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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에서 발원한 한강이 국토의 허리를 감싸고 흘러 마침내 한양도성 밖 아차산을 감돌아 흐르고 있다.
한양도성동쪽 외곽의 외사산(外四山) 아차산이 듬직하게 한양도성을 지켜내고 있다.강원도 충청도 경상도 등 동쪽에서
한양으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이곳 한강을 건너야만 한다.그때는 광나루(廣津)를 이용해야 했다.광나루는 숱한 물류와 함께
인물들이 오가며 다양한 역사와 문화를 연출한 곳이다.
하남위례성 밖 천호마을에서 도미와 함께 살던 부인 아랑의 동상이 광진교 위에 있다.
광진교의 명칭과 준공년도를 밝혀주는 교명주(橋名柱)가 도미부인 아랑의 동상 옆에 나란히 앉아 자리하고 있다.
광진교 옛 교명주(橋名柱) - 단기 4269년 9월 30일 준공
이 교명주는 광진교 철거시 남아 있던 것을 새 광진교를 건설한 후 옛 다리는 없어졌으나 교명주를 본래의 자리로 옮겨 놓아
“걷고 싶은 다리”로 다시 태어난 광진교의 역사적 가치와 옛 정취를 느낄 수 있게 하고자 서울 강동구에서 천호동쪽 다리 입구에
설치하였다.
한강철교 한강대교(옛 한강인도교)에 이어 세번째로 건설된 광진교다.대부분의 다리는 ㅇㅇ대교(大橋)라고 부른다.
광진교는 대(大)자를 붙히지 않는다.보통 강을 건너는 다리는 나루터에 놓았다.나루터는 강의 폭이 비교적 좁고 수심이 얕다.
그리고 물살도 그렇게 세지 않다.서울권 한강에 31개의 다리가 있다.서강의 끝자락에 월드컵대교가 준공을 앞두고 있다.
도미부인상이다.도미부인 동상을 건립하게 된 취지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도미설화'는 백제 위례성 시대 제4대 개루왕 때 유래된 백제초기시대 설화이다.
설화속의 주인공 도미부인은 우리 역사상 정절의 표상이 되는 인물로서,
삼강행실도 등에서 열녀와 관계되어 가장 대표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이에 백제시대 실질적인 문화의 중심지였던 강동구에 도미부인 동상을 건립함으로써
최근 들어 쉽게 흔들리고 깨어지는 가정 내의 부부 관계에 대하여 도미설화를 상기시켜
어려운 상황에서도 가정을 지켜나갔던 도미부인의 모습을 본받음은 물론 지역 문화역사의 재조명과
지역 주민에게 올바른 성 가치관을 심어주어 후세의 표상으로 삼고자 서울특별시 강동구에서 건립하였다.
도미부인상 건너편에는 조선초기 문신 서거정의 시비가 있다.
서거정은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지식인으로 꼽힌다.그는 45년간 세종·문종·단종·세조·예종·성종의 여섯 임금을 모셨다.
그는 신흥왕조의 기틀을 잡고 문풍(文風)을 일으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원만한 성품의 소유자로 단종 폐위와 사육신의 희생 등의
어지러운 현실 속에서도 왕을 섬기고 자신의 직책을 지키는 것을 직분으로 삼아 조정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성격이 편협하고 융통성이 없다는 평을 받기도 했으나 매우 낙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술과 농담 · 해학을 즐겨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등과 친분을 나누기도 했다.
그는 사패지로 하사 받은 몽촌(夢村 : 현재의 송파구 방이동 몽촌토성 일대)과 광진(廣津 : 현재의 광진구 광장동)에서
말년을 살다가 돌아갔다.당시 서울의 여러 곳을 다니며 곳곳의 풍경을 읊은 시를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남기고 있다.
서울 동대문구 답십리동의 신답사거리에서 전농동 · 장안동과 중랑구 면목동을 동북으로 뻗어 용마산길과 접하는 길을
‘사가정길’이라 부른다. 이는 서거정의 호를 인용하여 붙인 길이름으로, 그가 아차산에서 가까운 한강 건너에 살았던 것을
기념하고 있는 것이다.
성종은 그를 몹시 아꼈다. 그가 병들자 자신이 입던 따뜻한 옷을 주고 어의를 보냈다.
그가 죽자 수랏상의 반찬을 줄이고 조회를 폐했을 정도였다. 지금의 서울시장에 해당되는 한성판윤을지내기도 했다.
그는 32년간 불암산 밑에 살다가 나이 쉰이 넘어서는 현재의 서울 송파구 방이동 지역인 몽촌토성 근방에 살았다.
서거정이 몽촌으로 이사하기 전 옛날 광나루 풍경을 노래한 그의 시 ‘광진촌서만조’(廣津村墅晩眺)’를 돌에 새겼다.
乾坤納二一江湖 천지간의 종은 풍경 강호상에 들어오매
千里渾成水墨圖 천리나 넓은 안개가 수묵화를 펼쳐 놓았구나
白鳥去邊水明滅 갈매기 날아가는데 수면이 밝았다. 어두웠다.
青天盡處山有無 푸른 하늘 저 끝엔 산이 보이다 말다 하네.
古垣松菊餘三經 고원의 소나무 국화는 옛날 선비 서성대던 길이요
夢裏桑麻老一區 몽리의 뽕나무 삼밭은 오랜 옛날의 한 마을이라네.
步履看看將落日 한걸음 두걸음 보고 또 보노라니 벌써 해 서산에 지려는데
雨餘花氣潤如水 비 지난 뒤 꽃기운이 젖처럼 윤기 흐르누나
그 유명한 광나루 백사장 자리이다.서울권 한강에는 광나루 뚝섬 용산 등 3대 백사장이 있었다.
한강은 개발의 명목으로 그 좋은 백사장을 잃어야 했다.광나루 백사장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공원의 모습을 하고있다.그 공원 북쪽 지역에는 버드나무가 집중적으로 들어섰다.
옛날 버드나무가 참으로 많아서 양진(楊津)의 또다른 이름을 갖고 있던 광나루다.
지금 천호대교 서쪽 일대는 버드나무가 밀집되었다.그 버드나무 숲에는 '먹자 촌'이 들어섰다.
천호대교가 놓이고 강변도로 등 한강 주변이 개발되면서 그 많던 버드나무는 모두 사라졌다.
옛 백사장 자리에 한강천호공원을 마련하면서 거대한 숲이 조성되었다.
그때 그 숲에 버드나무를 집중적으로 심었다.거대한 버드나무단지로 변모하고 있다.
이제 그 숲 버드나무단지에서 그 옛날 양진(楊津)의 모습을 되찾아 볼 수 있게 되었다.
버드나무가 물가에 많은 이유로는 버드나무가 물을 매우 좋아하는 수인성 식물이고
잔뿌리가 땅속에서 그물처럼 서로 엉켜 강둑을 홍수등에서 보호해주고 있는 점을 든다.
또 버드나무에는 우리의 질병을 치료해주는 좋은 성분이 있어
우리 주변에서 번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3월쯤 버드나무에 물이 오른다.
어릴 때 연필 정도의 굵기 버드나무가지로 호드기 피리를 만들어 불었다.
또 봄이 오면 버들강아지를 맛있게 따먹으면서 껌처럼 씹고 다녔다.
버드나무는 정수작용이 있어서 우물가에도 많이 심어 왔다.
유럽에서도 버드나무껍질에서 추출한 살리신을 주성분으로
해열 진통 소염 심장병 뇌졸중 등에 사용하여 왔다고 한다.
이같이 수양버들에는 해열이나 진정의 효과가 있는 살리신이 있어
겨우내 시달린 몸을 달래고 질병예방을 위해 버들피리를 불고 즐겨 일상에서 활용하였다고 한다.
인도에는 수양버들나무는 적지만 불교와는 깊은 관련이 있다.
구강 위생뿐만 아니라 일곱가지 병을 없앤다고 하는 버드나무의 약효를 중요시 했다.
석가는 제자들이 탁발이나 수행을 위해 각지를 돌아다닐 때
반드시 휴대하는 18종의 도구의 하나로 수양버들나무 칫솔을 규정했다.
이를 단타카스타 즉 치목(齒木)이라고 말한다.
이쑤시게를 일본어로 よう-じ라고 한다.우리도 요지로 발음, 그대로 쓰고 있다.
사실 요오지도 한자로는 楊枝로 버드나무 가지를 뜻한다.
양류관음상(楊柳觀音)도 있다. 버드나무 아래 바위에 앉아있거나 오른 손에 버드나무 가지를 들고
대자비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병고(病苦)를 치유하는 관음이다.자비심이 많고 중생의 소원을 들어줌이 마치
버드나무가 바람에 나부낌과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한양이 조선의 도읍지로 결정되는데는 수운(水運)의 기능을 높이 샀기 때문이다.뗏목이 강원도에서 목재를 싣고 한양으로 온다.
뗏목이 첫 나무를 내리는 곳이 광나루이다.여기서 나무는 한양 북부지방으로 운송돼 재목으로 활용된다.뗏목을 타고온 뗏꾼들은
큰 돈을 나누어 갖는다.뗏꾼들은 15일정도 뗏목을 타고 광나루에 도착한다.목재를 팔고 뗏꾼들은 30~40원정도씩 나누어 갖는다.
당시 군수의 월급이 20원가량 되었다고 한다.뗏꾼들이 뗏목을 타고 나눠 갖는 돈은 대단한 목돈이어서 '떼돈을 번다'는 말이
유래되었다고 한다.이렇게 번 돈을 잘 관리한 뗏꾼들도 많았다.일부 뗏꾼들은 나루가에 진을 치고있는 색주가에서 털리기도
했다고 전한다.광나루에서 강원도 정선에 이르는 강가 색주가에서 돈을 털린 뗏꾼들의 한(恨) 많은 구슬픈 노래도 많다.
고구려 장수왕이 원한의 백제를 침공해 하남위례성을 7일 밤낮으로 공격한다.
고구려군의 총사령부가 주둔하고 있던 아차산 동쪽 기슭이다.장수왕이 이끄는 고구려군 총사령부에서는
백제의 도읍지 한성이 바로 눈아래 놓였다고 기록은 전한다.지금 워커힐 호텔이 자리한 아차산 자락이
고구려군 총사령부가 주둔하고 있는 곳으로 추정한다.아차산 주둔군을 주력으로 한 한성 공격은 삼면에서 동시에 감행되었다.
주력부대는 화공(火攻)으로 백제를 무력화시켰다.7일만에 백제는 완전 고구려에게 무릎을 꿇고 함락당한다.
개로왕과 왕족은 생포되어 모두 아차산 사령부로 끌려온다.
"475년(장수왕 63년) 9월, 왕이 군사 3만을 거느리고 백제를 침공하여
도읍지 한성을 점령한 후 백제왕 부여 경을 죽이고 남녀 8천명을 생포하여 돌아왔다."
고구려군이 성을 점령한 이후 대대적인 수색이 뒤따랐다.
개로왕의 부인과 그 자식들을 검거하기 위해서 얼굴을 아는 자들이 앞장을 섰다.
변장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결국 한성에 있던 백제왕실의 구성원들은 이렇게 모두 체포되었다.
한성에서 나룻배에 실려 강을 건너 아차산으로 끌려갔다. 장수왕은 백제왕과 그 가족을 고이 죽이려 하지 않았다.
개로왕의 죄목이 나열되었고,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을 그 처형의식에 할애하였다. 형리가 포박된 그를 잡아채서 모루 위에
그의 머리를 고정시켰다. 연장은 둔탁한 소리를 냈고, 피가 떨어지는 머리가 땅바닥에 뒹굴었다.
개로왕의 무덤은 없다.고구려는 그의 시신을 백제에 돌려주지 않았다.그 많은 왕실가족과 신료들도 처참하게 생을 마감한다.
조선후기 진경화가 겸재 정선의 그림 <광진(廣津)>이다.아차산 앞에는 한강이다.
그 강에는 여러 척의 배들이 여유롭다.아차산 동남쪽 기슭에는 사대부들의 별서들이 즐비하다.
양녕대군은 1416년 전직 고위관리 곽선의 첩 기생 어리(於里)와 사랑에 빠진다.
양녕대군은 태종의 극심한 반대에도 어리와의 비밀 연애를 즐기다 결국 어리는 양녕대군의 아이를 임신한다.
이 사실을 안 태종은 노발대발하고 결국 양녕대군은 종묘에 반성문을 올리며 용서를 빈다. 결국 세자에서 폐위된다.
양녕대군은 강제로 출궁 당하고 아차산 기슭에서 어리와 마지막 밤을 보낸다.그리고 광주로 귀양을 간다.
양녕대군은 광나루 포구에서 "앞으로는 이 땅을 두 번 다시 볼 수 없겠구나!" 하며 한탄하고 눈물을 지었다.
양녕대군이 광주로 갈 때 이곳 광나루에서 배를 탔다.
광나루는 세종대왕의 형으로서 세자의 지위를 벗어 던진 양녕대군이 아버지 태종으로부터 내침을 받아
광주로 가던 별리의 아픔이 쌓여진 장소이다. 태종 18년 (1418) 6월 양녕대군은 폐위당하게 된다.
원세자 양녕대군을 외방으로 내보내는 일이 추진되었다. 유정현 등과 같은 신하들은 춘천으로 추방하자고 하였다.
태종은 처음에 이를 응낙하였으나 곧 가까운 광주(廣州)로 바꾸어 나가게 하였다.
양녕대군이 떠나는 날, 양녕대군은 동대문 밖까지 그를 수행하던 원윤(元胤)에게
"경은 무슨 일로 나를 따라 오는가?" 고 물었다.
원 윤은,
"호송하라는 분부이시옵니다." 하니,
양녕대군은,
"앞으로는 이 땅을 두번 다시 볼 수 없겠구나!" 하고
광나루에서 배를 타며 눈물을 지었다.
작별할 때 원윤에게 말하길,
"…죄가 큰데도 죽지 않은 것은 오직 나라님의 덕택이다.
무엇으로 이 은혜를 보답할는지…
이처럼 불효하였으니 장차 무슨 낯으로
나라님을 뵈옵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 하였다.
호송을 하던 원윤은 양녕대군의 일행 가운데
여자의 숫자가 나라에서 정해 준 인원보다도 많다고 하여
두 사람의 여자를 빼앗아 돌아왔다.
이 보고를 들은 태종은,
"그 두 여자도 다 양녕의 첩이다. 빼앗아 온 것은 경의 잘못이다." 하고,
곧 광나루로 되돌려 보내주도록 명하였다.
아차산의 유래는 슬프고 안타갑다.조선조 명종 때 홍계관(洪啓寬)이라는 유명한 점쟁이가 있었다.
홍계관의 나이가 성년이 되어 주위에서 용하다는 소문이 나서 선비의 잃어버린 매(鷹)도 찾아 주고
판서 대감의 생각지 않던 돈이 들어오는 일도 알려 주어 점을 잘 친다는 소문이 전국 방방곡곡에 퍼졌다.
점을 잘 친다는 소문으로 그 점쟁이 집 앞에는 점보는 사람들로 늘 시장처럼 붐볐다.
발이 없는 소문은 날개를 달고 점을 잘 친다는 소문이 명종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소문을 들은 명종은 그 유명한 점쟁이에 대한 것이 궁금해서 승지를 불렀다.
“요즈음 한양에 점을 잘 치는 점쟁이가 있다는데, 그 소문이 사실이오?”
“예, 사실인 줄로 아옵니다. 그의 점괘는 귀신처럼 잘 맞는다고 하옵니다.”
“귀신처럼? 그게 정말이오?”
“그렇다고 하옵니다.”
“그렇다면 과인도 그 점쟁이를 한번 만나보고 싶구려.”
이튿날 그 유명한 점쟁이는 대궐로 불려갔다.
“소인, 상감마마의 어명을 받들어 대령하였사옵니다.”
“그대가 귀신처럼 잘 알아 맞춘다는 점쟁인가?”
명종이 점쟁이의 모습을 훑어보며 물었다.
“황송하옵니다.”
점쟁이는 머리를 들지 못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귀신처럼 맞춘다고 어디 보자.’
명종은 미리 마련한 싸고 또 싼 궤짝을 가리키며 어명을 내렸다.
“이 궤짝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점을 쳐보아라.
맞추면 네가 바라는 것을 들어줄 것이요,
그렇지 못하면 백성의 마음을 어지럽힌 죄로 네 목을 치리라.”
점쟁이는 흠칫 놀라더니, 정신을 가다듬고는 궤짝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주위는 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다.
점쟁이는 계속해서 궤짝을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궤짝에 손을 대고 잠자코 있었다.
“무엇이 있는지 어서 아뢰거라.”
참다 못한 승지가 재촉했다.
점쟁이는 말을 할 듯 말 듯 입술을 움직였다.
“그래, 그래. 어서 속히 말해 보거라.”
명종도 재촉했다.
“이 궤짝 안에는 쥐가 들어 있사옵니다.”
“오, 맞도다. 정말 잘 맞추는구나.”
“황공하옵나이다.”
“그래, 그럼 그 안에 쥐가 몇 마리 들어 있는고?”
명종 물음에 점쟁이는 잠시 무엇을 생각하는 듯 하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궤짝 속에는 아홉 마리가 들어 있사옵니다.”
“아홉 마리라구?”
“예. 그러하옵니다.”
“정말이냐?”
명종은 재차 물었다.
“예.”
“틀렸도다. 어서 궤짝을 풀어헤쳐 보거라.”
명종의 말이 끝나자 궤짝은 풀어헤쳐졌다.
“아니!”
점쟁이는 멈칫 놀랐다.
궤짝 안에는 아홉 마리가 아니라 두 마리가 들어있었다.
‘아! 어찌된 일인가? 틀림없이 아홉 마리라고 점괘가 나왔는데…….’
점쟁이는 사색이 되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여봐라! 저 점쟁이를 어서 사형장으로 끌고 가서 목을 치거라.”
“상감마마, 제발 소인의 말을 믿어주십시오. 분명히 쥐는 아홉마리이옵니다.
이건 무엇인가가 잘못된 것이옵니다.”
점쟁이는 포졸들에게 끌려가서 외쳤다.
명종은 점쟁이가 나간 뒤, 승지에게 물었다.
“궤짝 속에 분명히 두 마리를 넣었느냐?”
“예.”
“그렇다면, 그 두 마리 모두 수컷이더냐?”
“아니옵니다, 한 마리는 수컷이옵고 다른 한 마리는 암컷이옵니다.”
“뭐라? 아! 내가 실수를 했구나. 어서 암컷의 배를 갈라 보거라.”
조금 뒤에 승지가 아뢰었다.
“암컷이 새끼 일곱 마리를 배었나이다.”
“아아~ 그 점쟁이의 말이 맞았구나. 어서 그 점쟁이를 불러들여 큰 상을 내리도록 하거라.”
이즈음 사형장에 끌려온 점쟁이는 망나니에게 애원을 하였다.
“여보시오, 제발 부탁이니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죽을 사람이 잠시 기다린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
“아니옵니다. 제가 이곳으로 오면서 점을 쳐봤는데,
임금님께서 저를 다시 부르신다는 점괘가 나왔습니다.”
그러나 망나니는 점쟁이 말을 듣지 않았다.
임금님이 보낸 신하가 형장으로 달려왔을 때는 벌써 점쟁이의 목이 달아난 뒤였다.
“아차, 한 발 늦었구나.”
신하는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점쟁이 홍계관이 서울 동쪽의 엑끼(嶽溪)산 형장으로 끌려가서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이렇게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과 관련한 곳에 아차산 아차고개가 있다.
아차산에는 바보온달의 안타까운 사연이 있다.또 사육신의 묘가 있는 노량진에는 아차고개가 있다.
옛 사대부들의 별서가 몰려있던 그 자리에는 워커힐호텔과 광장아파트 등이 들어섰다.
유엔군사령부는 아시아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들의 휴양시설을 한국에 설치하도록 요구한다.
한국정부는 아차산 기슭에 국제관광공사의 주관으로 미군 휴양시설로 고급 호텔을 건설한다.
이 호텔은 1950년 한국전의 영웅 워커장군의 이름을 따서 '워커힐 호텔'로 명명한다.
워커장군은 낙동강 전선을 사수(死守)해 한국전의 전세를 역전시킨 인물이다.만일 낙동강 전선이
무너지면 한국정부를 사모어로 옮겨 망명정부를 수립할 것을 한국정부에 요청했다고 한다.
워커장군은 낙동강 전선에서 승리한 뒤 의정부로 가다 도봉구 창동에서 한국군 차량과 충돌해 세상을 떠난다.
워커힐호텔은 민간에 불하된다.이때 삼성그룹이 선경과 인수경쟁을 벌이다가 참패를 당한다.
SK家의 당시 최고위층과의 혼맥이 삼성그룹에게 참패를 안겼다.SK家의 혼맥은 석유개발공사와 한국이동통신
인수전에서도 삼성그룹을 따돌린다.삼성은 뼈아픈 3전3패을 당한다.
워커힐호텔 옆에 광장아파트가 자리하고 있다.우리나라 최초의 선수촌아파트다.
1975년 세계사격선수권대회가 태릉에 열린다.그때 참가 선수들을 위한 선수촌아파트 광장아파트다.
아차산이 동남쪽으로 흘러 한강가에서 용맥을 형성하고 있는 생기(生氣) 넘치는 곳이다.
광나루에 오래전부터 전해오는 용당산(龍堂山) 전설이다.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 한강에는 하늘로 승천하기를 기다리며 하천의 상하류와 주변의 산들을 다스리는 용이 있었다고 한다.
이 용은 한강이 세게 굽어지며 또한 넓어져 사람들의 수상교통이 왕래하던 곳,광나루 부근에 은거하며 위로는 한강이 시작되는 강원도 태백산 줄기와 아래로는 서해바다를 다스리며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또한 이런 용의 보살핌으로 광나루 주변은 강에서의 어업과 주변의 농업 그리고 강원도로부터 수로를 따라 번창하던 임업에 종사하던 많은 사람들은 넘치지는 않지만
부족하지 않은 생활을 할 수 있었다.그러나 어느덧 시간이 흘러 한강에 은거하던 용은 이제 하늘로 승천하게 되었다.
용은 그동안 자신이 보살피던 많은 미물과 고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기다리던 승천하는 날이 되었다.
용은 그동안 간직하고 있던 여의주를 입에 힘껏 물고는 자신의 모든 힘을 모아 하늘로 용솟음 쳤다.
한강이 크게 요동하며 갈라지고 드디어 용의 모습이 나타났다.광나루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그 놀라운 광경에 혼비백산하였다.
그 중 용기있고 정신을 차린 몇몇 젊은이들은 그동안 자신을 지켜온 용이 떠난다고 생각하여 하늘로 오르는 용의 꼬리를 잡았다고 한다.한 명 두 명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용의 승천을 막으려 달려 들었다.그러나 용의 승천을 막을 수 없었다.
용은 자신을 막는 사람들을 뒤로 하고 하늘로 높이 올라갔다.
어느덧 용의 모습이 사라지고 사람들은 실의에 차서 그자리에 모두 주저 앉고 말았다.
그때 하늘에서 무언가 반짝 반짝 거리며 떨어지는 것이 있었다.정신을 차린 사람들이 달려가 보니 용이 승천한 하늘에서부터
두 개의 용 비늘이 떨어지는 것이었다.용의 비늘을 받아든 마을 사람들은 용이 승천하면서 만류하는 자신들의 정성을
받아들여 내려준 것이라고 믿고 비늘이 떨어진 곳에 사당을 세워 후대의 풍년과 뱃일의 안녕을 기원하였다고 한다.
용당산은 아차산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산세다.한강 부근에 와서 '툭' 튀어나온 산 모양을 하고 있다.
지금의 한강호텔이 들어선 곳 일대다.아차산 자락의 야산으로 현재의 한강호텔 자리에 있었다.
아차산 자락과 연결되는 부분이 도로로 잘려 나갔다.도로가 생기기 전의 모양을 옛 노인들의 증언을 옮긴다.
"저 위쪽의 뾰족산(아차산)에서부터 샛강(한강)의 나루에
이르기까지는 같은 산자락이 천천히 낮아지면서 이어져 있었지.
이곳(광장동 워커힐 아파트 앞 도로 부근)에 와서는
다시 불룩 높아지면서 바로 저곳(한강호텔)에 용당산이 솟아 있었지."
지금은 용당산이 있었던 자리에는 한강호텔이 들어섰다.
그 주변의 모양은 여전히 용의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한다.
용당산에 있었던 사당 용신당은 일본 침략기에 많은 수모를 겪었다.
당시 일본은 한반도 곳곳에 신사를 세우고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용당산의 사당도 일본의 사당으로 꾸미고 소학교학생들에게
참배토록 하였다고 한다. 일제는 신사를 꾸미고 사람들이 다니기 편하게 하기 위하여
용당산의 산세를 자르고 길을 놓는 공사를 하였다고 한다.
공사를 위해 용당산 입구를 파는 곳에서
붉은 피가 흘러작업하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광진문화원이 낸 <광진구 마을 지명유래>에서 인용해 재구성한 것임-
이승만대통령은 낚시를 참으로 좋아하였다.
진해 앞 섬과 화진포 그리고 경복궁 경회루 등에서 낚시를 즐겼다.
광나루 한강가도 이승만대통령이 자주 찾는 낚시터였다.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
낚시를 좋아하였던 이승만대통령에게 최대의 아부성 발언으로 유명한 말이다.
유옥우 의원의 1956년 국회발언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이승만대통령이 광나루에서 특별선박을 내어 낚시질을 할 때 방귀를 뀌자
당시 경기도지사였던 이익흥 내무장관인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라고 말했는데,
아부질 잘하는 그런사람이 대통령을 보필을 하고 장관노릇을 한다고 하면 대한민국 명의가 서겠느냐!”
이 승만대통령의 눈을 가리고 귀를 막아 인의 장막을 치고 아부와 과잉충성이 극심했던 시절이다.
그로부터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라는 이 말은 이승만대통령에게 아부하는 사람들의 본질을 드러내는 말로 널리 쓰였다.
광나루는 서울시 광진구 광장동에 있었던 나루터이다. 양진, 광장, 광진, 광진도 등의 명칭으로도 불렸다.
한강의 중하류에 위치한 광나루는 교통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광나루는 부산으로 향하는 도로의 길목에 위치했다.
광나루는 서울 주변의 중요한 나루터로서의 기능을 수행했다. 백제가 북방 민족과 대치하면서 광나루는 군사 작전의 요충지였고
선진 문화를 수용하기 위한 외교-문화의 통로였다. 또한 신라가 발전하면서 불교문화가 이 나루터를 통해 수용되었고 철기문화가
이 나루를 통해 전해졌다.
조선시대에는 광나루에 관리를 두어 강원도, 충청도, 경기도 등지에서 서울로 운송되는 세곡을 관리-감독했다.
한양에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문화가 집결되면서 광나루를 오가는 행인들도 많아졌다.
그에 대해 태종 14년(1414)에 관리를 통해 광나루의 관리, 범죄를 저지르고 도피하는 자, 반역을 도모하는 자 등의 출입을
감시하게 했다. 그 당시에 광나루는 서울과 지방을 연결하는 간선도로의 연결 지점일 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강폭이 넓고
물이 많아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했다. 그래서 광나루를 담당하는 관리의 임무는 많아졌다.
이에 대해 세종 때 개설된 삼전도를 계기로 세조는 광나루의 업무를 삼전도에 분할했다.
삼전도의 개설로 광나루의 기능은 상당히 위축되었으나 일반인의 왕래는 계속되었다.
광나루에는 4척의 나룻배와 사공들이 있었고 사공들은 국가에서 땅을 받아 생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정치질서가 문란해지면서 양반들이 토지와 배를 빼앗아 광나루는 점점 부실해졌다.
일제강점기에도 유지가 되었으나 1936년 광진교가 설치되면서 광나루는 기능을 잃었다.
현재는 광진교, 천호대교가 강북과 강남을 연결해주므로 나루터의 기능은 상실하였으나
3번국도와 강변도로가 지나고 있어 여전히 교통이 좋은 지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