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uj8w0Sm7l-M?si=eCSiHEs_5ZOXhfAh
(Beethoven - Piano Concerto No 5 "Emperor" - Zimerman, Wiener Philharmoniker, Bernstein (1989)
베토벤의 피아노협주곡 제5번 '황제'는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를 침공하던 1809년에 쓰여졌다.
일각에서는 '황제'가 나폴레옹과 결부되어 생각되고도 있으나
베토벤은 오히려 나폴레옹과 프랑스를 미워했다고 전해진다.
이 곡은 악상과 구성이 엄숙장대하고 위풍당당해
마치 황제의 품격을 느끼게하는데다,
모든 피아노 협주곡 중에서도 최고의 작품이라는 뜻으로 후세인들이 명명한 것이다.
1809년 초, 베토벤의 생활은 비로소 든든한 반석 위에 올라선 것처럼 보였다. 일단 3월 1일부터 '평생 연금'을 받기 시작했는데, 세 명의 젊은 고위 귀족, 로프코비츠 공작, 킨스키 공작, 루돌프 대공이 그에게 매년 4천 플로린이라는 거금을 지급하기로 약속했던 것이다. 다만 베토벤이 "빈(Wien) 혹은 오스트리아 황실 폐하의 다른 세습영지를 거주지로 하는 대신"이라는 조건이 붙었다. 이로써 안정적인 재정기반을 확보한 베토벤은 들뜬 기분에 여행이나 결혼도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었고, 특히 친구인 글라이헨슈타인 남작에게 편지를 보내서 자신의 신붓감을 찾아봐 달라고 부탁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러한 희망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산산이 부서지고 만다. 그 해 5월, 나폴레옹 군대가 빈을 점령했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의 바이에른 침공에 대한 대응에 나선 프랑스 군이 에크뮐 전투에서 오스트리아
군을 격파한 다음 내친 김에 빈까지 진격해왔고, 그러자 오스트리아의 왕족과 귀족, 부유층들은 서둘러 빈을 탈출했다. 뒤에 남은 시민들이 나름대로 도시를 수호하겠다고 나섰지만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무기가 턱없이 부족해서 극장에 있던 총과 창, 칼 등의 소품들까지 꺼내왔지만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결국 빈은 포위된 지 일주일 만인 5월 13일에 함락당하고 말았다.
빈에 남게 된 베토벤의 상황은 절박했다. 적군의 포탄이 쏟아지는 동안에는 약해진 청력을 보호하기 위해 책상 밑으로 들어가 베개를 머리에 두르고 있어야 했다. 또 프랑스 군이 도시를 점령한 뒤에도 한 동안 오스트리아 군의 반격으로 인한 전투가 계속되어, 그는 사방을 뒤덮은 전쟁의 참화와 진군의 북소리, 군화소리로 인해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게다가 후원자들이 모두 도시를 떠나면서 경제적 원조가 끊기는 바람에 생계를 꾸려나가기도 힘겨웠는데 피난하기도 여의치 않았다. 가까스로 동생의 집에 의탁한 그는 여름에 쓴 한 편지에서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그 동안 우리는 가장 심각한 형태의 비참함을 겪고 있었습니다. 5월 4일 이후 나는 일관성 있는 작품을 거의 하나도 쓰지 못했습니다. 기껏해야 단편 이것저것 뿐입니다. …… 바로 얼마 전에 내가 쌓아올린 생존의 기반이 불안정해 졌습니다. …… 주위에서는 온통 파괴적이고 무질서한 행태 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온통 북소리, 대포소리, 모든 형태의 비인간적인 처참함 뿐입니다.”
그의 마지막 협주곡은 바로 이러한 경험에 기초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9월에 베토벤은 자선 연주회에서 [영웅 교향곡]을 지휘했고, 전황이 정리되어 감에 따라 빈의 질서와 생활도 점차 정상적인 상태를 되찾아갔다. 일련의 상황은 10월 14일 쇤부른 궁전에서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사이에 강화조약이 체결되면서 일단락 되었고, 베토벤도 다시금 기지개를 켰다.
그 전란의 와중에 작곡된 것으로 알려진 [피아노 협주곡 제5번 E♭장조]는 베토벤 최고의 역작 가운데 하나이다. 이 작품의 장대한 스케일, 왕성한 추진력, 찬란한 색채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심지어 베토벤 자신조차도 이 정도로 대담하고 격렬한 협주곡은 쓴 적이 없었다. 그는 이 곡에서 특유의 강력한 피아니즘을 그 어느 때보다 과감하게 펼쳐 보였고, 그 결과 이전의 [피아노 협주곡 제4번 G장조]에 이어 다시 한 번 피아노 협주곡사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피아노 협주곡 제5번 "황제"는 베토벤의 5곡의 피아노 협주곡의 최후를 장식하는 곡으로 작풍은 원숙하고, 구성은 웅대하며 내용은 장엄한 최대의 걸작이다. 1809년 (38세)의 작품이다. 베토벤은 35세에서 40세에 걸친 5년동안에 비참한 전쟁을 두 번이나 경험하였다. 그러나 강직했던 그는 일단 정착한 빈에서 한 발짝도 떠나지 않았다. 그 전쟁이란 1805년과 1809년 2회에 걸친 나폴레옹 군과의 싸움으로서 두 번 다 오스트리아 군은 참패했고, 빈은 나폴레옹 군대에 의해 점령되었다. 1809년 전쟁 때에는 약 20만의 오스트리아군이 명장 칼 대공의 지휘 아래 용감히 싸웠으나,
"대육군"을 자랑하는 나폴레옹군의 교묘한 작전과 기동력앞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나폴레옹은 5월 8일에 빈의 쇤브룬에 들어왔고, 13일에는 입성식이 거행되었다. 하이든이 빈에서 77세의 생애를 마친것은 그로부터 18일 후인 5월 31일의 일이었다. 프랑스 장교와 길에서 엇갈릴 때, 베토벤은 이렇게 말했다고 전한다. "내가 만약 전술을 대위법만큼 잘 알고 있었다면, 한 번 혼을 내줬을텐데 말이야"
이런 혼란 속에서 "황제"는 완성되었다. "교향곡 제5번", "제6번"을 완성한 다음 해이니만큼, 베토벤의 왕성한 창작력은 설사 육체나 정신이 흔들리기는했지만, 결코 그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뒤에도 신변의 사정은 조금도 호전되지 않았다. 이 무렵부터 베토벤은 점점 더 마음 깊숙이 정신을 가라앉히게 되며 "고별"소나타등을 써서 기술적 원숙에서 정신적 성숙으로 일단 전진한다. 이른바 후기로 접어들게 되는 것이다. 이 협주곡은 그런 점에서 베토벤의 창작이 명인적 연주 기교의 정점에 도달하여 압도적 역감을 보였던 시기, 그러면서도 내일에의 불안이 항상 존재했던 시기의 작품이다. 외관이 크고 호방하며, 기교에 있어서 치밀한 것들이 높은 경지에서 균형이 잡혀 극적인 전개로서 효과를 돋우고 있다.
이 곡의 초연은 1811년 11월 28일 라이프찌히에서 행해졌다. 그 때의 피아노 연주자는 교회 오르가니스트인 시나이더(J. F. Schneider)이었는데 매우 호평이었다. 빈에서는 이듬해 2월 15일에 피아노 교과서로 유명한 체르니의 독주로 연주되었는데, 그 날의 평은 좋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어찌 된 일인지 "제4번"과 마찬가지로 베토벤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다시 연주되지 않았다고 한다. 아마도 이 곡의 폭발적이고 중후한 울림이 당시의 청중에게는 저항감을 느끼게 했는지도 모른다.
이 곡은 구성상 몇가지 특색이 있다. 앞의 "제1번"에서 독주 피아노로서 시작하는 새로운 기법을 시도한 바 있는 베토벤은 여기서는 제2악장 서두를 독주 피아노의 카덴짜로 시작한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아주 호화로운 인상을 준다. 또 보통은 독주자의 즉흥에 맡기는 카덴짜를 전체의 통일을 위해 스스로 적어 넣고 있다. 그 밖에 제2악장에서 쉬지 않고, 제3악장으로 넘어가는 등 대담한 수법은 그 뛰어난 내용과 더불어 훌륭히 결실되어 있다.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제5번》은 그의 피아노 협주곡 가운데 최대의 걸작이다. 이 협주곡에는 황제란 별명이 붙어 있는데, 이것을 언제 누가 어떻게 붙였는지는 모르지만, 이 곡의 당당함이나 그 화려하고 웅장함을 생각할 때 이 황제를 연상시키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이 별명은 그러한 의미에서 볼 때 베토벤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이며, 또한 이것이 어떤 특정인물을 지목한 것도 결코 아니다.
모스크바에서 후퇴하는 나폴레옹
그리고 곡의 형식에 있어서도 《제4번 피아노 협주곡》에서 독주 피아노로 시작되는 새로운 연주법을 시도한 그는 제5번에서는 제1악장의 첫머리를 독주 피아노의 카덴짜로 시작하는 또 다른 새로운 연주법을 시도하고 있으며 처음부터 아주 호화로운 인상을 주고 있다.또 제1악장의 마지막 카덴짜가 나올 곳에서 베토벤은 이에 닮은 것을 스스로 적어놓고도 즉흥적인 카덴짜는 금지 시키고 있다. [카덴짜는 필요 없으며 그대로 계속한다.]라고 주식을 붙이고 있는데 새로운 방법이라 하겠다. 제2악장에서 제3악장으로 쉬지 않고 이어지는 것은 제4번에서 시도했던 것이나 여기서는 그 대조의 묘미가 잘 나타나 있는 것이 특이한 점이다.
이 곡은 1808년에서 다음해에 걸쳐 작곡되었다. 이 시기는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어수선했던 때로, 그의 《노테봄》 의 제29장에 [게네랄바스와 작곡법에 대한 베토벤의 원고...]란 항목이 있는데, 이것에 의하면 베토벤은 루돌프 대공에게 작곡법을 강의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1808년부터 시작되었는데, 그 다음해에 프랑스군이 빈을 점령하였기 때문에 대공은 9개월 동안 빈을 떠나 피신하여 강의는 사실상 중단된 것으로 보여진다. 그 증거로는 작품 81a의 Eb장조 피아노 소나타의 제1악장 원고에는 [이별의 인사, 빈 1809년 3월 4일, 루돌프 대공의 떠남에 즈음하여]라고 적혀 있으며, 마지막 악장에는 [1810년 1월 30일, 루돌프 대공의 도착]이라 적혀있는 것으로 증명된다. 이와 같이 모든 면으로 들떠 있고, 또한 프랑스 군인에게 교육을 받고 있던 시기에 이 곡은 작곡되었다. 당시 프랑스군의 장교와 거리에서 서로 스쳐 지날 때, 베토벤은 주먹을 불끈 쥐고 [내가 만약 전술을 대위법만큼 만 알고 있다면 가만 두지 않을 것을]이라고 말하였다는 것도 이 때의 일이다.베토벤은 조국을 사랑했고 조국의 해방을 위해 음악으로 애국정신을 표현한 위대한 애국 투사이기도 했다.
이 곡의 초연은 빈이 아니고, 라이프찌히의 게반트하우스에서 1811년 11월 28일 거행되었다. 독주자는 당시 라이프 찌히, 파우리네 교회의 오르가니스트였던 시나이더(Schneider)였는데 초연 당시 좋은 평을 받고 성공적으로 끝났다. 빈에서는 그 다음해인 1812년 2월 15일에 피아노 교본으로 명성을 떨친 체르니(Czerny)가 독주자로서 케른트나르 트 극장 무대에서 연주되었는데 이 때의 평은 좋지 않았다. 이 곡은 그의 후원자인 루돌프 대공에게 헌정되었는데 베토벤의 생존시에는 다시 연주되지 않았다
https://youtu.be/d0rKfxFguH4?si=Wkf8em-5hC2SLkIQ
(Beethoven - Piano Concerto No. 5 Op. 73 in E-flat major. Evgeny Kissin)
글쓴이 : 베토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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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ethoven: Piano Concerto No. 5 "Emperor" Op. 73 - Daniele & Maurizio Pollini - Sinfónica de Galicia
https://youtu.be/yTLOQGF-c1E?si=QLwQ94IE7_6tIqZ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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