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8월 9일 연중 18주간 금요일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24-28
24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25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26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27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2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이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나라에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
사랑의 실천이 바로 우리의 십자가
우리가 지고 있는 십자가는 항상 무거운 짐처럼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무게가 무거운지 가벼운지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만큼인지 측량하거나 알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지고 골고타 산으로 올라가신 그 십자가를 지겠다고 나서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십자가의 무게가 그러하다면 내가 왜 이렇게 긴 십자가를 지고 지겹게 일생동안 살고 있는지 자신의 신세를 탓하는 사람들은 많을지언정 십자가의 길이가 짧아서 길이를 늘려달라고 조르는 사람은 더욱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자신’은 버려야 하는데, 잊어야 하는데 그 자신(自身)이 무엇인지? 누구인지? 어떻게 버릴 것인지? 언제 버려야 할 것인지? 왜 버려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저도 항상 그게 의문이었습니다. 내가 버려야 할 <자신은 무엇인가?> 자신을 버리면 어떻게 자기의 십자가를 질 수 있다는 말인가?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듯이 사실 자신이 버려야 할 자신을 아주 잘 아는 사람이라면 성인이겠지요. 하느님의 특별하신 성령의 도우심으로 성인들은 이 모두를 알 수 있었답니다.
아주 오래 전의 일로 생각되는데 그날은 서울 어느 성당에서 강의를 6시간이나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많이 피곤하였습니다. 대전으로 오는 무궁화호 열차를 탔는데 그 때의 무궁화호열차는 참으로 좋은 차였습니다. 내 좌석은 통로에 위치해 있었는데 앞에 의자를 돌려놓고 한 가족이 같이 여행하고 있는 듯 했는데 불청객처럼 나는 한 쪽에 가만히 앉아 있었고, 내 맞은편에는 50이 넘은 듯한 신사가, 그 옆에는 그의 부인이, 그리고 내 옆에는 젊은 딸과 함께 가족이 타고 있었습니다. 나는 피곤해서 자리에 앉자마자 눈을 감고 의자에 몸을 기대고 있었는데 갑자기 무언가 작은 모래와 같은 것이 내 오른쪽 볼에 날라 온 것입니다. 그런데 무언지 모르고 그냥 눈을 감고 있었는데 조금 있으니까 이제는 왼편 볼에 또 무엇이 날라 와 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눈을 뜨고 범인을 찾고 있었습니다. 짐작하건데 범인은 바로 내 앞의 신사양반이었습니다. 그 분은 코딱지를 검지로 파서 엄지와 검지 사이에 놓고 동그랗게 탄환을 만들어서 중지로 내게 쏜 것이었습니다. 나는 항의를 하려고 일어서려다가 문득 나도 그렇게 하는 때가 있었다는 것이 하필 생각이 났는지 참았습니다. 그리고 그 신사가 그렇게 하는 것을 자신이 알고 행하였다면 따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사실 자신을 잘 모르고 사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만약 내가 그렇게 하였다고 항의하였다면 생사람 잡는다고 오히려 야단을 맞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내가 모르는 나까지 모두 버릴 수는 없습니다. 내가 모르는 자신은 교만함이 가장 클 것입니다. 그 교만함도 버려야 하고 자신이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무지, 편견, 아집도 버려야 합니다. 또한 나의 이기심, 형식적인 삶이나 체면치례, 허례와 허식, 그리고 세상에 대한 무한한 욕심, 그리고 자존심, 명예와 부귀와 영화까지는 몰라도 돈에 대한 헛된 바람이나 섬김을 받으려는 자세, 기도할 줄 모르는 자기도취 등 참으로 버려야 할 것이 너무도 많습니다. 아마 일주일 내내 찾는다고 해도 부족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버린 다음에야 십자가를 질 자격이 생기는 것입니다. 내가 버려야 할 것은 내 생명과 맞바꾸는 것이라는 데서 우리는 긴장됩니다. 정말 그런 것들이 내 생명을 바꿀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이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섭고 참기 힘든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정말 내가 처한 모든 환경과 역경들을 모두 극복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십자가를 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십자가는 바로 하느님과 이웃을 하나로 만드는 화합의 도구이며 사명이며, 가치이며, 우리의 삶입니다. 우리의 사랑의 실천이 바로 우리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십자가를 잘 지고 살았는지를 판단하는 기준이며, 우리의 생명을 구하는 유일한 길은 우리가 사랑하며 살았는지, 우리가 정말로 나의 모든 것을 버리고 진실로 하느님과 이웃과 일치하는 사랑의 삶을 살았는지, 주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주님의 바람대로 우리의 행실을 바르게 하고 살았는지를 다그치는 오늘 말씀이 더욱 무섭게 다가옵니다.
<하느님께서는 너희 조상들을 사랑하셨으므로 그 후손들을 선택하셨다.>
▥ 신명기의 말씀입니다. 4,32-40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32 “이제, 하느님께서 땅 위에 사람을 창조하신 날부터
너희가 태어나기 전의 날들에게 물어보아라.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물어보아라.
과연 이처럼 큰일이 일어난 적이 있느냐?
이와 같은 일을 들어 본 적이 있느냐?
33 불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소리를 듣고도
너희처럼 살아남은 백성이 있느냐?
34 아니면 주 너희 하느님께서 이집트에서
너희가 보는 가운데 너희를 위하여 하신 것처럼,
온갖 시험과 표징과 기적, 전쟁과 강한 손과 뻗은 팔과 큰 공포로,
한 민족을 다른 민족 가운데에서 데려오려고 애쓴 신이 있느냐?
35 그것을 너희에게 보여 주신 것은 주님께서 하느님이시고,
그분 말고는 다른 하느님이 없음을 너희가 알게 하시려는 것이다.
36 그분께서는 너희를 깨우치시려고
하늘로부터 당신의 소리를 너희에게 들려주셨다.
또 땅 위에서는 당신의 큰 불을 너희에게 보여 주시고,
너희가 불 가운데에서 울려 나오는 그분의 말씀을 듣게 해 주셨다.
37 그분께서는 너희 조상들을 사랑하셨으므로 그 후손들을 선택하셨다.
그분께서는 몸소 당신의 큰 힘으로 너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셨다.
38 그리하여 너희보다 크고 강한 민족들을 너희 앞에서 내쫓으시고,
너희를 이 땅으로 데려오셔서,
오늘 이처럼 이 땅을 너희에게 상속 재산으로 주신 것이다.
39 그러므로 너희는 오늘,
주님께서 위로는 하늘에서, 아래로는 땅에서 하느님이시며,
다른 하느님이 없음을 분명히 알고 너희 마음에 새겨 두어라.
40 너희는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그분의 규정과 계명들을 지켜라.
그래야 너희와 너희 자손들이 잘되고,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영원토록 주시는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