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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추풍령
강 문 석
❸…기적도 숨이 차서 목메어…
어릴 적 고향에서는 가을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한파가 몰아닥치곤 했다. 그때마다 어른들은 추풍령 쪽 하늘을 바라보면서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도 우리 꼬마들은 어른들의 그 한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추위가 몰고 올 오로지 첫눈만 기다렸던 것 같다. 그땐 지구 온난화란 말이 생겨나기 전이었으니 아마 추위도 그만큼 빨리 찾아왔을 것이다. 추풍령을 넘던 버스가 시동이 꺼져 고생했다는 이웃 사람들이나 트럭을 몰고 화물운송을 하던 사촌형님이 고개를 오르다가 차가 퍼져 고생했다는 얘기를 들은 것은 더 세월이 흘러 초등학교 상급학년 무렵이었던 것 같다.
차로 고생한 것은 추풍령이 높아서 차가 오르기도 힘들었겠지만 당시의 버스든 트럭이든 요즘 같았으면 버리고도 남을 낡은 엔진을 그대로 장착하고 있어서 생긴 고장이 아니었을까 싶다. 어른들의 추풍령 고생담을 들을 때마다 어린 마음에도 어떻게 생겨먹은 고개인지 한 번 직접 가보고 싶었지만 집에서 걸어서 접근할 수 있는 거리는 아니었다. 초등학교에선 봄철이면 주로 시가지 서쪽에 뚝 떨어진 직지사로 소풍을 갔었다. 직지사에서 추풍령은 다시 북쪽으로 떨어져 거리가 제법 멀었다.
시가지 중심에 위치한 학교에서 바라보면 서쪽 직지사와 그 북쪽 추풍령은 삼각구도를 이루고 있었다. 추풍령 코밑 도시에 살면서도 추풍령 체험이 늦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시의 열악한 경제사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결국 중학에 입학하고 나서야 황간 월류봉으로 가을소풍을 가느라 열차로 고개를 넘으면서 처음 추풍령을 만나게 되었다. 하지만 호기심 많던 시절이라 열차 안에서 차창 밖으로 스친 추풍령은 수박 겉핥기에 불과해 아쉬움은 그대로 남았다.
갓 입사하여 대전에 근무하면서 고향 집에서 열차통근을 시작했었다. 하숙비를 아끼느라 그런 게 아니라 어머니가 아들에게 한 끼라도 따뜻한 밥을 해먹이고 싶어 하셨기 때문이다. 당시는 6,000원이 채 안 되는 월급에다 한 달 하숙비는 1,000원을 약간 넘고 있었다. 그랬으니 하숙비와 한 달 통근열차운임은 별반 차이가 없었던 것 같다. 이렇게 시작한 열차통근은 성장기에 말로만 들으면서 동경하던 추풍령을 아침저녁으로 오르내릴 수 있었으니 처음 얼마 동안은 열차에 오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었다.
그때 통근열차는 불과 네 칸이었는데도 고개를 오르면서 힘이 달리는지 제대로 속력을 내지 못했다. 추풍령역은 경부선 철길 중에서도 해발고도가 가장 높았다. 한 번씩 통근열차 바로 앞에 목재나 석탄을 가득 실은 화물열차라도 만나면 추풍령역까진 그야말로 거북이처럼 기어서 30분이나 걸리곤 했다. 당시 장난감처럼 앙증맞은 직지사역과 신암역을 지나면 바로 경북이 충북으로 바뀌면서 소박한 모습의 추풍령 역사가 나타났다. 추풍령에서 열차에 오르는 사람들 말씨는 억센 경상도 사투리와는 달랐다.
그렇다고 느려터진 충청말씨와도 차이가 있었다. 경상도와 충청도를 버무려 놓은 말투처럼 들렸다. 열차통근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김천과 대전 사이 13개 역 이름은 저절로 외워졌다. 시골 역사들은 그 모습이 엇비슷했는데 산업화로 인한 경제성장으로 교통편이 좋아지면서 신암역을 비롯하여 각계 심천 지탄 세천역이 역사 속으로 사라져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된다. 어릴 적부터 꿈에도 그리던 추풍령을 직접 밟은 것은 대전 근무 2년 때였다.
전주 위에 매달린 변압기의 부하를 측정하여 배전선로 손실을 분석하는 용무로 추풍령을 찾았던 것이다. 추풍령 출장에 나선 건 또래 직원과 둘이었다. 추풍령은 사업장 관할지역으로선 최남단이었고 한창 젊은 두 사람은 몸을 아끼지 않은 탓인지 일은 빠르게 진척되었다. 열차로 통근하면서 차창으로만 내다보던 추풍령 역사에도 직접 들렀다. 철도 변압기는 대상이 아니었지만 역 근무자에게 양해를 구하고 플랫폼까지 들어가 문화재로 등록된 급수탑을 가까이서 관찰했다.
표준화된 급수탑이 만들어지기 이전인 1939년 생긴 과도기적 급수탑으로 방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었다. 기계실 안엔 당시 증기기관차에 물을 공급하던 워싱턴펌프와 급수에 필요한 물을 끌어들인 연못과 배관시설이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급수탑엔 6.25동란에서 총탄을 맞은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어 역사적 의미도 지녔다는 걸 역무원은 알려주었다. 출장에 나선 두 사람은 고향이 각각 전주와 김천이었다. 대전에서는 각각 호남선과 경부선으로 거리가 엇비슷했다.
추풍령에서 열차로 고개만 내려서면 바로 고향 집인데 둘은 그럴 생각을 못하고 시골여관에서 보냈으니 당시엔 그만큼 젊은이들 생각이 짧았던 모양이다. 그땐 지방자치제가 시행되기 전이었으므로 충북과 경기도 일부까지 대전에 있는 충남지점에서 업무를 관장했었다. 그 덕분에 고향 가까운 추풍령을 출장용무로 직접 체험할 수 있었다. 당시엔 1차사업소인 충남지점 밑에 크고 작은 2차 사업소인 영업소가 서대전을 비롯하여 강경 예산 천안 평택에 있었다. 이들 영업소 관할을 제외한 직할출장소 지역만 돌면 출장용무는 끝나는 것이었다.
대전에서 북쪽으로 회덕 신탄진과 조치원 전동 전의 내판 부강을 그리고 남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옥천 보은 영동 황간 추풍령지역까지를 보름 정도 걸려 마칠 수 있었다. 고향 집에서 대전까지 통근열차를 두 달 정도 탔을 무렵 갑작스런 업무가 나에게 떨어져 더 이상은 열차에 오를 수 없게 되었다. 새벽별 보고 일어나 저녁별이 나타날 무렵까지 매달려야하는 계획공사 업무였다. 거의 한도에 이른 배전선로의 공급능력을 늘이면서 전력손실을 줄이고자 3300볼트 배전전압을 두 배로 격상시키는 프로젝트였다.
매일 50여 명이나 작업인력이 붙어야하는 공사는 대전에 있는 전공만으론 부족하여 서울과 대구 부산에까지 연락해서 추가로 인력을 불러들여야 했다. 승압공사는 본사의 중장기계획에 따른 것이었으니 벌써 오래 전 계획된 일이었다. 공사 시작 무렵 생산시설로선 신탄진 연초제조창과 서대전 풍한방적 등이 대표적인 수용가였고 만년장호텔 등 유성온천지구에도 전기 다소비업소들이 적지 않았다. 거기에다 육군통신학교와 병참학교 공군기술교육단도 대구수용에 들었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제2차 연도인 이때는 누가 뭐래도 나라의 기운이 상승기류를 타고 있었다. 우리가 해나가는 배전선로 승압공사도 그 연장선상으로 보아야 할 것 같았다. 공사개시 후 처음 얼마 동안은 회사사무실에서 밤늦도록 일하다가 사옥 보안업무를 맡은 쪽에서 불편해하는 걸 알고 회사 가까운 곳에 방을 하나 얻었다. 승압공사 사무실도 겸한 이 방에다 출입문을 빼곤 매일 작성한 ‘공사 기별재료명세서’를 사방 벽면에 붙여 차곡차곡 쌓아나갔다.
세월이 지나 당시의 그 서류들을 떠올리다보면 참으로 아찔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 무렵 갓 나오기 시작한 콘크리트전주로부터 배전용변압기 외에도 수십 가지 품목의 자재를 현장에서는 전주에서 뜯어내고 붙였는데 그 수량들을 기재한 중요한 서류를 허술한 캐비닛에라도 넣지 않고 방바닥에 방치했던 것이니 만약 화재를 만나거나 주인집에서 청소를 한답시고 없앴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싶었던 것이다. 승압공사는 어찌 보면 발주자와 도급자가 모자관계나 다름없어서 그만큼 추진해나가기가 수월했는지도 모른다.
한 울타리 안에 같이 있었고 이름도 각각 한전과 한공이었다. 한공은 한국전력공업주식회사를 줄인 이름이었다. 1년 넘도록 대전 시내 전역과 서대전에서 유성을 지나 신탄진까지 이어진 공사는 다음해 여름이 되어서야 끝났다. 대전을 떠올리면 잊히지 않는 노래가 있다. 노래 제목처럼 <못 잊을 대전의 밤>이다. 대전에 발 디딘 1963년 세상에 나온 노래라 더욱 애정을 가졌는지도 모른다. 매력적인 저음을 지닌 안다성이 불렀지만 같은 해에 그가 불러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바닷가에서>에 비하면 거의 흥행이 바닥에 머문 노래였다.
아마도 <바닷가에서>는 히트 곡 제조기로 통했던 박춘석이 작사 작곡한 때문에 그만큼 대박을 터뜨렸을 것이다. ♪가로등 희미한 목척교에 기대서서 / 나 홀로 쓸쓸이 이슬비를 맞으면서 / 그 옛날 그 임을 안타까이 불러보는 / 첫사랑 못 잊는 대전의 밤이여 // 오늘도 가랑비 소리 없이 내리는데 / 쓸쓸한 이 마음 의지할 곳 없는 이 몸 / 바람만 불어도 흔들리는 이내 신세 / 옛 사랑 못 잊는 대전의 밤이여♪ 노랫말 속 목척교木尺橋는 까만 목재다리였다.
당시 나무로 만들었던 전주처럼 다리에 쓴 목재에도 방부재로 기름을 까맣게 주입했던 것이다. 대전역과 충남도청 사이 중앙로를 가로질러 흐르는 대전천은 당초 돌로 만든 징검다리로 하천을 건넜다. 새우젓장수가 아침저녁으로 이 징검다리를 건너면서 다릿돌 위에 지게를 받쳐놓고 쉬곤 했는데 그 모양이 상형문자인 자尺를 닮았다고 붙여진 이름이 이곳 지명 목척리가 되었다. 일제 총독부에서 목척리에 놓은 나무다리였지만 ‘목척’이란 이름을 못 넣게 하곤 대전교란 이름을 붙이면서 침략의 본색을 드러냈다.
그랬던 다리였으니 일본이 패망하고 나서야 목척교란 이름을 붙일 수 있었다. 목척교는 부산 영도다리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의 애환이 깃든 다리이기도 했다. 동란 땐 서울 등지에서 몰려든 피란민들이 생이별한 가족 친지를 찾느라 목척교로 모여들었다. 피란공간에서 애환의 다리로 유명세를 탄 때문인지 우리 가요에도 족적을 남기고자 <못 잊을 대전의 밤>이 탄생한 것 같았다. 노래가 나온 시기는 한창 감수성 예민하던 때라 그랬던지 난 쉽게 노랫말을 익혀 흥얼거릴 수 있었다.
가사에는 노래 시작부에 목척교가 가랑비와 함께 쓸쓸하게 등장한다. 젊은 피가 끓던 약관의 나이인데도 무슨 연유로 쓸쓸함을 떨칠 수 없었던지 난 노래의 분위기에 쉽게 빠져들었다. 그해 연말 MBC악단이 직장을 찾아와 펼친 콩쿠르무대에 이 노래를 들고 올랐지만 성과는 없었다. 당시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했던 군인작업복을 염색해서 걸치고는 제법 감정에 몰입한 표정에 아코디언 악사가 가까이 붙어 서서 연주하는 흑백사진이 한 장 남았을 뿐이다.
대전 추억 속엔 아리따운 소녀도 있었다. 단 한 차례 둘만의 데이트를 가졌던 18세 소녀였다. 그녀는 당시 편물점에서 일했고 난 그 편물점 앞에 직장 사무실이 있었다. 그때도 여전히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공사에 임하느라 고향에 홀로 계신 어머닐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런 나에게 어느 날 편물점 쇼윈도에 걸린 스웨터가 어머닐 떠올리게 했다. 주문한 어머니 스웨터를 찾던 날 주인은 나에게도 양복 안에 입을 언더셔츠를 권하면서 가격도 특별히 잘해주겠다는 말을 했었다.
멋을 부릴 줄 몰랐지만 겨울을 지나면서 경험한 대전 추위가 혹독했던 걸 떠올리며 편물점 권유에 응했다. 편물점엔 세 여자가 있었다. 부잣집 맏며느리처럼 얼굴이 후덕하게 생긴 30대 중반의 주인은 서울에서 그가 졸업한 대학의 이름을 점포 간판에 붙여 ‘이화편물점’이 되었다고 했었다. 사람 좋아 보이는 그는 밝은 표정인데도 얼굴엔 주근깨가 많았다. 20대 중반 이길순이 셋 중에선 가장 고왔다. 그는 집이 전주라 해서 맛난 음식이 떠올라 마음이 더 끌렸다.
그 무렵엔 새로 개통된 대전-전주 간 고속도로를 타고 점심을 전주에 가서 비빔밥으로 먹고 오는 게 대전에선 유행했었다. 신문에서 본 전주비빔밥 기사가 떠올라 그에게 고향 집에 갈 때 나도 따라가고 싶다고 했더니 배실배실 웃기만 할 뿐 답이 없었다. 내가 자신보다 다섯 살이나 아래다보니 한참 동생이라 생각한 것 같았다. 두 여자가 볼 때 내게는 옆에서 얌전하게 미소 지으며 직물을 짜고 있는 막내가 더 어울린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주문한 언더셔츠를 찾던 날 주인여자는 다짜고짜로 소녀와의 데이트를 나에게 권했다.
그러면서 나의 의사는 묻지 않고 그 장소와 교통편까지 알려주었다. 대전에선 거리가 제법 떨어진 유성이었다. 며칠이 지나 퇴근 후에 편물점 주인이 주선한 대로 둘은 버스를 타고 유성온천지구에 도착했다. 관광호텔마다 대전시내 한복판에서도 구경하기 힘든 화려한 네온사인이 돌아가고 있었다. 가을이 깊어가던 때라 가로에 사람들은 드물게 보였다. 둘은 정원이 도로에 맞붙은 어느 관광호텔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19세 소녀는 입을 다물고 조용히 앉아만 있었다.
그러면서도 누군가에게 쫓기는 것처럼 불안한 모양이었다. 편물점에서 대했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계룡산이 머지않은 때문인지 유성의 밤공기는 빠르게 차가워지고 있었다. 유성을 찾아갈 때의 들뜬 마음과는 달리 소녀와의 첫 데이트는 그렇게 끝나고 말았다. 그러곤 계절이 겨울과 봄을 지나 여름으로 바뀌면서 맡은 계획공사도 마무리단계에 이르렀다. 소녀도 내가 별로였던지 더 이상 연락이 없었다. 그러다가 직장의 명에 따라 여름이 한창일 때 난 부산으로 오고 말았다.
소녀의 아버지가 사무실로 날 찾아온 건 그해 겨울 초입이었다. 6.25 직후 사람들이 많이 입던 담요로 만든 외투를 걸친 그의 모습은 추레했다. 그와 회사 앞 다방을 찾았을 때 실로 충격적인 얘길 들었다. 딸이 달리는 열차에 뛰어들어 목숨을 끊었다는 것이었다. 말수가 적고 조용히 미소만 짓던 나약한 소녀가 스스로 목숨을 끊다니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생전의 소녀 모습과 편물점 사람들도 잠시 눈앞을 스쳤지만 난 어떤 위로의 말도 전할 수가 없었다.
딸은 중학 졸업 후 진학을 못하자 우울증을 보이기 시작하더란다. 그런 딸의 증세가 좀 심해지나 했는데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니 아버진 제 정신이 아닌 듯했다. 딸이 편물점을 그만 둔 건 몇 개월이 되었지만 그는 딸의 자살동기를 좀 더 알아보고 싶어 편물점을 찾아갔더란다. 그가 편물점을 나설 때 주인은 나를 찾아보라고 하면서 바로 앞 직장을 알려주더라고 했다. 이미 고인이 되었다는데 딸의 손목 한 번 잡지 않았다는 걸 밝힌들 무슨 소용이랴 싶었다.
사무실 옆자리 선배는 그에게 여비 한 푼도 해주면 절대 안 된다고 했지만 멀리서 불행한 일로 찾아온 사람을 그렇게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기적도 숨이 차서 목메어 울고 가는…♪ <추풍령>노래가 세상에 나온 것은 내가 추풍령을 지나는 열차통근을 시작했던 때로부터 2년 뒤였다. 그때 난 이미 근무지를 부산으로 옮긴 후였지만 새로 나온 노래는 직접 고향을 만난 것만큼이나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어릴 때부터 가요를 자주 흥얼거렸던 내가 감수성 예민한 청년기를 관통하고 있었으니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요즘 세대들은 ‘구름도 자고 가는 바람도 쉬어 가는…’ 노랫말을 음미하려 들지 않고 뻥이라고 서슴없이 말한다. 과거보러 한양을 찾아가느라 걸어서 고개를 넘어야했던 영남 선비들의 애환과 보부상들의 눈물을 알 리 없는 중년 이하 세대들은 ‘추풍령 구비마다 한 많은 사연’도 과장된 표현이라며 백안시한다. 한 많은 사연은 그 옛날 괴나리봇짐을 지고 걸어서 고개를 넘나들어야했던 사람들의 애환이다. 그런데도 추풍령은 전근대까지도 영남에서 한성을 오가는 소백산맥 중에선 가장 낮은 고개였지만 정작 주요 교통로가 되지는 못했다.
선비들이 과거시험을 보러갈 때 추풍령과 죽령을 피해갔던 것이다. 추풍령으로 가면 '추풍낙엽처럼 떨어지고, 죽령으로 가면 죽죽 미끄러진다'는 속설로 인해 한산한 고개였다. <추풍령> 노래가 나온 때가 경부고속도로가 건설되는 시대적 분위기와 맞물려 상당한 인기를 끌었고 오늘날까지도 중장년층들에게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명곡으로 남았다. 노랫말은 흡사 시구마냥 추풍령을 잘 보여주고 있어서 추풍령을 소개하는 지자체나 동호인 단체의 글에도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4번국도 추풍령구간 충북과 경북 경계지점에도 노래비가 세워져 있고 추풍령역 광장에도 있다. 사람들이 <추풍령> 노래에 빠져드는 것은 곡도 가사도 너무 운치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느리게 불러도 좋고 빠르게 불러도 멋이 느껴지는 걸 알 수 있다. 이 노래를 위하여 태어난 것처럼 남상규는 빠른 템포에 퉁기는 듯한 발랄한 창법으로 <추풍령>을 불렀다. 짧은 생을 살고 간 배호도 <추풍령>을 느린 템포에 중후한 목소리로 노랫말에 담긴 세월의 아쉬움을 잘 표현하여 사람들 마음을 흔들었다.
계절에 따른 기상변화가 심한 추풍령엔 기상측후소가 있고 상공에선 난기류가 수시로 발생하여 항공교통에 장애가 된다. 추풍령을 경계로 기상과 언어·풍속까지 완연히 다른 것도 특기할 만하다. 차를 손수 모는 사람이라면 경부고속도로 황간나들목과 추풍령나들목 사이에 위치한 우리나라 최초의 고속도로휴게소인 추풍령휴게소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부산방면 하행선 휴게소에서는 고속도로 완공기념비에 오를 수도 있다. 추풍령휴게소는 경부고속도로의 중간지점으로 영남의 관문 역할을 한다.
근대에 들어서도 경부선 철도와 경부고속국도 국도4호선 경부고속철도 등 중요한 국가 기간교통로가 이곳을 지난다. 주변 경관이 수려해 1970년 7월 7일 경부고속국도 개통과 동시에 상·하행선 추풍령휴게소가 영업을 시작했다. 전하는 말에는 추풍령을 지나던 한 승려가 “이곳에는 장차 전국에서도 이름난 놀이터가 들어설 것”이라고 예언하며 이름을 ‘多樂谷’이라 지어주었다는데 경부고속국도가 개통되면서 공교롭게도 서울과 부산의 중간 지점인 다락곡에 추풍령휴게소가 들어섰다는 것이다.
고속도로 노선이 지금처럼 많지 않았던 1990년대에는 하루 이용객이 10만 명을 넘을 정도로 좋은 시절을 보냈었다. 그러나 휴게소가 위치한 대전-김천 구간의 선형이 운전하기에 다소 불편한데다 2000년대 중반부터 대체노선인 중부내륙고속도로와 당진영덕고속도로의 개통과 내비게이션의 대중화로 경부고속도로가 최적경로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그 바람에 휴게소 앞 구간의 차량 통행량이 줄어듦에 따라 이용객 숫자도 대폭 감소하여 2만 명 선에 그치며 매출액도 자연히 줄어들었다.
경부고속도로 준공기념탑은 상행선 쪽에 위치하는데 이전에는 하행선 이용객들도 육교를 이용해 준공기념탑을 방문할 수 있었고 상행선 휴게소까지도 건너갈 수 있었다. 그러다가 2000년대 들어서 선형개량과 확장공사로 철거한 뒤 재설치 되지 않았고 화물차량들이 통행권을 서로 바꿔치기하는 장소로 악용하는 바람에 재설치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무슨 연유에서인지 최근 들어 다시 설치되었다. 반대방향 차량이 뽑은 통행권으로 서로 교환하면서 출발지를 알려주어 출발지에서 가까운 요금소에서 정산한다.
이렇게 단거리를 주행한 것처럼 속여 통행요금을 삥땅치는 것이었다. 누가 혹시 “겨우 통행료 그까짓 몇 푼 가지고?”하는 일반차량 운전자가 있다면 고속도로에서 대형화물차의 장거리 통행료는 기절할만한 수준이란 걸 명심할 필요가 있겠다. 지금은 출발지에서 통행권 발급과 동시에 차량번호까지 카메라에 찍혀 저장되는 시스템으로 바뀌어 종전 삥땅 수법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니 그 통행료 가지고 재미를 보던 사나이들은 “아! 옛날이여!”하고 그때를 그리워할는지도 모르겠다.
추풍령은 고향 김천과 충북 영동의 경계를 이루기도 한다. 좁은 국토 한반도에서 ‘영동’이란 지명은 왜 이리도 여럿인지 모르겠다. 기상예보에 등장하는 강원 영동은 태백산맥 동쪽을 말하고 서울 영동은 영등포 동쪽을 일컫는다. 영등포가 지명에까지 영향을 준 것은 산업단지로 일찍 터전을 잡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월류봉 등 자연풍광이 아름다운 충북 영동의 지명은 그 내력이 좀 복잡하다. 일찍이 감나무를 가로수로 심었고 지금은 포도생산지로 유명세를 타는 소백산맥 서쪽이지만 이곳 지명은 산맥에서 생겨나지 않았다.
군청이 소재한 영동읍에는 두 개의 하천이 합류하여 영동천을 이루는데 二水를 한 글자로 줄이면 永이 된다. 신라시대 명칭이었던 ‘길동’의 吉도 이두문자에 따르면 永이 되어 永同은 이 二水와 吉同에서 유래했다. 신라 초기까지 '길동'이라 불리다가 통일신라 경덕왕 때 영동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쓸쓸한 인생황혼에 반추해보는 어린 날의 고향. 세상 등질 날이 가까운데 무슨 수로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겠는가. 그래서 더욱 안타깝고 비감만 커진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왜 고향을 못 잊어하면서 지난 세월을 돌아보게 되는 걸까. 혹자는 나처럼 전란과 함께 겪은 모진 고난을 그냥 묻어두고 떠날 수 없어 추억을 펼칠 수도 있을 것이다. 역설적으로 순탄한 세월이었다면 진즉에 기억에서 사라졌을 악몽들이 마치 엊그제 일처럼 생생한 것도 뼈를 깎는 고난의 세월 덕분일 것이다. 특별할 것 없는 필부의 삶이라 자판을 두드리는 시간은 더욱 숙연해지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