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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박 8일 일정으로 터키 여행을 다녀와서 보고 듣고 느낀점을 간단히 적어 보았습니다.
8월 10일 부산에서 출발하여 인천공항에서 터키행 비행기를 탄 시각은 13시 30분이었다. 비행기 탑승 후 약 30분 후에 기내식(점심)이 나와 고픈 배를 채웠다. 비행시간이 11시간 30분이라니 이 긴 시간을 어떻게 보내나 걱정이 되었다. 비행기 안에서 움직이는 일이란 화장실 갈 때 겨우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다니지 대부분은 좌석에 앉아 있으려니 온 몸이 비틀리기 시작한다. 그래서 준비해간 책도 읽고, 창밖도 내려다보고, 잠도 자고하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눈을 떠보니 또 기내식이 나왔다. 물론 저녁밥이 나온 것이다. 밥이 아니고 빵이었다. 그래도 점심은 밥이나와 먹을 만 했는데 저녁은 영 먹을 수가 없었다. 음료수와 빵 한조각만 먹고는 다시 잠을 청했는데 도무지 잠이 오지 않는다. 그럴바엔 책이나 읽어야겠다고 마음먹고 가져간 책을 읽었다. 시간이 지나 드디어 이스탄불의 모습이 하늘아래 아련히 보이기 시작하였다. 드디어 착륙하여 입국 수속을 하고 이스탄불 공항으로 나가 여행동안 수고해 줄 현지 가이드를 만났다. 이름은 최정모 터키에 연수왔다가 이 곳에서 가이드를 하고 있단다. 대기하고 있는 버스를 타고 시내로 들어가 한식으로 늦은 저녁을 먹고 호텔에 돌아와 터키에서의 첫날밤을 보냈다.
다음날(8월11일) 5시 30분에 모닝콜을 받고 6시 30분에 아침식사를 하고 7시 10분에 카리세리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으로 갔다. 8시 20분발 비행기를 타고 본격적인 터키여행의 시작인 카파도키아로 향했다. 카이세리 공항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카파도키아로 떠났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바깥으로 보이는 풍경은 신기하기만 했다. 이 시간이 또한 여행의 참 맛이 아니겠는가!
이스탄불의 화려함과는 달리 이곳은 그야말로 시골의 한적함을 느낄 수 있었다. 자동차들의 통행도 드물고, 사람들의 모습도 잘 보이지 않았다.
약 1시간 쯤 달려 도착한 곳은 버섯모양의 바위들로 가득찬 파사바계곡이다. 그 옛날 화산활동으로 인하여 형성되었다는 산과 바위는 온갖 형태의 크고 작은 버섯바위들을 만들어 놓았다. 더 신기한 것은 이 바위들을 동굴을 파서 사람들이 사는 주거공간으로 활용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구멍이 있는 곳은 사람이 들어 갈 수 있을 정도로 남아 있었다. 그 동굴 속을 우리들은 다람쥐처럼 열심히 오르내리며 구경하고 감탄하기를 여러 번 하였다. 이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형성되어 있는 젤베 계곡은 동굴집들이 수백개나 만들어져 있으며 1950년까지도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지금도 살고 있는 집이 있으며 남아 있는 집은 찻집이나 동굴 호텔, 레스토랑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 곳은 집, 방앗간, 교회 등 도시가 갖추어야할 시설들이 모두 갖추어져 있는 동굴도시이다. 우리도 이곳의 한 레스토랑에서 항아리케밥으로 맛있는 점심을 먹으며 동굴 체험을 하였다. 솔직히 유명한 항아리케밥이지만 우리나라 불고기 덮밥이 더 맛있는 것 같았다. 역시 우리 음식이 우리에겐 가장 좋은 것이란 걸 느꼈다.
점심을 먹고 아래 쪽으로 펼쳐져 있는 계곡을 보면서 자연의 경이로움에 감탄했다.
다음으로 현재도 살림을 하고 있는 동굴집 체험을 하러 갔다. 지금은 관광객을 위하여 간단한 관광상품과 찻집을 함께 운영하고 있었다. 동굴 입구는 작았지만 1층에 들어서니 꽤 큰 거실이 있고 찻집과 상품을 파는 가게 등 여러 개의 방이 있었으며 2층에는 침실과 베란다 정원 등이 깆추어져 있으며 생활하는데에는 전혀 지장이 없을 것 같았다. 물론 한 여름에도 에어컨은 젼혀 필요치가 않다. 그 옛날 사람들의 자연을 이용하는 슬기를 엿볼 수 있었다.
다음으로 간 곳은 괴레메야외박물관과 우치사르 계곡이다. 괴레메 야외박물관은 바위 동굴 속에 수십 개의 교회가 형성되어 있었으며 지금도 교회의 모습을 온전히 갖추고 있는 곳이 여러 군데 있다. 특히 이 곳에는 성화그림이 프레스코화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암굴의 성분이 응회암으로 잘 벗겨지는 성질이 있기 때문에 물감으로 채색한 성화가 벗겨질 것을 생각해 비둘기 알을 이용하여 벗겨지지 않도록 했다는 지혜에 감탄할 따름이다.
이 많은 프레스코화를 그리자면 또 수많은 비둘기가 있어야하고 이 수많은 비둘기 번식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곳이 우치사르 계곡이다. 이 곳 또한 작은 수많은 동굴 속에 비둘기가 살수 있도록 했고 지금도 이 곳에는 수많은 비둘기가 살고 있이 이 계곡의 이름을 비둘기계곡이라고도 한다. 터키 여행의 첫날부터 입이 다물어지지않는다. 인간의 지혜와 자연을 이용하는 모습이 이렇게 경이로울 수가 없다.
데린구유 지하도시 이 곳을 보고는 다물어지지 않는 입이 더 다물어지지 않는다. 지상에서는 지하에 이렇게 거대한 도시가 만들어져 있으리라고는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로 치밀하게 입구며 지하의 통풍구, 지하수 등이 철저히 비밀에 붙여졌다. 발견이 되었을 당시에도 그 곳에 어떤 사람들이 살았는지, 어떤 용도 쓰였는지에 대한 기록과 흔적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아 로마시대 기독교 박해를 피해 지하에 거대한 도시를 만들었지 않나 하는 추축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런 추측을 가능하게하는 증거물이 지하도시 건축물에서 발견되어 지는데 사람이 지나 갈 수 있는 통로는 제법 넓어 여러 명이 한꺼번에 지나다닐 수 있으며 수레도 지나갈 수있을 정도로 만들어져 있다. 그런데 군데군데 통로 옆에 맷돌이 하나씩 끼워져 있었다. 이 맷돌이 바로 적이 침략해 왔을 때 통로를 차단하는 돌문 역할을 한 것이란다.
지하 1층과 2층에는 마구간과 포도주 압착기, 돌로 만든 긴 탁자가 놓여져 있는 식당 혹은 교실이 위치하고 있고 3, 4층에는 거주지와 교회, 병기고, 터널로 형성되어 있으며 더 깊은 지하층에는 지하 감옥과 묘지 등이 위치해 있다고 한다.
놀랍게도 지하라고 해도 습하다거나 숨이 답답하다거나 하는 증상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 비밀이 바로 곳곳에 통풍구가 설치되어 있으며 수 만명이 먹을 수 있는 지하저수조가 설치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곳의 통로는 미로로 만들어져 있어 한 번 들어오면 나가는 길을 잃어버릴 정도로 터널이 많이 형성 되어 있다는 것이다. 데린구유라는 말도 ‘깊은 우물’이라는 말처럼 지하로 들어가는 입구에 깊은 우물이 있는데 이 우물이 위장을 하기 위한 시설물이고 우물보다는 통풍구 역할을 한다고 한다. 지하에서 한참을 헤메다 지상으로 올라오니 도저히 지금 밟고 있는 이 땅 밑에 이런 거대한 도시가 있다고 상상이 가지 않았다. 데린구유 앞에는 인형을 만들어 팔고 있는 할머니들이 있는데 이 할머니들이 팔고 있는 인형을 잘 살펴보면 인형의 옷과 할머니들이 입고 있는 옷이 똑 같다는 것이다. 일상생활 속의 한 부분으로 인형을 만들어 팔고 자기들 옷도 만들어 입고 하는 것이다.
열심히 돌아다니다보니 어느새 해가 기울어지기 시작한다. 이곳은 우리나라와는 시차가 6시간이나 나기 때문에 우리나라보다 해가 훨씬 늦게 진다. 7시가 되었는데도 아직 해가 질 생각을 않는다. 덕분에 관광 할 시간은 그만큼 많아지는 것이다. 카파도키아의 베라 호텔에서 늦은 저녁을 먹고 터키에서의 둘쨋날 밤을 지내게 되었다.
8월 12일 셋째 날 아침 일찍 서둘러 버스에 올랐다. 지금부터 장장 8시간이라는 긴 시간의 버스투어를 해야 한다. 다음 목적지인 안탈랴로 가기 위해서 콘야라는 지방과 타우르스(토로스)산맥을 넘어야 한단다. 버스가 시내를 벗어나자마자 펼쳐지는 평야는 끝이 없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지평선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푸른 들판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 곳은 물이 귀한 나라기 때문에 벼농사 보다는 밭작물이 많이 생산되고 지금은 수확을 끝낸 상태라고 한다. 콘야로 가는 도중에 카라반 사라이를 들렀다. 옛날 대상무역을 하던 카라반들이 실크로드를 오가다가 묵던 숙소다. 지금의 여관 같은 곳이다. 겉에서 보기엔 커 보이지 않는데 안으로 들어가니 수백 명이 묵을 수 있는 규모다. 이 일대는 대상무역으로 번창한 곳이고, 세계최초로 대상무역을 보호하는 보험까지 만들어서 엄청난 부를 축적했단다. 사라이 바로 뒤에 아주 깊은 호수가 있다. 오블르크 호수라고 불리고 그 깊이가 80미터나 된다.날씨에 따라서 물색이 바뀐다. 오늘은 날이 맑아 짙은 비취빛으로 보였다. 이 물은 생활용수로도 쓰였다고한다. 그 이후 이 곳은 로마인들이 교회로 사용했고 그 흔적으로 지금도 돌에 십자가 새겨져있다.
버스가 도착하지 달려오는 아이들 무리가 있었는데 그 중에는 아이를 안고 있는 소녀도 보였다. 가이드 말로는 근처에 있는 집시촌 아이들이란다. 과자를 주니 좋아라한다.
카파도키아를 출발한 지 약 2시간 정도 지나 첫 번째 휴게소에 도착 했다.
가장 시급한 것이 화장실 가는 거다. 어디를 가도 화장실 문제가 가장 골칫거리인데 더군다나 유료화장실이 많기 때문에 무료일 때는 감지덕지하고 해결해야한다. 휴게소 구경도하고 바깥바람도 좀 쐬고 하면서 잠깐 휴식을 취하였다. 버스는 또 열심히 달려 타우르스(토로스)산맥을 넘어 가고 있었다. 도로 옆으로 보이는 산의 모습은 온통 바위산이다. 그래도 그 바위를 뚫고 나무들이 조금씩 자라고 있었으나 물이 흘러내려할 계곡에는 한 방울의 물도 흘러내리지 않았다. 그 많은 바위를 잘 살펴보니 우리에겐 귀하디 귀한 대리석이다. 중간 중간 산 중턱에 대리석을 채취하는 석재공장이 보이기도 하였다. 터키의 유적들의 대부분이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이유를 알겠다. 2시간을 넘게 산맥을 내달려 드디어 두 번째 휴게소에 도착하니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휴 게소 입구에 높이 세워져 있는 선무를 추는 남자 무용수의 동상이 인상적이었고 아름다운 모양을 한 벤취와 잘 조성된 화단 등이 긴 버스 여행의 피로를 잊게 해 주었다. 레스토랑에서 뷔페식으로 차려진 점심을 먹었다. 어디를 가도 케밥은 꼭 나왔다. 종류와 형태가 아주 다양했다. 디저트로 먹을 수 있는 케익 종류도 다양했다. 그러나 터키 사람들이 단 것을 좋아한다는 말은 들었으나 이렇게 단 케익은 처음 먹어 보았다. 도저히 입으로 넘길 수가 없을 정도로 단 것도 있었다. 치즈와 야구르트는 일품이었다.(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 많이 못 먹었지만) 아름다운 벤취에서 사진도 찍고 오가는 사람들도 보면서 행복감에 젖어 보았다. 다시 버스를 달려 도착한 곳은 그 유명한 원형극장이 있는 아스펜도스였다. 늦은 시각이었는데도 입장되었다.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오후 7시까지 입장이 된다고 하였다. 입구에서부터 그 웅장함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출입구를 통과하여 원형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약 20000명까지도 수용할 수 있다는 아스펜도스 원형극장은 90%이상이 남아 있어 지금도 오페라나 연주화 등이 마이크 시설 없이 공연이 된다고 한다. 무대에서 연주를 하면 그 소리의 울림은 맨 앞좌석이나 꼭대기의 좌석이나 어느 곳에서도 같은 음량으로 들린다니 기가 막히다. 59개의 기둥과 홀의 조화, 무대 앞면의 성벽, 계단식 관람석이 모두 돌로 만들어져 있으며 돌의 종류도 3종류를 사용하고 있단다. 대리석과 석회암 또 한 종류의 돌을 골고루 배치하였으며 원형극장의 맨 꼭대기 층의 59개의 기둥과 홀이 절묘하게 조화되어 소리의 공명에 큰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추정할 뿐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미스테리가 숨어 있다고 한다. 이 원형극장이 얼마나 잘 만들어졌는지 그 많은 사람들이 사고가 났을 때 불과 몇 분 정도 안에 대피할 수 있다고 하니 신기할 따름이다. 이 곳에서 사진도 찍고 소리도 질러보고 하며 원형극장의 매력에 푹 빠져 보았다. 이제 날도 저물어가고 또 사흘째 밤을 보낼 우리의 보금자리를 찾아 버스는 달려갔다. 드디어 지중해의 바다가 보이는 안탈랴에 도착하여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다음날 안탈랴와 파묵깔레로의 여행을 기대하면서 잠자리에 들었다.
오늘은 8월 13일 호텔의 레스토랑에서 아침을 먹고 다시 짐을 꾸려 안탈랴 관광에 나섰다. 하드리아누스의 문 - 하드리아누스황제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문으로 터키의 여러 곳에서 만나 볼 수 있다. 하드리아누스황제는 BC 2세기에 세운 장식용의 대리석 아치문으로 130년에 로마황제 하드리아누스가 이 도시를 통치했던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건축물이라고 한다. 터키는 이렇게 어디를 가거라도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 로마시대의 건축물이다. 하드리아누스의 문을 지나 안으로 골목길을 따라 내려가면 옛 도시의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는 거리가 나온다. 골목 양 옆으로 보이는 건물들이 모두 볼거리이다. 어떤 집은 상점으로, 어떤 집은 미니호텔로, 레스토랑으로 다양하게 이용하고 있었다. 그 길을 따라 가면서 로마시대에 와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질 무렵 웬 개 한 마리가 우리들을 졸졸 따라 오고 있었다. 가이드 말로는 우리가 이 골목을 다 빠져 나갈 때 까지 에스코트 할 것이라고 했다. 과자도 주면서 부르기도 하면서 개와 함께 걸어가는 기분도 괜찮았다. 골목길의 끝 무렵에 들어서자 웬지 낯익은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비릿한 냄새 바로 바다 냄새였다. 계단을 올라서자 눈앞에 푸른 지중해가 마치 우리를 손짓해 부르는 듯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지중해가 가장 잘 보이는 히드르륵요새의 전망대 앞에서 기념 촬영도 했다. 광장을 중심으로 화려한 색상의 꽃들과 멀리보이는 산맥들이 절묘하게 어울어진 배경을 가지고 있는 카라알리올루공원은 각 종 스포츠 시설물들이 설치 되어 있어 이 곳 사람들의 산책공원으로 활용된다. 공원을 빠져나와 아래쪽으로 내려가니 지중해의 푸른 바다위에 쿠루즈선 들과 유람선들이 줄지어 서있는 해변으로 이어졌다. 바다 속까지 훤히 들여다 보이는 깨끗한 물과 그 속에서 자유롭게 헤엄치는 아이들이 한 폭의 그림을 연상시켰다. 해변 주위로 늘어선 가게들 속에서 횟집은 찾아 볼 수 없었다. 아마도 그래서 물이 이렇게 깨끗한지도 모르겠다. 다시 골목길과 계단을 오르니 눈 앞에 견고한 성벽이 가로 막는다 성벽을 따라 성채로 올라가니 버스 속에서 가이드가 열심히 말하는 터키의 초대 대통령 아타
튀르크 대통령의 동상이 서있는 광장으로 올라오게 되었다. 아타튀르크대통령 동상 앞에서 사진도 찍고 멀리 보이는 이올리 미나레를 배경으로 사진도 찍었다. 미나레는 바로 이슬람교도가 하루에 다섯 번씩 올리는 기도 시간을 알려주는 탑이란 걸 알고는 왜 터키의 가는 곳마다 이런 탑이 많이 보이는지 이유를 알게 되었다.
광장에서 기다리고 있는 버스를 타고 다음 목적지인 파묵깔레를 향해 출발했다.
아름다운 지중해와 다른 곳과는 달리 풍부해 보이는 푸른 물결, 따가운 햇살 등이 뒤로 하고 오려니 아쉽기만 했다. 전형적인 유럽풍의 집들과 지붕위에 하나씩 왕관처럼 쓰고 있는 태양열 집열기 등은 빨간 지붕과도 잘 어울렸다. 습기를 뿜은 무덥덥한 열기만 빼고는 너무나 아름다운 곳이었다.
파묵깔레로 가는 도중에 레스토랑에 내려 점심을 먹게 되었다. 모처럼 한국에서 준비해 간 비빔장과 김 등으로 배불리 밥을 먹었다. 밥을 먹고 레스토랑에서 조금만 걸어 나가면 석회암이 물에 용해되어 바닥이 온통 하얀 살다호수로 산책을 나갔다. 입구에는 낙타가 대기해 있었는데 낙타를 타고 호숫가를 한바퀴 돌아오는데 1인당 3불이란다. 그래서 5불을 주고 유리와 진영이가 낙타를 타고 갔다. 우리는 걸어서 호수에 도착했는데 물바닥이 온통 석회성분이라 처음에는 물 속에 들어가는 것이 꺼림칙하여 주저되었으나 용기를 내어 들어가 보니 생각밖으로 밟히는 감촉도 좋고 하여 제법 많이 걸어 들어가게 되었다. 물론 다른 외국인들은 수영도 하며 즐기고 있었다.
파묵깔레라는 말은 파묵은 목화라는 뜻이고 깔레는 성이라는 뜻이다. 다시말해서 목화성이라는 이름이다. 이름처럼 이 곳의 특산물은 목화를 이용한 면제품이 유명하다. 양(염소) 가슴털로 짠 터키만의 때밀이 수건과 다양한 면제품을 파는 상점에 들러 다들 손에 한 꾸러미씩 들고 나왔다.
드디어 버스는 파묵깔레에 도착하여 내리란다. 파묵깔레는 이즈미르에서 동남쪽으로 250KM 지점에 있으며, 터키에서는 손꼽히는 온천 휴양지이다. 멀리서 보면 마치 온 산을 솜뭉치로 덮어 놓은 듯 하얗다. 석회층이 물에 의해 녹아 내려 생긴 웅덩이 같은 연못 마다 온천물이 고여 수영복을 입고 수영을 하거나 온천욕을 즐기기도 한다. 지금은 지나친 개발 때문인지 온천이 점점 매말라 가고 있어 온천욕을 제한하고 있다. 대신에 산 위에서부터 아래쪽으로 좁은 물길을 만들어 온천물을 그 곳으로 흐르게 하여 관광객들에게 족욕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세계유산으로 등록될 만큼 흰색과 파란색의 대비가 아름다운 석회층의 경관을 보호하기 위해 자유로운 출입을 금하고 있으며 전망대와 산책로에서만 감상 할 수 있는 아쉬움이 있다. 입구에 들어서니 비닐봉지 한 개씩을 나누어준다. 영문을 몰라 주춤하니 비닐봉지엔 신발을 벗어 넣고 맨발로 올라가란다. 맨발로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온천물을 밟으며 올라가는 기분도 나쁘지 않았다. 아마도 이 석회층을 보호하기 위한 방책이 아닌가 생각된다. 조금 올라가니 우리나라의 다랑이 논처럼 생긴 연못에 고인 온천물 속에서 다른 관광객들은 수영을 하며 온천욕을 즐기고 있었다. 한참을 올라가 우리도 적당한 자리를 골라잡고 따뜻한 물속에 발을 담구었다. 뜨거운 온천물이 아니라 따끈한 온천물이었다. 한참을 담구고 있으니 내리쬐는 태양빛의 열기인지 온천물의 온기 탓인지 땀이 흐르기 시작한다. 간간히 불어오는 바람이 이렇게 시원 할 수가! 따가운 태양을 막기 위해 모자도 쓰고 긴팔로 무장하고 그것도 모자라 파라솔까지 쓰고 족욕을 한다고 뙤약볕에 앉아 있으니 사우나가 따로 없다. 지나가던 외국인들이 갑자기 카메라를 누르기 시작한다. 누구를 찍나하고 살펴보니 모델은 바로 우리들이었다. 아마도 온통 몸을 감싸고 앉아있는 우리 모습이 그들 눈에는 신기하게 보였나보다. 우리 일행 중 한사람은 그기에다 등산용 얼굴 마스크까지 쓰고 있었으니 지나가다 ‘당신 모슬림?’하고 물어보고 가는 사람까지 있었다. 이슬람교도의 여자들 옷차림에 머리에 보자기만 쓰고 다니면 히잡이라고 하고 눈만 내고 얼굴을 가리면 차도르를 입었다고 하는데 얼굴에 마스크까지 썼으니 모슬림이라고 물어보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나! 이렇게 다니다보니 옷기는 일도 참 많았다. 시냇물처럼 흘러내리던 물의 양이 갑자기 줄어들었다. 웬일인가하여 고개를 돌려보니 아주 몸집이 큰 터키 아줌마가 좁은 물길에 누워 있으니 물길이 막힌 것이다. 그러다 아줌마가 일어나니 갑자기 홍수가 난 것처럼 우리들에게로 물이 흘러넘쳤다. 우리들은 그 모습에 너무나 우스워 깔깔거리고 웃었다. 이 광경에 그 아줌마는 재미가 나는지 여러번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었다. 그 아줌도 웃고 우리도 웃고하여 그 곳은 웃음바다가 되어 버렸다. 가이드와의 약속 시간이 되어 우리는 족욕을 끝내고 약속 장소로 올라갔다. 바로 앞에 보이는 큰 건물은 로마시대에 지어진 공동목욕탕이란다. 지금도 사용하고 있고 예전에는 온천물이 풍부하게 솟아났지만 지금은 그 양이 줄어 밤동안에 물을 뽑아서 저장을 해 두었다가 아래로 흘려 보낸단다. 이 온천이 나오기 때문에 고대에 커다란 도시가 형성 되었다고 한다. 비록 높은 산지이나 석회암층의 아름다운 지형과 온천수로 좋은 생활의 터전이 된것 같다.
고대의 거대한 도시 히에라폴리스가 바로 이 곳이다. 산 사람들의 도시라고도 한다. 지금은 지진과 사람들에 의한 파괴로 많이 허물어 졌지만 성터와 교회, 신전, 공동목욕탕, 등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산책로를 따라 유적지를 살펴보며 내려가니 거대한 석곽묘들이 눈앞에 나타났다. 바로 죽은 자의 도시 네크로폴리스다. 지금으로 말하면 공동묘지 쯤 될 것 같다. 죽을 때가 가까워 오면 히에라폴리스에 이주를 해오는데 자기의 전 재산을 기증하고 죽으면 이 곳에 묻히게 해달라는 조건으로 들어올 수가 있단다. 이 석곽묘만 보더라도 터키에는 얼마나 많은 양의 석회암과 대리석이 있는지 실감이 남다. 온통 대리석과 석회암으로 만들어진 석곽묘가 엄청 많았다. 처음에는 개인 묘를 만들었으나 점차 그 수가 늘어나면서 장소가 모자라 지금의 납골당( 가족묘)형식의 묘가 만들어 졌고 여기에서 계급과 돈에 따라 석곽의 모양이 천차만별이었다. 죽은 자의 도시에는 죽은 자만 있는 줄 알았는데 석곽 위로 움직이는 물체가 나타나 살펴보니 엄청난 크기의 도마뱀이 기어 다니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도마뱀의 5배정도는 큰 것 같았다. 이 곳에는 이런 도마뱀들이 많이 서식하고 있단다. 언젠가 답사를 갔을 때 감은사지의 동탑과 서탑의 기단부 바위 틈 속에 뱀들이 서식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여기에는 도마뱀들이 서식한다니 무언가 통하는 점이 있는 것 같아 오히려 정감이 간다. 죽은 자의 도시를 빠져 나오면서 살아 있는 동안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하고 힘이 있을 때 열심히 다녀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버스로 약 20분 거리에 우리가 묵을 호텔이 있었다. 이 호텔은 다른 곳과는 달리 빌라 형식으로 단지를 이루고 있었다. 우리는 8동 1층에 배정되어 여장을 풀고 식당에 가서 저녁 식사를 하고 자유 시간을 가졌다. 넓은 수영장과 온천욕장이 있어 밤 시간을 즐기기도 하였다. 저녁을 먹고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남편이 불렀다. (이 번 여행에는 우리 가족이 전부 참여하여 딸(유리)은 친구(진영)와 한방을 쓰고 아들은 남편과 한방을 쓰고 나는 석선생님과 한 방을 사용하게 되었음)
수영장 홀에서 밸리댄스 공연을 한다고 보러 가자고 하여 따라 나섰다. 아마도 시간이 좀 지났는지 홀에는 벌써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고 한창 여흥이 무르익어 있었다. 다음에 이스탄불에서 밸리댄스 공연을 관람하러 가기로 되어 있었지만 비교도 해 볼겸 구경을 하였다. 밸리댄스 특유의 몸털기 정말로 장난이 아니었다. 가슴 따로 배 따로 자유로 움직이는데 사람의 몸이 아닌 것 같았다. 신나는 음악에 맞추어 흔드는 동작 하나 하나가 예술이었다. 밤이 깊어 방으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나니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가 자리 눕자 금방 꿈나라로 가버렸다.
(석곽묘) (호텔의 수영장) (히에라폴리스)
8월 14일 아침모닝콜소리에 눈을 뜨니 6시였다. 대충 준비를 하고 식당으로 올라가 아침을 먹고 또 짐을 꾸려 다음 여행지인 에베소로 가기 위해 버스에 올랐다. 파묵깔레의 색다른 체험을 뒤로하고 에베소로 향해 버스는 열심히 달렸다. 또 우리 가이드 미스터최는 열심히 설명을 하고 우리 들은 열심히 듣고 하는 사이에 에베소에 도착하였다. 첫목적지인 성모마리아의 집은 크레소스산(뷰불다) 꼭대기에 예수가 돌아 가신 후 사도 요한이 성모마리아의 여생을 위해 작은 집을 마련 했다고 한다. 전해 내려오는 얘기에 따르면 사도 요한과 성모 마리아는 예루살렘에서의 기독교 박해를 피해 이 곳 터키 에페소로 피신해 와서 숨어 살았으며 처음에는 에페소 인근의 불불산 남쪽 기슭에 살았다고 한다. 성모 마리아는 이곳 불불산 남쪽 기슭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게 되고 현재 뷰불다를 구불구불 오르는 도로를 타고 올라가면 마지막 숨을 거둔 기역자혀의 토담집이 있다. 그런데 과연 어떻게 세상 사람들이 이곳이 성모 마리아가 숨을 거둔 곳이라는 것을 알아냈을까 의문이 들 것이다. 여기에는 신비한 사연이 깃들어 있다고 한다. 베일 속에 가려진 성모 마리아의 임종 장소는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었다. 하지만 독일 베스트팔렌주의 돌멘이라는 시골 한 농부의 딸로 태어난 수녀 캐더린 에메리히가 1878년 환상을 보게 되는데 그 환상 속에 예수 승천 후의 사도 요한과 성모마리아의 에페소에서의 생활이 생생하게 나타났다는 것이다. 놀라운 점은 에메리히 수녀는 12년이나 병상에서 보낸 사람으로 에페소에는 가본 적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환상이 너무나 사실적이고 구체적이어서 당시 시인 클레멘토 브렌타노는 에메리히 수녀의 환상에 기초하여 ‘안나 캐더린 에메리히의 비전(환상)에 의한 성모 마리아의 생애’라는 책자를 펴내게 된다. 1880년 이 책이 터키 이즈미르에 있었던 라자로 수녀회의 신부 줄리앙 구예에게 전해졌고 그는 책에 근거하여 성모 마리아의 집을 찾아내게 된다. 1891년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성모 마리아의 집으로 발견된 곳이 바로 지금의 장소이며 교황 요한 23세가 1961년 이를 공식적으로 승인하고 1967년 교황 바오르 6세와 1976년 요한 바오르 2세가 방문함으로써 입지를 굳히게 되었다. 현재 이곳은 기독교인과 이슬람교도들의 순례지로 유명해졌고 매년 8월 15일에 기독교인에 의한 기념 제전이 이곳에서 열린다. 우리는 마침 8월 15일에 이곳을 찾아 더 뜻 깊었고 많은 순례자들과 함께 성모 마리아의 집을 방문하였다. 성모 마리아의 집 입구 안내판에서 낯익은 글자들을 보고 너무나 놀랐다. 삼성에서 만든 한글 안내판이 6개 나라의 안내판과 나란히 서 있었던 것이다. 이곳에서도 우리나라의 위상을, 터키와의 관계를 실감나게 해주었다. 성모 마리아의 집 안에는 여러 기념물과 성모 마리아상이 세워져 있어 신도들은 그 곳에서 기도를 드리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성모 마리아의 집 뜰에는 긴 벽이 있는데 이 벽에는 소원을 적은 종이들이 수없이 많이 걸려있었다. 우리도 각자 소원을 적은 종이를 소원의 벽에 걸어 두면서 마음속으로 우리의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빌었다.
(소원의 벽 ) (천국의 열쇠) (한글안내문)
다시 버스로 이동한 곳은 에페소의 한식당이었다. 이 식당은 한인 식당으로 한식이 나왔다. 오랜만에 한글 메뉴판을 보니 너무나 반가웠다. 이래서 외국에 나가면 누구나 애국자가 된다고 하나보다. 고추장을 넣은 비빔밥에 미역국냉채가 나왔다. 점심을 먹으며 모두 행복해하는 표정에 기분이 좋았다. 점심을 맛나게 먹고 사도요한의 교회로 갔다. 식당에서 그리 멀지 않은 언덕 위에 사도 요한의 교회가 있었다. 입구는 어느 신전에 들어가는 듯 웅장한 문을 지나야 했다. 전해져오는 얘기로는 기원전 37년~42년, 박해를 피해 예루살렘에서 나온 사도요한과 예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가 살았던 곳이자 사도 요한이 복음서를 기술하고 또 생을 마감한 무덤이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처음엔 사도 요한의 무덤 위에 서기 4세기경 나무로 된 교회가 지어졌으나 비잔틴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577~565 AD)시대에 새로 만들어 오늘날의 형태로 남겨지게 되었다고 한다. 에페소가 아랍인들의 지배하에 있었던 7, 8세기 경에는 20개의 타워와 3개의 문으로 이루어진 성벽으로 둘러 싸이게 되었다. 현재 여행객들이 출입하는 곳이 주 성문인데 나머지 두 개의 문은 각각 동쪽과 서쪽에 나 있다. 기독교가 박해를 받던 초기 기독교 시절 당시 경기장 내의 사자들의 먹이가 되었던 기독교인들의 넋을 기리기 위함인지 성벽 축조에 사용된 돌들은 에페소의 경기장에서 가져온 돌들이라고 알려져 있다. 사도 요한의 무덤은 중앙 돔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사도 요한의 무덤 외에도 수도자들이 죽은 뒤 관을 올려두는 네 개의 기둥은 그대로 남아 있으며 각 건물들의 벽에는 작은 구멍들이 많이 있는데 이 구멍은 그 당시 교회에 오는 사람들을 위해 빵을 구워서 넣어 둔 곳이란다. 사람들은 이 빵으로 끼니를 때우기도 했다니 하나님의 사랑이 온 몸으로 전해진다. 아직도 허물어진 곳을 발굴하고 복원하고 있었으며 한 가지 신기한 것은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마당에 커다란 바위가 하나 있는데 이 바위를 자세히 살펴보니 지도가 새겨져 있었다. 에페소를 그대로 바위 위에 새겨 둔 것이다. 지금까지 에페소의 일부분만 둘러보았을 뿐인데도 그 많은 유적들을 보고는 기가 막힌다.
이제 본격적인 에페소 유적지로 이동하였다. 입구의 안내판이 있는 곳에 역시 한글 안내판이 보였다. 에베소 도시의 기원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역사에서 에베소의 이름이 최초로 언급된 것은 기원전 13세기 경의 힛타이트(Hittite, 기독교 성경상의 헷족속) 비문이다. 그 비문에 아파사스(Apasas)라고 불려 졌던 도시가 바로 이 지역일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스의 역사가요, 철학자인 타키투스(Tacitus)에 의하면 에베소 도시는 아마존족이 기원전 1,400년경에 처음으로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은 에베소를 문화적, 상업적으로 발전시킨 민족은 아니었다.
그 후 기원전 1,100년경 이오니온 족인 아테네 왕자 안드로클레스가 여인들이 다스리는 아마존 토착민들을 추방하고 에베소를 건설하였다. 안드로클레스는 당시의 전통에 따라 새 도시를 세우기 위해 델피 신전으로부터 허락을 받고자 했다. 그는 그곳에서 ‘생선과 산돼지와 불이 함께 만나는 곳에 도시를 세우라’는 신탁을 받았다. 에베소 지역에 이르러 그가 부하들과 함께 생선을 구워 먹던 중에 갑자기 불어온 바람에 불똥이 튀어 코레소서 산에 불이 나고 말았다. 바로 그 때에 그 숲속에서 산돼지가 달려 나왔는데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이곳이 '신이 원하는 장소'라고 여겼다. 그래서 이곳에 도시를 세우고 그것을 기념하는 '산돼지 상'을 건립하였다. 아마존족이 추방되고, 아테네에서 이주해 온 그리스인들은 에베소에 정착하면서 아데미(아르테미스) 여신을 숭배하였다. 기원전 560년경, 리디아 군주 크로에수스(Croesus)가 에베소를 점령하여 일시적으로 지배를 했으나, 주민들의 열정적인 아데미 숭배에 감동하여 퇴각하였다고 한다. 기원전 546년경에는 페르시아의 고레스가 에베소를 정복했다. 그 후 에베소는 페르시아와 그리스가 세력을 다투는 각축장이 되었다. 기원전 334년 알렉산더 대왕이 에베소를 정복했다. 그리고 알렉산더 대왕이 사망한 후에 그의 부하이던 리시마쿠스(Lysimachus)가 에베소의 지배자로 등장했다. 리시마쿠스는 피온산 기슭에 새로운 도시의 건설을 명하고, 도시의 성벽을 9 Km정도로 쌓았다. 그는 도시를 확장하고 난 후 도시 이름을 자기 아내의 이름을 따서‘아르시노에’로 바꾸었다.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유적은 바로 이 시대 때 부터의 유적이다. 그러나 리시마쿠스가 죽은 뒤 시민들은 다시 ‘에베소’란 이름을 사용하였다. 아나톨리아 동부에서 세력을 키워오던 시리아가 마침내 셀레우코스(Seleukos) 1세때에 에베소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지배는 오래 가지 못했고, 기원전 190년 막강한 세력으로 대두한 페르가뭄(성경의 버가모)왕국에게 에베소를 내주게 된다. 당시의 최강국이었던 로마가 아나톨리아로 진출하게 됨에 따라 버가모의 마지막 왕 앗탈로스 3세( Attalos)는 자신의 왕국을 로마제국에 자진 헌납함으로서, 에베소는 그리스 시대에서 로마시대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한때, 로마제국의 과중한 세금과 압제에 항거하는 폰투스왕 미트리다테스(Mithridates)의 반란으로 에베소 도시는 일부가 파괴되기도 했지만, 에베소는 로마시대에 가장 큰 전성기를 맞이했다. 로마인들은 로마제국의 아시아 수도를 페르가뭄(버가모)에서 에베소로 옮기고 이 도시를 아름답게 꾸며 나갔다.
기원전 33년, 로마황제 안토니우스는 그의 정적 옥타비우스(후에 Augustus로 개명)와 대치하던 중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이곳 에베소에 머물기도 했다. 에베소는 아우구스투스(Augustus) 황제시대에 더욱 번성하여, 로마의 5대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로마제국이 멸망한 후, 에베소는 비잔틴 제국으로 그리고 오스만 제국으로 바뀌면서 오늘날에는 터키의 유명한 관광지로만 남게 되었다.
아름다움을 자랑했던 에베소가 페허가 되어 버린 것은 대지진 때문이다. 게다가 6세기 중엽 진흙으로 덮여진 항만에서 모기들이 생겨 말라리아 병이 확산 됨에 따라 사람들은 아름다운 에베소를 떠나야만 했다. 12세기에 이르러 이곳에 침략해온 셀축 터키인들의 공격으로 남아있던 에베소의 기독교인들도 정든 도시를 버리고 타 지역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이곳에 침략해 온 터키인들은 회교도들이었기 때문이다. 에베소는 정치적으로 로마의 자치 도시였고, 상업적으로는 세계적인 무역 도시였다. 로마는 제한된 범위 내에서 자치 정부를 허용했다. 에베소에 로마 군대를 강제적으로 주둔시킨 적이 한 번도 없다. 에베소는 정치적으로는 로마로부터 자치권을 인정받아 독자적인 행정관이 있었다. 또한, 민주적으로 선출된 통치기관으로서 민회관과 순회 재판소가 있었으며 기타 민간 기구들도 있었다. 에베소는 당시 상업적으로 가장 중요한 도시였다. 고대 세계의 교통망은 오늘날처럼 용이하지 않아 주로 강 유역을 따라 상업과 무역이 성행하였다.
특별히 이곳은 이스테르 강 어귀에 위치해 있었으므로 이 지역에 성행하는 무역을 관장할 뿐 아니라 시리아, 인도, 아라비아, 이집트 등 세계 각국에서 몰려 온 상인들이 식료품, 향료, 고급 옷감에서부터 금, 은, 보석, 도자기 및 노예 판매에 이르기까지 온갖 상품을 거래하는 동양에서 가장 큰 시장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몰려 온 상인들, 은행업자, 창고업자, 운수업자들은 물론 그들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법률가, 대서업자, 예술가, 철학자 등 수 많은 사람들이 에베소로 몰려왔다. 이곳은 기원전 3세기부터 상업의 중심지로 발전하면서 거대한 시장이 생겼다. 이 시장의 바닥은 대리석으로 포장되고 그 주위에는 기둥들로 둘러져 있었으며 아름다운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연못도 만들어져 있었다. 또한 시장의 개점과 폐점을 알리기 위해 물시계와 해시계가 설치되어 있었다. 에베소에는 부족한 것이 없을 정도로 풍요로운 도시였다. 시민들을 위한 위락 시설로 2만 5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극장, 경기장과 체육관, 음악당, 거대한 목욕탕 등이 있었다. 지식들을 위해서는 도서관과 학교가 있었고, 여행자들을 위해서는 여관이나 유곽에 이르기까지 모든 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다.세계의 많은 여성들이 에베소에 한번 가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로마의 집정관 안토니우스는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한 후 수시로 에베소에 들러 보석과 화장품을 구입했다고 한다.
(도서관으로 내려가는 거리)(하드리아누스신전) ( 기둥)
에베소에는 세계 7대 불가사이 중에 하나인 아르테미스 신전이 있는 곳이다. 이 신전은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보다 4배나 큰 것으로 거대하고 웅장하고 아름다웠다. 그리스인의 구전에 의하면, “지금까지 태양이 운행하는 중에 아르테미스 신전보다 더 훌륭한 것을 보지 못했노라”고 하는 격찬의 말이 있다.
이 신전에서의 여신을 숭배하는 모습은 기묘하고 황홀하고 광적이다. 고함소리와 울음소리를 동반한다. 나팔이 울리면서 분향을 시작하게 되면, 군중들은 흥분과 발광으로 날뛴다. 게다가 음탕하고 수치스러운 일들을 서슴치 않고 행하였다. 에베소는 도덕적으로 타락한 도시였다. 에베소 사람들이 열정적으로 숭배했던 아르테미스 여신은 가슴에 유방이 24개가 달린 풍요의 여신이다. 아르테미스 여신의 머리에는 바벨론을 상징하는 성이 있고, 몸에는 특이한 사냥꾼 니므롯을 상징하는 사자, 호랑이, 사슴 등의 다양한 짐승들의 부조로 새겨져 있다.
매년 5월 아르테미스 여신의 축제날이 되면 유방과 같은 수의 24명의 흰 옷을 입은 여자 사제들이 앞에 서고, 뒤에는 자신의 고환을 아르테미스 여신에게 바친 남자 사제들이 여신의 호위병처럼 뒤 따른다. 축제의 행렬은 아르테미스 신전에서부터 시작된다. 아르테미스 신전에서 출발한 아르테미스 신상과 축제 행렬은 에베소 시의 동쪽에 있는 마그네시아 문을 통해 입성하고, 동방 체육관과 시장, 음악당을 지나서 에베소 시청에 이른다. 에베소 시청 앞에는 또 하나의 아르테미스 여신상이 밖을 향하여 서 있는데 두 개의 여신상이 만나게 되면 군중들의 열광은 절정에 이르게 된다. 이때, 에베소의 총독은 관저에서 나와서 아르테미스 여신에게 경의를 표하게 된다. 총독의 인사를 받은 아르테미스 여신상은 크레테 도로를 지나 셀수스 도서관을 거쳐 에베소 광장에 이른다. 광장에서 왼쪽 방향으로 항구대로를 지나 부두에 이르게 된다. 부두에 이르면, 드디어 소들을 바치는 희생 제사가 드려진다. 남자 사제들이 24마리의 황소 고환을 잘라 아르테미스 여신의 목에 걸어 주면, 군중들의 열광인 함성을 터뜨리기 시작한다. 무용수들은 음악에 따라 춤을 추고, 도살된 소들이 제단에 올려지면,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아르테미스 축제가 무르익게 된다. 이상으로 에베소의 역사에 대해 살펴 보았다.
성 밖에 공동 목욕탕과 그 당시의 유적들이 즐비하게 남아 있었으며 성 안으로 들어서니 입구부터 굉장하다. 입구에서 셀수스 도서관까지 연결되어 있는 거리를 따라 양 옆으로 건축물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지진에 의해 무너지지 않았다면 대단한 도시를 만나 볼 수 있었을 텐데 하고 생각하니 너무나 안타깝다. 성 안에도 거대한 공동 목욕탕이 있었는데 사우나시설(하맘)과 욕조, 수도시설, 휴게실까지 갖추어져있었다. 성 밖의 목욕탕이 일반 서민들을 위한 것이라면 성 안의 이 목욕탕은 주로 귀족들이 사용했다고 한다. 날씨가 너무 더워 목욕탕에서 시원하게 샤워라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목욕탕을 나와 대리석으로 잘 닦여져 있는 크레테스거리를 조금 내려가니 오데온과 시공회당자리이 나온다 지금은 여러 개의 기둥만 남아 있지만 그 옛날에는 성화가 밝혀져 있었으며 한 번도 성화가 꺼진 적이 없었다고 한다. 성화를 지키는 사람은 시민들 중에서 선발해 맡길 정도였으니 대단하지 않는가!
다시 조금 아래로 내려가면 메비우스의 비가 있다 메비우스의 비는 폰투스에서 에페소스를 탈환한 로마의 독재관 스라의 손자로 할아버지인 스라를 칭송하는 말들을 비석에 새겨 놓았다. 조금 더 앞으로 내려가면 헤라클라스의 문이 나오고 메비우스의 비 바로 앞에는 승리의 여신 니케의 부조가 세워져 있다. 이 니케의 부조는 원래는 헤라클레스 문의 아치로 장식 되었던 것이라고 한다.
크레테스 거리의 양 옆으로 오른 쪽엔 트라비아누스의 우물, 스콜라스티카목욕탕, 공중 화장실, 등이 있으며 왼쪽 언덕에 언덕위의 주택들이 있다. 크레테스 거리는 케르스스(세수스)도서관에서 끝나고 여기서부터 다시 마블거리가 이어진다. 마블 거리가 시작되어 지는 지점에는 여러 상점들과 유곽들이 있었는데 거리의 바닥에는 유흥가를 나타내는 광고가 새겨져 있는데 이 광고판에는 오른쪽에 여자그림이 있고 그 아래에는 돈이 새겨져 있다. 왼쪽 위에는 하트가 아래에는 발바닥이 새겨져 있는데 이 광고는 여자 그림은 ‘이 곳에 여자가 있다’라는 뜻이고 아래의 돈은 ‘돈을 갖고 오라’왼쪽 위의 하트는‘마음을 담은 서비스’라고 한다. 아래의 발바닥은 자기의 발을 갖다 대어 크기를 맞추어 보고 이 발바닥 보다 크기가 작으면 유곽에 들어올 수 없다 라는 뜻이라니 그 당시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재미있는 광고판이라고 생각한다. 다음으로 공중화장실을 들어가 보았다. 긴 벤취처럼 생긴 돌 판 위에 변기가 여러 개 뚫어져 있고 그 밑으로는 물이 흘러가도록 되어 있다. 볼일을 본다 생각하고 변기에 안자보니 사이즈가 꼭 맞고 옆의 사람과 대화도 나누면서 볼일을 본다니 그 당시의 개방적인 생황이 상상 되어 진다. 놀라운 것은 변기 아래로 물이 흘러 용변이 처리되도록 해 놓은 것이 지금의 수세식 화장실의 원조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셀수스(케르스스)도서관 멋진 2층짜리 파사드가 웅장하고 멋진 자태를 드러낸다. 로마시대 때 아시아주 집정관이었던 케르스스가 죽은 후 그의 아들이 아버지 묘 위에 세운 기념물이다. 그 후 목조 부분은 소실되고 대지진때 파괴 된 것을 1970년에 복구 하였다. 정면에 지혜, 운명, 학문, 미덕의 4가지 의미를 상징하는 여신상이 있다. 진품은 빈의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현재에 있는 동상은 모조품이다. 내부는 1cm으로 되어 있으며 12000권의 서적이 소장되어 있었다고 한다. 도서관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피온산 아래에 우뚝 버티고 서 있는 대극장으로 갔다. 아스펜도스의 원형극장과 비교해 보면 크기가 더 카다는 것이다. 그러나 앞면의 벽이 파손 되고 많은 부분이 없어져 아스펜도스의 원형극장보다는 감동이 덜하였다. 아무튼 25000명 정도가 수용되었다고 하니 그 당시 어느 정도 인구가 있었는지 짐작이 된다. (그 당시에는 여자는 인구조사에 넣지 않았음) 이 원형극장에서는 연극 공연과 모든 시민이 참가하는 시민의회장으로서 시민들에게도 중요한 장소였다. 4세기경에는 검투사와 맹수의 싸움이 벌어졌으며 객석과 오케스트라석을 나누는 손잡이가 위험방지를 위해 벽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무척이나 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에베소유적지를 돌아보니 힘은 들었지만 마음이 풍요로워지는 느낌이 들어 좋았다. 생각 같아서는 몇 시간이 걸리더라도 자유롭게 그 옛날의 영화롭던 시절을 떠올려 보며 거리 구석구석까지 꼼꼼히 살펴 보고 싶었지만 정해진 일정 때문에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셀수스도서관) (오데온) (공중화장실)
버스를 타고 더워진 몸과 마음을 시원한 에어컨 바람으로 식히고 있을 즈음 버스는 이즈미르 공항에 도착해 있었다. 다시 국내선으로 이스탄불로 이동해야 했기 때문이다. 터키 여행은 장거리 버스여행이 많다고 하여 처음에는 지루하지 않을까 걱정도 되었으나 전혀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 만큼 버스 이동 증에도 볼거리가 많다는 뜻이고 지친 몸을 쉬게 할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즈미르에서 그동안 수고해주신 기사님과 이별을 해야 했다. 공항 입구에서부터 검색대를 통과해야 공항 내로 들어 갈 수 있어 번거로웠지만 안전을 위한 일이기에 조금의 불편은 참아야 했다. 비행기가 약간 딜레이 되었으나 무사히 이스탄불공항에 도착하여 저녁을 먹고 이스탄불의 야시장 투어에 나섰다. 신시가지에서 구시가지로 이동하며 보이는 시가지 모습이 무척이나 정겨웠다. 신시가지는 여느 도시의 모습을 가지고 있으나 구시가지로 들어서니 옛 건축물이 많이 눈에 들어오고 길도 좁은데 트램(전차와 같은 것)까지 다니니 더욱 복잡했다. 그러나 이곳 사람들은 차가 막혀도 느긋하게 기다리는 것이 일상생활인 듯 했다. 화려한 조명으로 돋보이는 돔 형태의 큰 건물이 바로 그 유명한 불루모스크와 아야소피아란다. 불루모스크가 보이는 큰 길을 건너 보스포러스해협을 따라 선착장이 있고 그 주변이 바로 야시장이 서는 곳이었다. 야시장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모습의 시장이 아니고 땅바닥에 자리를 펼쳐놓고 신발이나 장난감 같은 잡다한 물건들을 파는 곳이었다. 조명도 제대로 없이 캄캄하여 눈에 불을 켜고 다녀야했다. 난간 옆으로 배들이 정박해 있는데 그 배들 중에는 터키에서 유명한 고등어케밥을 만들어 파는 배들이란다. 낯익은 냄새가 난다고 생각했더니 바로 고등어를 굽는 냄새였다. 고등어케밥을 파는 포장마차 외에 빵을 구워 파는 마차도 있었다. 야시장 구경에 한참 빠져있는데 언제부턴가 개 한 마리가 졸졸 따라 오고 있었다. 유난히도 터키에서는 이렇게 길거리를 떠돌아다니는 개가 많다. 그런데 터키사람들은 이 떠돌이 개들을 잘 보살핀단다. 가게나 집 앞에 그릇이 하나씩 놓여있는데 여기에 우유나 물, 빵 같은 먹을 것들을 넣어 둔단다. 한참을 졸졸 따라오던 개가 갑자기 멈추어 서더니 땅바닥에 그대로 엎드린다. 왜 그러는지 살펴보는데 미나레에서 기도 시간을 알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때맞추어 개가 당에 엎드리는 모습이 마치 기도라도 드리려는 자세 같아
우리 들은 그 개를 ‘기도드리는 개’라고 부르기로 했다.
야시장의 끝부분에 다리가 놓여있어 그 다리를 건너갔다. 다리 아래에는 많은 가게들이 있었고 다리 위에서는 아저씨들이 낚시를 하고 있었다. 이곳 사람들은 생선을 잘 먹지 않는다고 하는데 낚시하는 모습을 보니 신기하였다. 여기도 우리나라처럼 숭어나 고등어새끼 같은 작은 물고기들이 잡혔다. 다리 위에서 기념 촬영도 하고 뛰기도 하다 보니 어느새 다리를 다 건너왔다. 버스를 타고 호텔로 이동하여 다섯째날 밤을 보냈다
8월 15일
모처럼 여유로운 아침시간이다. 본격적인 이스탄불 탐구의 날이다. 9시에 호텔에서 출발하기에 다른 날보다는 마음이 가볍다. 오늘은 기대하던 보스포러스해협을 유람선을 대절하여 약 2시간에 걸쳐 둘러본다. 보스포르스대교를 지나 파티흐 술탄 마흐메트대교까지 가서 다시 되돌아오는 코스다 . 기대했던 것보다 더 큰 유람선에 보스포러스의 푸르고 맑은 물 빛과 파란 하늘이 묘하게 잘 어우러지고 뱃전에 불어오는 바람은 더없이 시원하게 느껴진다. 보스포러스해협을 따라 양쪽으로 많은 건물들과 공원, 궁전들이 보인다. 오른쪽으로 보이는 곳이 유럽쪽이고 왼쪽이 아시아쪽이라고 한다. 먼저 오른족으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해변의 모습을 보았다. 출발하자마자 보이는 하얀색의 건물이 예전엔 궁전이었으나 지금은 이스탄불에서 가장 고급인 호텔로 수영장과 야외 레스토랑, 야외공연장이 갖추어져있다.
왼쪽의 사진은 바다 가운데 암초가 있던 곳에 수영장을 만들어 활용하고 있었다. 물론 아무나 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회원제로 되어있어 회원증이 있어야만 이용할 수 있다고한다. 수영장까지는 요트(보트)를 타고 들어온단다.
멀리 고압선 아래에 병원 깃발이 보인다. 그 병원에서 나이팅게일이 근무를 했다고 한다. 유럽 쪽의 건물들은 규모가 크고 현대적인 반면에 아시아족의 건물은 매우 아름다운 건물들이 많았다. 아시아 쪽의 고풍스런 집들은 예전의 귀족들이 거주하던 곳으로 지금은 터키의 상류층 부자들의 별장이나 주거지로 이용되고 있단다. 유럽 쪽의 해변에 요트들이 많이 매여 있다. 이 요트들이 바로 아시아 쪽에서 타고 온 요트들이며 낮에는 유럽 쪽으로 건너와 일상생활을 하고 밤이 되면 요트를 타고 자기 집으로 돌아간단다. 참 부럽다. 한참 구경을 하다 이층선실로 올라갔다. 이층 선실에 올라가니 태양이 바로 내리쬔다. 선실바닥에 놓여있는 쿠션에 누워서 하늘을 쳐다보니 너무나 하늘빛이 푸르고 깨끗하다. 간간히 불어오는 바람이 너무좋다. 다시 아래로 내려와 시원한 맥주와 음료수로 목을 축이니 지상 낙원이 따로없다. 배는 어느 듯 반환지점인 파티흐 술탄 마호메트대교에 다다랐다. 여기서 돌아서면 아시아 쪽의 집 들을 보면서 내려간다. 동화 속에나 나옴직한 그런 아름다운 집 들이 자꾸 눈에 들어온다. 두 채의 쌍둥이 같은 건물이 보인다. 이 집이 현재 터키의 대부호의 여름 별장이란다. 참 부럽다. 보스포러스해협의 유람은 마음도 상쾌해지고 눈도 즐거웠던 여행이었다.
(특급호텔) (부호의 별장) (술탄마흐메트대교)
선착장에 도착하여 유람선에서 내려 간곳은 그 유명한 돌마바흐체궁전이었다. 돌마바흐체궁전은 들어서는 입구부터 입장하기가 까다로웠다. 모든 짐은 검색대를 통과해야 했고 사람도 검색을 철저히 하였다. 입장권을 받아 검색대를 통과한 뒤 마당에서 기다리니 가이드가 궁전 안에서 사진 촬영을 하려면 사진 촬영권을 구입해야 한다고 하여 카메라 한 대만 찍기로 하고 5불을 주고 촬영권을 구입했다. 촬영권까지 끊었으니 마음껏 촬영해야지 하며 궁전으로 들어가려니 또 하나의 절차를 거쳐야 했다. 신발 위에 비닐로 만든 덧신을 신어야한다는 것이다. 덧신을 조심해서 신고 안으로 들어갔다. 오스만 왕조시대 술탄의 마지막 거성으로 아타튀르크 초대 대통령의 집무실로 유명한 눈부시도록 화려한 궁전이다. 대리석 기둥마다 새겨진 아름다운 조각과 천장의 모자이크, 눈부시게 화려한 크리스탈 샹드리에, 내부 하나 하나마다 깔린 카페트의 문양, 방문 위에 새겨진 술탄의 문장들 어느 것 하나 빼놓을 수 없는 멋진 조각품들 이었다. 외부를 향해 나 있는 창문에는 유리마다 스탠드글라스를 넣어 아름다움을 더했다. 워낙 관람객이 많아 한 그룹당 할애된 시간이 50분이란다. 비싼 입장료에 비해 너무 인색한 관람시간 이었다. 사진도 많이 찍고 여러 곳을 둘러보면서 환상에도 젖어 보려던 꿈이 깨어졌다. 시간에 쫒기어 바깥으로 나오니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바다가 정원과 어우러져 감탄을 자아내게 하였다. 궁전의 내부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외부의 조경도 너무 아름다웠다. 술탄의 왕들의 화려한 생활이 눈앞에 그려진다. 아름다움에 취해있다 현실로 돌아오니 허기가 느껴진다.
(돌마바흐체궁전 입구에서) (천장의 모자이크) (야외 정원의 모습)
레스토랑에서 꼬지에 끼워진 소고기와 야채를 커다랗게 부풀어진 빵을 조금씩 뜯어 케밥을 만들어 맛있게 먹었다. 점심을 먹고 고대 로마시대의 공중목욕탕이 그대로 남아있는 목욕탕으로 갔다. 자금은 카페트 전시장으로 쓰고 있는데 내부가 모두 대리석으로 만들어 졌으며 대리석 기둥 하나하나마다 새겨진 조각과 천장의 환기구멍, 수도꼭지가 있는 세면대, 샤워실, 사우나실, 휴게실까지 갖추어져있어 지금의 목욕탕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다음으로 간곳은 멋진 궁전 톱카프궁전으로 갔다. 이 톱카프궁전은 보석궁전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 궁전의 식당이었던 곳은 도자기를 전시하는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고 궁전 여러 방들은 술탄 왕조 때 사용하거나 선물로 받은 보석들을 전시해 놓았다.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다이야몬드장식의 왕관과 엄청나게 큰 에메랄드장식 목걸이하며 너무나 많은 보석과 크기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왜 가이드가 들어가기 전에 ‘처음 들어 가서는 크기와 화려함에 놀라고 전시관을 하나씩 돌다 마지막 방에 오면 이게 진짜 맞나하고 물으니 여기에 전된 것은 모두 진짭니다.’ 하고 강조했는지 이해가 되었다. 처음에는 너무나 놀라웠는데 너무 많이 보니 진짜 같지 않게 느껴졌다.
유명 관광지답게 많은 외국인들로 북적거렸다. 그 속에 차도르를 갖춘 터키인들도 꽤 보였다. 다음으로 간 곳은 그랜드 바자르 우리나라로 말하면 대형시장과 같은 곳이다. 첫 입구부터 성으로 들어가는 느낌을 주었다. 넓은 길 양족으로 많은 가게들이 늘어 있었으며 금세공으로 화려한 보석가게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큰 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니 화려한 문양과 빛깔의 도자기 그릇이 진열된 가게, 터키의 전통 과자를 파는 가게, 가죽옷을 파는 가게, ...... 이 세상에 있어야할 물건들은 다 파는 것 같았다. 얼마나 바자르가 넓던지 시계를 보지 않으면 시간 가는 줄 몰라 약속시간에 나가지 못할 것 같아 자꾸 시계를 보게 되었다. 약속 시간이 얼마남지 않아 터키의 과자와 차를 파는 가게에서 애플티(사과차)를 살려고 들어가니 가게 사장님이 코리아 하면서 대한민국은 좋은 친구나라라면서 디스카운트를 많이 해주었다. 그리고 사진도 찍어 달래서 같이 사진을 찍고 보여주니 너무나 좋아한다. 바자르내의 가게에는 여자 점원이 하나도 없는 것이 특징이다. 모든 가게에는 남자점원들이 물건을 팔고 있었다. 이슬람교에서는 여자들이 바깥 사회생활을 하는것을 꺼린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식당에 가도 모두 남자들이 써빙을 하고 있었다.
바자르에서 나와 호텔로 돌아가 잠시 휴식을 취하고 저녁을 먹고나서 기다리던 밸리댄스를 관람하러갔다. 공연장에 들어서니 우리 좌석이 미리 잡혀져 있었다. 무대바로 옆이라 가까이서 밸리댄스를 볼 수 있어 너무 좋았다. 네명의 무용수가 나와 밸리댄스를 추었는데 마지막에 나온 ‘아세나’라는 무용수가 가장 유명하고 잘 춘다고 해서 유심히 보았다. 가슴과 배가 어쩌면 저렇게도 따로 따로 흔들어 지는지 부러울 뿐이었다. 밸리댄스 공연이 끝나고 터키의 거수가 나와 참석한 각 나라의 민요를 불러주는 시간이 되었다. 갑자기 귀에 익은 곡의 반주가 나오면서 우리쪽을 향해 손짓을 하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대~한민국! 하며 환호 하고 아리랑을 따라 불렀다. 아마도 그 날 참석한 팀 중에 한국 팀이 세 팀이나 되어 아리랑을 먼저 연주해 주는것 같았다. 다음은 스페인, 그리스, 등 참석한 나라들의 민요를 불러주고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로마시대의 목욕탕) (톱카프궁전) (밸리댄서)
8월 16일 터키에서의 마지막 날이다. 낯익은 거리를 지나 첫 번째로 간 곳은 히포드롬광장. 불루모스크 앞에 있는 광장이다. 이곳은 술탄아흐메트 자미의 서쪽에 있는 고대 로마시대 때 전차경기가 펼쳐지던 대경기장이라고 한다. 지금은 경기장의 유적은 찾아보기 힘들고 3개의 기둥이 서 있는 광장이다. ‘아트 메이단(말의 광장’이라고 불리며 축제일에는 여러 가지 행사가 열린단다. 맨 앞쪽에 보이는 커다란 돌기둥은 25.6M 의 높이로 기둥의 사방에 부조를 새겨놓았다. 이 돌기둥은 테오도시우스 1세의 오벨리스크라고 불리며 이집트의 카르나크 신전에서 로마 황제에 의해 운반된 것이라고 한다. 원래는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 토토메스 3세가 룩소르에있는 카르나크신전에 세운 것 중의 하나로 기둥에는 히에로그리프 등이 신비롭게 새겨져있다. 이 돌기둥이 이집트의 신전에서 온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돌기둥에 새겨진 상형문자에서 파라오를 상징하는 그림이 나온다. 이 돌기둥의 그림의 중간쯤에 물방개 같은 그림이 있다 이 그림이 파라오를 상징하는 것이란다.
오벨리스크의 하단에는 테오도시우스황제를 비롯하여 귀족들의 모습이 부조로 새겨져 있으며 또 다른 면에는 이 오벨리스크를 어떻게 하여 세웠는지 세우는 방법을 그림으로 표현해 놓았다. 일종의 벽화 같은 것이겠지. 이런 문자들을 이렇게 새겨둔 고대 사람들의 지혜가 돋보인다. 오벨리스크 뒤쪽에는 청동으로 된 높이 8M의 청동기둥이 있는데 콘스탄티누스 1세 시대에 그리스 델포이 의 아폴로 신전에 세워졌던 것을 가져온 것이다. 원래는 기원전 3세기에 그리스 도시 국가가 페르시아 전쟁의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이 청동 기둥은 2마리의 뱀이 서로 또아리를 틀면서 위로 올라가 머리를 맞대고 있는 모양이란다. 그러나 아쉽게도 머리 부분은 파손 되어 떨어져 나가고 없다.
마지막으로 보이는 돌기둥은 돌을 벽돌처럼 쌓아서 올린 오벨리스크로 콘스탄티누스 7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란다. 처음에는 돌기둥 겉면에 청동으로 입혀 놓았는데 사람들이 청동을 떼어 내어 지금처럼 매끈하지 못하고 제일 오래된 기둥처럼 보인다. 사실은 만들어진 연대는 가장 늦다. 그 옆에 팔각형 모양의 건축물은 독일의 샘이라고 불리며 독일의 빌헬름 2세로부터 기증 받은 것이다.
광장 옆으로 난 길을 따라 건너가니 바로 불루모스크로 들어가는 문이 나왔다.
모스크란 이슬람사원이라는 뜻이다. 이 불루모스크는 바로 마주보고 있는 아야소피아를 모델로 하여 건축되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불루모스크와 아야소피아는 너무나 흡사하다. 불루모스크의 정식 이름은 술탄마흐메트 자미라고 한다. 술탄마흐메트자미(불루모스크)는 이 부근의 지역 이름이 될 정도로 구시가지의 주요 관광 명소다. 웅장한 모습은 이스탄불의 상징이기도하다. 터키의 자미(사원)는 둥근 천장의 돔과 뾰족한 연필심 모양의 첨탑(미나레)이 특징이다. 불루모스크는 6개의 미나레와 높이 43M, 지름 27.5M의 대형 돔과 4개의 중간 돔, 30개의 작은 돔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이슬람 사원 중 6개의 미나레를 가진 사원은 극히 드물단다. 이 자미는 술탄마흐메트 1세의 명을 받아 마닐 시난의 제자인 마흐메트 아가 설계하여 1616년에 만들어졌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6개의 미나레는 술탄이 황금( 알툰-Altun) 으로 지어 달라고 한 것을 마흐메트아가 6(알트-Altu)으로 잘못 이해해 이와 같은 전에 없던 모양이 탄생했다고 한다. 중후한 모습은 오스만왕조 건축의 걸작 중 하나로 높이 평가 받고 있다. 넓은 바닥에서 위를 올려다보니 천장의 웅장한 모습과 천장의 조각이 독특한 분위기를 풍기고 중앙의 돔에는 260개가 넘는 작은 창이 있으며 스태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빛이 실내를 밝게 비추고 있으며 태양빛에 환히 비친 창의 무늬가 보석을 뿌려 놓은 듯이 아름다웠다. 안 쪽의 벽을 장식하고 있는 2만장 이상의 이즈닉타일은 파란색을 바탕에 다양한 문양이 조화를 이룬 매우 아름다운 모자이크다. 이 때문에 불루모스크라는 애칭으로 널리 알려져 있단다. 자미 안에 깔려있는 카펫 역시 볼거리 중의 하나인데 카펫 문양에 직사각형을 넣어 그 직사각형 하나가 한사람이 기도하는 자리를 표시한다고 한다. 이슬람의 성스러운 색인 녹색의 카펫은 이디오피아에서 보내온 것이라고 한다. 자미 앞에는 넓은 정원이 있으며 손질이 잘 된 화단에는 항상 꽃이 피어 있어 아름다움을 더한다. 모스크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신발을 벗어 봉투에 넣고 팔이 없는 셔츠와 짧은 반바지차림을 한 사람은 입구에서 나누어 주는 스카프를 두르고 들어가야 한다. 또 신자가 들어가는 문과 관광객이 들어가는 문은 다르다. 출입구 앞 마당에는 수도꼭지가 만들어져 있어 그 곳에서 발과 손을 씻고 자미 안으로 들어가 기도를 드린다고 한다. 내부의 돔에는 술탄의 문장과 알라를 나타내는 글자들이 이슬람교의 성스러운 색인 초록색의 문자로 부조되어 있었다. 모스크안의 가운데에는 신자들만이 들어 갈수 있다고 하며 일반 관광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줄을 쳐놓고 군데군데 지키는 사람이 서있었다. 사람이 너무 많아 (솔직히 발 냄새가 너무 많이 났다)출구로 나왔더니 벌써 나와서 기다리는 사람도 있었다.
( 오벨리스크) (불루모스크의 천정) (한사람이 기도하는 자리)
다음으로 이동 한곳은 지하궁전(지하저수조)으로 갔다. 입구에서 계단으로 얼마나 내려가니 일려로 늘어선 기둥과 기둥사이로 맑은 물이 흐르고 그 물 속에는 물고기들이 헤엄쳐 다니고 있었다. 336개의 기둥과 벽돌로 정교하게 쌓아 지하저수조보다는 지하궁전이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 이 저수조는 콘스탄티누스 황제부터 유스티아누스 황제시대에 걸쳐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곳은 마치 지하의 거대한 저수지 같다. 비잔틴부터 오스만왕조시대까지 이곳은 주변의 중요한 물 창고였다고 한다. 물은 아타튀르크 거리에 걸린 발렌스 수도교에서 이곳으로 끌어왔으며 후에 톱카프궁전의 술탄들의 목을 적셔주었다고 한다. 전체크기는 세로 140M 가로 70M, 높이 8M 정도이며 코린트 양식의 336개의 기둥으로 받쳐져 있다. 원래 이기둥도 28개의 기둥이 12줄로 모두 336개의 기둥이었지만 19세기 말에 90개가 없어졌다고 한다. v,링스인 고고학자가 발견할 때까지 지하에 이런 공간이 있다는 것을 아무도 몰랐으며 사람들은 지하궁전 위에 집을 짓고 마루 아래에 구멍을 뚫어 물을 긷거나 낚시를 했다고 한다. 중간 쯤 가다 보이는 기둥이 하나 있는데 ‘눈물기둥’이라고 하여 터키에 무슨 일이 일어 날 때 이 기둥에서 물이 흘러내린다고 하여 눈물 기둥이라고 한단다. 아마도 우리나라의 ‘땀 흘리는 사명대사비’와 같은 것이겠지. 궁전의 가장 안족에는 두 개의 특이한 기둥이 있는데 이 기둥을 받치고 있는 조각이 바로 그 유명한 메두사의 머리이다. 하나는 옆으로 뉘어있고 하나는 거꾸로 놓여있다. 이 메두사의 머리는 1984년 대대적인 보수 공사 때 바닥에 남아 있던 2미터나 되는 진흙더미를 없애면서 발견되었다. 어둠 속에서 드러내고 있는 메두사의 얼굴 모습은 소름이 끼칠 정도 괴기스럽다. 온통머리에 뱀으로 뒤덮여있는 메두사의 머리는 전설처럼 자신을 본 사람을 돌로 만들어 버리는 힘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스산하고 무서운 기운이 감도는 메두사의 기둥을 돌아 출구로 나오니 지금도 연주회나 음악회를 한다는 카페가 있었다. 아마도 이 지하공간이 공명에 좋은 효과를 가져 오나보다.
이스탄불에서의 마지막 점심은 서울정이라는 한식당에서 된장찌개정식으로 먹었다. 그래도 제대로 된 된장찌개와 고등어조림, 오징어볶음, 김치(양배추로 만든), 오이무침으로 배불리 먹었다. 서울정 앞에는 간단한 선물용 상품을 파는 가게들이 있었다. 언제 배부장은 모자를 샀는지 술탄의 모자를 머리에 쓰고 우리를 웃겼다. 내친 김에 기념사진을 찍었다. 다시 구시가지로 나가 아야소피아로 들어갔다. 아야소피아는 지금은 박물관으로 이름 붙여져 있지만 비잔틴 건축의 최고 걸작품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오랜 역사 속에서 여러 종교에 이용되면서 터키의 역사를 대변해 온 건축물이다. 서기 325년 콘스탄티누스 1세에 의해 아야소피아의 모체가 되는 교회가 건축되기 시작하여 360년 콘스탄티누스 2세 때에 완성되었다. 그후 수차례의 화재를 거치고 537년에 유스티아누스 황제의 명으로 6년 여만에 비잔틴양식의 대성당이 완공되었다. 그 후 비잔틴제국시대가 끝날 때까지 그리스정교의 총 본산으로 숭배 받았다. 안 뜰에 있는 그리스 양식의 원기둥은 유스티아누스 황제가 아테네와 에페소스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지름이 31M인 대형 돔의 지붕은 로도스 섬에서 만들어진 가벼운 벽돌로 지어졌다. 황제는 자신의 명예를 걸고 당시의 최고 기술을 구사하여 당 대 최대 규모의 건물을 만든 것이다. 안에는 여러 개의 모지이크화가 남아 있으며 비잔틴 문화를 상징하고 있다. 1453년 콘스탄티노풀이 함락 당하자 술탄 마흐메트 2세에 의해 성당이 자미(모스크)로 바뀌었고 메카의 방향을 나타내는 미흐라프 등이 새로이 추가 되었다. 그후 1700년대에는 남아 있던 모자이크도 칠보로 덧칠하여 20세기에 발견될 때까지 빛을 보지 못했다. 1931년 미국인 조사단에 의해 벽 중앙의 모자이크화가 발견되며 아야소피아는 비잔틴 시대의 유적으로 유명해지기 시작하였다. 터키의 초대 대통령 아타튀르크는 이곳을 박물관으로 일반인에게 공개하기로 결정하여 일반 관광객이 관람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성당의 2층으로 오르는 길은 계단이 아니라 비틸길로 되어 있다. 이것은 왕비가 기도를 드리러 갈 때 가마꾼들이 쉽게 왕비를 태운 가마를 2층으로 올라가게 하기 위해 비탈길로 만들었단다. 2층의 한 중아에는 주변과는 색깔이 다른 대리석이 박혀 있는 데 이곳이 바로 왕비가 기도하는 장소를 나타낸단다. 위층의 회랑에는 비잔틴 시대 때의 모자이크가 드러나 있는데 남쪽 회랑에 성모 마리아, 요한과 함께 그려진 예수의 모자이크는 지금도 금빛이 찬란한 아름다움으로 일부가 남아 있다. 대형돔 안에 걸려있는 검은 바탕에 황금색으로 쓰인 컬리그러피(상형문자)의 둥그런 판에는 알라, 무하메드와 4명의 카리프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돔 안쪽에는 크루앙의 한 구절이 적혀있다. 워낙 큰 대형 돔이라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 지금은 커다란 철탑을 세워 보호하고 있어 보기가 안타까웠다.
아야소피아를 나와 공항으로 가기까지 시간이 조금 남아 또 다른 바자르를 구경하고 버스를 타고 이스탄불공항으로 갔다. 이로써 7일간의 터키 여행은 마무리가 되어 간다. 공항 입구에서 부터 검색대를 통과하고 짐도 부쳤다. 가이드로부터 항공표를 받고 보니 이제 한국으로 가는 것이 실감난다. 그동안 열심히 설명도 하며 우리의 모든 것을 책임지고 보살펴 준 최정모 가이드와도 아쉬운 이별을 했다. 젊은 사람이 먼 이국 땅에서 열심히 사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출국 수속을 마치고 마지막 보안 검색대를 통과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터키 시각으로 오후 7시 30분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간다. 비행시간은 약 11시간 비행을 하는 동안 날짜가 16일에서 17일로 바뀐다. 올 때와 마찬 가지로 돌아가는 비행기에서도 2번의 식사가 나왔다. 가이드말로는 2번째 나오는 밥을 먹고는 잠을 자지 말란다. 왜냐하면 시차에 적응 하려면 잠을 자지 말고 버텨야한단다.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한국에 도착하면 오전 11시가 되어 있을 테니까. 무사히 인천공항에 도착하여 다시 리무진으로 갈아타고 김포로 가서 3시 비행기로 부산으로 왔다. 김해공항에서 우리 일행과 여행사의 고사장님과도 작별을 했다. 또 다음의 여행을 기다리면서 함께한 모든 분들이 항상 행복하기를 기원해 본다.
(메두사의 머리) (아야소피아의 성화) (불루모스크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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