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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령 독립군 부대 지휘권의 동양비서부 이관과 이르쿠츠크파의 군권장악
한국 독립운동에 많은 관심을 가졌던 레닌 등이 1919년경 코민테른을 설립하였고, 이 무렵 코민테른 내부에 서양비서부에 맞먹는 아시아 혁명을 인도할 동양비서부를 설립하여 아시아 혁명과 한국 독립운동에 관심을 기울이자, 러시아 공산당 중앙•혹은 달뷰라•극동공화국•극동공화국 군부가 한 때 가졌던 러시아 영내 한국 독립군 지휘권은 사실상 동양비서부로 일시 넘어간 상황이었다.
극동공화국 군부 총사령관 에이히(Эйхе)로부터 “앞으로 한인부대의 관리를 코민테른 기관에서 맡게 되었다”는 대답을 듣게 되자 자유시에서 온 한국 대표들은 곧 이르쿠츠크의 코민테른 동양비서부를 찾아갔다.
(김하석 등만 갔고, 상해파인 박애는 이들과 행동을 같이하지 않았다는 주장이 있다.)
김하석 등은 동양비서부 당국자와 회담하는 자리에서, 지금까지 군대 문제와 관련하여 한인부에만 문제가 있고, 흑룡주에서 벌어진 군사정세(각 부대의 역사, 분열의 원인, 충돌의 현상 등)를 일일이 보고하고 이에 대한 지도방침을 요청하였다.
이에 대한 동양비서부 당국자의 의견은 아래와 같았다.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당국자의 말. 아마 슈먀츠키로 추정된다) 고려혁명계 자체상 충돌이 다단(多端)이나, 대부(大部)에 취(就)하여 노골적으로 말하면, 국민의회와 상해정부와의 통일이 되지 못한 데서 생겨난 화단(禍端)이 군계(軍界)에까지 문란하게 된 터이니, 이 화단을 피하여 군대를 운전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즉 이상 양기관의 지배를 받지 말고, 국외에서 특립(特立)으로 고려군정의회(高麗軍政議會)를 조직하여 그 군대를 불편불의(不偏不倚)하게 혁명의 전도에 진행을 취하는 것이 상책(常策)이다. |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의 방침에 따라 이르쿠츠크에서는 곧 군정의회의 조직에 착수하게 되었다.
그것은 1921년 3월 중순경이었다고 한다.
동양비서부 제안에 대하여 대표 일동 (이르쿠츠크에서 조직된 합동민족군대내 한인군대 대표도 출석하였다고 한다)은 이의(異議)가 있었는 바 친자 출석한 대표 기개인은
“고려의병대 일부의 대표인고로 전고려혁명군대 군정의회를 조직함에 대하여는 권리도 없고 또는 장래 책임문제가 될 것이라” 고 거절하였다.
(※상해파, 사할린의용대, 만주 독립군 등의 동의 없이 자유시 일대와 러시아령에 집결한 독립군부대를 지휘할 수 있는 조직을 러시아 공산당의 힘을 빌려 만드는 것이 『독립운동』이라는 문구아래 단 한번이라도 총을 들어봤던 독립군이라면 화를 불러올 것임을 단번에 알았던 것이다. 상해파 혹은 이르쿠츠크파 누구든지 동료의 반대가 있을 것이 명백한 조직을 결코 만들어서도 안되고 인정해 줄 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로 인하여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에서 고려부(이르쿠츠크파로 구성됨)와 일주간을 계속 토론한 결과 군정의회를 조직하기로 낙착되었다고 한다.
(※결국 만주지방 11개 독립군 단체의 자유시 사건 성토문에서는 고려군정의회가 비밀리에 조직되었다고 규탄하였다.)
(김창순•김준엽 공저, 『한국공산주의 운동사 1권』, 청계연구소, 1986 등에 따르면)
군정의회를 조직하기 위하여 준비위원회가 소집되었는데, 여기에는 동양비서부, 자유시에서 온 6인 대표, 합동민족연대 대표들이 열석했을 뿐이고, 상해파 한인부에 있었던 상해파 대표는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다.
결국 대표들 중에서 반대가 있자, 동양비서부에서는 『고려부』와 1주일간이나 토의를 계속한 끝에 ‘임시고려혁명군정의회(臨時高麗革命軍政議會)’를 조직하기로 최후 결정을 보았다고 한다.
여기서 고려부라는 것은 동양비서부의 부설기관으로서, 이르쿠츠크파 전로고려공산당의 별칭이라고 알려졌다.
동양비서부에서는, 정식군정의회는 고려공산당대회가 끝난 뒤에 조직하기로 하되, 우선은 임시군정의회를 조직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앞으로 3개월 이내에 군대를 통합하여, 극동공화국 영역을 벗어나기로 방침을 세웠다고 주장한다.
곧 고려의병대의 근거지는 두만강과 압록강 상류부근 길림성 안도현(安圖縣), 무송현(撫松縣) 등의 밀림 지대에 두고 한만국경지대를 유격대식으로 출몰하면서 전투를 시작하기로 한 것이다.
1921년 3월 이르쿠츠크파의 임시 고려군정의회 조직
1921년 3월 중순에 이르쿠츠크에서 조직된 ‘임시고려군정의회(臨時高麗軍政議會)’의 구성과 병력은 다음과 같다고 알려졌다.
◊ 임시고려군정의회의 구성 의장 1인 까란다리시비리 (러시아인) 의원 2인 김하석, 채성룡 총사령관 까란다리시비리 부사령관 오하묵 임시참모부장 유수연(兪洙淵) ◊ 병력 제 5군단내 코카서스(혹은 카자키) 기병 600 여명 제 5군단내 합동민족연대(한인부대) 600여명 정치장교 16명 (이르쿠츠크공산당정치학교 제1회 졸업생) |
까란다리시비리는 코카서스 지방의 그루지아(조지아)출신으로 러시아어로는 “까란다리시비리”라고 발음되나, 그루지아어 등으로는 다르게 발음되거나 다른 이름도 있었던 모양이다. 까란다리시비리는 소련시대인 1973년 영화(Каландаришвили. "Сибирский дед". Фильм 1973 г.)로도 만들어진 적 있었던 볼셰비키 혁명시기 빨치산의 영웅으로 옴스크에서 치타까지의 전선 일대에서 백파군을 격퇴한 용장이었다.
또한 까란다리시비리는 여태까지 한인의 어느 파에도 가담한 일이 없기 때문에 공정을 기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던 모양이다.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에 등장한 까란다리시비리의 총사령관 선정 이유 까란다리시비리를 총사령관으로 선정함은 몇가지 이유가 있으니 첫째는 동양비서부의 정견과 같이 불편불의를 취함이니 이것은 이상 각 기관의 내막을 상찰(詳察)할지라도 상해정부에서나 대한국민의회에서 선정한 장교이면 하시 인물을 물론하고 현장에 있는 군대를 통솔키 난할 것이니 그럼으로 국외의 입장에서 다만 고려혁명의 진취를 목표하고 일반군인을 통일하려하는 것이며 둘째는 까란다리시비리는 원래 로시아 의회정부에 대공을 공헌한 의병대 수령으로 의병식전투에 경험이 풍부한 장관이니라. 다시 말하면 백전노장이라 과거 1920년도에 일본군대와 백파 셰묘노프군이 시비리(치타로부터 옴스크까지)를 점거한 것을 까란다리시비리가 의병대장으로 코카서스 기병 3천여명과 보병 수천명을 영솔하고 일제 침략군대와 셰묘노프군을 연해주로 격퇴하였으며 따라 일본군대의 전투적 방식을 당지로 분철한 것이며 셋째는 원동정부 지대에서 군대를 출동 또는 주둔 등 제반 동정에 대하여 로시아 의회정부의 후원을 원만이 득할 것이니 즉 의회정부의 신임과 원동정부의 신임에 하시 군벌을 물론하고 감히 흔동치 못할 까란다리시비리의 굳은 지위를 겸하였으며 또는 자기가 맹언하기를 로시아의 무산혁명은 성공되였으니 이로부터는 동양혁명에 피를 흘릴터 임으로 우선 동양혁명에 도화선이 될 만한 고려혁명에 헌신하여 고려의병대와 흥망을 같이 하려하고 자기가 다년 전선에서 친이 영솔하였던 코카서스기병 6백여명을 인솔하고 자원하였다. 그런즉 우리가 원수(怨?)를 대항하려고 실성이 되도록 부르짖고 힘이 있는 데까지 뛰면서 세계를 둘러보자. 까란다리시비리와 같은 동무가 몇이나 될 것인가. 면황 내정외세가 이와 같이 급박한 처지와 소우(所遇)에 난회(難會)의 장관(長官)이 아닌가. 까란다리시비리가 총사령관에 선임된 것은 이상의 사유이니라. (※일부 글자를 현재의 표기방법으로 수정하였습니다.) |
부사령관 오하묵과 임시 참모부장(혹은 참모장) 유수연은 이르쿠츠크파인 자유시의 한인보병 자유대대 소속이며 (두 사람은 1921년 1월 18일경에 같이 극동정부 군부를 같이 방문한 적이 있다),
이르쿠츠크에 와서 새로운 군사조직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결국 총사령관만 유명한 까란다리시비리를 데려다 놓았을 뿐이며, 나머지 간부들은 상해파나 만주•연해주•이르쿠츠크 합동민족군대 소속이 없었다.
심지어 간도 지방의 유명 독립운동 단체 소속 간부도 한명 없었다.
(참고자료 : 까란다리시비리의 일대기를 그린 구 소련에서 1973년 제작된 영화 https://youtu.be/I_YP4wxH80A)
1921년 4월 14일경 임시고려혁명군정의회 총사령관대리 오하묵, 의원 김하석(채성룡은 공산당대회에 참석키 위하여 체재) 참모부장 유수연 등은 정치학교 필업생 16인과 간도군대 대표들을 대동하고 이르쿠츠크를 출발하여 3일후 치타에 도착하여 원동정부 군부 총사령관 에이히를 면회하고 임시고려군정의회를 조직함과 장래행사 등 상세는 동양비서부의 소개서로 교부하고 고려 각 의병대로 하여금 임시고려군정의회에 인계할 것을 해 군부의 명령으로 제2군단에 송달케하였다
그리고 당지 (달뷰라 소속 잔류) 한인부 당국자이던 계봉우, 박애, 김진(동양비서부 설립된 후 한인부는 철폐되고 단 문부를 청정키 위하여 시일이 지연되였음) 기타 이용, 김규면, 이한영, 임상춘, 한형권 일파를 상면하고 임시군정의회의 조직된 사정을 설명하고 장래에 대하여는 아무쪼록 협동적으로 우리의 사업을 진행할 것이고 과거의 숙시숙비는 서로 연계할 것이 없다는 것으로 사세이연(事勢理然)케 말하였다.
그러나 피일파가 이와 같은 협의는 원래 원치 아니하거니와 더욱히 동양비서부와 임시고려군정의회를 모해중임으로 좌고타언(左顧他言)하고 냉락(冷落)한 동정을 암시함으로 하등의 대답을 듣지 못하였다고 한다.
치타에서 이르쿠츠크파가 임시고려군정의회의 조직경위와 자유시의 독립군 부대 지휘권이 임시고려혁명군정의회에 이관되었음을 통고하였다고 주장한다.
전후의 사정을 살펴봤을 때 상해파가 그것에 동의했을 가능성은 없었다.
상해파는 심지어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와 그들의 지원을 받은 임시고려군정의회의 권한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모스크바 등지에서 레닌과 사파라프, 지노비예프 등의 협조로 상해임시 정부의 외교권을 행사하고 있었던 한형권, 이한영 등이 (허수아바 국가인) 극동공화국 서울 치타에 모여서 상해파 주도로 ‘고려공산당 결성’을 시도하고 있었으나,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혹은 달뷰라 등의 여러 간부직을 겸임했던 슈먀츠키 등의 지지가 이르쿠츠크파로 향하자,
상해파가 한 때 획득했던 자유시 일대의 독립군 부대의 지휘권이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달뷰라, 극동공화국 군부 등의 명령서 한두장에 이르쿠츠크파로 넘어가는 상황이 다시 연출되었다.
상해파의 제2차 재러군사위원회 조직과 상해파 간부의 체포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지도부가 이르쿠츠크에 도착하여 코민테른의 동양비서부 지도하에 임시고려군정의회를 조직하던 무렵인
1921년 3월 중순경부터 이용, 박일리야, 장도정, 계봉우, 김진 등은 사할린 의용대가 주둔하는 마자나바에 와서 ‘군사위원회(軍事委員會)’를 조직하였는데,
이것은 1921년 1월에 이용을 위원장으로 하여 조직하였던 ‘재러군사위원회’가 극동공화국 군부 총사령관의 허가를 얻어
아무르주 자유시 일대로 이동해온 독립군부대와 이르쿠츠크파 한인보병자유대대 등까지 포함하여 조직된 것이다.
(사할린특립의용대의 조직은 앞선 장에서 언급하였습니다.)
‘제2차 재러군사위원회’라는 것이다.
재러군사위원회(혹은 한인군사위원회)는 명예회장으로 레닌, 트로츠키, 크라스나쇼코프(Краснощёков),이동휘 등을 추대하고, 군사위원은 이용, 채영, 한운룡, 장기영(張基永), 박일리야 등 15인을 정하였다고 한다.
이 무렵 상해파는 볼셰비키에서 지원된 자금과 동포들의 기부를 바탕으로 자유시 등을 포함하는 동시베리아 일대에 독립군 기지 건설을 시도한 것으로 보여진다.
이르쿠츠크파 역시 혁명계 어떠한 결사에서 던지 명예회장일망정 레닌, 트로츠키 그 동무를 절대로 환영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용이 교섭대표가 되어 (허수아비 국가인)극동공화국과 한인부대의 지휘권에 대한 교섭을 시작하였다.
달뷰라와 동양비서부의 지도를 받은 극동공화국 군부쪽에서는 한인부대에 관한 관할권이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에 있다고 하자, 상해파에서는 한국 독립운동에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와 이르쿠츠크파의 고려군정의회가 영향을 끼칠 수 없도록 해산시키거나 무기력하게 만들려고 하였다.
상해파 인물들의 체포
이에, 극동공화국 군부에서는 1921년 4월경에 계봉우, 김진, 박애, 이용, 장도정 등을 체포하여 이르쿠츠크로 압송해 버렸다.
이용은 약 5천원 상당의 금화를 휴대하고(이르쿠츠크파가 주장하는 금액임) 탈출하여 한인농가에 피신하였다가 1921년 7월 하순경에 연해주로 탈출하였다고 한다.
압송된 박애, 김진, 장도정, 계봉우 등은 이르쿠츠크파에 체포되어 군사재판을 받았다.
5월 18일에 고려군정의회와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의 합동으로 조직된 ‘임시고려군사혁명법원(臨時高麗軍事革命法院)’은 박애 등을 혁명의 방해자로 규정하여 군사재판을 하게 되었는데, 박애 등은 징역형,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구류처분을 내렸다고 알려져 왔다.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 98쪽을 살펴보면) 고려혁명군대에 대한 군사상 범죄자를 심판하기 위하여 조직되는 바 1921년 5월 18일에 정식 고려군정의회와 동양비서부의 합의로 임시 고려군사혁명법원을 조직하니 체제는 위원제를 취하였다. 1. 박애, 김진, 장도정, 계봉우 등에 관한 사건 위 4인은 고려혁명군대를 선동하여 분열과 충돌을 야기하였으며 또는 국제공산당 동양비서부에서 조직한 고려혁명 군정의회를 반대하는 등 사실이 현로(現露)되었음으로 원동공화국 총사령부에서 박애, 김진, 계봉우(장도정은 이르쿠츠크에서 구착)등을 포착하여 국제공산당 동양비서부의 처분하에 압송하니 해 비서부에서는 고려군사혁명법원을 임시로 조직케하고 위원은 김철훈, 이성, 채성룡 3인으로 선임하여 심리한 결과 사실은 아래와 여하다. (1) 고려혁명군대의 단결을 방해함 (2) 국제공산당 동양비서부가 설립되는 동시에 로시아 공산당에 명령하여 한인부는 이미 해산하였는데 위 일파는 한인부 명의를 잉자(仍藉)하고 자기들 야심적 수단을 진행키 위하여 비서부의 정책을 반항한 사실 (3) 소위 군사위원회란 것을 조직하여 원동정부 군부에 승인을 요구하였으나 해 군부에서는 부인하고 이르쿠츠크에서 조직된 고려군정의회에 복종하라 하니 당석에서 선언하기를 우리는 고려군정의회를 부인할 뿐 아니라 군대내에 폭동을 일으켜 고려군정의회와 혈전하겠노라 한 사실 이상의 사실에 의거하여 위 4인을 반혁명죄에 처하니 박애로 징역 8년 김진, 장도정, 계봉우 등으로 징역 5년에 선고하였다. |
그러나 이 재판은 나중에 모스크바 레닌정부나 코민테른 본부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상해임시정부 및 상해파 이동휘 및 다른 독립군 부대 등의 엄청난 반발에 의해 곧 무효화된 것 같다.
구금되었던 상해파 독립운동가들은 곧 동시베리아 지역에서 활동을 재개한다.
(이르쿠츠크파의 문건인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 김창순•김준엽 공저, 『한국공산주의 운동사 1권』, 청계연구소, 1986, 로버트 스칼라피노•이정식 공저, 『한국공산주의 운동사』, 자유시사건 부분에서 인용함)
이르쿠츠크파 임시 고려혁명 군정의회의 활동
임시고려군정의회는 5월 2일경에 자유시에 도착하였다.
도착하여 보니 자유시의 군대들은 마자나바와 크라스나야라바에 분리 이동되었고, 지방수비대에 인도되었던 자유대대 병력에 대해서는 다시 무장을 갖추어 체르니고프카(우크라이나·러시아인 마을)에 주둔시키고 식료 기타 일체를 공급하였다.
그리고 오하묵, 김하석은 자유대대의 무장해제 및 지방수비대 인계의 사유를 사득(査得)키 위하여 수비대 및 시민의회와 지방공산당, 한인의회 제 기관을 방문하고 당시 사유의 상세를 탐문하였다.
5월 3일경에 원래의 자유대대 주둔지에 왕하여 일반 군인을 소집하고 고려군정의회의 조직된 이유와 장래 진행책을 설명하였다고 한다. 자유대대의 군인 일동은 그간 사할린군대의 위협에 무장해제를 당한 것과 제반 잔혹강박에 참고 견디던 진말을 분개한 눈물로 호소하였다고 한다.
5월 4일경에 하바로프스크 제2군단에 대하여 임시고려군정의회가 당도하였다는 것과 사할린군대를 본 임시고려군정의회에 인계하라는 것을 직통전보로 알렸다고 한다.
결국 정식 고려혁명군정의회의 조직
1921년 5월 4일에서 5월 17일경에 이르쿠츠크에서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장과 달뷰라의 간부직 등을 겸임하였던 슈먀츠키 등의 지도하에 상해파를 배제한 채, 제1차 고려공산당 대표대회가 개최되었다.
다음날인 5월 18일경에 이르쿠츠크파에서 결국 독단적으로 정식 고려군정의회를 조직하였는데, 의원선임은 고려공산당 중앙간부에서 후보자를 천거(薦擧)하여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의 승인을 득하니 총사령관에 까란다리시비리, 의원에 류동열, 최고려가 임명되었다.
참고자료
이르쿠츠크파의 문건인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
http://db.history.go.kr/item/imageViewer.do?levelId=haf_082_0560
김창순•김준엽 공저, 『한국공산주의 운동사 1권』, 청계연구소, 1986
로버트 스칼라피노•이정식 공저, 『한국공산주의 운동사』, 자유시사건 부분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