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 번째로 예수님은 니고데모를 만나셨다. 니고데모는 유대 종교의 중심적인
인물이고 율법 안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이다.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의 모범이고
표본이 되는 사람이다. 사람들이 볼 때는 그 사람만큼만 되면 성공한 것이다. 율
법을 지켜서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누구라도 하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
은 그 사람을 보고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거듭나
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하시고 영생에 관해 제시하셨다. 율법
으로 말미암아 만들어진 것과 대조되는 한 생명을 내놓은 것이다. 사람들이 만들
어 놓은 포도주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새로운 포도주를 주신 것처럼 사람들의 힘
으로 만들어 놓은 인격에 대해서 다른 인격, 영생하는 인격을 내놓으신 것이다.
그 인격은 십자가에 죽고 다시 난 인격이었다. 전적으로 대조되는 것이다.
이것을 구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종교와 율법과 도덕으로 세련되어 점잖
고 훌륭하고 선하고 의로운 사람과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사람이 잘 구별이 되
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혼란을 빚게 되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그리
스도 안에서 다시 난 사람이 세상 사람보다 못하다고 생각해서 혼란을 가져오기
도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낳은 사람은 적어도 세상사람들보다는 나아야 되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누가 더 낫고, 누가 더 못한가’ 하는 문제가 아니다. 생명이 다
른 문제인 것이다. 하나는 율법과 종교와 사람의 노력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고,
하나는 십자가에 죽고 다시 얻은 생명이다. 하나님이 다시 주신 생명인 것이다.
생명 자체가 다른 것이다.
이스마엘과 이삭을 비교해 보자. 이스마엘이 나쁜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더 합법적이고 더 일찍 낳았고 부족한 것이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왜 이삭으로
말미암지 않으면 아브라함의 후사가 될 수 없다고 하시는가? 생명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하나는 아브라함이 노력해서 만들어 놓은 아들이고, 하나는 아브라함이
끝난 후에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아들이다. 하나는 율법의 결과였고 하나는 은
혜의 결과인 것이다
우리가 세상에 산다면 이 문제는 별 의미가 없을 것이고, 이거나 저거나 마찬
가지 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가 되고, 교회가 되려면 전혀 다른 것이다.
율법으로 낳은 자는 만나면 서로 싸우게 되므로 교회가 되지 않는다. 은혜로 낳
은 자라야 서로 하나가 되는 것이다. ‘하나가 되는 생명인가, 아니면 분열하는 생
명인가 하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다른 것은 없다. 누가 더 도덕성이 높은가, 누
가 더 점잖은가, 누가 더 옳고, 누가 그른가 하는 문제가 아니다. 하나는 합해지
는 생명이고 하나는 분열되는 생명인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삭으로 낳아야만 후사가 된다고 말씀하셨다.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도 같은 것이다. “당신은 참 훌륭한 사람입니다. 세상
에서는 정말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소용이 없는 사람
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되려면 내가 장대에 높이 달려서 죽은 후에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어야 됩니다.” 하셨던 것이다. 죽고 난 후에 죽은 그 사람 안으로, 십
자가에 매달린 사람 안으로, 끝난 사람 안으로 이끌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만이
교회가 될 수 있다. 이 생명만이 하나가 될 수 있는 생명이다. 율법적이고 도덕적
이고 종교적인 세계에서 생산되는 생명에 대해서 십자가에 죽고 다시 난 생명,
거듭난 생명을 제시하셨던 것이다.
어떻게 우리가 거듭나는 것인가? 사람들은 ‘침례를 받아야 거듭난다.’고 생각하
기도 하고 ‘성령 세례를 받아야 거듭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 ‘물은 침례로’, ‘성령
은 성령 세례로’ 해석하는 것이다. 만일 그렇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면
니고데모가 그렇게 하지 않았겠는가? 그렇게 해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면 금방
옷 벗고 물에 들어가면 되는 것 아닌가? 니고데모는 그것을 할 수 없어서 돌아갔
던 것이 아니다. 또한, 요즘 어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기도해서 방언 받고 성
령 세례를 받는다면 니고데모가 왜 그 길을 떠나서 가겠는가?
니고데모는 예수님께서 그 다음에 제시하신 말씀 때문에 돌아간 것이다. “모세
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처럼 인자도 들려야 하겠다. 인자가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다.” 하시니 그는 돌아서 버린 것이다. 이끌어진 그 생명이 곧 영생
하는 생명이기 때문에 니고데모는 지금까지 자기가 성공해 온 길을 버리고, 끝내
고 다시 시작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예수의 주위를 위성처럼 평생 빙빙 돌다
가 끝난 것이다. 결코 그가 침례를 받지 못했거나 방언을 하지 못해서 돌아간 것
이 아니다.
영원한 생명, 영생은 무엇인가? 죽은 후에 다시 얻은 생명이다. 십자가에서 끝
나고 다시 얻은 생명인 것이다. ‘영생(永生)’은 영원히 죽지 않고 산다는 말이 아
니다. 생명의 성질이 다른 것이다. 니고데모의 생명의 성질과 예수의 생명의 성질
은 다른 것이다. 결국은 다른 생명의 성질 안으로 이끌겠다는 의미였던 것이다.
다른 생명이 무엇인가? 물고기의 생명과 날짐승의 생명이 다른 것처럼 다른 것이
다. 물고기는 아무리 큰 고기라도 공중을 날 수 없고, 새 중의 왕이라는 독수리는
물 속에 들어갈 수 없다. 생명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듭나지 아니하
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하셨던 것이다.
이것은 행위의 문제가 아니고 생명의 문제이다. ‘선한가, 악한가?’ 하는 문제도
아니고, ‘예수를 믿고 얼마나 착해졌는가?’ 하는 문제도 아니다. 이것은 생명의 문
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 이후의 생명, 부활 생명만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다음에 예수님께서 가신 곳은 사마리아였다. 니고데모를 만난 곳은 예루살렘이
었다. 예루살렘은 유대의 정치와 종교와 문화의 중심지였다. 정통적인 자리인 것
이다. 거기서 예수님은 니고데모를 만났던 것이다. 유대 땅, 예루살렘, 종교의 성
지, 모든 것이 정상적인 곳이다. 정통적인 세계 속에서 대표자가 되는 사람은 니
고데모였다. 그러나 그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조헤’라는 영
원한 생명이 없었던 것이다.
이제 사마리아에 가셨는데 사마리아는 예루살렘과 정 반대되는 곳이다. 유대
사람들이 멸시하는 곳, 이단으로 취급하는 곳이다. 순수 혈통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유대 사람들이 상종조차 하지 않는 곳이었고, 멸시받는 사람들이 살고 있
는 곳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 중에서도 대표자를 만난 것이다. 그
대표자는 누구인가? 다섯 남편이 있었지만 지금 있는 사람도 자기 남편이 아닌
그 여자였다. 이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의 대표자인 것이다. 어떻게 이 여자가 사
마리아 사람의 대표자라고 할 수 있는가? 사마리아 사람은 혼혈종이기 때문에 혼
혈종을 대표하는 사람, 다섯 남편이 있었지만 지금 있는 것도 자기 남편이 아닌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 여자는 표면적으로 남편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 여자를 만났을 때
“남편을 데려 오라.” 하시니 “남편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여자는 남편이
없는 사람이 아니고, 궁극적으로 자기가 섬길 자가 없었고, 예배할 곳이 없는 사
람이었다. 그래서 이 여자는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라 하였는데 당신
들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어디서 예배해야 됩니까?”라고 물
었던 것이다.
이 질문은 궁극적인 문제이다. 왜 이것이 궁극적인 문제가 되는가? 사람은 하
나님을 섬기도록 만들어졌다. 하나님을 섬겨야 비로소 만족하도록 지어졌다. 하나
님을 섬겨야 비로소 영광스러워지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마이크는 확성을 하는
데 영광이 있고, 자동차는 달려가는 데 영광이 있듯이,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는
데 영광이 있도록 만들어진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을 합당하게 섬
기지 못하면 인생의 만족이 없는 것이다.
성경에서 대제사장은 이스라엘 가운데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존귀하고 영광스
러운 사람으로 표현되었다. 대제사장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가
장 영광스러운 의복을 입는다. 백성을 대표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기 때문
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이렇게 아름답고 영광스럽다는 것을 옷으로 표현
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섬길 때 그렇게 아름다워진다는 뜻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아름답다. ‘사랑을 하면 예뻐진다.’는 말이 있듯이 여
자는 남자를 사랑할 때 예뻐진다. 아무리 못생긴 여자라도 사랑이 충만하면 예뻐
지는 것이다. 여자는 섬기는 데서 예뻐지는 것이다. 이것이 사람의 운명이다. 여
자의 운명이고 동시에 사람의 운명인 것이다. 정말로 섬기는 사람은 아름답다. 그
러므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는 것은 우리의 행복이다.
이 여자는 어디서 하나님을 섬겨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어느 남편을 섬겨야
할지 몰라서 다섯 남편이 있었던 것이고, 어떤 하나님을 어디서 섬겨야 될지를
몰라서 지금 방황하고 있는 것이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이 산에서도 말고 저
산에서도 말고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다.”라고 하셨다. ‘이 산’은
‘그리심 산’, 즉 사마리아 사람들의 종교를 의미하고, ‘저 산’은 ‘예루살렘’, 즉 유
대 종교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사마리아 사람들의 종교 안에서도 예배하지 말고
유대 종교 안에서도 예배하지 말라는 것이다. 어떤 종교적인 방법 안에서 하나님
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하셨다. 종교적인 의식으로나 율법
으로나 어떤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아들로 아버지를
섬긴다는 것이다. 아들일 때만 아버지를 영화롭게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아들이
필요한 분이다. 우리는 돈도 필요하고 집도 필요하고 여러 가지가 필요하지만 하
나님은 오직 아들만 필요한 분이다. 당신 자신이 영이시기 때문에 아들만 필요한
분이다. 당신을 표현할 수 있는 형상이 필요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가장
기쁘게 하는 방법은 아들이 되는 것이다. 아들만 되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온다,”는 말은 “아들만 되면 됩니다. 사마리아 종
교나 유대 종교가 아들이면 됩니다. 아들로 예배할 때가 옵니다. 바로 이 때입니
다.’라는 의미이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영과 실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하셨다. 영은 형상이 없고 모양이 없다. 따라서 ‘영으로 예배
한다.’는 것은 ‘어떤 모양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진
리’는 ‘있을 것만 있고 없을 것은 없는 것’이다. 사실 그대로 있는 것이 진리이다.
그러므로 영과 실재로,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는 말은, 정성을 들여서 목욕재계하
고 예배를 드린다는 뜻이 아니다. 꾸며진 것,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 헛것이
없이 영원히 있을 것만 있는 것으로 섬긴다는 뜻이다. 아버지께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실재로 예배하게 된다. 영과 실재는 곧 아들이다.
여기서 이 여자의 눈이 떠지게 되었고 이 여자의 인생에 빛이 들어오게 되었
다. 어떤 남편을 섬겨야 될지 몰라서 방황했던 여자이고, 어떤 하나님을 어떤 방
법으로 어디서 섬겨야 할지를 몰라서 방황했던 이 여자에게, “이것저것 다 소용
없고 아들이면 된다.”는 말이 들려 왔다. 사마리아 여자가 무슨 수로 유대 성전에
들어가서 예배를 하겠는가? 아무리 하고 싶다 할지라도 받아주지 않기 때문에 들
어갈 수 없는 것이다. 또한 니고데모같이 유대 종교에 속한 사람이 무슨 수로 사
마리아 사람들의 성전에 들어가서 예배를 하겠는가? 죽으면 죽었지 못할 일이다.
예수 믿는 기독교인들이 불교 법당에 가서 절을 하겠는가, 불교의 법당에서 절을
하던 사람들이 예배당에 와서 예수를 찬양하겠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아들’이라는 이 말씀에 이 여자에게 빛이 들어오게 된 것이다. 그래서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내려가서 사람들에게 “나의 모든 것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봐라. 내 모든 것을 해결한 사람을 와 봐라. 이가 바로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였
던 것이다. 우리에게 이 모든 것을 보여 준다면 그가 바로 그리스도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자를 통해서 아들을 계시하셨다. 하나님은 아들을 찾고 있는 것이지
사마리아 종교를 찾고 있는 것도 아니고 유대 종교를 찾고 있는 것도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천주교에 가야 된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장로교에 가야 된
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침례교에 가야 된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불교에 가
야 된다.”고 말한다. 불교에 가는 사람은 “불교에 가야 극락에 갈 수 있다.”고 하
고, 예수 믿는 사람들은 “예수를 믿어야 천당에 갈 수 있다.”고 하고, 마호멧을
믿는 사람들은 “마호멧을 믿어야 천당에 갈 수 있다.”고 한다. 전부 그렇게 하고
있다. 서로 올 수도 없고 갈 수도 없다. 그렇다고 다 해 볼 수도 없는 것이다. 혹
시 실수할까 봐 ‘기독교도 좀 믿고, 천주교도 좀 믿고, 불교도 좀 믿어 놓으면 극
락도 낙제하지 않고, 천당도 낙제하지 않고 안전하겠지. 모두 적당히 믿다가 그때
가면 형편 봐서 택해야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종교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어느 종교든지 종교는 절대성을 가지고
있다. 절대로 다른 종교를 믿을 수 없게 되어 있는 것이 종교인 것이다. 사마리아
종교와 유대 종교는 도저히 같이 있을 수 없다. 유대 종교가 사마리아로 갈 수도
없고 사마리아 종교가 유대로 갈 수도 없다. 분명히 같은 아브라함의 자손인데
이렇게 갈라지고 말았다.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아들밖에 없다. 오늘날도 수많은 교파가 갈라져
있다. 이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장로교도 아니고 침례교도 아니다. 오직 아들인 것
이다. 한국에는 장로교인이 대부분이다. 믿지 않는 사람도 장로교가 제일 좋은 교
파인 줄로 알고 있다. 그런데 미국 장로교는 미국 기독교인의 십분의 일도 안 된
다. 침례교인이 오천만 명이라고 하는데 장로교인들은 오백만도 안 된다. 모르니
까 생각이 너무 틀린 것이다. “모르면 용감하다.”고 했는데 이것이 종교의 사정이
다. 서로가 자기만 옳다고 생각하고 남은 전부 이단이라고 정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여기서도 아니고 저기서도 아니고, 아
버지께 예배할 때가 온다.”는 것이다. 이 말씀이 아니면 모든 인류가 어떻게 구원
이 되겠는가? 모두 다 하나님이 창조한 사람이고,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하나
님을 섬겨야 할 사람들인데 길이 막혀서 어디로 갈지 모르게 된 것이다.
이런 세계 속에 들어오시니 예수는 아들로 드러나게 되었다. 아들이므로 유대
종교에 가나 사마리아 종교에 가나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유대 종교
를 가진 사람은 사마리아를 통행할 수 없다. 비켜서 멀리 피해 가야 된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마리아를 피해 갈 이유가 없었으므로 사마리아 한가운데를 정통으로
통과해서 갈릴리로 가셨다. 우리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사마리아를 피해
가는 것이 아니라 한가운데로 통행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종교는 아들과 아무런
상관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이 여자를 만남으로써 아들로 예배한다는 것을 계시하셨다. 참 봉사는 무엇인
가? 참 예배는 무엇인가? 아들이다. 아들만이 아버지께 예배가 되는 것이다. ‘예
배’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만족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누구에게 만족하
셨는가? 어떤 방법을 보고 만족하신 것도 아니고, “네가 그렇게 했으니 내가 만
족하다.” 하신 것도 아니다. 어떤 인격을 보고 만족하다 하신 것이다. 그래서 예
수님을 보시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희 말을
들으라.” 하신 것이다. 구약 시대도 마찬가지다. 어떤 방법을 보고 하나님이 만족
하신 것이 아니다. 양을 보고, 송아지를 보고, 비둘기를 보고, 곱게 갈아진 가루를
보고 만족하게 여기셨던 것이다. 그것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인격을 상징하는 것
들이었다.
하나님을 만족하게 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 아들뿐이다. 우리는 이것을 명심해
야 한다. 이것을 모르면 헷갈려서 다른 데 현혹되어 버린다. 아들밖에는 하나님
을 만족케 할 것이 없다. 다른 것은 모두 부수적인 것이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
는 것들이다. 아들이 없으면 다른 것을 다 하더라도 허탕이다. 아무 것도 없어도
아들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꼭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자기를 표현할 수 있는 아들로서의 형상이 필요한 분이다. 하나님의 이
절대적 갈망을 채워 주는 사람은 누군가? 누가 하나님의 갈급한 목을 채워 줄 것
인가? 아들이 그 갈망을 채워 줄 것이다. 다른 방법으로는 채워 줄 수 없다.
그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요4:35).” 하셨다. 이것은 사마리아 여자를 만나고 나서 하신 말씀이다.
세상의 형편과 사람들의 상태를 보면 너무너무 막막해서 ‘넉 달이 지나야 한
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우리 자신의 상태를 보더라도 넉 달이 지나야 하기
때문에 ‘지금은 안 된다. 죽은 후에는 될지 몰라도 지금은 안 된다. 육신을 가지
고 있는 인간은 안 된다. 육신을 가지고 있는 인간은 넉 달이 지나야 된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모든 사람의 공통적인 생각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눈을 들어 밭
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다.” 하신 것이다.
우리는 왜 안 된다고 생각했던가? 율법과 종교 안에 있었기 때문에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율법의 기준과 종교의 기준에 맞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기도를
하더라도 100점이 되는 기도는 없고, 아무리 믿더라도 100점이 되는 믿음이 없으
며, 아무리 봉사를 해도 100점이 되는 봉사는 없다. 항상 좀 모자라는 것이다. 사
람들은 이것을 어떻게든 메워 보려고 여러 가지 방법을 쓰고 있다. 그런데 이것
은 방법으로 메워질 자리가 아니기 때문에 죽었다 깨도 메워지지 않는 것이다.
어떤 사람도 메운 사람이 없는 것이다. 우리가 그 세계에 있다면 우리 자신을 볼
때도 ‘넉 달이 지나야 될 사람’이고 남을 볼 때도 ‘넉 달이 지나야 될 사람’으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넉 달’은 40년이 될 수도 있고 400년이 될 수도 있다.
시간적인 넉달이 아니기 때문에 언제 끝날지 모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저주인
것이다. 닿고 싶어도 닿을 수 없는 저주인 것이다.
시지프스의 신화에서는 저주를 잘 표현하였다. 신이 저주를 내렸는데 큰 바위
를 굴려 올려 높은 산꼭대기에 올려놓으면 죄를 용서해 주겠다고 했다. 그렇지만
거의 다 올려놓았는데, 조금만 더 올라가면 되겠는데 마지막에 굴러 떨어져 버리
는 것이다. 다시 밑으로 내려가서 천신만고 끝에 밀어 올리지만 항상 마지막에서
떨어져 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저주의 상징이다. 우리가 그런 세계에 산다면 그것
자체가 저주이다. 닿아야 되는데 안 닿으니 저주인 것이다.
전기가 통하려면 전선이 연결되어야 한다. 전선이 떨어져 있을 때는 서로 붙지
않으므로 전기가 오지 않고, 가까이 대면 스파크가 일어나서 불이 번쩍번쩍한다.
그래도 서로 통하지 못한다. 딱 붙여야 전기가 통하게 되어 냉장고가 돌아가고
선풍기가 돌아가고 에어컨이 돌아가는 것이다. 떨어져 있으면 불만 번쩍거릴 뿐,
냉장고도 돌아가지 않고 물도 시원해지지 않으며 얼음도 만들어지지 않는다. 하
나님과 우리가 그런 관계라면 어떻게 되겠는가? 스파크만 일어나서 땅이 흔들리
고, 예배당이 흔들리고 난리가 나지만 통하지 않는다.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려
고 하는 것이다. 전기를 통하게 하려면 서로 꼭 붙을수록 좋기 때문에 전기공사
를 할 때 될 수 있는 대로 완전하게 붙이려고 노력한다. 제일 좋은 방법은 땜질
을 해 버리는 것이다. 다시 떨어질 수 없도록 땜질하는 방법이 제일 좋은 방법이
다. 하나님과 우리도 그렇게 되어야 한다. 떨어져서 스파크가 일어날 것이 아니고
땜질을 해야 한다.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하겠다.” 하는 세계에 절대로 머물러서도
안 되고, ‘조금만 더 하면 되겠지.’ 하는 어리석은 생각을 해서도 안 된다. 그 세
계 자체가 불가능한 세계라는 것을 알고 다른 세계로 옮겨야 된다. 그때 “아! 희
어져 추수하게 되었구나!” 하는 세계로 들어오게 된다.
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누구도 아들이 되지 못할 사람은 없다. 사람은 원래 만
들어지기를 하나님을 표현하도록 만들어졌다. 알고 보면 이것보다 쉬운 일이 없
는 것이다. 자동차는 굴러가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에 굴러가는 것보다 쉬운 일은
없다. 사람은 하나님을 표현하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보다
쉬운 일이 없게 돼 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종교와 율법과 행위가 들어와서 하
나님을 표현하지 못하게 막아 놓았다.
선교사업을 하려고 해도 힘이 있어야 한다. 젊어서 힘이 있고 목소리가 좋을
때는 일도 잘하고, 설교도 잘 할 수 있지만 늙어서 드러눕게 되면 아무 것도 못
하게 된다. 그러면 ‘하나님이 젊어서는 쓰시더니 늙어서는 안 쓰시는구나, 다 소
용없구나.’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사람을 잘못 만들어 놓은
것 아닌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은 젊으나 늙으나 마찬가지이다.
늙었기 때문에 안 되는 것도 아니고 젊어서 더 잘 되는 것도 아니다. 건강하다
해서 잘 되고 건강하지 못해서 안 되는 것도 아니다. 사람이라고 하는 이름만 가
지고 있으면 하나님을 표현할 수 있다. 숨만 코에 붙어 있으면 되는 것이다. 이렇
게 쉬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모든 인류에게 공평한 직분은 이것밖에 없다. 어떤 직분은 이 사람은 할 수 있
지만 저 사람은 할 수 없다. 어떤 일은 이 사람은 할 수 있지만 저 사람은 할 수
없다. 빌리그레함과 같은 일을 모든 사람이 다 할 수 있겠는가? 어떤 사람은 할
수 있지만 어떤 사람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불공평하지 않은가?
그런데 하나님을 표현하는 일은 절대적으로 공평하다. 병상에 누워 숨만 쉬고 있
더라도 하나님을 표현할 수 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어머니를 보고 이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어머니
는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어머니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마음을 나에게 표
현하셨다. 어머니가 어머니 마음을 표현하는 것처럼 쉬운 것이 세상에 어디 있겠
는가! 그것보다 쉬운 것은 없다. 그러나 자식이 아무리 잘못했다고 해도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마음을 포기한다는 것보다 어려운 것은 없다. 본성이기 때문에 포
기가 안 되는 것이다. 아무리 자식이 욕하고 때리고 죽이려 하더라도 어머니의
마음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실 때 하나님을 표현하도록 지으셨다. 이것은 본성적인
문제이며 본질적인 문제이다. 이 자리로 돌아오기만 한다면 누구든지 하나님을
표현할 수 있다. 넉 달이 지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지금 희어져 추수하게 되지
않았는가! ‘아이고, 좀 더 있어야 하나님을 표현할 수 있지 나는 아직 멀었다.’ 하
는 생각은 율법적인 것이다. 지금 당장 바꿔서 “하나님의 아들이다, 지금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다.” 하시는 말씀을 듣게 된다면 나는 나만큼 하나님을 표현할 수
있게 된다.
한 살짜리 아기는 한 살짜리만큼 말하고 두 살짜리 아기는 두 살짜리만큼 말
한다. 버지니아에서 온 다솔이가 뉴욕에 있는 형들과 즐겁게 이야기하며 아침을
먹었는데 언어 수준이나 지식 수준으로 본다면 대학교에 다니는 사람과 초등학생
의 단어 차이는 얼마나 크겠는가? 그러나 말하는데는 아무 지장이 없다. 밥을 먹
으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하는 것이다. 이처럼 사람은 다 자기만큼
하나님을 표현할 수 있다. 아기는 아기대로, 청년은 청년대로, 노인은 노인대로,
병든 사람은 병든 사람대로 다 하나님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희어져 추수하
게 돼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다 할 수 있는 것이다. 다른 것이 가려서 못하고
있는 것뿐이다. 그것만 없어진다면 모두 다 하나님 아들로 하나님을 표현할 수
있다. 그때 하나님은 만족하신다. 아주 간단한 문제인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표현될 때 우리 인생은 비로소 만족을 얻게 된다. 그때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제 요한복음 5장에 오면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다. 요한복음을 써 놓은 것을
보면 참으로 신기하다. 4장에서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다.” 하는 아들이 나타나
고, 그 다음 5장에서는 안식 문제가 나오는 것이다. 요한이 이것을 의미없이 써
놓은 것이 아니다. 신문 기자처럼 사건을 나열해서 기록해 놓은 것이 아니다. 영
안에서 그리스도를 경험한 것을 토대로 써 놓은 것이다. 그 경험을 써놓은 것이
다. 그러므로 당연히 안식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아들이 되면, 아들의 세계를 발견하게 되면 우리는 안식하게 된다. 창세기 1장
에서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하셨고, “식물이 나라.” 하셨고, “동물이 나라.”
하셨고, “해와 달과 별들이 나라.” 하셨다. 그리고 마지막에 사람을 지으시고 안
식하셨다. 그것은 아들이 나왔다는 뜻이다. 안식하신 것이다. 요한복음도 1장에서
부터 시작해서 니고데모를 만나시고 사마리아 여자를 만나시더니 마지막에 가서
는 “아들로 예배한다.” 하셨다. 그리고 5장에서는 안식에 관한 문제가 나왔다.
베데스다 연못가에는 38년 된 환자가 물이 동할 때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아무
도 그를 넣어 줄 사람이 없어서 병을 고치고 못하고 있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을
고쳐주셨는데 이 일이 큰 문제가 되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인데 왜 이런 일을
하느냐?” 하였던 것이다.
요한은 바로 이 문제 때문에 38년돈 병자를 말하였던 것이다. 물이 동하기를
기다리는 이 사람의 병이 나았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고 안식일 문제 때문
에 이 사건을 기록하게 된 것이다.
창세기 2장 2-3절에서는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
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安息)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
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생활을 할 때 안식일에는 만나를 주시지 않았다. 안식일
전에 이틀 분을 갖다 놓고 안식일 날은 일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것
이 출애굽기 20장에 오면 정식으로 십계명으로 선포된다. “제칠 일은 너의 하나
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
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출20:10),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제칠 일은 큰 안식일
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무릇 안식일에 일하는 자를 반드시 죽일지니라(출
31:15).”
안식일은 유대인들에게 중요한 날이다. 이스라엘은 수차에 걸쳐 외국의 침략을
받았는데 그들이 침략해 들어올 때마다 유대인들을 핍박하는 제일 좋은 방법은
안식일을 범하게 하는 것이었다.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않는 것, 우상
을 섬기지 않는 것, 간음하지 않는 것, 도적질하지 않는 것, 부모를 공경하는 것
은 마음 속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표가 나지 않는다. 내가 하나님의 이름을 망
령되이 일컫는지 남이 어떻게 알겠는가? 그런데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금방 표가
나 버린다. 그래서 외국 통치자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안식일 날 일을 시켰던
것이다. 일제 시대 때도 기독교인들을 주일날 노력 동원을 시키거나 행사에 참여
시키는 식으로의 핍박한 역사가 있었다. 유대인들도 그런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
들이 얼마나 안식일을 철저히 지켰던가? 수많은 사람들이 안식일을 위해 목숨을
버렸고, 죽을지언정 안식일을 범할 수 없다고 해서 수많은 순교자가 나오게 되었
다. 그들은 이렇게 안식일을 지켜 온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이기 때문에 안식일 문제가 나온 것이다. 병자가 38년 동안 아팠는
데 하루 더 아프다고 당장 죽는가? 안식일이 지난 다음에 병을 고쳐도 될 것이
고, 안식일 전에 고쳐도 될텐데 하필이면 안식일 날 병을 고치는가? 기왕이면 안
식일 전날 하든지 안식일이 끝난 다음에 하실 일이지 왜 안식일 날 해서 말썽이
나게 하시는가?
마태복음 12장을 읽어 보면 예수님께서는 고의적으로 안식일을 범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갔는데 거기서 오른편 손 마른 자가 있다
고 하였다.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엿보
고 있는데 예수께서는 그것을 아시고 “한 가운데 일어서라.” 하셨다. 이것은 마치
휘발유 통을 들고 불 속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 어쩌다 잘못한 것이 아니라 일부
러 하신 것이다. 왜 그렇게 하셨는가? 유대인들의 그 안식일을 파괴하기 위해서
였다.
껍데기로 지키는 안식일, 날짜만 지키는 안식일은 유대인들이 철저하게 목숨을
걸고 지키지만 그들에게는 참 안식이 없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3장과 4장에서는
여호수아는 참 안식을 주지 못하였고, 너희가 불순종해서 아직 참 안식에 들어가
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안식할 때가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이다. 참 안식이라는 것
이 있다는 것이다. 날짜로 지키는 안식일이 아닌 참 안식일이 있다는 것이다. 여
기서 안식일주의자들, 안식일을 결사적으로 지키는 이 사람들에게 참 안식을 제
시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들 앞에서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 하셨다. 얼마나 건방진 말인가? 서른 살밖에 안된 청년이 수염이 긴 제사
장들과 거룩한 서기관들, 바리새인들 앞에서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을 상상해 보라.
얼마나 건방진 사람의 말이겠는가! 그들은 허파가 뒤집혔을 것이다. 그 말을 들
었을 때 온 몸의 피가 거꾸로 올라갔을 것이다. 요즘 아이들이 하는 말로 ‘뚜껑’
이 열렸을 것이다. 이것은 보통 지나가는 말로 하신 것이 아니다. “내 아버지가
일하는데 내가 왜 일을 못하느냐!” 결국 이 말은 예수님이 사형을 받게 된 죄명
의 하나가 되었다.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 친아버지라 하여 자
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는다고 한 것이다. 이 문제는 보통 문제가 아닌 것이
다.
금요일 해 질 때부터 토요일 해 질 때까지 일하지 말라는 것이 안식일에 관한
규례이다. 요즘에는 주일날 교회 가면서 “안식일을 지킨다.”고 하는데 전혀 모르
고 하는 말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주일날’은 안식일이 아니고 안식 후 첫날이다.
안식일은 금요일 해 질 때부터 토요일 해 질 때까지이다. 이 날은 아무 것도 못
하게 지키는 것이다. 그러나 수천 년 동안 지켜왔지만 이것은 참 안식이 아니고
단지 하나의 형상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제 예수께서 참 안식을 제시하셨다. 참 안식은 무엇인가? 모든 것이 이루어
져서 안식하는 것이다. 안식일은 ‘우리의 안식일’이 아니고 ‘여호와의 안식일’이다.
성경에는 “너희의 안식일을 지키라.” 하지 않고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거룩하게
지키라.” 하였다. 자기 일을 다 마치고 하나님이 안식하신 날이니 너희도 안식하
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안식하시니 너도 안식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것이다. 하나
님이 쉬는데 일하면 죽는다는 것이다. “일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일하면 죽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날짜를 지
키는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이 일하실 때 일하고 하나님이 쉬실 때 쉬라는 것이
다.
하나님은 왜 안식하셨는가? 지으신 모든 일이 지극히 만족했기 때문에 안식하
신 것이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더라도 내 마음에 딱 맞아야 잠을 자도 편하게
잘 수 있다. 열심히 일을 해 놓았는데 엉성하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잠이 오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지으시던 모든 일을 다 마치신 것은 하나님께서 볼 때
완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 하시고 안식 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 하신 이유는 ‘내가 보기에 심히
좋다고 만들어 놓았으니까 너희는 그것을 감사하게 누려야 한다. 잘못된 것이 있
는 것처럼 생각하여 고치려고 일을 하면 안 된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잘못해 놓
은 것처럼, 하나님이 뭔가 일을 덜 해 놓은 것처럼 생각하고 사람이 더하려고 하
면 안 된다는 뜻이다. 피카소의 그림을 보고 ‘저것은 코를 좀 더 뾰족하게 해 놓
았으면 좋을 텐데.’ 하거나, ‘코 색깔을 빨갛게 해 놓았으면 좋을 텐데.’라고 생각
하여 페인트칠을 해 놓는다면 그 그림은 완전히 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피카소가 어떻게 하겠는가? 진노하지 않겠는가? 자기 작품을 버려 놓았으니 칼이
있으면 죽이고 싶을 것이다. 우리가 안식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이 해 놓으신
일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것을 보고 사람이
“왜 이것은 이렇게 만들어 놓았는가? 왜 저것은 저렇게 해 놓았는가?” 하며 점을
찍어 놓으면 하나님이 그냥 두시겠는가?
이제 우리 인생을 다시 한 번 돌이켜 보자.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이것은
정말 없었으면 좋겠다. 왜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짐을 주실까? 하고 생각한 적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해 놓으신 일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도 옛날에 그런 생각을 했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몸이 건강하지 못했다. 젊
은 사람에게는 ‘한창 때’라는 것이 있는데 나는 그것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해서
‘한창 때’가 언제인지 모른다. “한창 때는 돌을 먹어도 소화가 된다.”고 하는데
나는 돌은 커녕 밥도 제대로 소화가 되지 않았다. 평생을 그렇게 살았다. 그래서
은연중에 ‘하나님은 왜 불공평하신가? 나한테는 왜 이렇게 하셨는가? 내가 일부
러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닌데 왜 나한테는 이런 악질(惡
疾)을 줘서 평생 동안 고생하게 하시는가?’ 하는 불만이 속에 있었다. 비록 날마
다 불평하지는 않았지만 내 안에서 만족이 되지 않았다. 그것이 늘 불만이었고
예수를 믿은 후에도 해답이 되지 않았다. 목회를 하고, 선교 단체에서 전도자로
봉사하면서도 해답이 안 되었던 것이다.
결국 나는 안식일을 지키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모르시는 것은 아
무 것도 없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든지 우리가 잘못해서 그렇게 되었든지 간에
하나님이 모르시는 가운데 되어진 일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런데 나에게는 그 일
이 확실하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것이 안식일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러
므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안식일을 범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어느 날 우리가 ‘아! 하나님이 내 인생에
베풀어 놓은 모든 것이 지극히 당연하구나. 이건 이래서 이렇게 되었고 저건 저
래서 저렇게 되었구나!’라고 깨달아지는 날이 돌아오면 내가 지금까지 하나님을
불순종하고 있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을 싫다 하고 거부하
고 있었던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문제이다. “내가 안식하니까 너
도 안식해라. 내가 쉬니까 너도 쉬어라. 내가 일하지 않으니까 너도 일하지 말
라.” 하나님은 사람에게 모든 것을 다 해 주셨다. 사람에게 꼭 알맞은 것을 해 주
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100% 감사한 줄 알고 살라는 것이다.
우리 형제들 가운데는 이런 형편 가운데에 있는 형제들도 있고 저런 형편 안
에 있는 형제들도 있다. 객관적으로 생각하면 좋은 형편이 있고 나쁜 형편도 있
다. 천차만별인 것이다. 그런데, 오랫동안 같이 살면서 지켜보니 ‘그 사람에게 배
열된 환경은 그 사람에게 아주 적합한 환경’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사람은
이 환경이 아니면 안 되고, 저 사람은 저 환경이 아니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므
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너무너무 기이하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왜 저렇게 되
었을까?’ 하거나 불공평한 것이 많은데, 같이 살면서 자세히 관찰해 보면 그 사람
은 꼭 그 환경에 있어야 변화 될 사람인 것이다.
나는 옛날에 4년 동안 어떤 사람들과 심하게 싸웠다. 그때 ‘나는 성질이 나쁜
사람도 아니고 못된 일 하는 사람도 아닌데 하필이면 이런 사람들을 만나서 이렇
게 고생을 하게 되는가?’라고 생각했었다. 4년 동안 풀리지 않는 의문이었다. 그
런데 뒤로 알게 된 것은 ‘사람을 만들려고 나를 그 자리에 두었구나. 내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기에는 그 자리밖에 없었구나.’ 라는 것이다. 내가 다른
것을 했더라면 밑창이 다 드러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나는 다른 사람과 적당
히 살 수 있고, 남이 싫어하는 말은 하지 않으면 되었고, 미운 사람은 보지 않으
면 되었고, 굳이 그렇게 싸우면서 살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성격이 모나
지도 않고 스스로 무난하고 원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며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여겼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을 만나니 내 속에서 모든 것이 다 드러나게 되었다.
모든 것이 다 드러났다. 나는 그 일을 통해서 내 속에 그런 것들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람은 어떤 것으로 포장되어 있을 뿐이지 속은 다 같은 것이
다. 그 뒤로 나 자신에 대해서도, 다른 사람을 볼 때도 차별 없이 볼 수 있게 되
었다. 겉으로 보기에 ‘이 사람은 착하고 저 사람은 악하다.’ 할 수 있지만 밑바탕
을 보면 다 같은 것임을 알게 되었다. 선악을 아는 지식으로 보지 않고 사람으로
볼 수 있는 눈이 생기게 되었다. 또한, 나 자신에 대해서도 판단을 중지하게 되었
다. 고린도후서 10장 12절에 “자기로서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서 자기를 비교하
니 지혜가 없도다.” 하였다. 자기 기준을 가지고 자기를 판단한다는 것도 지혜가
없는 짓이고, 자기 기준을 가지고 남을 판단하는 것도 지혜가 없는 짓이며, 객관
적인 어떤 기준을 가지고 남을 판단한다는 것도 지혜가 없는 짓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서로 판단할 수 없는 사람이다. 어떤 환경에 이르면 다 똑같기 때문이
다. 미국 사람들은 질서를 잘 지킨다고 하는데 교통체증에 걸리면 우리와 똑같다.
몇 시간씩 서서 기다리다 보면 새치기하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맨하탄에 가 보니
사람들이 줄을 서 있는데 모두 갈 지(之)자로 서 있었다. 미국 사람도 우리와 별
차이 없다. 길이 넓고 여유가 있을 때는 느긋하지만 급하면 다 같은 것이다. 급하
게 가야 할 일이 있는데 앞이 가로막혀 있으면 미국 사람이라고 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사람은 다 같은 것이다. 이것을 알고 나면 사람을 볼 때 편견이 없어지
게 된다. ‘이 사람은 이런 사람’, ‘저 사람은 저런 사람’ 하는 기준이 없어지는 것
이다. 사람은 다 같다. 그러므로 서로 허물을 가려주어야지 들춰내려고 해서는 안
된다. 다른 사람의 허물을 들춰내려고 한다면 그 사람도 역시 나의 허물을 들춰
내려 할 것이고, 내가 다른 사람의 눈에 있는 티를 끄집어내고 지적한다면 다른
사람도 내 눈에 있는 들보를 지적할 것이다. 판단을 받고 싶지 않다면 남을 판단
하지 않아야 한다. 예수님은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7:2).”
하셨다. 비판하는 사람은 자기도 다른 사람에게 비판받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
이다. 그런데도 스스로 비판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얼마나 우스
운 일인가? 사람은 다 같다. 이것을 알고 나면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옷만 다
르게 입었을 뿐이지 속은 다 같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여러분이 옷은 다르게
입었지만 몸은 다 같고 피는 다 같은 것처럼 모든 사람이 같은 것이다.
4년 동안 싸웠던 일로 인해 나는 이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 환경 가운데 나
를 집어넣으신 것은 정말로 하나님의 지혜였다. 그 일을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나를 그렇게 다루었던 사람들에게도 감사한다. 그들이 맷돌의 윗돌과 아랫돌이
되어 갈아주었기 때문에 나는 가루가 될 수 있었다. 절대로 헛일은 없다. 주님을
알고 주님의 목표를 알고 보니 내 인생에 배열된 모든 것은 하나도 헛된 것도
없고, 맹목적으로 된 것도 없으며 하나님이 모르시는 가운데 되어진 일이 아무
것도 없었다. 하나님께서 다 알고 계시는 일인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적절한 것을 주셨다. 그러므로 그 환경에서 그리스도
를 깨닫게 된다면 환경은 우리에게 복이 되는 것이다. 어떤 환경으로 인해 그리
스도를 알게 된다면 그 환경 때문에 그리스도를 아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그것이
나에게 복이 되는 것이다.
밀이 맷돌에 갈릴 때 밀은 이유를 모르고 억울하기만 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
님의 성전에 떡으로 들어갈 때 “아! 맷돌 때문에 내가 떡이 되었구나! 내 힘으로
떡이 될 수 없었는데 맷돌이 갈아주었구나!” 하며 맷돌에게 감사하게 되는 것이
다. 밀이 스스로 성전에 들어가겠는가? 맷돌에 갈렸으니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
서 하나님이 잡수시는 음식이 된 것이다. 밀이 무슨 수로 “하나님, 나 좀 잡숴 주
세요. 나 좀 먹어 주세요.” 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곱게 갈아진 가루밖에는 잡
수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나를 갈아주어야 나는 하나님의 양식, 하나님
의 만족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깨달을 때 여호와의 안식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40년 동안 방황하였다. 열 사흘이면 갈 수 있는
길을 왜 40년 간 방황해야만 했는가? 여호와의 안식에 참여할 수 없었기 때문이
다. 그들은 여호와의 안식에 참여하기 위해 40년을 방황하였던 것이다. 40년 동안
을 낮에는 구름기둥이, 밤에는 불기둥이 그들을 인도했던 것이다. 그들은 언제 구
름기둥, 불기둥이 뜰 지 몰랐다. 구름기둥이 한번 내려오면 하루가 될지 열흘이
될지 몇 시간이 될지 모르는 것이다. 언제든지 구름기둥이 뜨면 일어나고 불기둥
이 일어나면 일어나야만 되는 것이다. 시간은 정해져 있지 않았다. 자기 생각을
가지고 있다가는 가지 못하는 것이다.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들은
얼마나 답답했겠는가! 마음대로 놀지도 못하고, 쉬지도 못하고, 스케줄을 잡을 수
도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시간을 모르니 내가 시간을 정해 놓을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왜 이런 훈련을 시키고 있었는가? 하나님과 발을 맞추게 하려는 것
이었다. 하나님이 가시면 가고, 하나님이 오시면 오고, 하나님이 일어나시면 일어
나고, 하나님이 앉으시면 앉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셨다. 훈련이 잘 돼 있어서 하나님이 일어나시면 예수
님도 일어나시고, 하나님이 앉으시면 앉으시는 분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결국 광야에서 안식 훈련을 받은 것이다. 구름기둥을 따라
몇 번 하다 보면 며칠일지 몇 달일지 모르고, 결국은 자기를 포기하게 된다. 자기
스케줄을 포기하고 언제든지 구름기둥이 뜨면 가고, 앉으면 앉는 사람으로 변화
되게 된다.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은 첫째로 이 훈련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부르셨다. 그 때 하나님께서 “너는 몇
월 며칠까지 어디에 도착하고, 몇 월 며칠까지 어디로 가라.” 하시며 지도를 가르
쳐 주셨다면 얼마나 쉬웠겠는가! 그런데 성경을 읽어보면 그렇지 않다. “내가 네
게 지시할 곳으로 가라.” 하셨다. 언제 어디로 가라는 말이 없는 것이다. 아브라
함은 차라리 “예, 어디입니까? 그 길을 가르쳐 주옵소서. 지도를 가르쳐 주시면
제가 찾아가겠습니다.” 하고 싶었을 것이다. 예수께서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내가 가서 집을 예비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나 있는 곳에 영접하겠다.”
하시니 도마는 “주여, 그 길이 어딥니까?”라고 물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길을 묻지 않았다. 어디로 갈 것인지 몰랐지만 부르시는 대로 왔던 것이다. 이것
을 히브리서에서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다(히11:8).” 하였다. 어디를 갈지
모르고 오직 그 분만을 믿고 간 것이다. 길을 보고 가는 것이 아니고 그 분을 믿
고 간 것이다. 사람들은 어떤 교리를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분을 따라가
야 한다. 아브라함은 이 훈련을 받고 있었다. 이스마엘을 낳은 다음에 100살이 되
어서 이삭을 낳았던 것은 바로 이 안식 훈련이었던 것이다. 내 인생의 스케줄을
버리고 그 분의 스케줄을 따라야 이삭을 낳게 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대단히 어
렵고 답답한데 한번 포기하고 나면 이보다 더 쉬운 일은 없다. 이것보다 편하고
쉬운 일은 세상에 없다. 내 인생에 대해서 아무 것도 염려할 필요가 없고 다만
그 분이 원하시는 대로, 그 분이 움직이시는 대로 움직이면 되는 것이다. 그러므
로 아무 염려할 것이 없는 것이다.
형제들이 처음에 나를 따라 오면서 제일 답답한 문제가 이것이었다. 어떤 교리
를 가르치거나, 전도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면 쉬웠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도
저것도 아니고 어떤 스케줄에 따라 움직이면 좋겠는데 그것도 아니니 어떻게 해
야 좋을지 몰랐던 것이다. “무엇을 원한다.” 하든지, 맞으면 “맞다” 틀리면 “아니
다.” 하면 쉬웠을 텐데 ‘좋다.’는 말도 ‘아니다.’라는 말도 아니었고, “내일 간다.”
는 말도 아니고 “모래 간다.”는 말도 아니니 답답했던 것이다. 나는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나중에 형제들이 하는 말을 들으니 너무너무 답답했었다는 것이다. 나
도 형제들에게 지도를 그려 주면서 “이렇게 저렇게 하라.” 했다면 나도 편하고
형제들도 편할 텐데 왜 그렇게 하지 못했는가? 나는 나의 스케줄을 포기한 지 오
래 되었고, 내 스케줄이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나도 내일 어찌 될지 모르는
데 형제들에게 무슨 약속을 하겠는가? 아무 약속도 할 수 없었다. “네가 나를 따
라오면 무엇이 될 것이다.”라고 약속할 수 없었고, “나는 동쪽으로 가니까 이 길
로 오라.”고 할 수도 없었다. 나도 주님이 인도하시는 길을 따라서 어디로 갈지
모르기 때문이다.
선교단체에서 나온 후 나는 지금까지 누구에게 약속을 하지 않았다. 내가 어떻
게 약속을 하겠는가? 아무 약속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주인이 있는데 종이 자기
혼자 따로 약속을 해 놓으면 다음에 주인이 부르시면 어떻게 하겠는가? 주인 승
낙도 받지 않고 내가 사인을 해놓으면 매 맞을 일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일로 4
년 동안 호되게 당했기 때문에 내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내 스케줄이 없이 주님을 따랐을 때는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평탄하게 하셨다.
그런데, 내 스케줄이 생기니까 하나님이 매를 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이상한 일
이다. 다른 사람들은 다 그냥 두는 것 같았는데 나는 하나님이 용서를 하시지 않
는 것이었다. 고향을 떠나 신학교에 가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그렇게 합당
하게 인도하셨는지, 지금 생각해도 기가 막히게 인도하셨다. 그때 나는 내 계획이
전혀 없었다. 오라 하면 오고 가라 하면 갈 사람으로 그냥 그렇게 있었을 뿐이다.
아무 근심도 걱정도 없었다.
공부 잘 하는 학생이 신학교 기숙사에 같이 있었는데, 어머니가 권사인 감리교
집안에서 어려서부터 예수를 믿었고 장래가 촉망되는 학생이었다. 그런데 그는
불안병을 앓다가 결국 간경화로 죽고 말았다. 그가 하루는 나에게 “이 선생은 불
안하지 않습니까?” 하는 것이었다. 밤중에 누군가가 들어올 것 같아서 칼을 침대
밑에 두고 잘 정도로 불안해서 못 살겠다는 것이었다. 그 친구는 출세할 스케줄
을 가지고 있었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미국에 유학을 간다는 아주 야무진 계획
을 가지고 있었지만 불안해 하다가 결국은 병을 얻었던 것이다.
그때 나는 아무 계획이 없었기 때문에 불안할 이유가 없었다. 그 교단이 작았
기 때문에 신학생들은 모두 앞날을 암담하게 생각하고 불안해하면서 웅성거리는
데 나는 불안할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하나님이 나를 공연히 부르셨겠는가? 일이
있으니 부르셨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니 그 자리에서 아무 계획도 없었고 나 혼
자 편안했던 것이다. 그것이 결국 안식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상하게도 앞길을 염려하고 스케줄을 짜고 하나님께 기도하던 사람들
을 제쳐두고 나에게 교회로 나가라는 것이다. 그것도 서울 시내에 있는 교회인데
2학년에 막 올라갔을 때인데 나를 부르더니 “자네, 그 교회에 좀 가야 되겠네.”
하는 것이었다. 내가 아무 것도 안 하는데 길이 다 열려있었던 것이다.
그 교회에서 8년 간 있었는데, 거기서 나는 목회를 한답시고 계획을 갖게 되었
다. 교회를 정비하고, 이런 저런 계획을 세웠다. 그 교회에 가 보니 18년이나 된
교회였는데 교인 숫자는 한 80명밖에 안 되었고 여집사들만 있었다. 그래서 속으
로 면밀히 분석을 해 본 결과, ‘아, 이것이 잘못되었구나. 남자들이 있어야 일을
하는데 여자들만 있어서 일이 안 되는구나.’라고 알게 되었다. 남자 집사가 있었
지만 여자 집사들이 하도 드세니까 배기지 못하고 나가버렸던 것이다. ‘안 되겠
다.’ 싶어서 속으로 엉큼한 생각을 하고 계획을 세웠다. ‘남자 집사를 차근차근
만들어야겠다. 그래서 세력 균형을 이루어야겠다.’ 하고 유능한 젊은 청년들을 등
용시켜 집사를 만들기 시작했다. 남자 집사는 계속 추천해 올리고 여자 집사는
일부러 추천하지 않았다. 여자 집사가 7명이면 남자 집사도 7명이 되도록 균형이
맞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제직회의를 하니 여자들하고만 하는 것보다 훨씬 쉬웠
다. 그래서 ‘야, 이제 제대로 잘 돌아간다.’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용납하시지 않았다. “너 이놈, 뭐 하고 있는 것이냐?
야 이놈아, 네가 몰래 꿍심 부리고 있는 것을 내가 모르는 줄 아느냐?” 하시며
뒤통수를 치셨다. 나는 거기서 4년 동안 고생을 하면서 철저하게 깨달았다. ‘아!
하나님은 나를 그냥 두시지 않는구나! 내가 내 계획을 가지고 잔꾀를 부리면 하
나님이 절대로 그냥 두시지 않는구나!’
그 다음부터 내 스케줄이 없어지게 되었다. 스케쥴이 없어져 버리니까 하나님
이 전혀 때리지도 않고 치지도 않았다. 내가 잘못하는 것도 있지 않겠는가? 그런
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때리시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는 것은 바로
‘내 계획’이었던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한답시고 계획을 세웠으니 오죽 좋은 계획이었던가! 조직
을 짜서 움직여 간다면 교회가 얼마나 잘 되겠는가? 30대의 젊은 나이에 그런 생
각을 했었다. 정치성도 있고 판단력도 있고 장래를 내다보는 눈도 있었다. 나는
내가 잘 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다른 사람들도 나를 보고 “야, 저 사람 참 일 잘
한다.” 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다 잘 한다고 하는데 하나님은
뒤에서 보고 계시더니 “너 이놈, 네가 어디서 부름 받아서 왔는데 이제 딴 궁리
하고 있느냐?” 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4년 동안 매를 맞았는데 매를 맞으면서도
하나님이 때리는 줄 몰랐다. 그렇게 미련했다. 영리한 것 같은데 미련한 것이 인
생이다. 몇 대 맞으면 알아야 할 것 아닌가? 그런데 이것을 모르는 것이다.
결국 일은 커졌고 싸움이 벌어져서 교단 총회에서 투표를 하게 되었다. 투표를
하려면 동지들을 규합시켜 표를 모아야 하는데 한 사람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
래서 그 사람을 포기하고 있었는데 패기만만한 젊은 집사가 밤에 찾아와 상황을
묻더니 자기가 가보겠다는 것이었다. “사람을 만나서 한 번도 실패해 본 적이 없
다.” 하기에 갔다 오라고 했더니 서대문에서 중량교까지 먼 거리를 택시를 타고
갔다. 열 시쯤 되니 맥이 쭉 빠져서 죽을상이 되어 돌아왔다. “내가 사람을 만나
서 이렇게 실패한 것은 처음입니다.” 하며 실패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열 시
반쯤 돌아갔는데 가는 길에 독립문 횡단보도에서 자동차 사고로 다리가 부러졌
다. 다음날 새벽 일찍 그의 동생이 찾아와서 문을 두드리며 “어제 밤에 교회에서
돌아오다가 교통사고가 나서 입원했습니다.” 하였다.
그때 “쾅”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 이거 뭔가 잘못된 것이다. 뭐가 좀 이상하
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하여간 내가 잘못 가고 있다는 생각
이 들었다. 병원에 가 보니 생때같은 사람이 발에 깁스를 해서 누워 있었다. 넉
달 동안 누워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앞이 캄캄했다.
차이로 내가 이겼지만 이긴 것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실력자들이 나와서 설쳐
버리니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돈이 없고 그 사람들은 돈이 있기 때문에
투표는 하나마나 마찬가지가 되었고 멀쩡한 사람만 발이 부러져서 넉 달 동안 고
생하게 되었다.
그때 내 속에서는 힘이 꺾였다. ‘아! 뭔가 하나님이 막으시는 것 같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교단 싸움이어서 나 혼자 빠져 나올 방법이 없었다. 그 다
음부터는 끌려 다니기 시작했다. 그것이 더 괴로웠다. 내가 신념이 있을 때는 괜
찮았는데 끌려 다니니까 더 괴로운 것이었다. 2년 동안을 뼈가 깎이는 고통을 당
했다.
하나님은 나를 너무나 잘 알고 계셨다. 조금도, 한 치도 곁길로 가는 것을 용
납하지 않으셨다. 지금 생각하니 얼마나 감사하고 은혜인지 알 수 없다. 만일 그
길로 그냥 갔더라면 내가 무엇이 되었겠는가? 괴물이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매를 때려 다른 길로 오게 하신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세상에서는 ‘계획’이 필요하다. 세상일을 하려면 계획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다르다. 주님이 움직이시는 대로 가는 사람, 자기 때가 없는 사람
이어야 한다. 예수님이 그러하셨다. 예수님의 동생들은 “형님, 지금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명절이 돌아오면 예루살렘에 사람이 모일 텐데 나타
내기를 원하면서 숨어 있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이때 나가야 그래도 당신이
누군지 알아주지 시골에 숨어 있으면 당신이 그리스도인지 하나님 아들인지 선지
자인지 누가 알겠습니까?” 하였다. 그 때 예수님은 “너희의 때는 항상 있지만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않았다.” 하셨다. 너희는 늘 너희 때를 만드는 사람이지만 나는
내 때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 자신은 자기 때가 없었던 사람
이다.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일어나면 가고, 앉으면 앉고, 열흘 앉아 있으면 열흘
앉아 있고, 한 달 앉아 있으면 한 달 앉아 있는 분이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갖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쉽다. 너무너무 쉬워진다. 20
년 동안 아무 계획을 안 했으니까 나는 얼마나 편한가! 이 작은 머리로 계획을
하려면 너무나 복잡할 것이다. 그런데 아무 계획도 하지 않았는데 나에게 평강이
누려졌다. 결과적으로 가장 완전한 계획을 한 셈이다. 하나님 자신이 계획을 한
것이니 완전한 계획이 아닌가!
안식은 하나님이 행하신 대로 내가 행하는 것이다. 내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행하는 대로 따라가게 되지만 내 스케줄이 있으면 따를 수 없다. 종에게 자기 볼
일이 따로 있으면 주인의 명령을 따를 수 없는 것이다. 주인이 “뉴욕으로 가라.”
할지, “워싱턴으로 가라.” 할지, “토론토로 가라.” 할지 모르는데 종이 자기 혼자
갈 곳을 정해 놓고 ‘내일 로키 산맥에 가서 스키 좀 타고 와야지.’ 하는 식으로
계획하고 앉았으면 되겠는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주인이 “토론토에 갔다 오너
라.” 하면 다 헛일이 돼 버리는 것이다. 자기 계획이 없는 사람 같으면 “예” 하고
갈 수 있지만 밤새도록 계획 해 놓았다면 주인을 원망하게 될 것이다. ‘야, 저 주
인은 내 속을 몰라주는구나. 매정한 사람이야. 정말 얄미운 사람이야.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야. 주인이면 다냐? 나는 전생에 무엇을 잘못해서 종이 됐나?‘ 이렇
게 별 생각을 다 하게 된다. 그렇지만 주인은 자기가 당연히 시킬 사람이니까 아
무렇지도 않고 아무 생각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원망을 하는 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밤새도록 고민하며 우리 자신을 위한 계획을 세우지 않아야 한다.
그러면 주인에게 원망할 일이 없어져 버린다.
이제 우리에게 참 안식이 남아 있다. 참 안식은 어디서 오는가? 예수 안에서
참 안식이 왔다. 그리스도 안에서, 아들 안에서 참 안식이 왔다. 아들이 계시되고,
아들이 오니까 추수할 때가 되었고, 추수를 하니 안식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행하여 놓으신 일을 추수해 보면 안식이 되는 것이다. 나는 추수만 해도 되는 것
이다. 추수만 해도 바쁘다. 하나님이 일을 다 하셨다. 나는 추수만 해도 되는 것
이다.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
지가 드러난 후에 그 위에서 걸어다니면 쉽지만, 물 속에 있는 것을 끄집어내려
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하나님이 갈라놓으셨으니 나는 육지로 걸어다니기만
하면 쉬운 것이다.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셨으니 우리는 갖다 먹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상추를 만들어서 먹으려고 하면
얼마나 어렵겠는가?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것을 그대로 먹으면 되는 것이다.
얼마나 쉬운가!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 또 그 광명으로 하여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 하셨으니 우리는 저녁이 자고, 아침이면 일어나니
얼마나 편하고 좋은가! 우리가 사시와 징조와 연한을 만들려고 한다면 어떻게 되
겠는가?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그대로 우리가 살면 너무너무 편하고 좋은 것이
다. 하나님이 주신 그대로 믿음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 하나도 버릴 것이 없
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내 인생의 목표를 그리스도에 두고 모든 순서를 배열하셨다. 그
러므로 내가 그리스도에 목표를 두고 본다면 하나님이 나를 어디로 인도하시는지
알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내 목표가 안 되면 하나님이 무엇을 하고 계시는
지 모를 수밖에 없다. 평생 모르는 것이다. 그러니 끌려가면서도 답답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끌려가는 개를 보면 모가지를 계속 당기며 버티려고 한다. 어디로
가는지를 모르지만 주인이 이끄는 대로 가면 좋을 텐데 목이 아프도록 당기고 있
는 것이다.
하나님이 준비해 놓으신 것, 하나님이 해 놓으신 것, 하나님이 다 이루어 놓으
신 것을 발견하는 것이 지혜이다. 산을 만들어 놓은 것을 발견하는 것이고, 바다
를 만들어 놓으신 것을 발견하는 것이고, 바위를 만들어 놓은 것을 발견하는 것
이다.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것을 발견하니까 감탄이 나오고 하나님이 해 놓으신
일을 깨닫게 되니까 우리가 감탄이 나온다. 하나님이 해 놓으신 일을 깨닫지 못
하면 우리는 아무것도 감사할 일이 없다. 그러면 우리는 암담해지는 것이다.
창세기 1장을 읽으면서 ‘이거 새 것도 아니고 다 있는 일이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땅도 있고 식물도 있고 물고기도 있고 날짐승도 있고 땅에 돌아다니는
짐승도 있고, 다 있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미 다 있는데 하나님이 “이것을
내가 만들었다.” 하고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이다. 하나님이 다 만들어 놓았다.
전에 우리는 이것들을 무심코 보았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것들을 내가 만들었
다.” 하신 것이다.
다 보게 된다. 아버지가 해 놓으신 일을 보게 되는 것이다. 아버지가 해 놓으신
것은 다 좋은 것이다. 하나님이 아버지시라면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주시겠는가? 우리를 위해 가장 좋은 것을 예비해 놓았을 것이다. 아들에게 나쁜
것을 예비할 아버지는 절대로 없다. 도둑질을 해서라도 좋은 옷을 입히고 싶은
것이 아버지 마음이다. 자기는 형무소에 가더라도 아들만은 좋은 것을 먹이고 싶
은 것이 부모의 마음이다. 그런데 “하물며 너희가 악할지라도 그리 하거든 하늘
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우리를 위하여 좋은 것이
예비되어 있다.
그런데 그것이 보이지 않아서 문제였던 것이다. 왜 그것이 안 보이는가? 그 이
유는 하나님 말씀이 없어서이다. 하나님 말씀이 우리에게 오면 그것이 보이게 되
고 그러면 우리는 쉬워지는 것이다. 안 보이는 것을 믿으려고 하면 너무너무 어
려운데 보는 것을 믿으니까 너무너무 쉬워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이 필요하다. 그 말씀을 들을
때 무엇인가를 깨달아야 한다. 그러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얻을 수 있다.
깨닫지 못한 사람은 아무런 결실을 얻지 못한다.
젊은 학생들을 만나 보면서 종교가 사람들을 잘못 인도한 것뿐만 아니라 그
의식 구조를 잘못 만들어 놓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깨닫는 머리가 없이 무조건
믿으라고만 가르쳐 놓았다. 이것이 왜 그런가 하고 깨달으려고 하면 “그것은 잘
못 되었다. 하나님 해 놓은 대로 그냥 믿어야지.” 이렇게 되어 버렸다. 그래서 젊
은 학생들도 하나님 말씀을 깨달으려는 생각을 아예 하지 않는다. “아, 이 젊은
사람아, 지금부터 벌써 머리가 그렇게 굳어 있으면 네 인생이 뭐가 되겠냐?”고
한 적이 있다. 하도 답답해서 그렇게 말한 것이다. 이것이 무엇인가 하고 생각하
려고 하지도 않는다. 깨달음이 없게 만들어 놓았다. 이것이 비극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외워야 되는 말이 아니고 깨달아야 되는 말씀이다. “30배 60
배 100배가 됐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시자 그것이 무슨 뜻이냐고 제자들이 물었
다. 그랬더니 “하나님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이 필요하다. 내가 여러분에게 말씀한 테이프를 들
어보면 뭔가를 깨닫고 말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여러분도 그것만 깨닫고
그것만 알게 되면, ‘아, 이것은 깨닫고 하는 말이니까 깨달아야 하겠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말씀을 들을 때마다 늘 새로운 것이 들
리게 될 것이다.
우리 교회의 어떤 형제가 말씀을 들을 때 하도 잠을 자서 “목사님 말씀을 듣
는데 왜 이렇게 졸립니까? 나는 왜 교회만 오면 졸립니까?” 하고 나에게 물었다.
그래서 “너는 머리가 너무 좋아서 그래.” 하였다. 머리가 좋으니까 한국에서 공부
하는 식으로 말씀을 대충 훑어서 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들으면 늘
같은 말이다. 늘 흙 이야기고 진주 이야기고 밭에 묻힌 보화 이야기이다. 20년 들
어 봤자 늘 똑같은 이야기이니 잠을 잘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다. 흙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늘 깨달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것을 깨달아야 하는
데 깨달을 생각은 하지 않고 ‘흙, 아, 흙 알지, 사람은 흙이야.’ 이러고 끝나 버리
니까 잠이 올 수밖에 없다. 그래서 “너 테이프 한 번도 안 듣지.” 하니까 안 들었
다는 것이다. 20년 동안 테이프를 따로 들은 역사가 없다는 것이다. 다 아니까 들
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교회에 오면 졸리는 것이다. 그래서 “말씀을 들
어 봐라. 들어서 그것을 깨달아 봐라.” 하였다. 깨달은 사람은 테이프 하나를 열
번 더 들었다는 사람도 있고 스무 번 들었다는 사람도 있다. 들을 때마다 다른
것이 자기에게 발견이 되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뭔가를 깨닫기 시작하면 보면 볼
때마다 뭐가 늘 새로운 것이 보이게 되고 들으면 들을 때마다 늘 새로운 것이
들리게 될 것이다. 금광을 찾아가듯이 주의 말씀을 찾아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감추어져 있다. 공개된 것이면서도 감추어진 것이다. 그러니
깨닫는 사람에게 열려져 있는 것이지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는 손에 쥐어 주어도
모르는 것이다.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고 진주 장사 같은 것이다. 그래서 발견하
는 사람만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이 행해 놓으신 일을 발견한다면 누구라도 안식하지 못할 사람이 없다.
하나님이 행해 놓으신 일이 얼마나 완전하겠는가? 그것만 깨닫는다면 누구라도
믿음 없을 사람이 없고 평안을 얻지 못할 사람이 없다. 그것을 모르니까 불안한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무엇을 해 놓았는지를 모르니까 불안한 것이다. 어
찌 되려는지, 하나님이 나를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무엇을 좀 생각해 주는지 생각
해 주지 않는지 불안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알기만 알면 안심이 된다.
나는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하신 일을 발견하고 나서 내 인생에 대한 염려를
놓게 되었다. ‘나는 왜 이렇게 안 되는가, 내 내면적인 문제는 왜 갈등이 생기며
왜 일은 성과가 안 나나?’ 하는 문제가 많이 있었다. 예전에 몸담고 있던 선교단
체에서는 일에 대해서 상당히 스트레스를 받았다. 실적을 올려야 하고 위에서 압
박이 오니까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그래서 능력 있는 사람과 능력 없는 사람의
차이가 많이 생긴다. 그러니 스트레스를 받았고 갈등을 느꼈다. 기도 해 봐도 안
되고 힘써 봐도 안 되고, 그래서 열심히 일하는 것으로 그 갈등을 덮어보려고 일
했다. 그런데 집에 돌아오면 도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하나님이 내 인생에 관여해서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보여지고 난
뒤에는 그것이 없어져 버렸다. ‘아, 내가 염려하고 내가 할 일이 아니로구나. 그
분이 이미 하고 있구나. 다 일을 하고 있구나. 지금까지 빈틈없이 일을 해 왔구
나. 앞으로도 빈틈없이 일하시겠구나.’ 그것이 알아지니까 내 문제가 다 없어져
버렸다. 그래서 나는 안식하게 되었다. 그 후로는 내 문제에 대해서는 뒤돌아 본
일도 없고 생각해 본 일도 없다. 내가 잘 되어 가고 있느냐 못 되어 가고 있느냐
하는 것을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다. 단지 앞에 계신 그 분을 향해서, 푯대를 향
해서, 그 부러운 인격, 그 영광스러운 인격을 향해서 그것을 찾기 위해 달려갔을
뿐이다. 내 자신과 교회에 대해서 염려하거나 돌아본 적이 전혀 없다.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움만 보고 달려간다면 교회는 저절로 되는 것이지 교회를
어떻게 하면 되냐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모두 주님을 사모한다면 교회는 저
절로 되는 것이다. 서로 하나될 방법을 찾다 보면 갈라지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모두 연합하자.” 그러면 분열되는 것이다. 예전에 에큐메니칼 운동, 전 세계 교
회 운동을 하자고 했는데 그랬더니 두 쪽으로 갈라졌다. 사람의 생각으로 연합하
자 하면 그것이 분열의 시초이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다. 주님만 사모하면 되
는 것이다. 우리의 영원한 푯대는 그리스도뿐이니까 그리스도밖에 사모할 것이
없으면 우리는 서로 형제가 필요해진다. 그 형제와 내가 같이 살아야 된다. 싫어
도 같이 살아야 하고, 마음이 좀 안 맞아도 같이 살아야 하고, 보기 싫어도 같이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가 목표가 되기 때문에 같이 살아야 한다.
하나님이 해 놓으신 일을 발견할 때 우리는 안식에 이르게 된다. “눈을 들어
밭을 보아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지 않느냐?” 그것이 보여지니까 안식이 되고,
‘아,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온다.’ 알아지니까 안식이 된다. 하나님이 해 놓으신
것을 알기만 하면 우리는 안식을 하게 된다. 그것이 참으로 안식일을 지키는 것
이다.
예수님은 육신적으로 볼 때는 상당히 고달픈 인생, 여러 가지 환난과 핍박을
당하는 삶을 살아갔다. 그렇지만 그 속에는 깊은 안식이 있었다. 요동하지 않는
지성소가 있었다.
성막의 지성소는 가장 깊은 곳에 있는데 절대로 요동치 않는 곳이다. 밖의 온
도가 덥든지 춥든지 지성소 안의 온도는 같고, 밖이 밝든지 어둡든지 지성소 안
은 같고, 바람이 불든지 불지 않든지 지성소 안은 같다. 그것이 지성소이다. 우리
가 하나님의 안식에 이른다는 말은 우리 영도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바깥에서
요동을 하고 바람이 불어도, 환경이 변화가 되고 문제가 되어도 고요한 지성소가
있다. 지성소가 생기니까 사람이 안정이 된다. 그러므로 밖은 좀 움직여도 상관이
없다. 바람은 좀 불다가 자는 것이고 구름은 끼었다가 개는 것이고 비는 오다가
개는 것이다. 계속 비가 오는 것도 아니고 계속 바람 부는 것도 아니다. 누가 나
에게 욕을 하더라도 자기 입이 아프니까 계속 할 수는 없다. 언젠가 하다가 자기
가 피곤하면 안 한다. 나를 미워하던 사람도 계속 미워하다 보면 괴롭기 때문에
자기가 지쳐서 못한다. 나만 안정되어 있으면 문제는 저절로 다 해결된다. 안식만
있으면 세상은 다 조용해진다. 나를 괴롭게 하던 사람, 미워하던 사람, 욕하던 사
람, 좋아하던 사람, 모두 내 안식만 있으면 다 잠잠해진다. 이것은 얼마나 신기한지.
그래서 하나님이 지성소 안에 계신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지 모른다. 만일 하
나님이 밖의 환경에 의해서 요동한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면 온 우주
가 다 요동하게 된다. 하나님이 항상 고요하게 계시는 분이니까 우리가 좀 죄를
지어도 용서받을 길이 있고, 우리가 좀 싸워도 다시 풀릴 길이 있고, 우리가 좀
잘못해도 건져질 길이 있다. 그렇지 않고 내가 좀 비끌어진다고 해서 그 분도 같
이 비끌어지고, 내가 좀 화난다고 해서 그 분도 화가 나고, 내가 좀 싸운다고 해
서 그 분도 싸워 버리면 뒤로 누가 해결할 것인가? 아무도 해결할 사람이 없다.
우리가 백날 난리를 쳐도 그 분은 고요하게 계신다. 그래서 바람이 불다가도 도
로 자고 비가 오다가도 그치고 구름이 있다가도 도로 개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쪽빛 하늘이 나오는 것이다. 그 분이 지성소에 계시다는 것은 우리의 축복이다.
하나님이 요동치 않는다는 것은 우리의 축복이다.
내 자신 속에 요동치 않는 영이 있고, 요동치 않는 지성소가 있다는 것은 내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축복이 되는 것이다. 어떤 가정에 가족들이 모두 다
요동을 한다고 생각해 보자.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
고 싸우기도 하는데, 그 집안에 지성소가 있는 사람이 한 사람만 있다면 그 지성
소 있는 사람 앞에 오면 다 고요해지는 것이다. 이 지성소가 없는 집은 어떻게
되는가? 온 집안이 다 덜렁거리고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지성소에 계시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지 모른다. 그리고
그 지성소가 또 우리에게 옮겨져 와서 우리 속에도 지성소를 주신다는 것이 얼마
나 큰 축복인지 모른다. 이 지성소, 이것이 바로 안식이다. 참된 안식이다. 이 참
된 안식이신 그리스도가 오신 것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그 말씀이 하나님과 같이 계셨고 그 말씀이 곧 하나
님이시다.” 이 말씀이 육체가 되어 우리 가운데 온 결과가 안식이다. 성육신의 결
과가 안식이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2장 7절에 가서 하
나님이 안식하셨다 하는 것 같이, 요한복음 1장에서 말씀이 육체가 되신 한 인격
이 나타나면서 결국은 안식에 이르게 되었다. 그 분의 여정은 안식으로 가는 여
정이고 그분 자체가 바로 안식이다. 그러므로 그분 안에 있을 때 우리 자신도 안
식이 된다.
나는 교회에서 이 사실을 보았다. 형제와 자매들이 요동할 때도 많이 있었다.
풍랑에 흔들려서 “왜 주무십니까? 우리의 사정을 왜 돌아보지 않습니까?” 한 적
이 많이 있었다. 사람이 많으니까 별 사람이 다 있는 것이다. “이것은 왜 이렇습
니까?”, “저것은 왜 저렇습니까?”, “왜 당신은 고물에서 주무십니까?” 하는 때가
참 많았다. 그런데 요동하다가도 다 조용해졌다. 그것은 성장의 한 과정이지 큰
문제가 아니다. 내가 요동치 않으면 큰 문제가 아니다. 내가 요동하는 자리에 있
으면 큰 문제가 되지만 내가 지성소 안에 있으면 다른 사람이 요동하는 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 저절로 가라앉을 것이기 때문이다. 푸른 하늘이 구름 끼
었다고 염려하겠는가, 비가 온다고 염려하겠는가, 바람이 분다고 염려하겠는가?
어차피 하늘은 그대로 있는 것이니까 좀 그러다 마는 것이다.
우리 안에 하늘이 되시고, 우리 안에 지성소가 되시고, 우리 안에 안식이 되신
그리스도! 이 인격이 왜 필요한가? 바로 이 인격이 우주의 중심이 되기 때문이다.
이 인격이 우리 안에 올 때 온 우주가 다 조용해지고 만물이 다 조용해진다. “만
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기를 싫어하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
다.”고 하였다. 그리스도가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다는 말이다. 2000년 전의 그
리스도라는 말이 아니고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는 것이
다. 그래야 자기들이 복을 받기 때문이다.
어느 날 형제들이 나에게 “목사님이 요동하지 않아서 우리가 이렇게 살았습니
다.”라고 말했다. 나는 요동하는지 안 하는지도 몰랐지만(물론 주님이 볼 때는 나
도 요동하는 사람이겠지만), 형제들이 볼 때는 내가 요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
기들이 한참 요동하다가도 제 자리로 돌아오게 되었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모두
다 요동을 했다. 안 할 수가 없는 것이 사람이다. 그런데 아무리 요동해도 요동하
지 않는 자리가 있으면, 중심지가 있으면 다시 되돌아오는 법이다. 그러므로 내가
요동하지 않으면 온 우주가 요동치 않고 내가 요동하면 온 우주가 다 요동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남이 시끄러운 것이 아니고 내가 시끄러운 것이고 남이 요동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요동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비밀이다. 그리스도의 모든 비밀이 교회 안에 간직되어 있
다가 우리의 교통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생활을 하면 그
리스도의 비밀 안에 살게 되고 그 비밀을 누리게 된다. 나는 대구교회를 보면서
이것이 참 비밀이구나 하는 것이 시간이 갈수록 더 짙게 알아진다. 이것은 글로
나 책으로 쓰여진 것이 아니고 교리도 아니다. 살아있는 생명이기 때문에 그리스
도의 어떠함을 계속 드러내는 것이다. 세포 하나 하나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그것
들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그것을 혼자서 알 수 있겠는가?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낱낱이 다 드러나는 것이다. 발톱은 왜 필요하며, 새
끼손가락은 왜 필요하며, 귓구멍은 왜 필요한지가 다 드러난다.
혼자 예수를 믿을 때는 필요한 것이 몇 가지 없다. 그런데 교회 생활 속에서
보니 다양한 것이 다 필요하고 또 그것들이 다 공급이 된다. 모든 이유가 다 설
명이 되는 것이다. 나는 왜 이런가 하는 이유도 설명이 되고, 저 사람은 왜 저런
가 하는 이유도 설명이 되고, 우리 모두가 왜 이런가 하는 이유도 다 설명이 되
는 곳이 교회이다. 교회는 너무너무 신기한 비밀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것을 ‘그
리스도의 비밀’이라고 하였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 비밀 안에 사는 사람
들이다. 교회 생활을 누리면서 점점 그리스도의 비밀을 깊이 알아져 갈 것이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예비해 놓으신 것이 무엇인지를 점점 알아져 가게 될 것이다.
에베소서에 보면 “창세 전에 이것을 예비해 놓았다.”고 하였다. 창세 전에 그
몸 안에 예비해 놓았다고 하였다. 그 몸은 바로 교회이므로 교회 안에 예비해 놓
았다는 것이다. 바울은 그렇게 깊이 교회의 비밀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도 교회
생활을 하면서 교회를 더 깊이 깨달아서 우리 안에서 교회에 대한 비밀이 다 드
러나게 되기를 원한다. 에베소 교회가 성경에만 있다고 하는 법이 어디 있는가,
고린도 교회가 성경에만 있다고 하는 법이 어디 있는가? 오늘 살아 있지 않다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오늘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오늘 그 교회가 있고
그 교회보다 더 발전된 교회가 있을 수도 있고 그것보다 더 차원 높은 교회가
있을 수도 있다. 그만큼 성장하고 그만큼 자라가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성경에 있는 이 교회들로서 끝내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이 교회들은
시작에 불과하다. 우리를 통해서 그 교회들이 열매맺게 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우
리는 그 열매를 향해 가니까, 어쩌면 성경에 쓰여 있는 이 교회들보다 오늘 우리
에게서 더 아름다운 것이 나올 수가 있다. 나무가 자라는 것을 보면 나뭇잎보다
꽃이 훨씬 좋고 꽃보다는 열매가 훨씬 더 좋다. 잎도 다 필요하지만 잎에 비해서
꽃은 더 아름답고, 꽃도 좋지만 꽃에 비해서 열매는 더욱 달콤하다. 생명의 성장
은 그런 것이다. 그러면서도 잎도 필요하고 꽃도 필요하고 열매도 필요한 것이
생명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 있는 이것은 시작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완
성이 아니고 시작이며 우리가 이것을 다 온전케 해야 할 사람들이다. 우리가 아
니면 온전케 할 사람이 없다. 교회 생활을 통해서 이것이 온전하게 이루어질 것
이다.
이번에 미주 지역을 순회하면서 몇 군데 교회를 보게 되었다. 사람 숫자야 몇
몇 안되고 뉴욕처럼 이렇게 많이 모인 곳도 없다. 그런데 많이 모이나 적게 모이
나 다 교회다. 많이 모이면 더 풍성하고 다양해지는 것이고 적게 모이면 그런 것
이 좀 아쉬워지는 것뿐이다. 전에 왔을 때에 비해서 미주에 있는 교회들이 많이
성장을 해서 마치 어린아이가 커서 학생이 되듯이 그렇게 컸다. 뉴욕에 와서 보
니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렇게 오랫동안 땅 밑에서 다지고 또 다져서 오늘 이렇
게 발아가 되어 지상으로 드러나는 교회가 되었다는 것이 신기하다. 우리는 벌써
10년 전에 여기에 교회가 이루어질 것을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 나름대로 뭔가
좀 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이제 생각해 보니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 뭔가 땅 밑에서 준비할 것이 더 많았던 것 같고 예비할 것이 더
많았던 것 같다. 이렇게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다는 것을 여기 와
서 절실하게 또 느끼게 되었다.
때가 되어서 나와야 떡잎이 잘 살지 미리 나와 버리면 잘 못사는 것이다. 그리
고 가을 늦게 나와도 못 사는 것이다. 잎이 나온다고 나왔는데 찬 서리 올 줄을
모르고 나와 버리면 나오자마자 찬 서리를 맞으면 죽어 버리는 것이다. 봄에 시
기를 잘 타고 나와야 건강하게 자랄 수 있다. 하나님이 적절하게 잘 준비해서 긴
겨울을 지나고 봄이 되어 발아가 되도록 하신 것 같다. 이것이 한 여름을 지나면
한 가지가 온전해지고 또 다음 해가 지나면 또 한 가지가 온전해진다. 여름 늦게
나뭇가지를 잘못 잘라 버리면 가을 늦게 새 순이 나오고 이것은 겨울에 얼어죽어
버린다. 그래서 나무는 얼어죽지 않으려고 여름 동안 계속 열심히 자라는 것이다.
여름에 잘 자란 가지는 가을에 가서 잎이 떨어져도 겨울에 얼어죽지 않는다.
하나님이 당신의 교회를 다지고 또 다져서, 이 세상의 풍파 속에서, 사탄의 계
교가 흉흉하는 세계 속에서 흔들리고 무너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게 든든하게 세우시려고 그렇게 계획을 하신 것 같다. 하나님이 일하
시는 것을 아주 주의깊게 관찰하고 그것을 우리가 깨닫게 되기를 원하고 그것을
우리가 짊어지고 살게 되기를 원한다. 교회나 내 인생이나 가정이나 모두 하나님
이 행하신 일이 날마다 드러나는 것을 발견하게 되기를 원한다. 그것을 발견하게
되면 우리는 풍성한 삶을 누리게 될 것이다.
뉴욕 한 복판, 알고 보면 이 곳은 세계 한 복판이고 우주의 한 복판이다. 이
한 복판에서 우리가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 꿈만 같고 정말 신기
한 일이다.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해서 그저 감사할 수밖에 없고 그저 찬양할 수
밖에 없다.
가능하다면 우리와 같이 다른 사람들도 복을 누리게 되기를 원한다. 그것은 억
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다 때가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나 “우리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파한다.”는 말이 왜 나오는가 하면 누가 준비됐는지를 모르
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면 준비된 사람만 전하면 참 좋은데 전해 보면 안 될 사
람은 아무리 전해도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또 그렇게 안 되던 사람도 오늘은
안 되지만 내일은 또 될 수가 있다. 한 10년 전에 연결됐던 사람인데 그 때는 코
방귀를 뀌고 가 버리더니 한 10년 후에 다시 찾아왔다. 10년 동안 자기는 세상에
서 방황하고 돌아다녔는데 결국 하나님 앞에 돌아오게 되는 길이었던 것이다. 그
래서 ‘좌우지간 뿌리고 봐야겠다. 5년 후에 돌아올지 10년 후에 돌아올지 모르는
것이니까 좌우지간 뿌리고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뿌리다 보면 정말
생각지도 않았던 데서 열매가 열린다. 그것을 볼 때 ‘야, 이것이 사람이 하는 일
이 아니고 하나님이 준비를 다 해 놓았구나. 그릇을 다 준비해 놓았구나.’ 하는
것을 우리가 부인할 수 없게 된다. 우리가 그것을 알기만 한다면 헛된 데에 왜
뿌리겠는가? 알기만 한다면 준비된 데 찾아 가서 한 마디만 하면 제깍 오는 것인
데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냥 뿌리는 것이다. “강물에 너희가 양식을 뿌려라. 이
틀이나 사흘 후에 네가 다시 그것을 건지게 될 것이다.” 하는 말이 있다. 강물에
다 쌀을 뿌리면 다 어디로 가 버리고 없지 않은가? 그런데 이틀이나 사흘 후에
떠오를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뿌리고 나면 어디서 나올지 모른다는 것이다. 나
는 뿌리기만 했는데 거두는 사람은 딴 사람이다. 그래서 뿌리는 자도 즐거워하고
거두는 자도 즐거워하게 된다. 내가 다 할 것 같지만 그것이 아니다. 나는 뿌리기
만 할 수밖에 없고 어떤 사람은 거두기만 할 수밖에 없고, 이렇게 해서 우리가
서로 필요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하나님께서 배열을 하고 계신다. 그래서 교회 생
활에서 다른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성숙한 단계에 이르게
된다. 저 사람이 없으면 안되는구나, 저 사람이 있어야 내가 꼭 되겠구나 하는 것
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게 될 것이고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요즘은 인터넷 시대가 되어서 세계가 한 눈 안에서 다 연결이 된다. 컴퓨터 만
지는 사람은 컴퓨터 앞에 앉아서 어디에 있는 사람이든지 다 서로 이야기하고 있
다. 아직 얼굴은 화면으로 보지 못하고 있는데 곧 화상 전달이 된다는 소식이 들
어오고 있다. 얼굴까지 보면서 이야기를 다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
의 풍성한 교통이 전파를 타고 온 세계를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평화롭게 안식하고 사는 이 세계를 다른 사람들이 엿보게 된다면 부러
워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열어 놓고 이것을 공개하고 싶다. “사람들이여, 우리가
이런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세계로 초대합니다.” 하고 지금 인터넷을 열어
놓고 있다. 24시간 인터넷을 열어 놓으려고 생각하는데 아직 준비가 안 되어 못
열어 놓았다. 그것을 인터넷 망을 설치해서 열어 놓으면 언제든지 열어 보면 나
오도록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항상 미국에서는 미국에서대로, 영국에서는 영
국에서대로 언제든지 두드리면 다 나와서 볼 수 있도록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얼마나 우리가 교통이 좋은 시대에 태어났는지 모른다. 이런 것들을 하
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밤잠 못 자고 수고해 놓았는데, 우리는 이것을
정말 참 기가 막히게 누리고 있는 것 같다. 세상 사람들이 다 우리를 위해서 일
하고 있는 것이다. 과학자들이 지금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것을 활용할
수 있는 모체가 되기만 한다면 전부 우리를 돕는 자들이다. 나는 컴맹이지만 컴
퓨터 하는 사람들의 덕을 참 많이 본다는 생각을 한다.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모든 것, 심지어는 사탄이 만들어 놓은 것까지도 전부
우리가 소화할 수만 있다면 다 양식으로 먹을 수 있다. 한국에는 기이한 사람이
있는데 쇠붙이를 계속 먹어도 상관없는 사람이 있다. 자기 안에서 소화가 되기
때문에 엑스레이를 찍어 보면 쇠붙이가 다 녹아 버리고 없다는 것이다. 이런 위
장을 갖기만 한다면 우리는 사탄이 만들어 놓은 것까지 다 소화해서 양식으로 할
수 있다. 그렇게 되는 것이 우리가 성장하는 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