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유적에서 파낸 귀갑(龜甲)과 우골(牛骨)이, 용골(龍骨:학질의 묘약)로서 베이징[北京]의 약방에서 팔리고 있었는데, 1899년 이것을 사들인 류어[劉
]가 갑골문자가 새겨진 것을 발견하였고, 고대사학자들의 주의를 끌어 뤄전위[羅振玉]·왕궈웨이[王國維] 등이 연구하여,
은왕조의 점술사가 왕가를 위하여 점을 친 점괘의 기록이라는 것을 밝혀내었다.
1915년 뤄전위는 샤오툰촌을 방문하여, 갑골 외에도 청동기·옥기 등을 입수하였다.
1928년 중화민국 중앙연구원 역사어연구소가 둥쭤빈[董作賓]·리지[李濟]를 중심으로 은허 발굴을 실시하였다. 이로부터 1936년까지 15회 대발굴을 비롯하여 1950~1962년에 걸쳐 발굴을 실시하였으나, 아직도 넓은 유적 전체에 미치지 못하고 그 성과도 완전히 발표되지 않았다.
은허 가운데 거주유적은 주로 샤오툰촌 북방 위안수이강[洹水] 연변 대지(臺地)에 나타난다.
토단(土壇)을 쌓아올린 위에 궁전초석과 토단 주위에는 많은 구덩이식[竪穴式] 거주유적이 있다. 종묘(宗廟), 제왕(帝王)·왕족의 주거는 지상에 있고, 백성은 지하식인 수혈에 있었다.
샤오툰 교외에서는 도기(陶器)·골기(骨器)·동기(銅器)를 만든 장인의 공장과 주거지가 많이 발견되었다.
위안수이강 북쪽의 허우자좡[侯家莊]·다쓰쿵촌[大司空村]에는
은왕조의 왕묘로 보이는 다수의 거대한 묘가, 지하 10m 이상 깊은 곳에 만들어졌다. 왕·왕족의 널[棺]은 다수의 시종과 비첩(婢妾)의 순장(殉葬)으로 둘러싸여 있다. 묘실에는 청동기·옥기 등의 보물이 있었는데, 그 호화로움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고, 말·원숭이·코끼리 등의 동물 전용 갱(坑)이 있는 것도 있다. 아마도 생전에 기른 동물까지 순장된 듯하며, 죽은 뒤에도 살아 있을 때와 똑같이 생활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결과일 것이다.
은대의 청동기는 과(戈)와 같은 무기보다는, 오히려 신을 받들어 모시기 위한 주기(酒器)·식기·악기(樂器)가 주류를 이루었다. 조상을 상징하는 괴수(怪獸) 무늬가 전면에 빈틈없이 새겨졌는데, 그 정교함은 전세계에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다.
왕·귀족들은 4두(頭)마차를 타고 다녔으며, 또한 전쟁은 차전(車戰)이었다. 무관촌(武官村)의 대묘에는 네 마리의 말뼈를 수반한 마차의 유물이 발굴되었다. 궁전 옆의 수혈 등에서는 대량의 귀갑·우골이 나왔는데, 점술사가 왕조의 조상에 대한 제사의식을 점친 문장이 새겨져 있다. 갑골문자의 해독과 왕묘의 유물에서 은왕조 왕후·귀족의 생활상을 대체로 상상할 수 있다.
은허 청동기는 발달의 최고정점에 있던 것으로서, 청동기 유래의 경로를 알지 못하였으나, 1950년 이후 중국전토에 걸친 발굴이 진행되면서, 각지에 은대 유적이 발견되었다.
특히 허난성 정저우[鄭州]의 유적에서 나온 청동기 유물 가운데에는, 안양의 왕묘에서 나온 것보다 원시적인 것이 포함되어 있어, 청동기 발달경로가 판명되었다.
은허 유적은 규모가 크고, 출토된 호화로운 청동기 등의 미술품이 우수하기 때문에, 메소포타미아·이집트의 신전과 더불어 고대문화의 보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