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대 동명성왕 (BC58년 ~BC19SUS)
성은 고, 휘는 주몽. 동부여의 금와왕의 맏아들.
대소태자의 모해를 피하여 압록강 연안인 졸본천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고구려라 함
◐ 2대 유리왕 (BC19년~18년)
기원전 19년에 어머니 예씨로부터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졸본부여에서 남쪽으로 내려가
아버지를 만나 태자로 인정받고 고구려 제2대 왕이 됨
기원전 17년에 계비인 치희를 그리는 《황조가》를 지음
3년에는 도읍을 홀본에서 국내성으로 옮기고 위나암성을 쌓음
◐ 3대 대무신왕 (4년~44년)
유리왕의 셋째 아들.
14년에 태자로 책봉됨 22년에 동부여를 공격하여 고구려에 병합시킴
그 해 개마국을 쳐서 국토를 살수 이북까지 확대함. 32년에는 왕자 호동을 시켜 낙랑군을 정벌함
◐ 4대 민중왕 (44년~48년)
대무신왕의 아우. 대무신왕이 죽자 태자 해우가 어리므로 대신 즉위함
유언에 따라 민중원 석굴에 장사를 지냄
◐ 5대 모본왕 (48년~53년)
대무신왕의 아들.
49년에 한나라를 공격하였으나 요동태수 채동의 제의로 화친을 맺음
성품이 포악하고 정사를 돌보지 않아, 백성들의 원성을 들음. 결국 신하 두로에게 피살됨
◐ 6대 태조왕 (47년~165년)
유리왕의 손자이다.
56년에 동옥저를 정벌, 동으로는 창해, 남으로는 살수에 이르게 함
72년에는 부족장인 달고를 파견하여 조나를 정벌함
121년 한나라의 요수현을 공격하여 서북면의 영토를 넓힘
중앙집권적 형태로 체제를 정비함. 165년, 119세로 죽어 한국 역사상 가장 장수한 왕이 됨
◐ 7대 차대왕 (71년~165년)
태조왕의 동생.
121년 유주자사 풍환, 현도태수 요광, 요동태수 채풍 등이 고구려를 침범하자 군사를 이끌고 나가 이를 대파함. 147년, 위 계승을 반대하던 우보 고복장을 죽이고, 148년 태조왕의 태자 막근마저 죽인 후 왕권을 확립하였으나, 횡포와 학정을 일삼아 백성들의 원성을 듣다가, 결국 명림답부에게 시해 당함
◐ 8대 신대왕 (165~179)
태조왕의 계제이며 어머니는 부여 사람.
둘째형인 차대왕이 포악무도하여 숨어 살던 중 차대왕이 명림답부에게 살해되자 좌보, 어지류 등의 추대로 77세에 즉위함
166년 좌·우보의 직제를 국상으로 고치고 명림답부를 이에 임명함
169년 한나라의 태수가 대군을 이끌고 침입해오자 스스로 항복함
170년 경림의 후임인 공손 탁을 도와 부산의 도적을 토벌함
◐ 9대 고국천왕 (179~197)
신대왕의 둘째 아들. 184년 한나라 요동태수의 침입을 막고 대승함
191년 을파소를 국상으로 등용하여 현정을 베품. 194년 진대법을 실시하여 백성들의 빈곤을 덜어줌
왕위계승 방법을 형제상속에서 부자상속으로 바꿈
◐ 10대 산상왕 (197∼227)
신대왕의 아들이며, 고국천왕의 동생. 208년에 서울을 환도(중국 퉁거우 지방)로 옮김
217년에 한나라 평주의 하요가 백성 1,000여 호를 거느리고 와서 항복했으므로 왕은 그들을 받아들여 지금의 중국 훈춘 지방인 책성에서 살도록 함
◐ 11대 동천왕 (227∼248)
산상왕의 아들.
236년 오나라 손권이 화친을 청해 왔으나 사신을 죽여 위나라에 보냄
242년에 중국과 낙랑군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인 서안평을 공격하다가 관구검의 반격을 받아 환도성이 함락되고, 남옥저로 피란함. 이때 용장 밀우와 유유의 계책으로 적을 격퇴시켰으나, 환도성이 복구할 수 없을 만큼 파괴되어 247년에 수도를 동황성으로 옮김
248년에는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화친을 맺음
◐ 12대 중천왕 (248∼270)
동천왕의 맏아들.
동생 예물과 사구가 일으킨 반란을 평정함
259년 위나라의 장수 위지계의 침입군을 양맥곡에서 격퇴함
◐ 13대 서천왕 (270∼292)
중천왕의 둘째 아들. 280년 숙신이 내침하자 동생 달고를 보내어 이를 격퇴함
286년 반란을 도모한 동생 일우·소발 등을 주살함
◐ 14대 봉상왕 (292∼300)
서천왕의 태자.
백성들의 추앙을 받고 있던 숙부 안국군을 살해함. 이듬해 동생 돌고마저 사사함
명신 창조리를 국상에 등용하여 연나라 모용의 침입을 격퇴함
300년 폐위되고, 후환이 두려워서 자결함
◐ 15대 미천왕 (300∼331)
서천왕의 손자.
큰아버지 봉상왕이 아버지를 죽일 때 민가에 숨어 화를 면함. 국토 확장에 진력하여, 302년 군사 3만으로 현도군을 공격함. 311년 요동 서안평을 점령함
313년 낙랑군을 공략, 낙랑군을 멸망시킴. 314년 대방군을 정벌하여 영토로 삼음
◐ 16대 고국원왕 (331∼371)
미천왕의 아들. 평양성을 증축하고 국내성을 쌓음
342년 환도성으로 천도한 뒤 수차례 연나라의 침입을 받음
343년 동생을 연나라에 파견, 조공을 바쳐 미천왕의 시체와 왕비를 찾음
355년 다시 조공하여 왕모를 찾아옴. 369년 2만 군대로 백제를 공격하였으나 패함
371년 침입한 백제 근초고왕과 평양성에서 싸우다가 죽음
◐ 17대 소수림왕 (371∼384)
고국원왕의 아들. 전진과 평화적 관계를 수립하여 전진의 제도와 문화의 수입에 노력함
372년 최초로 불교를 수입하고 태학을 설립함.
373년 처음으로 율령을 반포하여 고대국가 체제를 정비함
377년 3만 대군의 백제군 침공을 물리치고 백제의 북변을 역습함
◐ 18대 고국양왕 (384~391)
소수림왕의 아우. 광개토왕의 아버지.
385년 군사 4만으로 요동을 공격함 386년 백제를 정벌하여 국토를 넓힘
불교를 널리 펴뜨려 문화를 발전시킴 국사를 세우고 종묘를 수리하는 등 국가체제 확립에 이바지함
◐ 19대 광개토왕 (391∼413)
고국양왕의 태자.
소수림왕의 정치적 안정을 기반으로 최대의 영토를 확장함
백제의 북쪽을 진격하여서 석현 등 10성을 함락함
396년 친히 수군을 거느리고 백제를 정벌하여 58성을 차지함
400년 신라 내물왕의 요청으로 5만의 원군을 보내어 왜구를 격퇴함
407년 모용 희를 죽이고 자립한 고운과는 수교를 맺음
410년에는 동부여를 정벌하여 64성을 공파함으로써 철령 이북의 동부여가 고구려의 판도 안에 들게 됨. 또한 남하하여 한강선까지 진출하고 서쪽으로 후연을 격파하고 요동지역을 확보함으로써 만주의 주인공으로 등장함
아버지 유리왕은 왕의징표인 신수를 받지못해, 늘 전전긍긍하는 심약한 인물이었습니다.
막 세워진 고구려는 주변강대국들, 특히 漢에 치여 눈치만 보는 형편이었고, 급기야 해명태자를 죽이는 지경에 이릅니다. (태자가 둘이나 죽는데, 한명은 이름이 기억이 안나네요;)
무휼은 어렸을때부터 생각합니다. 왜 우리가 漢의 눈치나 보며 전전긍긍하며 살아야합니까. 내나라 내 백성을 위해서라도 좀더 강한 나라를 만들겠다고..漢을 넘어서는 강한 나라를 만들겠다고..
궁극적으로 무휼이 향하는 것은 漢이 아니라 그 너머의 부도입니다. 우리의 뿌리가 있는, 언젠가는 돌아가야할 그곳..漢을 넘어서 가야할곳..내나라 내 백성을 위해서..
무휼의 차비 연은 두나라의 화친을 위해 부여에서 시집오지만, 후에 무휼은 동부여를 공격, 병합합니다. 왕의 세력을 강화하기위해 군사력이 있던 이지를 들이고, 낙랑을 치기위해 호동과 낙랑공주 사비를 결혼시키기도 하고요.
무휼은 아버지가 형을 죽이는 것을 보아왔기때문에 부자간의 殺에 대해 고민하고, 호동의 신수인 봉황과 자신의 신수인 청룡이 殺의 관계라는것(즉, 한쪽이 죽어야하는)때문에, 호동의 목숨이 위험해짐을 감수하고라도 봉황을 없애려합니다. 대를 이어가는 부자간의 殺을 제거하고싶어하죠.
(아..두서없이 적었습니다..책이 있다면 좋겠네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태왕사신기의 시놉에 나오는 광개토왕에 대한 설명입니다.
담덕 (광개토태왕) (375 - 413)
문치주의를 표방했던 소수림왕의 조카로 태어났다. 왕위계승 서열에서 한참 아래였던 관계로 어려서부터 왕위 따위는 생각도 안하고 자라났다. 학문에는 도통 뜻이 없고 동네아이들과 전쟁놀이를 하며 뛰어다니거나 대장간에서 놀기를 좋아했다. 소수림왕이 아들이 없이 죽고, 그의 동생이며 담덕의 아버지인 어지지가 왕위에 오르게 되던 날도 대장간에서 스스로 칼을 하나 만들어낸 일을 더 기뻐했다.
고국양왕이 된 어지지는우리늘 몸이 약했던 탓에 마음도 심약한 인물이었다. 그런 그에게 최대의 적은 소수림왕때에 받아들인 불교의 승려들이었다. 전진과 동진에서 각각 파견해온 승려 순도와 아도의 무리는 고구려를 각기 자국의 이익에 맞게 움직이려고 온갖 방법을 강구하고 있었다. 그들은 병약한 고국양왕의 후계인 담덕을 자신들의 뜻대로 키우고자 온갖 계책을 꾸민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담덕은 오히려 애국심에 눈을 뜨게 되고, 승려무리들은 뒤늦게 담덕을 제거하는 쪽으로 뜻을 모은다. 열두살에 태자가 된 담덕은 계속되는 암살 위협에 시달리지만 덕분에 오히려 강하게 자라난다. 그의 타고난 낙천성은 언제나 위기를 성장의 기회로 삼게 만드는 것이다.
열여섯의 나이에 처음으로 주안과 수지니를 만난다. 주안은 처음에는 철딱서니로 보이는 담덕에게 실망하지만 차츰 그의 당당함에 마음이 끌린다.
담덕은 사신(四神)을 찾아야한다는, 그래서 단군의 땅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안의갈망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가 원하는 것은 다만 내 땅의 백성들이 씨 뿌릴 때 뿌리고 추수 할 때 추수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을 지켜주는 것이 왕의 도라고 생각한다. 그것만 지키면 나머지 생은 최고의 호랑이를 사냥하거나 최고의 칼을 만들며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열일곱의 나이로 병석에 누운 아버지에게 왕위를 물려받은 담덕은 사방으로 둘러싸인 적들도 함께 물려받는다. 전진이 멸망한 이후 성립된 후연, 서진, 후량들이 중국의 북방과 서방에서 세력을 확대하였고, 남방의 맹주 동진은 꾸준히 영토를 확장해오고 있었다.
더욱 기가 막힌 일은 또한 산동과 요서 지역을 차지한 백제가 가야와 왜 등을 끌어들여 연합세력을 형성하여 고구려에 대항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지 않은가.
담덕의 선생으로 눌러앉은 주안은 고구려와 백제의 형제의 역사를 알려주었다. 백제는 먼 옛날 시조 아버지인 고주몽의 부인이었던 소서노가 그 아들들과 만든 나라라고 하지 않는가.
더구나 백제의 새 왕인 아신은 수지니의 정인인 모양이다. 담덕의 생애 처음으로 마음이 끌린 여자, 그러나 따로 연인이 있는 듯하여 좀처럼 속 마음을 내보일 수 없는 여자. 그녀가 잊지 못하는 남자를 죽이고 싶지는 않다. 여자의 원망을 듣느니 차라리 호랑이 먹이가 되는 게 낫겠다.
담덕은 이 모든 골치 아픈 국제정세에 대해 그다운 결론을 내린다.
강해지자. 강해지고 강해져서 더 이상 넘볼 자가 없는 나라를 만들면 되지 않겠는가. 주안선생의 말이 이 세상의 중심에는 단군의 나무가 있다고 하니 그 나무를 찾아 그 땅에 도읍을 정하자. 더 이상 아무도 전쟁을 원하지 않는 나라를 만들자.
담덕은 강한 군대를 만들기 위해 강한 무기를 만들 수 있는 철을 찾아 나선다 . 그리고 백두산 근처의 철광에서 모두루를 만나 평생의 친구가 된다. 그들이 의기투합하여 만들어낸 철기부대가 이후 죽음의 철기부대로 불리게 될지는 그들도 몰랐다.
애초에 기마술에 능했던 고구려의 날랜 장정들이 모여 검은 철갑으로 말까지 무장을 하고 강철창과 활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죽음의 철기부대.
그들은 태왕이 만주벌판을 달릴 때면 언제나 그 뒤를 지켰으며, 태왕이 만들어낸 대선단이 서해를 넘어 상륙했을 때 그 배의 갑판에서 말과 함께 몰려나와 적을 공포에 빠뜨리곤 했다.
그때에야 비로소 주안은 담덕이 태어날 때 보였던 두개의 별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영웅의 별과 함께 떠올라 새벽까지 머물렀던 살성(殺星)의 의미를.
골치 아픈 담론은 딱 질색이다. 엉킨 매듭은 도끼를 내려쳐 잘라내는 성격이다. 타고난 전술의 달인이라고 불리는 그의 병법은 언제나 적의 의표를 뛰어넘는데 있다. 너무 머리를 굴리지 마. 절대 흔들리지 않는 내 머리엔 당할 수 없단 말이다. 라고 자랑스럽게 말하곤 한다.
어린 시절 외세의 첩자들에 의해 끝없이 암살 위협에 시달린 탓에 내 민족이 아니면 일단 적이라고 생각한다. 외교보다는 전쟁을 택하곤 하는 그의 성향도 그에서 비롯된 듯 하다.
대신 내 민족에 대한 끝없는 애정이 있다. 그것이 비록 전쟁의 대상인 백제라 하더라도.
수지니 때문에 엄청 신경이 쓰인다. 그것이 사랑이라고 깨달았을 때 그녀는 떠난다.
부인 이화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낳았고, 장남인 거련이 후에 장수왕이 된다.
서른 아홉, 마흔을 채우지 못한 나이에 이루지 못한 단군조선의 꿈을 안고 죽는다.
태왕의 죽음을 전후로 사신(四神)들도 그와 죽음의 길에 동행한다.
다음 대에 다시 만날 것을, 다시 만나 그때에는 반드시 꿈을 이룰 것을 약속하며.
태왕은 죽기 직전 아들에게 백제와 더 이상의 전쟁을 하지 말 것을 당부했고, 나아가야 할 곳은 남쪽이 아니라 단군의 나무가 있는 대륙의 중앙이라고 유언했다.
장수왕이 그의 말을 지켰더라면 이후 한반도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나 장수왕은 오히려 도읍을 남쪽으로 옮기어 남벌에 주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