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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44편
시 44:1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 열조의 날 곧 옛날에 행하신 일을 저희가 우리에게 이르매 우리 귀로 들었나이다.
조상들이 자손들에게 전한 유일한 큰 보배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행사(救援行事)이다.
선대(先代)에 하나님의 하신 일을 알게 된 자는, 겸하여 하나님을 알게 된다.
하나님을 참되이 아는 것은 구원을 받음이다.
이 세상 나라들은 그 국조(國祖)들의 영웅적인 행적을 전승하며 교육한다.
신본주의 국가였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놀라우신 행적을 그 후손들에게 기억시킨다.
교회도 그렇게 해야 된다.
그것은 진리에 속한 귀한 교육이다.
시 44:2 주께서 주의 손으로 열방을 쫓으시고 열조를 심으시며 주께서 민족들은 괴롭게 하시고 열조는 번성케 하셨나이다.
이 귀절에 "주께서 주의 손으로"란 말이 첫머리에 나왔으니 그것은, 어순상으로 역설적(力說的) 어투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된 사실이 이렇게 역설되었다.
"열방을 쫓으시고".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수아의 인솔아래 가나안 족속들을 정복하게 된 사실을 가리킨다.
여리고 함락을 위시하여, 가나안 정복은 온전히 하나님의 권능으로 이루어졌다.
그 증거는,
① 그 때에 그 땅의 민족들이 강했음에도 불구하고도 이스라엘에게 정복된 사실,
② 왕벌을 보내어 그 민족들을 쫓아낸 것(수 24:12)과 기타 특이한 섭리에 의하여 이스라엘이 승전하게 된 사실,
③ 하나님이 약속하셨던 것이 필경 이루어진 사실 등이다(창 15:12-21).
"열조를 심으시며".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하신 사실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세우신 것을 식목(植木)에 비유한 말씀이다.
식목자는 그가 심은 나무를 잘 가꾸어서 번성하게 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친히 양육하시고 왕성하게 하셨다.
시 44:3 저희가 자기 칼로 땅을 얻어 차지함이 아니요 저희 팔이 저희를 구원함도 아니라
오직 주의 오른 손과 팔과 얼굴의 빛으로 하셨으니 주께서 저희를 기뻐하신 연고니이다.
히브리 원문에는 이 귀절 초두에 "왜 그런고 하면"(키)이란 이유 접속어가 있다.
그러므로 이 귀절은 앞절 말씀의 이유를 보여준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을 정복할 때에 군대를 사용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군대의 승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었다.
"주께서 저희를 기뻐하신 연고니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그처럼 특별한 은혜를 베푸신 것은, 이스라엘이 외로운 까닭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그 기쁘신 뜻대로 이스라엘에게 무조건적인 호의를 가지신 까닭이었다(신7:7,8, 9:6).
시 44:4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왕이시니 야곱에게 구원을 베푸소서.
"주는 나의 왕이시이"란 말은 히브리어로 아타 후 말키인데 정역(正譯)하면, "당신 오직 당신이 나의 왕이시니"이다.
이것은, 이 시인이 그 자신과 그의 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를 순종하는 심리적 표현이다.
이만큼 하나님께 순종하는 심사가 있는 자로서는, 하나님의 특은을 청구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구원"(이스라엘에게 구원)을 주시기를 기구(祈求)하였다.
시 44:5 우리가 주를 의지하여 우리 대적을 누르고 우리를 치려 일어나는 자를 주의 이름으로 밟으리이다.
이 시인은, 이 말을 할 때 이스라엘의 역사상 경험에 의하여 생각한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에는, 여호와를 믿은 자들이 권능을 받아 적군을 물리친 일들이 많다.
예를 들면 기드온(삿 7장), 다윗(삼상 17장) 등이 그리하였다.
하나님은 영적 사리(靈的事理)에만 아니라, 군사 관계도 통치하신다.
"주를 의지하여"란 말은 히브리 원어로 뻬햐인데, "당신으로 말미암아"(by Thee)라고 직역(直譯)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권능을 힘입는 것을 가리킨다.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을, 신앙에 의하여 주님의 힘으로 하게 되는 것은, 고금(古今)이 일반이다.
제 2차 세계 대전 때에 영국의 도비 장군(General Ddbbie)이 지중해의 말타라는 섬을 안전히 수비한 것은, 하나의 이적이아고 한다. 그가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면서 그 섬을 파수했으므로 독일 공군의 공격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시 44:6 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 칼도 나를 구원치 못하리이다(시20:7 참조).
인간은 그 소유를 의지하는 경향이 많다.
군인으로서 병기를 소유했으면 그것을 의지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고 병기를 믿는 자는 그 병기로 자신을 멸망시킨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하신 것도 그 의미이다(마 26:52).
시 44:7 오직 주께서 우리를 우리 대적에게서 구원하시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로 수치를 당케 하셨나이다.
히브리 원문에는 이 귀절 초두에 "왜 그런고 하면"이란 말(키)이 있어서 이 귀절이 앞절의 이유임을 보여 준다.
앞 절에서 이 시인은 자기 자신의 힘을 믿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 이유를 여기서 밝혔으니, 곧, 그가 하나님의 구원을 믿는 까닭이라고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힘을 믿을 때에는, 우리 자신의 힘을 믿지 않게 된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과 우리 자신을 믿는다는 것은 피차 서로 용납 못한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잘 믿으려면 자신을 믿지 않아야 된다.
시 44:8 우리가 종일 하나님으로 자랑하였나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영영히 감사하리이다(셀라).
여기 "자랑하였나이다"함은 교만한 자랑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으로서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하는(6절) 겸손으로 하나님 제일주의를 가짐이다(고전1:31).
우리가 현재 혹시 하나님의 새로운 은혜를 받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를 찬송해야 된다.
그 이유는, 우리가 과거에 그의 은혜를 받았을 뿐 아니라, 앞으로도 영영토록 그의 무한하신 은혜를 받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도 그를 찬송하고 또 영영토록 찬송해야 된다.
주님을 "자랑하였다"는 말이나 "감사하리"라는 말은 주님을 찬송한다는 뜻을 포함한다.
시 44:9 그러나 이제는 주께서 우리를 버려 욕을 당케 하시고 우리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
이 시인은, 여기서부터 그 당면한 현실에 대하여 탄식한다.
곧, 과거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권능으로 붙드셨는데, 어찌하여 지금은 내버리신 것처럼 두시는지?
이때에 특별한 범죄 사건이 없었는데도(17절), 그 나라가 고난을 받음은 무슨 이유인가?
이 문제는 그 시인이 알 수 없는 문제였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인간이 다 알기는 어렵다.
이사야 55:8,9에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라고 하였다.
우리가 한 가지 기억할 것은, 이 시인이 알기 어려운 고난을 앞에 놓고 원망한 것이 아니라 기도하였다는 것이다.
"버려"란 말은 히브리 원어로 자낙타인데, 미워하여 내버림을 가리킨다(Calvin).
이 말은, 그 때에 이스라엘이 당한 참상이 어떠하였음을 보여 준다.
그 사랑하는 백성을 미워하는 듯이 내버려 두시는 하나님의 오묘한 경륜을, 우리는 해석하기 어렵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배울 것은, 우리 신자들이 혹시 영적 불경기를 당하여도 낙심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미워하시는 듯해도 실상은 그런 것이 아니니, 참아 기다리기만 하여라.
"우리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의 패전한 사실을 염두에 둔 것이다.
하나님께서, 어떤 때에 그 사랑하시는 백성을 패전하도록 버려두시는 일이 있다.
그것은 마치, 독수리가 그 새끼를 높은 낭떠러지에서 내려뜨리는 것과 같다.
독수리는 그런 방식으로써 그 새끼로 하여금 잘 날도록 연단을 받게 한다고 한다.
시 44:10 주께서 우리를 대적에게서 돌아서게 하시니 우리를 미워하는 자가 자기를 위하여 탈취하였나이다.
이것은, 윗절 한반절 말씀에 이어서 이스라엘의 패전 경험을 가리킨다.
그들은, 원수로 더불어 싸우다가 패배하여 돌아섰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탈취를 당하였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지 못하는 자들은 언제나 실패할 수 밖에 없다.
신명기 32:30에 말하기를, "그들의 반석이 그들을 팔지 아니하였고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어주지 않으셨더면 어찌 한 사람이 천을 쫓으며 두 사람이 만을 도망케 하였을까"라고 하였고, 시 127:1에는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라고 하였다.
성도들도 버림을 당한 것처럼 일시 동안 실패하는 때도 있다.
시 44:11 주께서 우리를 먹힐 양 같게 하시고 열방 중에 홑으셨나이다.
이것은, 정복 당한 이스라엘 민족이 받는 압박에 대하여 진술한다.
그들의 원수가 그들을 그렇게 비참(悲慘)하게 만들었지만, 이 시인은 그 원인자가 하나님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그 어떠한 일도 발생할 줄 없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하나님의 주권을 무상(無上)의 것으로 알았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능히 구원하실 수도 있다고 믿고 기도한다.
"먹힐 양 같게 하시고" 곧, 이스라엘 민족 중 어떤 사람이 양처럼 살육 당했다는 뜻이다.
"열방 중에 홑으셨나이다" 이것은, 전쟁에 포로된 자들에 외국에 이끌려 간 사실을 가리킨다.
어떤 비평가들은 이를 후대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 사실을 가리킨다면서, 이 시편을 후대의 작품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바벨론 이외의 다른 나라들에게도 패전하고 포로된 일이 있었다(욜3:2, 암1:6,9, 왕상8:46).
시 44:12 주께서 주의 백성을 무료로 파심이여 저희 값으로 이익을 얻지 못하셨나이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민족이 외국에 무가치하게 포로되어 간 사실을 통탄한다.
이 시인은 여기서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이스라엘 패전 후의 참상을 애석히 여기는 것 뿐이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비참하게 된 자들을 긍휼히 여기시어서 구원하시는 일이 있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 시인은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의 비참한 처지를 하나님 앞에서 진술하며 애소한다.
시 44:13-16 주께서 우리로 이웃에게 욕을 당케 하시니 둘러 있는 자가 조소하고 조롱하나이다 주께서 우리로 열방 중에 말거리가 되게 하시며 민족 중에서 머리 흔듦을 당케 하셨나이다 나의 능욕이 종일 내 앞에 있으며 수치가 내 얼굴을 덮었으니 나를 비방하고 후욕하는 소리는 인함이요 나의 원수와 보수자의 연고니이다.
이 귀절들은, 이스라엘 민족과 및 이 시인 자신이 외국인의 비방을 받고 있는 사실을 진술한다.
언제나 패전 국가는 승전 국가 앞에서 천대와 멸시를 받는 법이다.
이 시인은, 그런 수모를 받는 중에서도 행복되다.
그 이유는, 그가 그 모든 원수들까지도 제재(制裁)하실 수 있는 만군의 하나님을 알고 그에게 기도하기 때문이다.
시 44:17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임하였으나 우리가 주를 잊지 아니하며 주의 언약을 어기지 아니하였나이다.
모든 고난이 와도 변하지 않는 신앙은 귀하다.
약한 신자들은, 핍박이 올 때 불의와 타협하고 범죄할지 언정 고난은 면하려 한다.
그러나 충성된 자들은 그런 때에도 굳게 서서 동요치 않는다.
그들은, 원수의 간교한 타협책에도 넘어가지 않으며, 폭력의 위협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는다.
시 44:18 우리 마음이 퇴축(退縮)지 아니하고 우리 걸음도 주의 길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나
이스라엘 백성은 외국에 압제 아래서도 주님의 진리에서 탈선하지 않았다.
그런 일은 하나님의 은혜로야 될 수 있는 것이다.
그 때 그들이 외국의 압제는 받았을 망정, 그들의 영적 생활은 도리어 유복하였다.
혹 평안한 환경에 처한 자들이 행복된 것 같으나, 그들의 영적 생활은 해이(解弛)해지는 법이다.
시 44:19 주께서 우리를 시랑의 처소에서 심히 상해하시고 우리를 사망의 그늘로 덮으셨나이다.
이것은, 그 때에 이스라엘 백성이 당하고 있었던 압제와 핍박을 비유한다.
그 고난은 극단적인 것이었으니 만큼, 그것을 "시랑의 처소"(용들의 처소), 혹은 "사망의 그늘"이라고 하였다.
이 시인과 및 동지자들은, 그런 험악한 핍박 속에서도 하나님을 저버리지 않았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신자의 유일한 목적이요 유일한 즐거움이다.
세상의 그 무엇이 신자의 신앙의 절개를 깨뜨릴 수 있겠는가!(롬8:35).
시 44:20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잊어 버렸거나 우리 손을 이방 신에게 향하여 폈더면.
하나님을 잊음은 배교(背敎)에 이르는 첫 걸음이다(Spurgeon).
"우리 손을...편다" 함은, 무엇을 간구하는 손짓을 가리킨다(출9:29,33, 왕상8:38, 사1:15).
경건의 참된 증표는, 깊은 고난 중에서도 마음이 갈리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기도함이다(Calvin).
시 44:21 하나님이 이를 더듬어 내지 아니하셨으리이까 대저 주는 마음의 비밀을 아시나이다.
이 말씀을 보면, 이 시인의 경건이 얼마나 순결하였던 사실이 드러난다.
그는, 마음속을 다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신앙 절개가 깨끗하였음을 증거한다.
진실한 신자는, 이렇게 하나님이 자기 마음을 아신다는 신념 밑에서 움직이고 있다.
그는, 사람들의 눈보다 하나님의 눈을 무서워하며, 사람이 그를 알아줌보다 하나님의 알아주심으로써 만족한다.
시 44:22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이 시인과 동지자들은, 애매하게 핍박자들의 수중에서 수난하고 있었다(롬8:36).
우리 기독 신자들도 이런 고난을 받는다.
우리가 사언행에 실수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당장 벌하지 않으신다.
도리어 감사하게도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위하여 영광의 고난을 받을 자격자가 되게 하신다(Spurgeon).
시 44:23-26 주여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일어나시고 우리를 영영히 버리지 마소서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고 우리 고난과 압제를 잊으시나이까 우리 영혼은 진토에 구푸리고 우리 몸은 땅에 붙었나이다 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 주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우리를 구속하소서.
이 귀절들은 시인의 결론적 기도를 포함한다.
"주여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실상 주무신다는 의미를 포함하지 않는다.
이 말씀은 순전한 시적 표현으로 어떤 때에 하나님께서 잠잠하사 기도자에게 응답하지 않으심을 가리킨다(121편).
이 말은 불평과 조급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겸손과 대망을 가진 간절한 기도이다.
그것은, 26절에 "주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우리를 구속하소서"라고 한 말씀은 보아서 알 수 있다.
이 성도에게는 원망하는 심사가 없고, 겸손하게도 하나님의 인자에만 한 줄기의 소망을 가지는 믿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