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그 천사가 서서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라.
이 성전이 재건된 예루살렘 성전이라는 점은 2절에서 "이방인들"이라는 언급이 나옴으로써 확실해진다. 무천년주의자들은 이 성전을 "신약 교회"로 단정내리고 싶어 좀이 쑤시지만 좀 기다려 보라. 왜 이것이 신약 교회가 아닌지는 본문을 통해 다 밝혀지니 말이다. "그 천사"가 전장에 나왔던 그 구름으로 옷 입은 천사인지 또다른 천사인지 확실하지 않다.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 신약 교회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건물 성전의 시대가 종식되었고 지금은 성도의 몸이 성전이 되는 경륜인 것은 기초 상식이기 때문에 내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아실 것이다.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주시니 그분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성전들에는 계시지 아니하시며(행 17:24).
만일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께서도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이는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며 너희는 그 성전이기 때문이라(고전 3:17).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의 몸을 성전 삼아 2천년 동안 성령께서 내주하신 것은 이 땅에 구약 성전이 더 이상 없었던 것과 관련이 있다. A.D.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무너지기 수십 년 전에 이미 성령께서는 오순절로 탄생한 신약 교회 성도들 안에 거하고 계셨다. 그때는 사람들이 인식이 전환되지 않아서 건물 성전도 여전히 의미 있다고 여겼고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철거된 다음에야 서서히 그 인식이 돌아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신약 교회를 밀어내고 등장한 로마 카톨릭 체제는 다시 구약 종교를 짝퉁으로 흉내내어 부활시켰으며 그들은 "성 베드로 성당"을 일종의 예루살렘 성전 대체제로 만들어 추종자들을 거기로 끌어들여 경배하도록 했다.
내가 주장하는 주안점은 이렇다. "건물 성전은 지금 의미가 없게 되었지만 그것은 교회 시대 동안만 그럴 뿐이다"라는 것이다. 여러분은 자신이 출석하는 교회를 <성전>이라 부르면 안 되고 자신이 예배당을 성전이라 부르는 관행을 가진 교회에 출석하고 있다면 그 교회와 교단의 가르침은 필연적으로 문제가 다분할 수 밖에 없음을 알기 바란다.
그러한 종교적 관행은 특히 종말론에 있어서 심각한 오류를 자아낸다. 자기 교회를 성전이라 믿는 신자들은 계시록 11장과 같은 본문을 마주할 때 올바른 해석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교회당을 성전이라 일컫는 관행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계 11장의 이 부분도 건물 교회를 말하는 것이구나, 그렇게 무심히 넘겨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자, 여러분이 자기 출석 교회를 성전이라 믿건 말건 상관없이 그 예배당 안에는 "제단"이 있는가? 물론, 여러분이 카톨릭에 다니고 있다면 거기에는 실질적인 제단이 있다. 그러나 개신교회 안에는 제단이 없고 설교단만 있다. 제단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실로 엄청나다. 예배당 안에 제단이 있는 종교는 <구약 종교>이고 예배당 안에 제단이 없으면 <신약 종교>이기 때문이다. 제단이 있다면 거기에 뭔가 제물이 계속 바쳐지고 있다는 뜻인데 로마 카톨릭의 경우 성체성사라는 명목으로 그 제단에서 미사 의식을 집전한다.
무슨 말인가, 여러분이 명목상 "개신교인"이 맞다면 여러분은 교회당 안에 제단을 두고 제사를 드리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본문의 "제단"에 대해서 회피하지 말고 똑바로 해석해야 한다. 본문이 카톨릭 성당에 대해 묘사하는 것은 당연히 아닐 것이므로 이 제단은 신약 교회와 무관한 것이다.
문자적으로 해석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비겁한 개신교 학자들은 형이상학 영역으로 도망간다. 그들은 이 성전과 제단과 그 전반적인 묘사들을 상징으로 떠넘겨 버린다. 이게 영적인 교회라고 주장하면서 실질적인 건물과 무관하단다. 그런가? 그러면 이방인들이 이 성전을 침범할 수 있다는 2절의 언급은 다 허구인가? 하늘의 영적인 교회를 이방인들이 어떻게 훼손하느냐 말이다. 그러니까 해석을 못 하겠다고 상징으로 에둘러 말하는 못된 버릇은 많이 배운 신학 박사님들의 전유물인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꼼수가 통하지 않도록 분명하게 성경을 기록하셨다.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라 이 경배하는 자들은 정통 유대인들임이 분명한데 2절에서 이들에 대비된 존재로서 "이방인들"을 언급하기 때문이다. 이 성전은 유대인들의 손으로 지어진 유대인들의 성전이며 솔로몬 성전과 스룹바벨 성전의 계통을 물려받은 정통 유대인 성전인 것이다. 유대인들은 바빌론 침공으로 예루살렘 성전이 없어진 이래 회당을 결성하고 그 회당이라는 거점들을 중심으로 한 신앙 형태를 발전시켰다. 회당 중심 유대교에서 발전된 영적인 부산물이 소위 "탈무드"를 비롯한 랍비들의 구약 성경 주석서들이다.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합법적으로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유일한 장소가 성전이었기 때문에 예루살렘 성전은 현대의 모든 대형교회들을 능가하는 물자와 인원의 집결지였다.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게 구약 종교의 체제이지만 너무 상업화되다 보니 주님께서는 성전에서 상인들을 쫓아내셔야 했다. 하나님께서 7년 환란 때 지어질 성전에서 드려지는 경배를 받아주실지 관심이 가는데 일단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명칭이 붙었기 때문에 이 성전과 경배드리는 행위 자체는 매우 합법적인 게 분명하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경배를 받아주실 것이다.
그러면 여러분은 한 가지를 유념해야 하는데, 교회 시대인 지금 성전이 예루살렘에 세워진다면 어떻게 될까, 하는 부분이다. 성전이 세워진다면 그것은 본문에서처럼 "하나님의 성전"이고 하나님께서는 거기서 드려지는 실질적인 동물 제사의 제물과 그 유대인들의 경배를 받아주실 것이다. 구약 종교와 신약 종교가 공존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천년왕국에서는 그것이 실제로 일어나겠지만 교회시대인 지금은 그것이 불가능하다.
성령께서 오순절 이후 지금까지 그 어떤 건물 성전에도 권위를 부여하지 않으시고 오로지 그리스도인 안에 내주하시면서 사역하셨는데 별안간 방침을 바꿔서 건물 성전과 그리스도인에 대한 이원적 사역을 하신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네가 본래의 돌올리브 나무에서 꺾여 본성을 거슬러 참올리브 나무에 접붙여졌는데 하물며 본래의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본래의 올리브 나무에 얼마나 더 잘 접붙여지겠느냐?(롬 11:24).
여기서 돌올리브 나무는 이방인 출신 크리스찬들을 말하고 참올리브 나무는 "하나님의 나라"를 말한다. 즉, 구약 시대에 성령과 무관했던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음으로 성령 안에 접붙여지고 구원받은 백성이 된다는 뜻이다. 본문은 속성이 다른 두 가지, 곧 돌올리브 나무 가지와 참올리브 나무 가지가 동시에 나무에 접붙여진다고 하지 않는다. 하나가 붙여지면 다른 게 제거되는 배타적 관계인 것으로 말씀하고 있다.
따라서 교회가 접붙여진 기간인 2천 년 동안 이스라엘 올리브 나무 가지는 떨어진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이고 교회 가지가 떨어진다면(휴거된다면) 그때는 이스라엘 가지가 다시 원래의 나무에 접붙여질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이 이야기를 길게 설명한 이유는 이렇다. 많은 크리스찬들이 "예루살렘 (제3) 성전 재건은 곧 이루어질 것이다"고 믿는 것을 아예 넘어서 "지금 우리 눈 앞에서 지어질 것이다"라고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럴 수가 없다.
성전이 지어지는 과정을 포함해서 완공까지, 그 전반적인 프로세스가 교회시대에 발생할 수 없는 일이다. 왜 그런지 아는가? 예루살렘은 전세계가 주목하는 도시이고 UN이 그 땅을 감시하고 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도 가장 관심의 촉각을 모으는 장소인 템플 마운트에 소리소문 없이 유대인 성전이 올려질 수 있다고 믿는 바보가 있는가? 거기에 굴삭기 한 대라도 진입하면 CNN 탑 뉴스에 올라간다.
만일, 그럴리 없지만 교회의 휴거 이전에 성전 재건이 시작된다면 그 사건 자체가 휴거의 강력한 예표가 될 것이고 그 시점부터 우리는 휴거 날만 기다리며 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원하실리가 없고 교회는 복음 전파의 사명이 끝날 때까지 세상 죄인들 구원에 진력해야 하기 때문에 예루살렘 성전 재건은 교회 시대에 시작될 수 없는 것이다.
2 그러나 성전 밖에 있는 뜰은 남겨 두고 측량하지 말라. 이는 그것을 이방인들에게 주었으며 그들이 마흔두 달 동안 그 거룩한 도성을 발 아래 짓밟을 것이기 때문이라.
측량된 구역과 측량되지 않은 구역의 차이점이 어디에 있는가? 성전 밖에 있는 뜻은 표면적 의미상 성전 건물에 부속된 구역인 마당을 말하는 것이지만 더 넓은 의미에서는 성전을 둘러싼 예루살렘 도성 전체로 적용될 수도 있다. 즉, 이방인 군대가 와서 예루살렘 도성을 완전히 장악할 때 그 군대는 성전 바깥에 머물 것이라는 얘기다.
느부캇넷살 왕은 적그리스도의 강력한 예표인데 같은 점도 있고 차이점도 있다. 같은 점은 둘 다 예루살렘을 포위, 함락시키고 성전을 더럽히고 약탈한다는 것이다. 다른 점은 느부캇넷살의 경우 성전을 부수고 아예 평탄화시켜 버렸지만 적그리스도는 성전을 급히 부수지 않고 그 안에 들어가서 무슨 짓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이 말했던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서 있는 것을 볼 때면 (읽는 자는 깨달으라.)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하라(막 13:14).
자, 적그리스도는 혼혈 유대인이고 그는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생각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7년의 중간에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성전을 차지한 후에 티투스나 느부캇넷살처럼 다 부수고 태워버리지 않는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예루살렘에 자신의 보좌를 세우고 그곳이 세계 정부 수도가 되었다고 선포할 것이다. 그러니 멸망의 아들은 느부캇넷살이나 티투스처럼 성전을 파괴하면 안된다는 얘기다.
그들이 마흔두 달 동안 그 거룩한 도성을 발 아래 짓밟을 것이기 때문이라 여기에 개월 수가 명시되어 나오는데 3년 반이고 개월수로 마흔 두달, 일수로 1,260일이다. 이 기간은 에누리 될 일이 없고 절대 변동될 리가 없다. 내가 지난 강해에서 힘주어 언급한 바 있지만 7년 환란이라는 절대적인 기간은 깎여 나가지 않는다. 다만 7년의 끝무렵에 있을 환란후휴거 날짜는 앞당겨질 여지가 남아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6일 전쟁으로 말미암아 동서로 분단되어 있던 예루살렘 전체에 대한 관할권을 되찾아 왔다. 지금은 성전 산이 문제가 되고 있는데 그 구역은 여전히 요르단이 통제하고 있는 상황이다. 유대인들의 디아스포라 소망의 핵심은 예루살렘 회복이며 유대인들은 단순한 "국책 사업" 수준을 넘어서 예루살렘을 고대처럼 복원하고 성전도 세우는 사역을 민족적 열망으로 간직하고 있다. 예루살렘이 아랍 군대나 유럽 군대에 의해 다시 짓밟히는 십자군 전쟁 때의 끔찍한 악몽이 반복되는 것은 유대인들 중 누구도 바라지 않는다. 전세계 유대인들은 그런 일을 막기 위해서 자기들의 전 재산이라도 내놓을 것이다. 혹은 그 일을 막기 위해서라면 이스라엘은 전세계를 향해 핵미사일이라도 쏠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가장 바라지 않는 그 소름끼치는 일은 결국 대환란 때 일어나고 말 것이다. 인간적으로 불가능해 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의 모든 경제적, 군사적 힘을 꺾으신 다음 적그리스도의 군대를 거기에 입성케 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주를 버린 자들이며, 나의 거룩한 산을 잊어버리고 그 군대를 위하여 식탁을 마련하며 그 수대로 술을 제물로 제공하는도다(사 65:11).
예루살렘을 점령한 이방인 군대는 3년 반 동안 그 도성을 떠나지 않으면서 유대인들의 고혈을 짜내어 착취하고 뜯어 먹을 것이다. 옛날부터 전쟁이 나면 제일 고생하는 집단이 군인들이 아닌 군대를 서포트하는 민간인들이다. 군인들이 배가 고프면 눈이 돌아가게 되고 힘없는 민간인들을 위협해서 사정없이 털어먹게 되어 있다. 전시가 아닌 때에도 군인들은 백성들을 곧잘 강탈했기 때문에 두려움과 기피의 대상이었던 사실이 성경에도 나오고 있다.
또 병사들도 그와 같이 그에게 물어 말하기를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하리이까?”라고 하니, 그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아무도 억압하지 말고 거짓되이 고소하지 말며 너희의 급료로 만족하라.”고 하더라(눅 3:14).
침례인 요한은 군인들에게 무력을 사용해서 힘없는 백성을 괴롭히지 말라고 명령했는데 그런 원성이 이미 자자했기에 나온 이야기다.
대환란 때 적그리스도를 추종하는 자들은 666표를 받아서 아주 잘 먹고 사는 게 절대 아닌데 이 점을 착각하는 사람도 있다. 적그리스도의 신세계질서(NWO) 체제는 로마 카톨릭이 지배하던 암흑시대 유럽과 흡사하다. 그 피라미드 사회 구조의 꼭대기에는 왕과 귀족들이 있고 그 바로 밑에 사제 집단, 그 밑에 무사 집단(기사), 그 밑에 상공업에 종사하는 장사꾼, 도제 장인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밑바닥에 농사 짓는 평민들과 농노들이 있다.
적그리스도 정부의 축소판을 잘 보여주는 것은 인도의 카스트 제도도 마찬가지다. 카스트 제도의 상층부에 있는 핵심 권력층은 두 집단이다. 하나는 브라만이라는 사제 계급, 다른 하나는 크샤트리아라는 군인 계급이다. 그 둘이 연합해서 백성들을 무참히 짓밟고 착취하면서 호의호식하는 피라미드 형태의 사회가 힌두교 국가인 것이다.
욥기 24장을 보면 대환란 때 일어날 사회적 부조리, 부패의 만연, 백성의 질고와 아픔에 대해 잘 묘사되어 있다. 그 내용이 길기 때문에 다 인용할 수가 없는데 여러분이 대환란 때의 사회상에 대해 잘 알고 싶다면 해당 본문을 꼭 한번 정독해 보기를 권한다.
산지의 소나기로 젖으니 피할 곳이 없어 바위를 품는도다. 그들은 아비 없는 자의 품에서 빼앗아 가고 가난한 자에게서 저당물을 취하는도다. 그들은 가난한 자를 옷 없이 벗은 채로 가게 하며 주린 자들에게서 곡식단을 빼앗고 이들은 담 안에서 기름을 짜며 포도즙틀을 밟으니 목이 말라 고생하는도다(욥 24:8-11).
여러분이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의 극한을 엿보고자 한다면 러다이트 운동(기계 파괴 운동)이 일어나던 영국의 초기 산업혁명 시대의 역사를 찾아 보면 된다. 그 시절 아동 노동 착취라는 개념이 없었기에 유치원생 아이들이 무지막지한 공장 노동에 시달렸던 것이 역사에 남아 있다. 또는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일어난 노동 착취와 인권 유린은 어떠하며 모택동의 중국에서 일어났던 집단 농장으로 인한 대기근은 어떠한지 찾아보라. 그런 인위적 재난들로 인해서 수억 명이 굶주리다 죽어갔던 것이 인류의 근현대사이다. 수 세기 동안의 노동 착취와 기근들은 대환란 때 일어날 일에 비하면 애피타이저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이런 질문을 여러 번 했기에 내가 이 얘기를 하겠다. 그 사람은 "적그리스도는 자본주의자에요, 공산주의자에요?"라고 내게 묻곤 했다. 나는 "자본주의자는 아니고 공산주의에 더 가까울 것이다"라고 여러 번 말했는데 그 친구는 납득하지 못하고 적그리스도는 자본주의자라고 믿으려는 것 같았다. 그 뒤에 마지막으로 그 친구가 물어봤을 때 나는 "적그리스도는 어떤 주의를 뛰어 넘은 초월적 전체주의자"라는 대답을 했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모든 사상의 극과 극은 서로 통한다는 개념 때문이다. 극우와 극좌는 어느 순간 서로 만나게 되어 있다.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는 러시아 볼세비키 공산주의를 원수처럼 여겼지만 나치들 자체도 생산 시설과 자본의 국유화를 신봉하는 사회주의자들이었다. 궁극적으로 그들이 이루고자 하는 세상은 소수의 선택받은 특권 귀족들(공산주의의 경우 당간부)이 절대 다수의 힘없는 국민을 일개미나 일벌처럼 부려먹으면서 파라오처럼 군림하는 그런 체제인 것이다.
적그리스도의 정부를 뭐라 부르건 나는 신경쓰지 않는다. 그게 군국주의, 전체주의 공산주의라 부르면 100% 맞는 얘기고, 자본주의냐고 묻는다면 글쎄 좀 애매하지만(자본주의는 개인의 자유권을 강하게 함유하고 있기 때문에) 어쨌건 매우 변질, 타락한 자본주의의 일종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자본주의 체제 안에도 어떤 나라들, 이를테면 싱가포르 같이 준사회주의식 피라미드 독재 사회인 데도 있으니 말이다.
3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그러면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고 하더라.
2절에서는 42개월, 3절에는 1,260일이라는 기간이 등장하는데 이렇게 '더블 체크'해 주시는 성령의 의도를 무시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7년 환란이라는 게 성경에 있나요? 어디? 하 하 하"라고 무식한 비웃음을 날린다던지, "대환란이라는 것은 정해진 기간이 있는 게 아니에요. 교회시대가 곧 대환란이에요"라는 또 다른 무식을 뽐내면서 성경을 덮어 버린다.
한번 말하면 좀 알아 쳐먹어야 될텐데 죄인들이 하도 변명하고 거짓말하는 데 익숙해 있다 보니까 성령께서 두 가지 버전으로 "42개월이다", "1,260일이다"라고 자상하게 설명해 주시는데도 "뭐요? 뭐요?" 하면서 사오정 노릇하는 이 딱한 개신교 신학 박사님들과 성경 해석가들을 어찌 하면 좋을까? 그들에게 어울리는 잠언이 여기 있다.
네가 어리석은 자를 곡식과 함께 절구에 넣고 공이로 찧을지라도 그의 어리석음은 그에게서 떠나지 아니하리라(잠 27:22).
우선 여러분이 알아야 될 핵심은 "두 증인은 과연 누구인가?"에서 시작될 것이다. 여러분은 신약에 등장하는 이 신사 양반들이 신약에서 나온 사람들이라고 단정할 수 있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두 증인은 구약에서 출발한 구약 선지자들이며 그들은 예수님의 초림 당시에도 지상에 나타났었다. 성경을 올바로 나누어 공부하지 않는 게으른 이단 종파 사람들은 두 증인의 정체성을 파악하지 못한 채 "내가 두 증인이 될거야"라는 이단적 망상에 빠져서 대환란 통과하는 꿈을 꾸고 있다.
그 곁에는 두 올리브 나무가 있는데, 하나는 그 그릇의 오른편에, 또 하나는 그것의 왼편에 있나이다.” 하고,(슼 4:3).
두 올리브 나무라 표시된 이 존재들은 두 증인들이다. 이들이 실질적인 올리브 나무가 아니라 나무로 상징된 사람들이라는 점이 슼 4:14에서 컨펌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4:2에 묘사된 금촛대는 마찬가지로 촛대로 상징된 어떤 인물일 것이다. 1차적으로는 성전 재건의 주역인 스룹바벨이고 더 본질적으로는 천년왕국 성전 건립자가 되실 주 예수 그리스도가 금촛대이다. 그리스도를 좌우로 보좌하고 있는 존재가 두 올리브 나무, 두 증인인데 이들이 누구인지는 슼 4장에서 설명하지 않지만 하여튼 확실한 것 한 가지는 이 자들이 스카랴의시대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마호메트나 몰몬교 창시자 죠셉 스미스, 통일교 문선명 같은 작자들은 두 증인에 결코 포함될 수 없다. 그 자들이 어떤 거짓말을 늘어놓건 두 증인은 기원전부터 존재하던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기를 “이들은 두 기름부음받은 자들이니, 온 땅의 주 곁에 서 있는 자들이니라.” 하더라(슼 4:14).
두 증인은 "두 기름부음받은 자들"이며 "온 땅의 주 곁에 서 있는 자들"이다. 기름부음은 "메시아적 사명"을 받았다는 표시이며 그래서 이들은 왕 같은 제사장이거나 선지자라는 얘기다. 그에 해당하는 주요 구약 선지자가 누구인가, 첫째가 모세요, 둘째가 엘리야다. 에녹은 그가 비록 신약 교회 휴거의 예표가 되는 휴거 성도라 할지라도 두 증인 중 하나는 될 수 없다. 에녹의 경우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기름부으신" 것에 관한 구절이 없기 때문이다.
"온 땅의 주 곁에 서 있는", 이 표현이 중요한 이유는 시제 때문이다. 시제가 현재형으로 되어 있지 않은가? 스카랴가 보던 그 때 당시에 "현재형"으로 거기 있는 사람들이라는 얘기다. 내가 왜 문선명이나 이재록, 이만희가 두 증인 후보생이 될 수 없다고 하는지 이해가 가는가? 그 자들이 두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예수님처럼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나는 있느니라"(요 8:58)라고 증거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사람도 예수님의 이 증거를 따라할 수 있는 경우는 없으며 그들 모두는 자기 인생이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시 90:10)이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는 하루살이에 지나지 않는다.
두 증인의 등장 무대를 옮겨서 이제 복음서로 건너가 보겠다.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을 데리고 따로 떨어져 있는 높은 산으로 올라가시어, 그들 앞에서 변형되시니 그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의 옷은 빛처럼 희어지더라(마 17:1-2).
제자들 앞에서 주께서 "변형"되셨다(transfigure: 형태가 바뀌다). 여러분이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자격으로 휴거가 될 때 지금의 누추한 몸 그대로 올라가는 게 아니라 주님께서 거기서 "변형"되셨듯이 변형되면서 올라갈 것이다. 그리고 영광을 입으신 주님의 찬란한 모습 옆에 두 신사가 등장한다.
그런데, 보라,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에게 나타나서 주와 함께 이야기하더라(3절).
슼 4:14에서 언급된 바 "온 땅의 주 곁에 서 있는 자들"이 실제로 제자들 앞에 모습을 시연한 것이다. 스카랴서에는 그 둘의 실명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이제 그들의 정체성은 "모세와 엘리야"였다는 것이 백일하에 공개되었다.
이것이 성경의 <점진적 계시>, 혹은 <계시의 점진성>이라 부르는 개념이다. 이후에 나온 계시가 이전에 나온 계시를 설명하고 또는 보완, 추가하는 형태로 진행된다. 즉, 창세기를 온전히 설명하기 위해서는 신약이 필요하고 성경의 모든 책들이 그런 관계 하에 놓여 있기에 구약 성경만을 고집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66권 성경을 다 믿는 그리스도인들보다 성경을 온전히 깨달을 수 없다는 얘기인 것이다.
이제 스카랴서의 두 올리브 나무가 변화산의 두 사람, 모세와 엘리야라는 점은 밝혀졌고 그들이 지금까지 계속 예수님 옆에 서 있다는 것도 드러났다. 그렇다면 우리의 관심은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왜, 모세와 엘리야는 거기서 그러고 있는 것일까?"
두 증인에 관한 주제가 계시록에서 막중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기에 이번 11장 설명은 본문을 짧게 끊으면서 나갈 수 밖에 없음을 여러분이 이해해 주기 바란다.
우선, 모세가 두 증인 중 하나가 될 것이라는 어떤 명시적인 예고는 구약에는 아직 없다. 다만 모세의 시체가 무덤에 묻혀 있는 게 맞는지 미심쩍다는 인상을 주는 구절이 하나 있는데 한번 보자.
그러므로 주의 종 모세가 주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으니라. 주께서 그를 벧프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하셨으니 오늘까지 그의 묘를 아는 자가 아무도 없더라(신 34:5-6).
일단, 모세는 확실히 의학적으로 죽기는 죽었다. 본문에 죽었다고 되어 있으니까 죽은 것이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그가 평범하게 장례를 치른 것이 아니라 주께서 그를 직접 장사지내셨다는 것이다. 어떤 이스라엘 사람도 모세의 장례 절차를 직접 지켜보지 못했기에 심지어 그의 무덤이 어디 있는지도 아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 주님은 모세의 장례를 왜 그렇게 처리하신 것인가? 모세가 노숙자, 무연고자도 아니고 엄연히 가족과 친척이 다 있고, 게다가 그는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이끌었던 거의 왕에 준하는 지도자인데 쓸쓸하게 아무도 없는 장례를 치른다는 게 말이 되는가? 그런데 주님은 그런 방식을 취하셨다.
그렇다면 어떤 조문객도 지켜보지 않는 그 이상한 모세의 장례 과정에서 무슨 이벤트가 있었던 것인지, 구약은 더 서술하지 않지만 신약에 가서 보충 설명이 등장한다.
그러나 천사장 미카엘도 모세의 몸에 대하여 마귀와 더불어 다투며 논쟁할 때 감히 그를 모독하는 비난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주께서 너를 책망하시느니라.”고 말하였느니라(유 1:9).
천사장 미카엘이 모세의 장례식에 와서 사탄과 논쟁을 벌였다고 한다. 논쟁의 주제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모세의 몸에 대하여"라 되어 있는 것을 볼 때 그 몸을 미카엘이 차지하느냐, 사탄이 차지하느냐를 놓고 싸웠다고 봐도 무방하다. 모세의 몸을 두고 왜 공사다망한 미카엘과 사탄이 만사 접어두고 내려와서 언쟁을 벌이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무척 중요한 이유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보다 천년 이상 앞선 그 시대에 부활시키려고 하셨던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크게 예외를 인정하신 사례가 되고 사탄은 "죄인이 어떤 근거로 부활하고 게다가 음부 대신 하늘나라로 직행할 수 있습니까?"라고 방방 뛸 수 밖에 없는 사안이다.
자,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노아의 홍수 이전에 휴거되었지만(창 5:24, 히 11:5) 사탄이 에녹의 휴거 때문에 난리를 치며 항의했다는 성경 구절은 없다. 엘리야 역시 죽음을 보지 않고 불말과 불병거를 타고 휴거되었지만 그것 때문에 사탄이 하나님께 엄중 항의했다는 구절은 없다.
에녹, 엘리야와 모세의 한 가지 차이점은 이것이다. 에녹, 엘리야는 어쨌거나 죽음을 보지 않은 상태로 그저 그들의 위치가 땅에서 하늘로 바뀌어진 케이스이다. 모세는 늙어서 죽었고 죽었던 그가 살아나서 하늘나라로 갔다. 모세는 어떤 징계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는지 기억하는가? 그는 반석에 대고 말하라고 했는데 화가 나서 지팡이로 반석을 쳤다, 하나님께서 그를 징계하셔서 카나안 땅에 살아서 못 들어가고 먼 산에서 지켜보기만 할 것이라고 선언하셨는데 과연 그렇게 되었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모세는 참 애잔하고 기구한 운명의 사람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 모세는 크나큰 징계를 받았는데 그 징계보다 더 어마어마한 보상을 일거에 획득했다. 그는 당시 에녹, 엘리야 정도의 극소수 선택받은 자들만 하늘나라로 직행할 수 있고 나머지 구약 성도들은 음부 낙원에 내려가 대기해야 했던 구약시대임에도 하늘나라로 곧장 올라갈 수 있었다. 사탄이 볼때 모세에 대한 하나님의 처우가 <편애>라고 항의한다 해서 이상할 게 없다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모세만 편애하신 것이 아니고 과잉 대접하신 것이 아니다. 결국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고귀한 십자가 희생과 장사, 부활하심 이후에 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기만 해도 하늘나라에 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세, 엘리야, 에녹이 하등 부러울 게 없는 그리스도인들이다. 모세 편에서의 문제는 그가 나중에 대환란 때 이 땅에 올 것이고 여기서 고난을 겪다가 끝내 목베임을 당할 것이라는 데 있다. 여러분이 피상적으로 생각하면 모세는 참 복 받은 사람이다, 구약 시대에 그런 특권을 받아서 하늘나라에 갔다니, 그렇게 생각하지만 결국 모세는 대환란 때 이스라엘로 와서 순교를 해야 한다. 즉, 스카랴 당시에나 초림 때의 변화산상의 모세나 계 11장의 모세나 아직 "임무 수행중"인 상태이고 여러분이나 나처럼 휴거되면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들어갈 수 있는 편한 마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우리도 하늘 잔치에 들어가기 전에 그리스도의 심판석이라는 거북하고 괴로운 자리를 거쳐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적어도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피를 볼 일은 없다. 반면 모세는 가장 힘든 과정을 남겨둔 채 저 위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내 말의 요지는 모세는 하나님께서 가장 편애하신 사람이 아니라 가장 힘든 일을 수행케 하기 위해 남겨놓으신 선지자라는 것이다. 그는 최후의 환란 성도의 자격으로 본문 11장에서 목베임 당하고 휴거될 것이다. 그는 마지막까지 노고를 쏟다가 휴거되는 사람, 힘든 일을 도맡아 하는 환란 사역자이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값진 보상을 천년왕국에서 주기로 약속하신 것이다. 모세는 엘리야와 함께 주님의 왼편과 오른편에서 섬기는 직(우의정, 좌의정) 중 하나를 맡아 천년왕국에서 통치할 것이다.
주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참으로 너희가 내 잔을 마시고, 또 내가 받는 침례로 침례를 받으려니와 나의 오른편과 왼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요, 나의 아버지께서 예비하신 자들에게 주실 것이니라.”고 하시더라(마 20:23).
천년왕국 때 통치자의 반열에 올라 주님과 함께 철장을 잡고 다스리는 위치에 있는 것은 매우 영예로운 일이다. 요한과 야고보는 그 영광스러운 자리의 가치를 진작에 알아보고 주님의 왼편과 오른편 자리를 자기들에게 나눠주실 수 없는지 의사를 타진해 보았다. 주님의 대답은 결정적이고 확고했는데 "안되느니라"였다. 왜냐하면 그 두 자리는 이미 구약의 두 신사분에게 "예약"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모세와 엘리야인 것이고 그래서 그 둘은 변화산에서 주님과 함께 나타난 것이다.
이제, 나머지 한 증인인 엘리야에 대해 살펴보고자 하는데 언급할 것은 모세에 비해서는 적다. 엘리야의 휴거에 대해서는 워낙 유명한 사건이기 때문에 설명할 필요도 없지만 문제는 엘리야가 선지자들 중에 어떤 위상을 갖고 있는 사람이기에 두 증인이라는 막중한 자리에 낙점된 것인가 하는 의문이다. 자, 엘리야는 남유다가 아닌 북이스라엘 선지자였고 그는 아합왕과 이세벨 왕비에 대적해서 조상들의 신앙의 순수성을 옹호한 대표적 선지자였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영(능력)을 받아서 그와 유사한 사역을 펼쳤으며 엘리사가 그러했기 때문에 자연히 구약 유대인들은 엘리야가 앞으로 다시 나타날 것이라고 기대를 품었다. 게다가 성경은 그들의 기대가 틀리지 않다고 확실하게 천명하고 계신다.
보라, 내가 주의 크고 무서운 날이 오기 전에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들의 마음을 자식들에게로, 자식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들에게로 돌이켜, 내가 와서 땅을 저주로 치지 않게 하리라(말 4:5-6).
킹제임스 성경의 구약 배열 순서에 따르면 말라키서 4:6이 구약의 마지막 구절이 된다. 구약의 마지막 부분에서 선지자 엘리야의 재림을 다루고 있다는 것은 무척 의미가 깊을 수 밖에 없는 일인데 게다가 그가 등장할 시기에 대해서도 결정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엘리야는 "주의 크고 무서운 날이 오기 전에" 다시 올 것이다.
구약의 마지막 책인 말라키서 마지막 장에서 엘리야가 등장하고 있고 신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에서 그 예언이 응하여 진짜 엘리야가 재등장하고 있다. 놀랍지 않은가? 이런 이유 때문에 두 증인의 정체성을 다루는 신학자들의 견해들도 "모세" 같은 경우에는 좀 아리까리하다고 두 증인에서 빼는 경우도 있지만 엘리야만큼은 두 증인 중의 하나로 남겨놓는 게 보통이다. 엘리야가 두 증인 중 하나가 아니라고 상상도 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정통 신학계의 범주 안에서 그렇다는 말을 한 것이고 몰몬교라던지 각종 유사 기독교 이단들에서 두 증인에 대해 주장하는 정신나간 헛소리들은 고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나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들 마음대로 대하였도다. 이와 같이 인자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고 하시더라(마 17:12).
그는 엘리야의 영과 능력을 가지고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들의 마음을 자식들에게로, 불순종한 자들을 의인들의 지혜로 돌아오게 하며, 주를 위하여 마련해 놓은 백성을 예비시키리라.”고 하더라(눅 1:17).
그런데 학자들의 머리를 뒤엉키게 만드는 한 가지 사실이 있다. 그것은 복음서에서 침례인 요한이 "엘리야", 혹은 "엘리야의 영과 능력을" 가진 선지자로 빈번하게 언급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 때문에 개신교 학자들은 계 11장 자체를 초림에다 갖다 놓는다던지, 아니면 교회시대에 맞춰 영적인 적용을 하는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변명할 수 있다. "저 구절들을 봐라, 구약에서 다시 올 것이라 했던 엘리야는 침례인 요한이 아니냐, 그러니 엘리야가 앞으로 다시 올 일은 없을거다."
그게 맞는가? 침례인 요한은 엄밀히 말해 "엘리야의 영과 능력"을 가진 별개의 선지자이지 엘리야라는 사람 자체는 아니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당시 예수님을 메시아로 영접하고 회개했더라면 침례인 요한의 사역은 엘리야의 사역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이고 엘리야 본인의 재림은 아예 불필요했을 것이다. 그들이 사도행전 2장 이후에라도 민족적으로 결단, 회개했다면 계 11장에 나오는 "진짜 엘리야의 재림" 사건은 교회 시대라는 간격을 넘어 대환란 때 발생하는 게 아니라 A.D. 1세기에 일어났 수 있었을 것이다. A.D. 1세기에 대환란과 두 증인의 활동, 재림과 천년왕국이 다 이뤄질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되지 않았고 "진짜 엘리야의 재림"은 앞으로의 대환란 때로 유보되어 있는 상태다.
만일 너희가 그것을 받을 의향만 있다면,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가 바로 그 사람이니라(마 11:14).
예수님께서 마 11:14에서 던져 주신 중요한 단서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침례인 요한은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가 바로 그 사람"이라는 말씀 그대로 엘리야의 몫을 통째로 대체할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변화산의 예수님 좌우에 나타난 존재가 모세와 엘리야가 아닌 모세와 침례인 요한일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침례인 요한의 사역의 권위를 백성들은 받아들이고 지도자들은 거절했기 때문에 결국 마 11:14은 불발로 끝났다. 침례인 요한이 그럼에도 구약의 선지자들 가운데서는 "으뜸"이라고 주님께 친히 인정받았는데 그 이유가 궁금하지 않은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인에게서 난 사람 가운데 침례인 요한보다 더 큰 선지자는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자일지라도 그보다 더 크니라.”고 하시더라(눅 7:28).
침례인 요한은 실질적으로 모세, 엘리야보다 더 큰 선지자였다. 이는 그가 엘리야의 영을 받아서 이스라엘 백성을 회개시키는 결정적인 임무를 맡았고 그것을 성실히 수행했기 때문이다. 물론 나중에 가서는 예수님이 진짜 메시아가 맞는지 긴가민가해 하는 등 의심 많은 모습도 보였지만 그의 입지는 선지자들 가운데 대단한 존재이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두 증인"이 대환란 때 해야 할 파견 임무를 이 침례인 요한이라는 사람은 한 명이 수행했고 그가 "두 사람 몫"을 해냈기에 그는 모세와 엘리야를 능가한 구약의 넘버 원 선지자로 주님께 인정받은 것이다.
4 이들은 땅의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두 올리브 나무이며 두 촛대니라.
이 구절은 슼 4:14을 인용한 것인데 원래에서 바뀐 부분들이 있다. 사소한 차이일지라도 주목해야 하는 것은 성경의 중요한 교리들이 사소한 구두점이나 접속사, 시제 등에서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기를 “이들은 두 기름부음받은 자들이니, 온 땅의 주 곁에 서 있는 자들이니라.” 하더라(슼 4:14).
무엇이 바뀌었는지 인식이 되었다면 설명하겠다. 이 사람들이 두 올리브 나무라는 계시록의 설명은 스카랴서와 동일하다. 한 가지 추가된 것은 두 촛대라는 설명이다. 두 촛대라는 설명은 스카랴서에서 이 두 증인에게 붙은 것이 아니었다. 스카랴서에서는 두 올리브 나무 사이에 한 금촛대가 있다고 했었다. 따라서 두 증인은 계시록에 추가된 계시에 따르면 두 올리브 나무이면서 두 촛대도 될 수 있는 것이다.
슼 4:14에서는 "온 땅의 주 곁에(by)" 서 있다고 했는데 계시록에서는 "땅의 하나님 앞에(before)" 서 있다는 묘사로 바뀌었다.
"온"(whole)이라는 수식어가 빠진 것은 솔직히 이게 실질적인 의미 차이가 있는 건지 잘 감이 오지 않는다. 그러나 "곁에"가 "앞에"로 바뀐 것은 분명히 유의미한 차이가 맞다. 그 차이의 의미를 좀 해석해 보도록 하자.
스카랴서 당시에 두 증인은 하늘에 있었는가, 땅에 있었는가, 물론 그들은 셋째 하늘의 하나님 보좌 근처에 있었다. 이 땅이 아니었다. 거기서 "온 땅의 주"라고 한 것은 한편으로는 주님께서 앞으로 그렇게 되실 것을 미리 말씀하신 것이다. 현재의 주님은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에 계시지 온 땅의 왕이 되셔서 실질적으로 천년통치를 하고 계시지는 않다. 그러나 보다 넓은 의미에서 주님은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의 자격으로 현재도 "온 땅의 주"라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스카랴서에서 "온"(whole)이 붙은 것은 우주적인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가리키는 것이라 해석된다. 하늘에서 두 증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곁에 서 있었다.
계시록에서는 "온"(whole)이 사라지고 "땅의 하나님"이 되었는데 whole이 빠진 것은 이 땅이 대환란 때 적그리스도의 주관 하에 놓이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그렇게 된 것 아닌가 한다. 그리고 "곁에"가 "앞에"로 바뀐 것은 이 두 증인이 주님의 지상 재림보다 앞서 이 땅에 오기 때문에 "앞서 온다"는 의미에서, 즉 침례인 요한처럼 주님의 "선두주자"라는 의미에서 "앞에"(before)라는 조건이 붙었다고 해석된다.
이들을 "두 촛대"라 말할 수 있다면 일곱 교회를 나타내는 일곱 금촛대들도 어떤 선지자나 사역자를 가리킬 수 있을까? 나는 아니라고 대답하겠다. 사실 이번 4절 때문에 개신교 신학자들은 일곱 금촛대가 일곱 목회자라고 주장하게 된 측면이 있다. 촛대가 사람을 가리키는 상징으로 등장했으니 일곱 금촛대도 일곱 목사 아니겠느냐, 그런 논리를 펴는 것이다.
그러나 왜 그렇지 않은가 하면 일곱 교회에 대해 금촛대로 말씀할 때에는 그 금촛대가 사람으로 보이는 어떤 암시도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네가 본 것은 나의 오른손 위의 일곱 별과 일곱 금촛대의 신비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천사들이요, 네가 본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라(계 1:20).
여기서 이미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라는 확고한 정의가 내려진 상태이고 이것은 뒤에 가서도 바뀌지 않고 유지된다. 일곱 금촛대는 일곱 목회자 혹은 일곱 선지자가 아닌 지역 교회 자체인 것이 맞다.
반면 계 11장에서는 이 두 증인이 사람이라는 명확한 전제 하에서 관련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기에 두 사람을 두 촛대로 비유했다는 것이 설명 없이도 드러나고 있다. 두 사람을 촛대에 비유했다는 것은 해석을 할 필요 없이 그저 읽기만 해도 보일 정도이다.
올리브 나무와 촛대는 둘 다 "성령"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상징물이다. 이스라엘을 올리브 나무로 비유할 경우 그것은 이스라엘이 소유한 "하나님의 나라"(구원과 관련하여 성령의 나라)를 가리킨다. 여기서 두 증인이 올리브 나무가 되는 것은 그들이 자기들의 예언을 통해서 사람들을 회개하고 구원받게 만들기 때문이다.
아무도 촛불을 켜서 은밀한 곳이나 곡식 되는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촛대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사람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는 것이라(눅 11:33).
촛불은 촛대 위에 있어야 제 역할을 할 수 있다. 촛불은 성령의 역사이고 촛대는 성령의 역사를 실행하는 그릇인 인간이다.
5 누구든지 그들을 해치려고 하면 그들의 입에서 불이 나와 그들의 원수를 삼키리니 누구든지 그들을 해치려고 하면 반드시 이와 같이 죽게 되리라.
첫째로 주목해야 할 부분은 "그들을 해치려고 하면"이라는 대목이다. 그들은 상할 수 있는 제한적 육신을 가지고 이 땅에서 활동한다. 두 증인들은 누군가 그들을 해치려고 하면 다칠 수도 있는 몸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초자연적 능력을 하나님께 받는 것이다. 만일 저 두 증인이 부활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절대로 누구도 그들을 해칠 수 없을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은 벽을 통과하실 수 있었고 지구와 하늘나라 사이를 순식간에 오고 가실 수 있었는데 누가 그 분과 같은 몸으로 변화된 그리스도인들을 다치게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두 증인은 우리와 같지 않은 연약한 육신을 갖고 있기에 그들은 보호가 필요하며 결국에는 죽임을 당하는 것이다.
그들이 받은 능력은 "불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능력"이다. 이것은 엘리야가 받았던 성령의 능력 중 하나인데 그는 실제로 그 능력을 사용해서 오십인 부대를 두 번이나 불살라 버렸다.
그리고 왕이 오십부장을 그의 오십 명과 함께 엘리야에게 보내니라. 그가 엘리야에게 올라가니, 보라, 엘리야가 산꼭대기에 앉아 있는지라, 그가 엘리야에게 말하기를 “하나님의 사람이여, 왕께서 내려오라고 말씀하셨나이다.” 하니, 엘리야가 대답하여 오십부장에게 말하기를 “만일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너와 너의 오십 명을 사르리라.” 하자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와 그의 오십 명을 사르더라(왕하 1:9-10).
거짓 선지자는 적그리스도의 위임을 받아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오게 하는데 그것은 엘리야의 능력을 모방한 것이다. 그것은 계 13장에서 살펴볼 장면이지만 미리 잠깐 보겠다.
또 큰 이적들을 행하는데 심지어는 사람들 앞에서 불을 하늘에서 땅 위로 내려오게 하더라(계 13:13).
약간의 차이점은 인지가 된다. 거짓 선지자의 불은 단순히 "전시 효과"처럼 보이는데 거기에 누구를 살라버린다는 이야기는 없기 때문에 그렇다. 물론 위협용이 아니라 진짜로 누구를 불태울 수도 있을 것이다. 만일 그게 그렇다고 하면 거짓 선지자가 1번 타겟으로 공격할 대상은 누구보다 먼저 두 증인일텐데 두 증인을 불로 공격한다는 이야기는 역시 없으니, 그래서 나는 전시 효과 같다고 말한 것이다.
두 증인 모두가 불의 권세를 갖고 있으니 엘리야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모세도 같은 능력을 받는다는 얘기다. 반면 엘리야도 자기가 행한 적 없는 기적, 즉 물을 피로 변하게 하는 이적을 행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둘은 서로의 능력을 공유하면서 시너지 효과를 내는 것으로 파악된다.
5절에 내포된 의미를 보면 두 증인을 해치려고 시도하는 인간이 꽤 많은 것 같다는 암시와 인상을 준다. 여러가지 방법을 동원할텐데 첫째는 소문없이 죽이기 위해 독침이나 독화살 같은 냉병기를 사용하는 방식, 소총, 권총 같은 개인 화기를 이용한 저격 시도, 그 외에 삼손에게 인해전술로 덤벼들었다가 떼죽음을 당한 필리스티아인들처럼 흉기를 든 군중들이 개떼같이 덤벼드는 방식, 온갖 방법이 다 시도될 것이다. 그럼에도 아슬아슬하게 잘 하면 죽일 수 있을 것 같음에도 죽이지 못하고 오히려 시도한 사람들만 죽어나갈 것이다.
두 증인을 호위하고 서포트하는 제자들이 있는 것인지 정확히 모른다. 그러나 광야에서 홀로 외쳤던 침례인 요한의 경우를 대입한다면 이들은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두 명이 고립된 채 사역할 것이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참 궁금할 것이다. 놀라운 능력을 많이 받은 하나님의 선지자이긴 해도 모세와 엘리야도 사람인데 밥 먹고 쉬고 잠도 자고 그래야 될텐데 어떻게 이들은 3년 반 동안 자기들을 죽이고 싶어 안달난 수많은 원수들 사이에서 저렇게 사역을 하지?
그가 거기서 한 굴에 이르러, 거기서 유숙하였더라. 보라, 주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엘리야야, 네가 여기서 무엇하느냐?” 하시니 그가 말하기를 “내가 만군의 주 하나님으로 인하여 심히 질투하였사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었으며 주의 선지자들을 칼로 죽였음이니이다. 나, 오직 나만이 남았는데, 그들이 내 생명도 앗아가려고 찾고 있나이다.” 하더라(왕상 19:9-10).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와 아론에 대하여 불평하고 또 온 회중이 그들에게 말하기를 “차라리 우리가 이집트 땅에서 죽었더라면! 아니면 우리가 광야에서 죽었더라면! 어찌하여 주께서 우리를 이 땅으로 데려다가 칼에 쓰러지게 하시며 우리의 아내들과 우리의 자식들이 먹이가 되게 하시는가? 우리가 이집트로 돌아가는 것이 더 낫지 아니하냐?” 하고 그들이 서로 말하기를 “우리가 한 대장을 세워서 이집트로 돌아가자.” 하더라. 그러자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의 집회 앞에서 엎드리더라(민 14:2-5).
모세와 엘리야는 수백만의 백성들로부터 왕따를 당해 본 유경험자들이다. 이런 경험은 성경대로 믿는 이 시대 크리스찬이라 해서 누구나 경험하는 것이 아니다. 이 시대 대부분의 교회 다니는 자들은 성경대로 믿지 않는 제도 교인들이고 그들은 바이블빌리버들을 왕따시키고 심지어 이단이라 부른다. 따지고 보면 나도 수백만의 형식적 기독교인들로부터 왕따당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두 증인이 이 땅에 와서 경험할 일에 비하면 아주 가벼운 왕따를 경험하는 것이다. 적어도 내가 한글킹제임스 성경만을 고수한다고 해서 대환란 때의 두 증인들처럼 3년 반 동안 무장 폭도들과 군인들과 암살자들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지는 않기 때문이다.
거의 두 증인에 버금가는 시련과 왕따를 경험한 라오디케아 시대(20-21세기) 사역자들 가운데 대표적인 한 명을 들자면 고 피터 럭크만 박사가 있을 것이다. 그 분은 킹제임스 성경만을 고수하면서 평생을 사역했으며 수백 만의 목사들과 신학자들, 교인들이 바득바득 이를 갈면서 "럭크만은 상종 못할 이단자"를 외쳤다. 여러분이 이 땅에서 바른 진리의 길에 서서 노선을 굽히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영예를 주신 최종 권위의 한 성경(한국인에게 있어서는 한킹)만을 고수한다면 여러분은 두 증인과 비슷한 경험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러분은 온 세상과 교회들의 증오의 대상이 되겠지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귀하게 사용하실 것이다.
각설하고, 그래서 두 증인은 이미 왕따 당하는 데 있어서는 이골이 한참 난 베테랑들이다. 그들은 수백만 명이 그들을 반대해서 촛불 시위를 벌이건, 안티 두 증인 캠페인을 벌이건, 그들의 목에 수천억원의 살해 현상금이 걸리건 신경쓰지 않고 자기들의 할 일만 할 것이다. 여러분이 성경대로 믿는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두 증인과 동시대에 사역하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들과 <동병상련>의 관계를 형성한다는 뜻이요, 나아가서 초대 교회의 사도들과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과 같은 길을 걷는다는 의미이다. 선지자나 사도들 가운데 이 세상에서 소문난 명사로 환영받았던 인물은 한 명도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