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굽의 바로가 아브람에게 노비를 주었습니다(창12:16). 이름이 하갈입니다(창16:1). 하갈은 이집트 바로의 종이었다가, 지금은 아브람의 종입니다. 하갈은 종입니다.
애굽 사람 하갈은 아마 미스라임의 후예일 것입니다(창10:6). 미스라임은 함의 아들입니다. 함의 아들 미스라임은 저주받은 혈족입니다(창9:25). 하갈은 저주받은 자의 자손입니다.
하갈이 아브람의 아이를 임신했습니다(창16:4). 하갈이 주인 아브람의 아이를 임신한 후에, 여주인 사래를 멸시합니다(창16:5). 하갈은 착하지 않습니다.
하갈은 종이요, 저주받은 자의 자손이며, 착하지도 않습니다. 하갈이 학대를 받습니다(창16:6). 종이요, 저주받은 혈족인데다, 착하지도 않으니 학대받는 것은 당연한 결론 같습니다. 학대를 못 이겨, 하갈은 도망갑니다. 임신한 채, 도망 길에 나선 하갈은 친정 쪽으로 방향을 잡습니다(창16:7). 친정이라 한들, 받아줄 사람이 있는 건 아닙니다. 임신한 채 국경을 넘어온 종을 반길 리가 없지요. 하갈은 애굽 국경을 넘을 수도 없고, 아브람에게 되돌아갈 수도 없는 상황에 처했습니다.
국경을 넘을 수도 없고, 넘지 않을 수도 없는 진퇴양난(進退兩難)의 때에, 하갈이 ‘여호와의 사자’를 만납니다. 오도가도 못하는 곳에서, 하갈이 천사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이상합니다. 하갈은 종입니다. 하갈은 저주받은 혈족입니다. 하갈은 착하지도 않습니다. 하갈은 종이요, 저주받은 혈족이며, 착하지도 않은데, 하갈에게 천사가 나타나고, 천사를 통해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전달됩니다(창16:10). 도대체, 왜, 천사가 하갈에게 나타났고, 하나님은 하갈에게 놀라운 복을 약속하시는 걸까요? 한낱 종년에게, 저주받은 자의 자손에게, 착하지도 않은 사람에게, 하나님은 왜 복을 베푸실까요?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라(창16:11)” 하나님은 고통을 들으시는 분이십니다. 하갈은 종이요, 저주받은 자의 자손이며, 착하지도 않은데다가, 기도한 적도 없습니다. 하갈은 하나님에게 기도한 적이 없습니다. 하갈은 기도한 적이 없는데, 하나님은 들으셨습니다. 하갈의 고통을.
기도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기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아도 고통이 너무 심하면 기도할 수 없습니다. 하갈은 하나님을 몰랐고, 하갈의 고통은 너무 큰 것이었습니다. 하갈은 그래서 기도하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하갈의 고통을 들으시고, 하갈에게 응답하십니다. 하갈은 기도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은 응답하십니다.
종 하갈에게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저주받은 자의 자손 하갈에게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착하지도 않은 하갈에게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하갈에게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은 하갈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를 보시고 하갈에게 응답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저 하갈의 고통에 응답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시42:3)” 학대를 받을 때, 실패 했을 때, 진퇴양난의 때, 돈이 없을 때, 일이 되지 않을 때, 사람들이 묻습니다. 아니, 내가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학대받거나, 실패했거나, 오도가도 못하거나, 돈이 없거나, 하는 일이 풀리지 않는 그 사람과 함께, 하나님이 계십니다. 기도마저 할 수 없어 그냥 고통 중에 있는 그 사람에게 하나님은 찾아가십니다. 하나님은 쩌렁쩌렁 소리 높은 기도보다, 기도마저 할 수 없는 침묵 속 고통을 훨씬 더 잘 들으십니다.
한낱 종년에 지나지 않는 하갈을, 저주 받은 자의 자손 하갈을, 조금도 착하지 않아 여주인을 멸시하는 하갈을, 하나님께서 살펴주셨습니다. 하갈도 의아합니다.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창16:13)”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지, 하갈도 납득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저 고통을 들어주신다는 것을 하갈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갈의 고통을 들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고통을 들으십니다. 때로 기도하지 못하여도, 하나님은 응답하십니다.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8:26)" 하나님께서 고통을 들으시기 때문에, 성령의 기도는 탄식입니다. 성령의 기도는 언어를 초월한 것입니다. 말할 수 없는 것이 성령의 기도입니다. 성령께서는 고통당하는 자의 그 고통에 깊이 공감하십니다. 성령께서는 고통당하는 자의 삶에 함께 참여하십니다. 육체가 아닌 성령께서 고통당하는 자의 그 고통을 함께 느끼시며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해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고통을 들어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음소리를 들어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하지 못하고 내뿜는 한숨소리를 들어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고통당하는 자의 그 고통을 들어주시니, 고난은 장차 영광이 됩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
121125_민들레주보.hwp
첫댓글 하나님은 참....우리와 관점이 다르십니다...
그게 이해가 가지않고 받아들이기 힘든데....
그게 나를 향하신 마음이라는 걸 깨달으면
말로 다할 수없는 부끄러움으로 고꾸라집니다...
그래서, 비판이 아니라 저항입니다. 우리는 악을 비판하는 사람이 아니라, 악에 저항하는 사람입니다. 저항을 위해서라면 비판은 허용되는 것이겠구요. 자유하세요. 하나님의 관점과 집사님의 관점이 크게 다르진 않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