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승재
•1960년 《자유문학》, 196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
•경북문인협회·부산가톨릭문인협회 회장 역임
•저서 《장승재 시선집》 1·2 등
•한국문인협회, 현대시인협회 회원
형산강에서 외 9
경상북도 동해남부 지역을 가로 흘러
포항 영일만으로 빠지는 형산강
거의 매일이다시피 형산강을 지나며
저, 푸른 물 천천히 흐르는 강물을 보면서
큰형님 같다고 항상 느낀다.
6·25동란이 한창일 때
괴뢰군에 밀려 후퇴하던 우리 국군
이 형산강 어귀에서 얼마나 피를 흘렸나
꺾어지는 양동 마을이 보이는 곳
수많은 젊은 피가 강물을 붉게 물들인 곳
형산강은 혈산강이었다.
형산강 둑길을 걸으며
그 옛날 숨져 간 젊은 넋을 기리며
큰형님 같은 그들이 아니었으면
오늘 나는 어떻게 이 강둑을 걸을까
형산강, 이곳의 옛일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펭귄의 사랑
남극바다에 사는 펭귄들이
눈보라 치는 추운 날에는 밖으로 나와
얼음 위 바람을 맞으면서도
모두가 한 덩어리 되어 모여 있는 영상
텔레비전에서 보며 펭귄들의 따뜻한 사랑
어쩌면 사람들이 보고 배우라는 듯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웅크리고 있네.
혼자서는 아무리 애써도 할 수 없는 것들
뿔뿔이 흩어져서는 도저히 이뤄낼 수 없는 것을
우리 사는 세상에는 너무도 많다.
둘이 힘을 모으거나 부둥켜안으면
추위도 이겨내고 무거운 것도 옮길 수 있다.
둘보다 많은 사람이 한곳에 모여
서로 온기를 나누며 서로 사랑하면
다툼도 없어지고 하나로 뭉쳐진다는 거
우리가 다 알고 있으면서 하지 않는 것은 무엇일까?
그 이유를 따지기 전에 그냥 실행하는
펭귄 같은 마음으로 살아가야 한다.
펭귄의 아름다운 사랑을 느껴보아야 한다.
풀꽃의 의미
들과 산에 봄이면 돋아나는 풀들
그 풀들 속에 꽃을 피우는 꽃 풀이 있다.
무성한 풀 더미 속에 꽃 풀은 숨어 있다.
눈으로는 가려낼 수 없는 꽃 풀
잎이나 줄기가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를 맞고 햇볕을 쬐며
꽃 풀은 드디어 꽃술을 뽑아 올리고
어느 날 아침 예쁜 꽃을 피운다.
붉고 노란색, 분홍이기도 파랑이기도 한 빛깔
꽃은 그제야 제 모습을 드러낸다.
사람도 꽃 풀과 같지 않을까?
초등학교 운동장에 모여 있는 어린이들
그중엔 빛나는 꽃을 피울
꽃 풀 같은 어린이가 숨었다는 사실.
풀밭 길을 걸으며 오늘은
꽃 풀의 오묘한 숨은 뜻을 보았다.
뽕나무
우리 집에 처음 오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묻는 말이 있다.
-장형, 마당 한가운데에 웬 나무야?
그렇다, 이십 년 전 이사 와서
마당에 뽕나무 묘목을 심었는데
그새 크게 자라서 마당 덮개가 되었다.
뽕나무, 나무 중에서도 내가 좋아한다.
넓은 잎으로 시원히 그늘도 드리우지만
해마다 유월이면 달콤한 오디를 준다.
오디, 꽃을 언제 피우는지 모르지만
새봄, 새잎이 트면, 가지마다 옹골옹골
오디 눈이 맺히고 오뉴월이 되면
처음엔 빨갛게 나중엔 보랏빛으로
가지마다 소복이 열리는데 그 맛이 참 좋다.
오디뿐만 아니라 속잎을 따서
데쳐놓으면 고소한 쌈이 된다.
뽕나무, 마당 복판을 차지해도 나의 친구다.
우 산
—아름다운 모습
비 오는 날 거리에서
두 남녀가 팔을 끼고
작은 우산 하나 쓰고 앞서가는데
오른쪽 어깨와 팔이 비에 젖은 남자
왼쪽 어깨와 팔과 치마까지 젖은 여자
그래도 둘은 팔짱을 끼고 머리를 맞대고
빗물을 철벅거리며 걸어간다.
둘 사이가 부부인가 연인인가
부부라면 신혼일 테고
연인이라면 곧 결혼할 남녀라며
으레 짐작하며 뒤따라 걷는데
그들 앞에 우산 없이 비를 맞고 오는 학생
남자가 손에 쥐고 있던 접이우산을 쑥 내민다.
아하- 참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과메기
어느 먼 바다를 헤엄치던 청어가
오늘 저녁 내 술상에 올랐다.
푸른 등 비늘은 사라지고
껍질도 벗겨진 채 벌거숭이가 된 청어
검붉은 살은 이미 마르고 햇볕에 익어
과메기란 이름으로 다가왔구나.
생김 한 장에 녀석을 얹고
생마늘 한쪽 초장에 찍어 입에 넣으면
아, 청어가 뛰놀던 그 바다 내음
달짝지근한 맛과 함께 기분을 돋우는구나.
언제부터 과메기가 술안주가 되었는지
일품 맛을 내는 청어 과메기
한 마리 두 마리 먹다 보니 술이 오르고
마침내 청어처럼 나도 과메기기 된다.
그 늘
빛이 있는 곳에 그늘이 있다.
나무 그늘 아래엔 짐승들이 쉬고
산그늘 아래엔 사람들이 모여 산다.
그늘은 조금은 어둡지만
고단함을 달래주는 쉼터를 준다.
사람에게도 그늘은 있다
자비로움의 빛, 사랑의 빛으로
사람에게 은은한 그늘을 드리운다.
그 그늘 아래 부부가 화목해지고
부모의 그늘 아래 자녀가 커간다
그래서 그늘은 보금자리가 되고
소중한 행복의 꽃을 피우는 나무가 된다.
그늘을 지우거나 피하면
땡볕 아래 메마르고 외톨이가 된다는 것
그늘은 조용히 가르치고 있다.
디 자로 끝나는 말
오디를 따 먹으며
참 달고 맛있다 하며
오디란 말도 참 곱다고 생각했다.
오디, 우리말에서 디 자로 끝나는 말
무엇이 있을까 궁금했다.
-오디, 잔디, 마디, 반디…
그런데 경상도 말에 디 자로 끝나는 말이
참 많다는 거 처음 알았다.
<가>부터 <하> <히>까지 찾아보았다.
검디- 검둥이, 고디-고동, 구디- 구덩이, 궁디-궁둥이
누디- 누덩이, 단디- 단단히, 만디- 꼭대기, 매디- 매듭
문디- 문둥이, 불디- 불덩이, 쌍디- 쌍둥이, 순디- 순둥이
엉디- 엉덩이, 주디- 주둥이, 초디- 초등학생, 코디- 콧등
판디- 판자, 판매대…
더 있을 것 같지만, 삼삼…
그러고 보니 사투리가 마냥 나쁜 건 아니지.
봄을 먹다
—조남훈 시인에게
삼월 들어 새봄을 가지고 온다고
울산에 사는 조 시인이 연락을 했다.
새봄을 가져온다니?
속으로 웃으며 안강역으로 마중을 나갔다.
다리가 실하지 않아 절룩거리는 시인
열차에서 내려 나오는데
한 손에 지팡이, 한 손에 보따리를 들었다.
몇 달 만에 만나는데 인사보다 먼저
새봄 가져온다고 수고했소.
그 보따리 안에 봄이 들었군요.
허허, 그래요. 우리 할멈이 정성껏
봄동을 절여 맛있게 담근 겉절이여
아, 그렇구나. 혼자 사는 내가 안쓰러워
새봄 봄동으로 김치를 담가 왔구나. 허허…
그날 저녁밥 먹을 때 봄동 겉절이
정말 입안 가득히 온몸으로
새봄이 스멀스멀 맛있게 스며들었다.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
오래전 성지순례로 이스라엘에 가서
예루살렘의 주님의 발자취를 찾아보고
좁은 골목 주님이 마지막으로 걸으셨던
십자가의 길, 비아 돌로로사
기도하며 그 길을 걸어 골고다를 찾는데
아, 왜 이렇게 사람들이 복작대고
해골산은 보이지 않는가?
유대인들은 나 몰라라 하듯
좁은 골목에 점포를 차려 장사를 하고
순례객들에게 무엇인가 팔려고
소리소리 지르며 호객을 하는구나.
좁은 골목 벽에 조그맣게 붙여놓은 십사처 숫자
그래서 이 골목이 십자가의 길인데
유대인들 때문에 분심이 생기고
흡사 주님을 비아냥거리던 그 옛날처럼
골목이 슬프고 어지러웠다.
아, 이 길. 비아 돌로로사
좀 거룩하게 좀 엄숙하게 만들어
세상에 하나뿐인 거룩한 길이 되도록
할 수는 없었을까?
슬픔과 아쉬움, 울분이 솟구치던 시간이었다.
작은문학 2022 하반기호(통권 5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