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5(연산군 11).
조선 전기의 환관.
본관은 전의. 세종부터
연산군까지 일곱 왕을 시종했다. 몇 차례 관직을 삭탈당하고 유배되기도 했으나 곧 복직되었다. 1460년(세조 6) 원종공신(原從功臣) 3등에 추록되었으며, 성종 때에는 대비의 병을 치료하는 데 공이 있다고 하여 정2품인 자헌대부(資憲大夫)가 되었다. 1505년(연산군 11)에 연산군이 궁중에서 자신이 창안한 처용희(處容戱)를 베풀고 음란한 거동을 벌이자 "이 늙은 신이 네 임금을 섬겼고, 경서와 사서를 대강 통하지만 고금에 상감과 같은 짓을 하는 이는 없었다"고 직간하다가, 연산군에게 직접 다리와 혀를 잘리고 죽임을 당했다. 죽은 뒤 부모의 묘가 파헤쳐지고 처(處)와 선(善) 두 글자의 사용이 엄금되었으며, 본관인 전의도 없어지는 등 수난을 당했다. 연산군이 폐위된 뒤 1506년(중종 1) 고향에 공적을 기리는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1457(세조 3)~1494(성종 25).
조선의 제9대 왕(1469~94 재위).
개요
〈경국대전〉의 반포와 전세(田稅)의 관수관급제(官收官給制) 실시, 유학의 장려 등을 통해 태종대에 본격적으로 정비되기 시작한 조선봉건국가체제를 완성했다. 재위중 훈구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신진사림세력을 등용함으로써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과 투쟁으로 특징지어지는 조선 중기의 권력구조가 배태되었다. 이름은 혈(娎)
세조의 큰아들인 덕종(德宗)의 둘째아들이며, 어머니는 한확(韓確)의 딸
소혜왕후(昭惠王后)이다. 비(妃)는 영의정 한명회(韓明澮)의 딸
공혜왕후(恭惠王后)이며, 계비(繼妃)는 우의정 윤호(尹壕)의 딸
정현왕후(貞顯王后)이다. 1461년(세조 7) 자산군(者山君)에 봉해졌다가 1468년 잘산군(乽山君)으로 개봉(改封)되었다. 이해 세조가 죽고 예종이 19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게 되자 세조의 즉위 때 공을 세운 신숙주·정인지·한명회 등의 훈신(勳臣)들이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정치적 지위가 급상승한 남이 세력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이에 따라 왕권이 상대적으로 약화된 가운데, 1469년 예종이 죽자 병약한 형 월산군(月山君)을 대신하여 13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7년간 정희대비(貞熹大妃:세조의 妃)의 수렴청정을 받아 독자적으로 정국을 운영하지 못했으며, 훈신세력이 모든 군국사무를 주도했다. 훈신세력은 성종이 즉위하던 해 가장 위협적인 정적이던
구성군(龜城君) 준(浚)을 유배시킴으로써 권력을 더욱 안정시킬 수 있었다. 1476년(성종 7) 친정(親政)을 시작했으나 세조와 같은 전제권을 확립하지는 못했다. 이해 공혜왕후가 아들이 없이 죽자 윤기견(尹起畎)의 딸
숙의윤씨(淑儀尹氏)를 왕비로 삼아 연산군을 얻었다. 그러나 윤씨의 투기가 매우 심해 왕의 얼굴에 상처를 입히는 사건까지 일어나자 1479년 윤씨를 폐위하고 1482년 사사(賜死)했다.
성종은 친정을 시작하면서 신진사림세력을 등용하여 훈신세력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시키고자 했다. 사림세력은 성종대에 이르러 뚜렷하게 권귀화(權貴化)한 훈구세력을 비판하면서 향사례(鄕射禮)·향음주례(鄕飮酒禮) 보급운동과 두 의례(儀禮)에 입각한
유향소 재건운동을 통해 기존의 훈구세력에게 장악된 향촌질서를 성리학적 향촌질서로 재편하고, 나아가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그들의 이상이었던 도학정치(道學政治)를 실현하고자 했다. 이러한 사림세력의 정치적 지향은 성종의 왕권강화 노력과 많은 부분 일치했으므로, 성종대에는 김종직·김굉필·정여창·김일손·유호인 등의 사림이 정계에 진출하고 1488년 유향소가 부활됨에 따라 조선 중기 사림정치의 막을 열었다. 그러나 사림의 정계진출 및 급속한 성장은 훈구세력과의 필연적 마찰을 불러일으켜 연산군 때부터 시작된 4대 사화(士禍)로 이어졌으며 지방에서는 유향소의 지배권을 둘러싼 대립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성종은 재위 기간 동안 선왕들의 통치제도 정비작업을 법제적으로 마무리하는 한편, 숭유억불의 정책을 더욱 굳건히 펴 나갔다
(→ 숭유억불책). 조선왕조 통치체제의 기본방향을 제시하는 〈경국대전〉은 세조 때 건국초의 법전인 〈경제육전〉의 원전(原典)과 속전(續典), 그리고 그 뒤의 법령을 종합하여 편찬되기 시작하여 원래 예종 때 반포될 예정이었으나 예종의 죽음으로 보류되었다. 성종은 즉위 이후 〈경국대전〉의 편찬사업을 이어받아 1471, 1474년 2차례의 수정을 거쳐 1485년 이를 최종적으로 완성·반포했다. 이어 이극증(李克增) 등에게 명하여 1492년 당시 사회 실정에 비추어 〈경국대전〉과 불일치를 보이는 부분을 보완,
〈대전속록 大典續錄〉을 편찬하게 했다. 이로써 '경국대전체제'라고 불리는 조선 일대(一代)의 통치이념과 국가체제가 완성되었다. 한편 성종은 불교를 통제하기 위해 1471년
간경도감(刊經都監)을 폐지했다. 이어 1469년 사족(士族) 부녀가 승려가 되는 것을 금지하고 1471년에는 도성 안에 있는 사찰을 도성 밖으로 철거했다. 1492년에는 도첩(度牒)의 법을 중지시켰다. 이러한 억불정책으로 불교 및 사원세력은 세조대에 비해 위축되었다. 반면 유학을 장려하기 위해 1475년 존경각(尊經閣)을 세워 왕실소장의 경서를 보관하여 열람하게 했으며 수차례에 걸쳐 성균관과 각도의 향교에 학전(學田)과 서적을 지급하고 유생들의 군역을 면제시켜 주었다. 특히 1466년 겸예문관제도(兼藝文館制度)를 확충하여 사령(辭令)을 제찬(製撰)하는 고유한 임무에 더하여 경연관(經筵官)·고제연구(古制硏究)·편찬사업 등 옛 집현전의 기능까지 겸하게 했다. 1478년에는 단순한 장서(藏書) 기관에 불과하던
홍문관을 예문관의 집현전적인 기능을 편입시켜 명실상부한 학문연구기관으로 개편했다. 이밖에도 유학의 진흥과 깊은 관련을 가지는 편찬사업에도 힘써 〈동국여지승람〉·〈동국통감〉·〈악학궤범〉·〈국조오례의〉 등을 간행했으며, 1484년에는 갑진자(甲辰字) 30여 만 자를 주조하여 인쇄술을 발전시켰다.
조선의 수조권(收租權) 분급제도인 과전법은 1466년 현직관리에게만 과전을 지급하는 직전법으로 바뀌었다. 이에 관료들이 퇴직 후의 생활보장을 위해 현직에 있을 때 농민을 수탈하고 토지를 겸병하는 폐단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러한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 1470년 관수관급제를 실시했다. 그 내용은 국가가 농민으로부터 직접 조세를 거두어들인 다음 관리들에게 녹봉을 현물로 지급하는 것이었다. 관수관급제의 실시로 우리나라 토지제도의 한 축이 되었던 수조권적 토지지배가 소멸하게 된다. 한편 국방대책에도 힘을 기울여
윤필상(尹弼商)으로 하여금 1479년 압록강 이북의 건주야인(建州野人)의 본거지를 정벌하게 하고, 1491년에는
허종(許倧)을 도원수로 삼아 두만강 이북의 우디거 부락을 소탕했다. 능은 선릉(宣陵)으로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에 있다. 시호는 강정(康靖)이다.
드라마라는 것이 현실이 아니면서, 인간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이상적인 모습을 그려보게 하는 힘이 있다. 그것은 가상의 힘이랄까.... 소설이나 영화나 그런 것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