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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여름평화여행 고구려 기행 이틀째 2007. 8.7 비-중앙탑, 충주박물관-인천공항
민경은 추천 0 조회 70 07.08.23 16:50 댓글 18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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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7.08.23 17:41

    첫댓글 정말 올리시느라 고생 많으셨겠네요..^^ 기억이 새록 새록합니다. 또 다음이 기대가 됩니다. 내일 기대해도 되나요...^^

  • 작성자 07.08.23 21:36

    부지런 떨어보지요. 학기초라 덥고 공부도 안되고 하니 ...

  • 07.08.24 00:51

    그렇죠^^ 쭉~~~~~~~~~~~~~~가는거야..

  • 07.08.24 00:53

    근데 큰일 났네요..중앙탑이 언제부터 저렇게 기울어졌지요?

  • 작성자 07.08.24 08:54

    찍사가 중심이 안서서 그런가봐요.

  • 작성자 07.08.24 08:54

    아님 한국의 피사의 사탑

  • 작성자 07.08.24 09:03

    중앙탑은 신라가 중원을 차지한 기념으로 세웠답니다. 중원은 國元이라고도 충주는 忠州 --- 中心고을 이라는 뜻이 어느 곳이든 사람사는 곳에는 노른자위가 있겠지요. 고구려가 눈을 황하강 중원으로 돌렸더라면-- 이런 우매한 생각도. 아마도 살기 좋은 땅을 더 차지하려고 한 것 아닐까요? 한족의 세력이 점점 커지고

  • 07.08.26 01:20

    음,,,,제가 알기로는 중앙탑은 신라가 부분통일을 기념하기위해 세운 것이고,중원은 國原이라했다고......법사님께서 확인 좀 해 주셈^^

  • 작성자 07.08.26 14:36

    또 찝혓음, 감사 법사님 SOS!!! 이거 신뢰가 떨어져 큰일!!! 모든 보도는 확실함은 기본으로 해야하거늘...

  • 작성자 07.08.27 09:12

    國原小京 맞습니다 맞고요. 감사합니다. 게속 부탁 드립니다

  • 07.08.26 19:11

    부분 통일이라??? 처음 듣는 설입니다. 중원탑평리칠층석탑을 중앙탑이라고 불리는 것은 여러 건립 설 중 하나입니다. 다음은 관련서적에서 찾은 내용입니다. <또 다른 일설에는 신라 원성왕 12년 국토 중앙을 표시하기위해 탑평리에 임시 대리석탑을 세우고 이를 확인하기위해 건각자를 뽑아 남북의 끝으로 파견한 다음, 동시에 출발하도록 누차에 걸쳐 시험해도 반드시 탑평리에서 만나게 됨으로 이 탑을 화강암으로 크게 개축하고 중앙탑이라 불렀다. 가금면 소재지의 동명을 '안반내'라고 하는것도 '한반래'에서 한반도의 반 즉 중앙이 된다는 뜻이며, 이 곳이 국토의 중앙지라는 사실을 내포하고있다.> 중원문화 이야기(1) 중에서

  • 07.08.26 19:26

    참고 - 신라 제38대 원성왕(元聖王, 재위 785∼798) ....이미 신라의 통일이 완성된 시기입니다.

  • 07.08.26 19:35

    국원이라는 지명은 삼국사기에 고구려가 국원이라고 했다는 기록에 의한 것입니다. 후에 신라가 이 땅을 차지한 후 국원소경이라고 했고 후에 중원경이라고 불리면서 중원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것입니다.

  • 작성자 07.08.27 09:07

    5 소경은 신라시대에 중요한 지역에 두었던 5개의 특수행정구역으로 소경은 통일 이전부터 설치되기 시작하였으나 아직 전국적으로 체계를 갖추어 정비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통일 뒤인 문무왕 18년(678)에 북원소경(원주), 20년(680)에 금관소경(김해)이 설치되었으며, 신문왕 5년(685)에 서원소경(청주)과 남원소경(남원)이 설치되고, 통일 이전인 진흥왕 18년(557)에 설치된 국원소경(충주)이 중원소경으로 고쳐짐으로써 5소경이 완성되었다.

  • 작성자 07.08.27 09:07

    5 소경은 동서남북중의 방향에 맞추어서 다섯으로 정리된다. 이것은 왕경(경주)이 동쪽 한 끝에 너무 치우쳐 있는 결함을 보충하려 한 뜻을 담고 있다. 때문에 여기에는 왕경의 귀족들을 이주시켜 거주하게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소경에는 정복지역의 지배층을 사민(徙民, 옮겨 거주하게 함)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예컨대, 중원소경에는 대가야의 귀족들(예 : 강수, 우륵, 김생)이, 남원소경에는 고구려의 귀족들이 옮겨 살았다. 이렇게 볼 때 5소경은 지방 세력을 견제하는 역할도 담당하였다고 할 수 있다.

  • 07.08.29 02:15

    아, 법사님 친절한 댓글에 감사. 제가 부분통일이라고한 것은 애초에 우리 민족의 터전이었던 고조선강역을 신라의 영역에 두지 못한 것,오래 전부터 북한 학계에서는 신라를 발해와 더불어 남북국시대라고 규정한 점,20여년 전부터 한국학계에서도 신라의 통일을 미완의 통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라는 점등에 근거한 것입니다. 제대로 된 통일이었다면 중앙탑은 평양 북쪽 어드메쯤 아니면 이번에 선재님들의 여행길에서 구경할 수 있었겠지요.^^

  • 07.09.13 16:02

    자꾸 반복해야 할 듯.... 박물관에도 무시로 드나들고...

  • 작성자 07.09.13 17:25

    참 좋은 곳에 사시니.. 여유있게.. 저는 아직 중앙박물관도 안 가보고 그나저나 선재학교 연밭 위에 다방을 하나 개업해야 할 듯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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