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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유댕이
교복 마이 안주머니속에 항상 가지고다니던 열쇠가 있었다. 그것은 지금 태연의 손 위에 올려져있었다. 사실 열쇠가 딱히 필요할것도 없는 집이었는데도, 태연의 성화로 그녀는 열쇠를 만들었다. 하나는 내꺼, 하나는 네꺼. 차가운 금속성의 물질을 태연의 손에 올려주면서,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너는 내꺼. 나는 네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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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연은 힘겹게 오르막길을 올랐다. 아직 여기 살고있을까. 살고있지 않는다고해도 괜찮았다. 태연은 발 밑으로는 계단을 세고있었다. 처음으로 올랐을때도, 마지막으로 올랐을때도 변함없이 이 계단은 200개였다. 이 계단을 만든 사람들이 굳이 200개를 염두에 두고 만들었다고는 생각하지않았다. 그러나 이 계단은 어떻게 세어봐도 200개가 분명했다. 그만큼 길고 높았다. 오늘은 200개가 아니면 어떡하지. 그런 불안한 마음이 태연의 머릿속을 장악했다. 그렇지만 그 길고 긴 계단을 다 올랐을때, 계단은 여전히 200개였다.
번지수 조차 알 수없는 그런 달동네였다. 수도조차 없어서 물을 사다먹거나 저 아래에있는 곳으로 물을 뜨러가야했다. 전기가 들어오지않는것은 물론이요,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추웠다. 그럼에도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풍경만은 기가막혔다. 이 동네사람들 대부분이 이용하는 슈퍼 앞 평상에 앉아 야경을 내려다보고있노라면 입가에는 미소가 걸렸었다. 하늘에있는 별을 가장 가까이에서 볼 수있다고 자부했었다. 그당시, 우리 둘은.
"어, 윤아학생 친구 아니여?"
계단을 다 올라온 곳에 슈퍼가있었고, 계단이 없는 오르막길을 따라 얼마정도 더 올라가야 윤아의 집이 있었다. 오르막길을 앞에 두고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피던 태연에게 말을 건사람은 몇년 전에 보고 못보았던 슈퍼 주인 아줌마였다. 남편이 도박 빚을 져서 있는 재산을 다 날리고 10년 전쯤 이 동네에 정착하게 된 아줌마는 그때나 지금이나 뽀글머리 파마를 하고있었다. 태연은 살짝 고개를 숙였다.
"맞구만. 아이고, 오래간만이여. 한동안 못봤던것 같은디. 벌써 몇년 되부렸제?"
안에 솜이 누벼진 꽃무늬 몸빼바지를 입고, 손에는 분홍색 바가지를 든 아줌마가 태연의 어깨를 살짝 감싸쥐었다. 이 동네가 자신의 동네인 냥 휘젓고 다녔던 시절에는 이 슈퍼아줌마는 태연의 두번째 엄마나 마찬가지였다. 태연은 말 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녀는 태연의 손목을 살살 끌어 자주 앉았던 평상에 앉혔다. 그리곤 잠깐 가게안으로 들어가더니 태연이 좋아했던 바나나우유를 들고 나왔다. 친절하게 빨대도 함께였다.
"왜 이렇게 뜸했디야, 하루가 멀다하고 놀러오드니. 못알아볼뻔 했잖여."
태연은 차가운 기운이 있는 바나나우유를 받아들고 한모금 빨았다. 그때와 많이 변한것은 없었다. 여고생때의 단발머리가 기른것과 전에는 하지않았던 화장을 한 것. 그리고 옷차림만이 달라졌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줌마의 말을 들으니 꼭 그런것만 변한것같지는 않다고 생각되었다.
"많이 이뻐졌구마잉. 그때는 요렇게 볼도 통통했는디."
아줌마가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며 말하는바람에 태연은 풋 하고 웃어버렸다. 얘기를 할 수록 좋은 사람이었다. 불쌍하게도 너무 착했던게 탈이었다. 남편은 아줌마가 빚을 다 갚아주자 이혼을 하고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렸다고 들었다. 그런 아줌마가 전에는 불쌍하고 처량하기만 했는데 오늘은 왠일인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녀가 윤아와 너무 닮아있어서가 아닐까. 윤아가 아줌마라면 자신은 아줌마의 남편이었다.
"요것은 아직도 잘먹네-그때 요것만 찾았잖여."
기달려보랑께. 하며 다시 슈퍼 안으로 들어간 아줌마는 태연에게 검은색 봉지를 내밀었다. 그 안에는 태연이 좋아했던 바나나우유가 한 가득이었다. 적어도 열 개 정도는 되보이는 그 봉지안에는 빨대도 있었다. 아직까지도 기억하고있다는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빨대를 꽂지않고는 바나나우유를 마시지않는 그 버릇을.
"가져가서 실컷 먹어. 줄게 없네-"
아줌마는 멋쩍게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점심때가 지난 시각이라 밥을 먹이긴 뭐하다는 소리 같았다. 태연은 고맙다 말하며 빨대꽂힌 바나나우유를 한 모금 더 마셨다. 달큰한 바나나향은 언제 먹어도 질리지가 않았다. 여기 조금만 앉아있다가 갈게요. 태연은 그렇게 말하고 빙그레 웃었다.
"더울텐데."
아줌마는 눈썹을 아래로 내리며 태연을 걱정했다. 하지만 태연은 그저 웃어보였다. 괜찮아요. 그러자 아줌마는 '그려? 그럼 고거 더우면 먹고-' 하더니 슈퍼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혼자 있고싶었는데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혼자 오는것은 고등학교 2학년때 이후로는 처음인 듯 했다. 아니, 전에도 혼자 이렇게 있었던적은 있었지만 윤아를 기다리지않았던적은 한 번도 없었다. 늘 여기 위에 앉아서 윤아를 기다렸었다. 아니면 윤아의 집앞에서, 그렇게 윤아를 기다렸었다. 하지만 오늘은 윤아가 오지않을것이다. 윤아는 태연을 잊었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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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혹시 임윤아라는 애 어디사는지 아세요?"
주소도 없었다. 담임이 적어준 종이엔 '달동네 어딘가' 라고만 적혀있었다. 벌써 몇일 째 학교에 나오지않는 윤아를 찾아오라는 것이었다. 반장인 태연은 그러마 하고 학교를 나서긴 나섰는데, 달동네라는곳이 이런곳인지는 상상도 못했었다. 달동네는 달이 보이는 예쁜 동네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이건 뭐 달이 보이긴 하다만 그리 예쁜 동네는 아님이 틀림없었다. 시멘트조각이 이곳저곳에 깔려있는 우둘투둘한 길을 지나면 달동네로가는 끝이없어보이는 계단이 있었다. 혹여나 잊어버릴까봐 계단의 숫자를 하나 하나 세며 올랐다. 그리고 다 올라섰을때, 그곳엔 낡은 구멍가게 하나가 있었다. 태연은 그곳에가서 조용히 위처럼 물었다.
"아, 윤아학생 찾는겨?"
친근하게 한번 웃어보인 슈퍼주인은 문을 열고 고개만 빼꼼히 내밀고있는 태연을 안으로 들였다. 태연은 뻘쭘하게 서서 애꿎은 교복 블라우스의 끝자락만 매만지고있었다. 뭐먹을텨? 하고 물어오는 아줌마에게 얼떨결에 '바나나우유요' 라고 대답해버린 태연은 제가 한 말에 자신이 놀라 혀를 살짝 내밀었다.
"우짜제, 윤아학생은 밤 늦게 올텐디."
"어디갔어요?"
꼭 만나고 가야하는 임무가 있었음에 태연은 온 몸에 힘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밤 늦게라. 그게 과연 몇 시를 말하는것일까. 일부러 야간자율학습도 빼먹고 온 길이다. 잠깐 주머니에 들어있는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5시 반. 아직 밤이 되려면 한참이나 남은 시간이다.
"아르바이트라고 하든디? 학생도 고생이 많제. 젊은 나이에 그렇게 일하러댕기고."
"아르바이트요?"
"그려. 밤 늦게 올거여. 학교는 제대로 댕기는지, 원."
주인여자는 측은하다는 목소리로 혀를 찼다. 학교에서는 곧잘 잠만자던 임윤아라는 아이. 전학온 당일은 그 황홀한 얼굴때문에, 그리고 그 다음날에는 얼굴과는 어울리지않는 분위기때문에 여러 아이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아이. 태연 자신은 제대로된 말 한번 걸어본 적 없는 아이였다.
"혹시, 집이 어딘지 알려주실 수 있으세요?"
가방안에 포스트잇이 있었던가. 태연은 잠깐 머리를 굴렸다. 프린트는 이미 파일에 껴두었으니 그것은 그냥 슬쩍 밀어넣고 가면 될테지. 포스트잇으로 자신의 용건을 적어놓고말이다.
"요 앞에 길 따라서 쭉 올라가다보면 파란대문이여. 바로 보일텐데-"
"감사합니다. 아, 이거…"
태연은 자신이 슈퍼 안으로 들어오기전에 보았던 길다란 길을 기억해내었다. 길은 끝이 보이지않을정도로 길어보였다. 태연은 입에 물고있던 바나나우유를 내려다보며 우물쭈물한 표정을 지었다. 줘서 받기는 했다만 이것은 엄연히 가게에서 파는 물건이었다. 태연의 마음을 알아챘는지 주인여자는 그저 웃어보였다.
"기냥 가. 그리고 윤아학생한테 무리하지말고 댕기라고 하고."
"네, 안녕히계세요."
태연은 인사를 했다. 그려, 잘가. 하는 인사를 받은 태연은 드르륵 미닫이문을 열고 나왔다. 봄이라고는 하지만 쌀쌀했다. 태연의 눈앞에 바로 보이는것은 작은 오르막길이었다. 두어 사람이 지나가기에 딱 알맞은 그 좁은 길. 태연은 자신의 가방에서 윤아에게 줄 물건들을 꺼내 품에 안았다.
오르막길을 오르는것은 다리가 뻑뻑해질 정도로 조금은 힘든것이었다. 매일 이 길을 올라다니고도 그 예쁜 다리선을 유지할 수있는 윤아가 부러울 따름이었다. 태연은 품에 안은 파일안에들어있는 프린트가 혹시라도 빠질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길을 걸어올랐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태연의 앞에는 마침내 파란 대문의 집이 나타났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집이었다. 정말로 판자로 만들어진 듯, 아슬아슬하게 바람을 견뎌내고있는 집. 대문은 짝이 맞지않아 닫혀있는것도, 열려있는것도 아닌것처럼 되어있었지만 색만은 새파랬다. 새로 칠한 듯, 거의 때도 묻지않은 것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어보였다. 하지만 말 한마디 제대로 나눠보지않은 사이인 태연이 윤아의 집에 막무가내로 들어가있는다면 윤아는 과연 어떠한 표정을 지을까. 그래서 태연은 윤아의 대문 앞에 주저앉았다. 그리곤 가방에서 포스트잇을 꺼내 윤아에게 전하는 말을 쓰기로 다짐했다.
'이거 월요일까지 꼭 풀어와야한대. 무단결석 많이하면 학교에서 잘린다더라. 꼭 나와.'
너무 친근했나. 태연은 밑에 -태연- 이라고 덧붙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얘가 내 이름을 알고있긴 할까. 아무리 반장이라도, 윤아는 태연에게 너무도 관심이 없어보였다. 그래서 태연은 자신의 이름 앞에 '반장' 이라고 작게 써놓았다. 이정도면 알아보겠지? 반장이라고쓴게 잘난척하는걸로 보이면 안될텐데…
순간, 저 멀리 아래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태연은 포스트잇과 펜을 가방안에 집어넣고 가방을 멨다. 그리고는 파일 앞에 자신이 쓴 글을 붙였다.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있었다. 손바닥만한 집이 다닥다닥붙어있는 동네이기때문에 윤아와 부딪힐 확률은 없었다. 게다가 윤아는 아르바이트를 갔다고 하지않았는가.
"……"
하지만 태연의 앞에 나타난것은 윤아였다. 태연은 대문밑으로 파일을 집어넣기위해 쭈그리고앉아있었고, 윤아는 조금은 상기된 얼굴로 태연을 내려다보고있었다. 태연과 윤아의 눈이 마주쳤다. 윤아는 당황한표정이었고, 태연은 매우 놀란 표정이었다. 둘은 잠시동안 서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뭐야."
침묵을 깬것은 윤아였다. 태연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에는 파일을 들고 있었다. 윤아는 태연보다 조금 키가 컸다. 성큼성큼 태연의 앞으로 다가온 윤아는 태연에게 대답을 들을 생각도 없는 듯 태연을 없는 척 하고 대문을 밀어 열었다. 그러고보니 대문에 열쇠구멍이 없었다.
"저, 윤아야!"
태연은 문을 닫으려는 윤아에게 다급히 소리쳤다. 태연의 말을 무시할거라는 태연의 생각과는 달리 윤아는 문을 열고 태연을 빤히 쳐다보았다. 태연은 윤아에게 손에 들고있던 파일을 내밀었다. 윤아는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들었다. 이게 뭐야. 하는 윤아의 눈빛에 태연은 '아차!' 하더니 급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그거, 너 학교 안나왔을때 받았던거야. 프린트. 다음주 월요일까지 꼭 풀어와야돼."
"……"
윤아는 말 없이 파일 안을 들여다보았다. 태연 자신이 직접 위에 이름도 써놓았건만. 윤아는 그것을 알 리가 없었다. 태연은 윤아에게 이것을 줘봤자 풀어오지않을것이란걸 알고있었다.
"아, 학교도 꼬박꼬박 나오래."
"…안가."
윤아는 짧게 대꾸했다. 태연이 예상했던 대답이 아니었다. '응' 이라거나 '그럴게' 라는 대답을 원하고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태연은 '그럼 우리 월요일에 보자!' 하는 친절한 대사를 날려주고는 이 길을 내려가면 되는것이었는데. 윤아는 눈썹을 찡그리고있었다. 뭐 또 줄거있어? 하고 묻는 윤아에게 태연은 도리질을 쳤다.
"줄거없음 그만 가."
"…어, 어?!"
윤아는 태연의 눈앞에서 대문을 쾅 하고 닫아버렸다. 하지만 짝이맞지않는 대문은 반동으로 튕겨나가 반쯤 열려버리고 말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윤아는 제 집으로 들어가버렸다. 마루가 있는 작은 집이었다. 주방은 따로있는 듯 했고 생각외로 깨끗해보였다. 역시 여자가 사는 집이라서 그럴까. 몇 분간 그렇게 계속 안을 들여다보고있던 태연이 가방을 고쳐멨다. 딱히 더 할 일도 없었다. 자신은 담임과의 약속을 지켰고, 밤까지 기다리지않아도 되었다. 태연은 한숨을 푹 내쉬고 뒤를 돌았다.
"야."
드르륵 문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윤아가 그 앞에 서있었다. 태연은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몸을 앞으로 돌려 윤아를 바라보았다. 가벼운 트레이닝복 차림의 윤아는 저 낡은 집과는 어울리지않게 너무나 예뻤다.
"밥-"
"응?"
난데없이 밥은 무슨 밥. 태연은 눈을 댕그랗게 떴다. 윤아의 짧은 말은 언제나 태연의 어깨를 조금은 움츠러들게했다. 말은 해본적없지만 왠지 그런 느낌이었다. 그런 태연을 알아챘는지 윤아의 표정은 조금 풀려있었다. 태연은 마른 입술에 침을 발랐다. 윤아는 태연에게 손짓했다.
"밥 먹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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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윤아의 집에 찾아가 자주자주 밥을 먹었다. 대화는 그다지 필요하지않았다. 학교에 나오지않는 윤아덕에 자꾸만 윤아의 집에 찾아가는것은 태연이었고, 윤아는 그런 날이면 계단 앞으로 나와 태연을 기다리며 사탕을 입에 물고있곤했다. 둘은 아무소리없이 길다란 길을 올라가 윤아의 집안으로 들어섰고, 같이 밥을먹었다. 태연은 윤아의 집에서 나올때 가져온 프린트를 놓고 갔고, 윤아는 그것을 풀어 학교에 나왔다.
"열쇠…만들어. 도둑들면 어떡해."
"아무도 안와."
한 여름. 이제는 제법 말을 터놓게 된 윤아와 태연이었다. 태연은 혼자사는 윤아가 못내 걱정스러워 하루가 멀다하고 윤아네를 찾았다. 계단 200개는 이제 아무것도 아니었다. 성큼성큼 오르다보면 어느새 슈퍼가 나왔고, 길을 따라 올라가면 파란 대문이 나왔다. 대문은 대문인데 정말 잠금장치가 하나도 없이 문 뿐이라 태연은 윤아네집에 찾아올때마다 이런 잔소리를 하곤했다.
"그래두…. 나 오잖아."
"그럼 열쇠 없는게 더 편하잖아."
윤아는 태연이 가져다준 영어프린트를 풀고있었다. 학교를 안나옴에도 윤아는 태연이 갖다준 문제집이나 프린트를 곧잘 풀곤했다. 너 머리좋으니까 열심히 하면 대학 갈 수있을거야. 태연은 나긋나긋하게 말했고, 윤아는 대학 붙어봤자 안간다며 딱 잘라 말했다.
"아무나 들어오는건 싫어."
"……."
임윤아가 사는 집에,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건 싫어. 나는 처음에 두드려보지도못했던 그 문을 아무나 열고들어온다는건 상상하기도 싫어. 너랑 나만 들어올 수 있게 해. 그렇게 해.
"응? 만들어, 윤아야."
"…응."
윤아는 짧게 대답하며 계속해서 프린트의 빈 괄호에 영어단어를 채워넣었다. 내말은 귓등으로도 안듣지. 태연은 심술이 나 입을 비죽거렸다. 말만 '응' 하면 어떡해. 행동으로 보여줘야지. 그런 태연의 속마음을 알아챈것일까. 윤아는 다음날 학교에 나왔고, 태연을 조용히 불러내었다.
"열쇠."
"…응?"
학교 뒤 공터였다. 저기서 어렴풋이 수업종이 치는 소리가 들렸다. 학교에서는 왠만하면 말을 걸지않는 사이라 윤아와 태연은 서로의 눈이 마주치기만을 기다려서 몰래 빠져나왔다. 다음수업 늦겠다. 하고 생각했다.
"만들었어."
"정말? 잘했어."
이제야 네가 행동으로 보여주는구나. 태연은 감탄했다. 그렇게 말해도 듣지않더니 낯간지러운 말을했더니 금새 말을 들어준 윤아가 얄미웠다. 꼭 내가 내맘 보여주지않으면 모르지. 바보.
"손-"
"이거 왜 나 줘?"
제 주머니에서 짤랑거리는 열쇠를 꺼낸 윤아가 태연의 손을 끌어 그 위에 올려두었다. 앙증맞은 하늘색옷을입은 강아지모양의 열쇠고리가 부드럽게 손에 앉아있었다.
"두 개 만들었어. 하나는 내꺼, 하나는 네꺼."
윤아가 쑥쓰럽게 웃으며 다른쪽 주머니에서 열쇠 하나를 더 꺼냈다. 자신의 열쇠고리는 분홍색옷을입은 강아지다. 태연은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이며 열쇠를 손에 쥐었다. 안심이 됬다고 할까. 그냥 그런 기분이었다.
"밖에서 기다리지말고 이걸로 따고 들어와."
"응."
윤아가 아르바이트에가고 없으면 윤아의 집 앞에서 윤아를 기다리는게 일이었다. 문은 휑하게 열려있는데도 그것을 열고들어갈 엄두가 나지않아서였다. 신경안쓰는 척 하고있었지만 알고있었구나. 태연은 가슴 한켠이 달달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나에게 신경써주고 있었구나.
"김태연."
한창 그렇게 감동을 하고있는데, 윤아가 나즈막하게 태연을 불렀다. '태연아' 하고 부르는것보다 더 절절한 한마디. 내 이름이 이렇게 솜사탕같았던가. 태연은 살짝 고개를 올려 윤아를 바라보았다.
"너는 내꺼, 나는 네꺼."
"……."
수줍은 고백. 윤아는 희미하게 웃고있었다. 태연은 손에 쥐고있던 열쇠를 다시 한 번 쳐다보았다. 강아지가입은 하늘색 옷 앞자락에 쓰여있는 세 글자는 임윤아. 태연은 윤아쪽을 보았다. 윤아는 자신의 손 위에 분홍색 옷을 입은 강아지를 올려두고있었다. 김태연. 김태연이라고 쓰여있다.
"너는 내꺼. 나는 네꺼."
"너는 내꺼…나는…네꺼…."
따라하라는 것 같아서 따라했는데 이게 왠일일까. 눈물이 넘쳐올랐다. 항상 눈짓으로만, 조심스런 몸짓으로만 서로의 맘을 확인했었던 윤아와 태연이었다. 사랑을 확인하고싶어하던 태연과, 확인시켜주고싶지만 서툴렀던 윤아가 동시에 한 방울 눈물을 떨어뜨렸다.
"잊어버리지 마."
"……."
지금 이 순간,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들, 앞으로 함께할 시간들…. 내 마음과 니 마음. 지금 이 터질 것 같은 심장소리도, 일렁거리는 서로의 눈 안에 담긴 서로를. 너는 내꺼라는것도, 나는 네꺼라는것도. 잊어버리지 마.
"잃어버리지도 마."
"……."
내 마음을 열 수있는 열쇠를. 너와 나만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을 열 수있는 열쇠를. 우리 추억도, 너와 내 사랑도. 나를 잃어버리지 말아줘. 나는 네꺼니까. 절대 잃어버리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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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이 있으면 헤어짐도 있다던가. 윤아의 엄마라는 사람이 태연을 찾아온것은 둘이 사랑을 고백한지 얼마 되지않아서였다. 자신이 낳은 아이를 버리고 잘 살겠다고 도망간 사람이 자신을 찾아왔다는것이 꽤 불쾌하기도했다만, 윤아의 엄마라서 그런지 그 미모만큼은 대단했다.
"우리 딸, 내가 데리고 일본가서 살거에요."
"……."
요 몇일동안 세상 다 산사람처럼 넋이 나가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였구나. 태연은 자신이 말을 걸어도 한참이나 있다가 대꾸하던 윤아를 떠올려냈다. 엄마가 찾아왔었구나.
"친한 친구사이라고 하던데, 윤아가 무슨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한국에 계속 살겠대요."
"……."
"설득해줘요. 친한 친구사이니까 그정도는 해줄 수 있죠?"
"……."
나때문일까. 고작 김태연이라는 아이때문에 18년전에 자신을 낳아준 사람의 호의를 거절하는걸까. 퍽이나 감동스러웠다. 그냥 따라가지. 서로다른나라에 살고있다고해서 그 마음 사라지는건 아니잖아. 임윤아 바보.
"그동안 엄마노릇 못해줬던거 다 해주고싶어서 그래요. 공주처럼 잘 키워볼거에요."
"……."
"그러니까, 태연양이 윤아좀 잘 타일러줘요."
"……."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잘 타일러볼게요. 그렇게 얘기하고 자리를 떠났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래도 보내기가 싫었다. 제 옆에 두고싶었다. 낳아주기만 하고 키워주지는 않았잖아, 당신은. 나는 낳아주지는 않았어도 사랑을 줬어. 같이 밥을먹고, 잠을 자고, 끌어안고 입을 맞춰줬어. 낳았다는 이유만으로 나에게서 임윤아를 빼앗아가려고 하지 마요. 당신에게는 버려진 딸이지만 나에겐 전부고 세상이야.
「윤아야.」
태연은 윤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다일어났는지 윤아의 목소리는 잠겨있었다. '어' 하고 대답한 윤아는 태연이 다음말을 꺼낼때까지 잠자코 있었다. 날이 차가워지고있었다. 태연은 한숨을 내쉬었다.
「엄마 따라가.」
「…….」
「가서, 잘 살아.」
윤아는 마지못해 '응' 하고 대답했다. 우리 헤어지는거 아니야. 너는 엄마한테 가는거고, 나는 늘 여기있을거야. 언제든지 돌아와도 돼. 너도, 나도 헤어지자고 한 적은 없으니까. 태연은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학교에 갔을때, 윤아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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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연은 타는듯한 석양을 물끄러미 바라보고있었다. 오른손에 가만히 쥐여져있는 바나나우유는 이미 텅 비어있었다.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때문에 옆에 놓인 비닐봉지가 사락사락소리를 냈다. 이제 그만 가봐야지. 태연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앞에는 둘이 걷던 좁고 긴 길이있었다. 손가락에는 달랑달랑 바나나우유가 든 봉지를 들고, 태연은 그 좁은 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쯤 걸어갔을까, 조금은 색이 바랜 녹슨 파란 대문이 태연의 눈앞에 나타났다. 태연은 메고있던 가방에서 하늘색 강아지가 달린 열쇠를 꺼냈다. 근 몇년간 한번도 열어보지못한 대문. 태연은 열쇠구멍앞에서 잠깐 머뭇거렸다. 이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도 넌 없을텐데…
털컥 하는 소리와 함께 파란 대문이 열렸다. 태연은 살짝 손을 뻗어 문을 밀어보았다. 끼익-하는 기분나쁜 소리가 들려왔다. 오랫동안 열지않아서일까. 태연은 두근대는 마음을 안고 한발자국 안으로 들어섰다.
"누구세요-?"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아니, 먹먹했다. 너무도 빨리 뛰고있는 심장때문에 아무것도 상상 할 수가 없었다. 따로 딸려있는 주방에서 들릴듯말듯 흘러나온 소리는 지금들어도 익숙한 그것이었다. 눈물이 다 날것 같았다. 밖에있는 이방인이 대꾸를 하지않자 의아하게생각한 집주인은 미닫이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위로 틀어올린 머리. 교복을 입었을때와는 확연히 다른 옷차림. 더운 날씨에 한껏 걷어붙인 소매. 하지만 옛날과 하나도 변한 것 없는 임윤아.
"……."
"……."
너, 일본에 가버린게 아니었니. 분명 선생님은 네가 학교를 그만뒀다고 얘기했었는데. 태연은 열쇠를 쥔 손을 바르르 떨었다. 그녀의 눈도 함께였다. 니가 있어서 좋은데, 싫기도하고, 어색하고, 당황스러워.
"…왔어."
"……."
조금 당황한 듯 했지만 윤아는 아무렇지도않게(마치 어제도 본 사람마냥) 태연의 존재를 인식했다. 태연은 지금 자신의 앞에 펼쳐진 상황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도 구분이 안되고있었다.
"들어 와."
"…너…"
"기다려, 밥 금방 되니까."
"너 왜 여깄어?"
윤아는 자신의 손에 묻어있던 물기를 셔츠 앞자락에 슥슥 문질러 닦았다. 재회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태연의 입에서 튀어나온 대사라곤 딸랑저거. 너 왜 여기있니.
"다시 돌아왔어."
"……."
"많이 생각해봤는데…난 너 없으면 안되겠더라."
"……."
"언젠가 여기로 찾아올거라고 생각했어."
"……."
그렇게 보고싶고 기다리던 엄마랑 사는데, 사는 것 같지가 않아서 되돌아왔어. 왜그랬을까 생각해봤는데, 답은 딱 하나더라. 너. 김태연. 거긴 니가 없어서, 사는 것 같지가 않았어. 연락할 길이 없어서 연락도 못했다. 딱히 연락하려고 하지도 않았어. 니가, 언젠가는 여기로 찾아올 것 같아서. 저 문을 열 사람은 너밖에 없으니까. 니가 당장 내일이라도 저 문을 열고 나를 찾아올 것 같아서.
"밥."
"……."
"먹자."
"……."
할 말 없으면 맨날 밥먹자고하지. 태연은 손에 쥔 열쇠를 더 꽉 쥐었다. 울지말아야지, 하는데도 자꾸만 눈물이 흘러내렸다. 조금만 더 일찍 찾아올걸. 너 여기있는거 알았으면 더 일찍 찾아올걸.
"울지말고."
"……."
"밥먹자, 태연아."
나즈막한 윤아의 목소리에 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윤아는 태연에게 작게 손짓했다. 쭈삣쭈삣걸어 윤아의 앞에 서자 윤아가 태연을 꼭 끌어안았다. 기다렸어. 많이. 윤아의 작은 중얼거림에 태연은 윤아의 어깨에 눈물을 한가득 쏟아냈다. 때이른 별들이 그들의 머리위를 반짝반짝 비춰주고있었다.
A Key_And.
첫댓글 사랑스럽네요
엠피에 넣어서 보고 또 봤는데도 계속 보게 되는 ㅋㅋ 진짜 이거 너무 좋잖아요 ㅜㅜ
태윤 ?윤탱? 암튼 이 커플링도 사랑스럽다는..ㅠㅠ까칠 융 모범생 탱ㅋㅋ 정말 귀여워요 한때 소학가때 미친듯이 좋아햇던 커플링ㅋㅋㅋㅋ
달달한윤탱은 그저절녹아버리게하는거겠죵ㅠㅠㅠㅠㅠㅠ복습도 정말 나쁘지 않은듯.윤아는왜 불량학생삘로나온건지..인사도 꼬박꼬박하는폴더윤아ㅋㅎㅎ그리고다시만난둘은너무감동적인듯ㅠㅠㅠ
어익후 달달해라 ㄷㄷ 단편은 단편대로 잔잔한 분위기가 너무 좋네요^.^
표현이 어색한 임융과 나름다정 탱.... 잘어울리고 달달하고. 굿굿굿 ㅠ_ㅠ
완전찬양찬양하던 태니빠엿는데....요즘 슬금자리를 잡아가는 이커플 ㅠㅠㅋㅋㅋㅋ
와..율탱..되게 보기좋다는..ㅋㅋ 달달하고 뭐 순수해보이는 애기들같다 ㅠㅋ 분위기가 짱 ...ㄷㄷ
아 달다...존경해요 작가님~
ㅎㅎ 재밋네여ㅡ
님단편다봤습니다!!!!!진짜 좋아요 ㅠㅠ
가입하고나서순서대로하나하나다읽어보려고제일첫번째메뉴에서제일첫번째글이A Key네요,제목만 보고 샤이니가 생각난이유는뭘까요?태윤이라...전 태니를 지향하는데도 이 글을 읽어보니까 태윤도 굉장히 매력있는 것 같아요, 모범생태연이라 안경쓴 모습이 생각나서 그런지 역활이 잘어울리는 것 같아요, 까칠한 윤아도 마음에 들고, 처음에 윤아가 밥먹자라고 했을때 저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렸던 것 같아요,윤아도 태연이가 마음에 들었던거겠죠? 윤아는 까칠한듯하면서도 속으론 굉장히 다정한 것 같아요, 마음을 잘 표현하지 못한다고 해야되나, 그런 서투른 마음을 열쇠를 건네줌으로써 용기내어 표현한것 같아요
열쇠가 둘을 이어주는 매개체인듯해서 차가운 금속성의 물질이라 표현되어져 있는데도 왠지 따뜻하게 느껴지네요, 나중에 태연이 윤아를 생각해서 엄마에게 보내주었는데 괜히 마음이 얼얼해지고 그러네요, 마지막으로 태연과 윤아가 재회해서 다행이라 생각했어요, 김태연없인 살지 못하는 윤아와 임윤아없인 살지 못하는 김태연이라,불가분의 관계인듯해요,마지막에 밥먹자 태연아,라고 말하는 윤아의 말이 왠지 귓가에 맴도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절대로 열쇠 잃어버리지 않았으면 싶네요^^재밌게 잘읽고 가요-
으아~~윤탱이라니 ㅋㅋ 윤아 좋네요 ㅋㅋ 표현은 잘 못하지만 그런 점이 귀엽다는!!! 잘봤습니다 ㅋㅋ
좀 짱이네여 ㅠㅠㅠㅠㅠㅠㅠㅠㅠ 융이 뭐저리 시크하냐능 ㅠㅠㅠㅠㅠㅠ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