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오월 이십사일에서 이십육일, 저는 대학 신입생의 신분으로 선배를 따라 서울 연세대에서 열리는 4기 전학협 출범식에 참여했었습니다. 각 지역에서 모인 동지들로 가득했던 연세대는 총학생회장이자 전학협의장인 윤수진 동지를 필두로 정성껏 행사를 준비했고, 2박 3일동안 다양하고 좋은 프로그램과 행사 진행으로 멀리서 올라간 동지들의 힘을 북돋아 주었습니다.
저는 부산에서 올라갔더랬어요.
이십오일, 무척이나 햇살이 강한 날이었습니다. 연대 곳곳에서 각종 행사가 펼쳐지고 있었고, 오후 세네시쯤이었던가요, 저는 선배와 함께 송석춘씨의 강연을 듣고 있었습니다. 어딘가에서 자꾸만 귀에 익은 목소리가 멜로디를 타고 얕게 들려왔습니다. 강연 도중 쉬는 시간, 로비에서 담배를 피우다 분명히 정태춘님의 노랫소리가 들려오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게다가 아직 앨범으로 출시되지 않은 곡이었어요. 음악을 크게 틀어놓은 것도 아니고, 전학협측의 행사공연도 아니었죠. 저는 남은 강연을 뒤로 하고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찾아 달렸습니다.
그곳은 노천극장이었어요.
바람이 분다, 라는 제목의 콘서트가 열릴 예정이더군요. 불과 몇 시간 후에. 리허설을 하는 모양이었습니다. 지금 리허설을 하는 거냐고, 구경해도 되냐고 공연 관계자로 보이는 분께 묻자 맞다고, 안된다고 하시더군요. 저는 일이분 정도 서성이다 그냥 노천극장으로 들어갔습니다. 누구도 아무말 않던걸요.
결국,
저는 정태춘님을 실제로 보고야 말았고, 생생한 육성과 노래를 들었답니다. 세상에. 너무도 아름다웠어요. 몸과 마음 모두 노랠 들어찼지요. 햇살이 폭포처럼 쏟아지고 있었고 저는 축늘어진 커다란 청바지와 비틀즈의 이메이진, 가사가 가슴에 새겨진 부경학협의 진녹색 로고티를 입고 있었습니다.
가까이에서 뵙고 싶고 인사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저 먼먼 발치에서 님을 하염없이 바라보기만 하다 돌아왔습니다. 반시간이나 지났을까요. 혹시나 저를 보셨을까요. 한없이 쏟아지는 햇빛을 한손으로 가린채 저 윗쪽에 옹색하게 앉아있는 커다란 여학생을요. 님의 목소리와 노래를 깊이깊이 새겨들은 것은 물론 발에 신겨진 투박한 슬리퍼와 생수를 마시는 모습도 기억하고 있답니다. 까만 선글라스도요. 선글라스만 아니었다면 오래된 책방의 주인아저씨처럼 보였을 거예요. 사지도 않을 거면서 바닥에 주저앉아 책을 보는 손님에게 눈치 한번 주지 않는 그런 넉넉하고 말없는.
그날 밤,
공연이 끝날 즈음 사람들이 많이 교문을 나서더군요. 저를 다소 눈살 찌푸리게 한 노란 티셔츠가 참 많이 보였습니다. N씨를 좋아하는 이들의 모임이라지요. 그에 대해 개인적으론 감정이 없으나 요즘 그러한 모임들을 보노라면 상업적인 댄스 가수에 맹목적으로 열광하는 십대 여학생들을 보는 듯한 기분이에요. 공연 뒤에 전해들은 바로는 정태춘님께서 공연중에 떠다니던 노란 풍선을 콕콕 터뜨리셨다더군요. 어쩐지 웃음이 났습니다. 저는 정치니 이념이니 노선이니 하는 것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지만, 좌파가 아닌 이에게 좌파라는 호칭을 붙이는데 마냥 찬성하고 싶진 않아요. 그러한 잘못된 호칭이 아니었다면 그에 대해 이야기할 이유도 없을텐데.
아무튼, 정태춘님은 제가 생각하고 있는 그런 분이셨어요.
(부산에서도 동일한 제목과 출연진의 공연이 열렸었지요? 죄송스럽게도 가보지 못했답니다. 그날 제가 속한 동아리의 공연이 있었거든요.)
햇빛 쏟아지던 그날, 어쩌면 나 왜 여기에 와 있나, 하는 생각을 끊임없이 하고 있었을지도 모를 그날, 제 귓가에 흘러온 님의 노래는 저를 제 의지대로 달리게 해주었고, 강한 햇빛 아래 앉아있는 것을 개의치 않게 해주었고, 보고 싶었던 이를 보게 해준 기쁨을 주었으며, 듣고 싶었던 소리를 듣는 행복까지 맛보게 했지요. 정말 감사했다는 말씀, 드리고 싶어요.
참! 이십주년 기념 앨범, 늘 잘 듣고 있답니다. 사년전 저를 님의 노래에 푹 빠지게 했던 골든 앨범만큼이나 좋은 노래모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