐만 아니라 ‘차가라’라는 석궁과 ‘젬베렉이’라는 사람의 엄지손가락 굵기만한 화살을 쏘아대는 대형석궁을 다루기도 했습니다.
예니체리의 복장
예니체리들은 45cm 길이의 뵈르크라고 부르는 하얀색 머리 보호대를 쓰고 다녔습니다. 대부분의 부대가 착용하는 뵈르크의 크기는 동일했지만 몇몇 부대에서는 작은 크기의 뵈르크를 착용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예니체리들은 청색이나 암청색의 치마와 붉거나 노란색의 로브로 만들어진 돌라마라고 부르는 옷을 군복으로 입었습니다. 장교들은 일년에 두 번씩 군복을 지급받았고, 일반 병사들은 일년에 한번식 군복을 지급받았습니다. 고급장교의 군화는 붉은 색이었으며 하급 장교의 군화는 검은색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입술 위에만 수염을 길렀으며 용모를 더욱 잔인하고 험악하게 보이도록 옆수염을 길고 두껍고 비죽비죽 서게 했습니다. 수염의 나머지 부분을 모두 면도하면서 머리털도 제일 꼭대기의 한 뭉치만을 남겨놓고 모두 잘라버렸습니다. 이는 그들이 전쟁터에서 패배하여 적에게 잡혔을 때 적이 그 남겨놓은 머리털 뭉치를 치켜들고 그들의 머리를 자를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와 같은 용모로 그들은 공포스러울 정도로 보기 흉하고 험상??게 보였습니다. 그리고 전쟁터에서 자신의 능력을 훌륭하게 드러낸 자는 모자의 앞부분에 장식 띠나 세밀한 금빛 꽃장식으로 치장하고, 그 위에 투르크산 홍옥이나 비싸지 않은 다른 보석들로 꾸며진, 반짝이는 은으로 만들어진 대를 똑바로 올려서 깃털 장식 꼭대기가 광채가 나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정예부대인 솔락과 페익 같은 경우 노란색 군복과 청동제 투구를 착용했으며 궁궐경비대인 보스탄지는 바타라라고 부르는 붉은색 머리보호대와 붉은색 로브를 착용했습니다.
예니체리의 급료와 진급
예니체리의 급료는 동등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자는 더 많이 받고 어떤 자는 덜 받았는데 인물의 가치에 따라 하루의 4아스프르에서 8아스프르까지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니체리의 계급이 올라가는 데에는 특혜나 추천이 그다지 많이 작용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전쟁에서 공훈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에 대한 물질적 보상도 커졌다는 점이었습니다.
예니체리의 변질과 해체
‘고인 물이 썩는다.’라는 말처럼 강력한 보병 부대로써 그 명성을 날린 예니체리도 점점 부패하게 됩니다. 시간이 점점 지나면서 예니체리의 집단은 그 수나 힘, 권위에서 점차 강력해졌고 이에 다라 대담하게 이득을 챙기고 세력을 유지했습니다. 술탄이 죽기라도 ㅎ면 무절제한 그들은 노획물과 약탈품을 탐냈습니다. 그리고 이스탄불, 갈라타, 아드리아노플, 살로니카, 부르사 그리고 광대한 투르크의 다른 지배지역에 거주하면서 지상과 해상의 상품교역물들을 닥치는 대로 약탈하는 일을 자행했습니다.
게다가 새로 즉위한 술탄에게 충성 서약을 할 때 그들이 행한 약탈과 노획을 술탄이 용서하고 즉위 선물과 기념품을 제공하지 않으면 결코 충성을 맹세하지 않았습니다. 이렇듯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나 권력집단으로 변질된 예니체리들은 무력을 사용해 정치에 영향을 미치고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했습니다. 17세기에 들어서면서 예니체리들은 궁궐 내에서 반란행위를 수없이 일으켰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수는 1574년 2만 명이었던 것이 예니체리가 완전히 해체당한 1826년에는 13만 5천명으로 늘어나면서 더 이상은 이들을 유지할 만한 비용을 국가가 감당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이들은 호사스러운 삶을 유지하기 위해 에니체리 부대원들끼리 불법적인 방식으로 재산을 비축하였고 다양한 사업과 장사를 벌여 사회에 관여하는 일을 늘렸습니다.
예니체리의 해체는 마흐무드 2세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개혁적 군주인 마흐무드 2세에게 있어서 에니체리 군단은 자신의 개혁을 방해하는 가장 큰 장애물이었습니다. 이미 1810년 이스탄불에 도착한 바이런과 호브하우스는 자신들이 예니체리에 의해 지배되는 도시에 머물고 있다고 할 정도로 예니체리의 힘은 통제가 불가능할 정도였습니다. 이렇듯 17세기의 예니체리는 특권을 가진 사회의 골칫거리로 변질되어 있었습니다. 1811년 5월 말경, 예니체리가 외국의 적들과 마지막 전쟁을 위해 소집되었을 때 13000명이 스탐불의 막사로 출두했습니다. 지난 전임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들도 당연히 에디르네와 전쟁터를 향해 도시 밖으로 행군했습니다. 하지만 수도에서 겨우 56km 정도 떨어져 있는 실리브리에 도착했을 때는 예니체리의 수는 1600명으로 감소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10년 후에 일어난 그리스 반란이 제국을 흔들고 있을 무렵에는 그들은 공인된 도적 떼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마흐무드의 한 궁정 선전가는 ‘몇 번이고 술탄은 그들의 범죄를 사면해야만 했다’라고 적었습니다.
1825~26년 겨울 동안 마흐무드 2세는 수도인 이스탄불과 보스포러스 요새들에 배치되어 있던 포병대를 증강시켰습니다. 동시에 예니체리의 상부에 자신의 지지자들을 심어 두었습니다. 최고의 훈련관이었던 카라 후세인은 1823년 겨우 8개월 동안 예니체리를 지휘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술탄은 아직 막기에는 역부족인 예니체리의 봉기를 예방하기 위해 부르사와 이즈미르에 있는 사령부로 그를 서둘러 전속시켰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후임자인 제랄렛딘 메흐메드는 더 조심스럽게 그 기반을 다져나갔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선임 장교들이 개혁에 동조적임을 확신한 마흐무드는 유럽식의 훈련 규칙 및 유럽식 복장 그리고 소총 사용법에 관한 훈련을 수용하도록 예니체리에게 요구했습니다. 2주 동안이나 규칙과 규율을 강제하려는 새로운 시도에 대한 병사들의 분노를 가져왔습니다. 이 분노를 참지 못한 예니체리 5개 대대의 하급장교들은 아트 메이단느 즉, 유서깊은 집회장소인 옛 경기장에 모여 군대 개혁의 철회를 요구했으며 이웃 막사에 있던 군인들에게 수프 냄비를 뒤엎으라고 선동했습니다. 수프 냄비를 뒤엎는 행위는 반란을 알리는 전통적 신호였습니다. 반란 초창기에는 예니체리가 곧 스탐불의 통제권을 넣을 듯 했습니다. 반란 시작시에 마흐무드는 옛 궁전이 아닌 베쉭타쉬에 있었습니다. 다만 카라 후세인이 톱카프의 궁의 입구를 장악하기 위해 보스포러스 하류 쪽으로 상당한 증원군과 25개의 대포를 동원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카라 후세인의 공격에 옛 궁전으로 향하던 반란군은 행진을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아트 메이단느의 막사로 후퇴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의 마지막 행진이었습니다. 카라 후세인은 아트 메이단느의 막사를 향해 30분 동안 포격을 가했습니다. 이 포격으로 수백 명의 예니체리들이 죽었으며 다른 예니체리들도 신속하게 처형되었습니다. 하지만 일부의 예니체리들만이 개혁을 반대하고자 했고 대부분의 예니체리들은 오스만 제국의 새로운 정책에 순응하고자 했습니다. 그렇게 1826년 6월 17일 예니체리는 정식으로 해체되었습니다.
예니체리의 창설과 해체 그 간단한 연표
1380년 - 베이 무라트 1세가 데브쉬르메 제도를 실행함으로서 예니체리 부대가 설립되었다. 15세기 - 예니체리가 오스만 제국내에서 강력한 정치적 집단으로 성장하게 된다.
16세기 - 예니체리 대원에게 결혼이 허락되었으며 심지어 자식들이 무슬림으로 태어났다하더라도 예니체리 부대에 입대시킬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다.
17세기 - 예니체리 부대는 궁궐내의 반란행위를 계속해서 일으키게 된다. 이런 행위는 결국 그들의 종말을 가져오게 된다.
1648년 - 예니체리 부대가 궁궐에 난입해 술탄 이브라힘 1세를 살해한다.
18세기 - 전통적인 데브쉬르메 징병제가 문란해지고 많은 수의 자유인들이 지원하게 되며 그들 중에는 무슬림 가족들 중에 선발된 이들도 끼어있었다.
1820년 - 예니체리 부대가 그리스의 독립전쟁을 진압하는데 실패하게 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예니체리는 예전처럼 무적의 부대라는 명성을 유지할 수 없게 된다.
1826년 - 예니체리들은 술탄 무라드 4세가 새로운 유럽 방식의 부대를 창설하려는 것을 알고 반란을 일으킨다. 술탄은 전쟁을 선포하고 콘스탄티노플 내에 있는 예니체리의 막사와 지방도시에 포탄세례를 퍼부으면서 전쟁은 막을 내린다. 대부분의 예니체리 대원들은 전사했다. 생존자들 대부분은 사형당했으며, 나머지는 추방당했다. 예니체리의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
첫댓글 예니체리가 정예이긴 했는데 무기를 너무 많이 들고 다녔다는 얘길 들은 적이 있어요. 맞는 말인가요?
자꾸 에이지오브엠파이어2이야기를 꺼내는거같지만; 거기에서보면 무기를 2가지 가지고 다닌걸로 기억합니다 총과 굉장히큰 도? 그때문인지 근접전도 잘한다는ㅎㄷㄷ.;
파란만장한 삶이구만...
고인물이 썪는다라... 역시 권력과 탐욕은 인간을 병들게 하는구나..ㅡㅡㆀ
로마의 근위대랑 비슷끄므리하네요
성스러운예니체리.. 유명한사람이 운영하는카페지요..
나의 완소 예니체리 하앍..(제 예니체리는 "그"의 예니체리와 다릅니다.)
미디2에 나오는 예니체리 중장 보병은 어디 속하는지 모르겠네요. 뭐가 짬뽕이 된거 같기도 하고...
예니체리...핡... 격!! 광!! 참!! 연!! 얀 지슈카~ 지하드~!! 나인 크루세이더~~ "나인이란 숫자의 의미를 알고있나?" 죄송합니다 ㅠ.ㅠ... 옛날의 아련한 추억이 떠올라서리...
좋은 게시물 잘 보았습니다. 스크랩해 갈 터이니, 부디 양해해 주십시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