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거리에만 급급하는 ‘립싱크 천국’…가창력 시대로 돌아가야
가수가 라이브를 하는 것보다 TV에 나와 춤을 추며 비주얼한 측면을 강조하게 된 그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려주는 일이 가수들에겐 하나의 난관이 되었다. 급기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 도중 “첫 방송 때는 아무 것도 모르고 라이브를 해서 사람들이 우리의 실력을 알아버렸다”고 말하는 여성그룹이 생기기도 했다.
가수가 본분인 노래를 부르지 않고 외모와 춤으로 승부하는 것은 어쩌면 우리 가요계만의 기현상이다. 요즘에는 심지어 코미디까지 한다. 그렇다면 가수가 아니라 ‘연기자’로 불러야 맞다. 요즘 주가 최고인 해외의 보이밴드들만 해도 음반산업이 만들어낸 기획상품이라는 점에서 엄청난 비판을 받지만 최소한 언플러그드는 제대로 할 정도의 라이브 실력은 갖추고 있다.
하지만 절망하라는 법은 없다. 망가진 우리 대중음악을 되살릴 가창력 있는 가수들이 리듬 앤 블루스부문에서 속속 나와 희망의 불씨를 지핀다. 3명의 신예 박정현 박효신 박화요비가 그 기수들이다.
먼저 벌써 3번째 앨범을 낸 해외파 박정현은 한마디로 ‘노래할 줄 아는’ 여가수다. 미국의 수많은 콩쿠르대회에서 입상하며 1993년에는 본토에서 가스펠 앨범을 발표했을 정도의 실력이다. 이어 ‘리나’라는 이름으로 국내에서 리메이크 앨범을 내놓은 바 있으며 월트디즈니의 애니메이션 ‘뮬란’의 한국판 앨범에서 크리스티나 아길레라가 부른 ‘리플렉션’을 ‘내 안의 너를’이라는 곡으로 바꿔 불러 가창력을 인정받았다.
●리듬 앤 블루스 부문에서 가창력 인정받아
1집에선 시나위 출신으로 노래에 관한 한 제1로 꼽히는 임재범과 ‘사랑보다 깊은 상처’를 불러 어깨를 겨뤘으며 2집부터는 간간이 자신이 쓴 곡을 선보이고 있다. 이번에 나온 3집은 전작들에서 드러난 경직된 자세를 떨쳐 버리고 편한 느낌을 제공해 비로소 한국화(?)에 성공했다는 평을 듣고 있다.
예전 그녀의 보컬 패턴은 자신감은 가득했으나 흉내내기가 힘들어 듣는 사람은 부담스러운 측면이 없지 않았다. 새 앨범은 ‘You mean everything to me’(닐 세다카의 팝송이 아님)와 같은 부드러운 R&B를 들려주는가 하면 힙합 뮤지션과 함께 한 곡 ‘싫어’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들을 자기 스타일로 녹여내고 있다.
박정현이 외국물을 먹은 반면 박효신은 철저하게 국내 대회에서 수상하며 실력을 닦은 ‘토종’으로 현재 고3 수험생이다. 파격적으로 진주와 함께 ‘록 햄릿’의 주인공으로 발탁될 만큼 목소리의 파괴력은 이미 알만한 사람들은 모두가 안다. 이소라가 그의 목소리에 반해 듀엣을 자청해 ‘Just once’라는 곡에서 함께 호흡을 고를 정도였다.
어린 나이답지 않게 힘이 느껴지는 보컬은 본인은 R&B를 하고 싶어하고 루더 밴드로스를 좋아하지만 오히려 임재범 하면 연상되는 록과 록발라드에 어울린다는 생각이다. 카리스마는 임재범에 못지 않다. ‘해줄 수 없는 일’ ‘바보’ 등이 수록된 첫 앨범은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강력한 타진이다.
박효신의 목소리는 모든 곡을 ‘평균으로’ 만들어버리는 마력이 있다. 곡에 의해 좌우되는 일반 가수의 목소리와는 달리 그의 보컬에 묻혀 곡들은 개성을 잃어버리고 우리는 어느덧 멜로디가 아닌 그의 목소리 자체만을 듣고 있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가 루더 밴드로스 같은 대형 리듬 앤 블루스 가수가 되기 위해서는 거친 음색을 좀더 깎을 필요가 있다. 임재범과의 차별화를 위해서라도 음색 개발은 시급하다. 허나 R&B만 하기에는 모처럼의 ‘파워 보컬’이 아까워 장래에는 무궁무진한 변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의 변신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2000년에 신고식을 한 박화요비는 올해 유난히 예사롭지 않은 강세를 보인 다른 여자 신인가수들과 함께 한참 경쟁하고 있는, 데뷔한지 6개월밖에 안되는 신인이다. 고등학교 때까지 클래식을 전공했던 그녀는 ‘화요일과 R&B’를 합성해 만들었다는 이름만큼이나 특이한 선회를 했다. 올해 대학에 들어가면서 진로를 실용음악으로 전환한 것이다.
데뷔앨범에는 박효신과의 듀엣 곡이며 드라마 ‘신귀공자’의 주제곡이기도 한 ‘전설 속의 사랑’과 머라이어 캐리 식의 허밍의 연출이 돋보이는 ‘Lie’ 등이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대견스러운 것은 수년을 음악과 함께 분투한 그녀답게 연주곡을 포함, 5곡을 만들어내는 저력을 선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그녀의 음악을 듣고 미국의 유명 래퍼 MC 해머는 DJ DOC와 더불어 ‘미국에서도 통할 가수’라고 격찬하기도 했다.
●음악계 해방시킬 ‘작은 개혁주의자들’
소속사의 선배 양파의 노래가 애절함에 힘을 싣고 있다면 그녀는 슬픔의 감정을 숨소리와 호흡에 더 무게를 얹히고 있다. 호흡을 하나의 보컬 특색으로 만들어버린 그녀의 재능은 아주 오랜 시간 창법을 연마해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전혀 공력을 쌓지 않은 채 이미지만을 믿고 마구 쏟아져 나오는 근래 여가수들에게는 하나의 경종이다.
국내에서 R&B라는 장르가 표면화된 시점은 김조한이라는 걸출한 가창력의 소유자가 있었던 그룹 솔리드가 떠오르면서부터일 것이다. 미국 흑인들의 음악인 솔이 정제화되고 부드러워져 90년대 들어 이 R&B라는 장르로 굳어졌는데 근자의 대표적 톱 가수인 머라이어 캐리나 휘트니 휴스턴의 이름만 떠올려도 얼마나 가창력을 요구하는 장르인지 대번에 알 수가 있다.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하지 않고 라이브의 혼을 전달하는 이들은 그런 의미에서 이 시대가 진정으로 긴장해서 돌보아야 할 가수들이다. 대중적 친화력을 결코 놓치지 않은 채 가수의 본령과 기본을 일깨우는 이들 ‘3박’ 가수, 그리고 그들에게 성원을 보내는 팬들이야말로 TV라는 무소불위의 권력으로부터 우리 음악계를 해방시킬 ‘작은 개혁주의자들’이다. 어서 이들의 시원한 개혁풍이 불었으면 한다.
(임진모·대중음악 평론가 jjinmoo@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