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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부전선 이상 없다
- 공산회(형제)전방기행...
태풍 곤파스 7호가 강하게 북상하면서 중부내륙지역에 상당한 피해를 줄 것이라는 기상 속보가 계속되는 데... 두 동생의 강한 결심으로 일정대로 전방 길을 따라 나섰다.
정작 목적지를 향하여 고속도로에 올라서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다. 벌써부터 계획된 일정인데 작은 핑계 때문에 취소하게 되면 심리적인 균형이 흐트러지게 되고 귀한 일정이 영원히 무산될 수도 있기 때문에 다소 무리가 따르더라도 강행군을 서두를 때 오히려 순리로 바뀌는 경향을 경험하며 살아왔다.
예외 없이 오늘도 날씨는 거짓말 같이 우리의 앞길을 안전하게 열어주었다.
철원을 중심으로 군 복무와 전방에서 오래 살았던 D동생의 운전과 가이드는 최고의 실력이었다.
1착지는 기억도 새로운 고석정孤石亭이다. 40년 전 35개월의 긴 군 생활을 이 터에서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간 뒤 처음 이다. 어쩌면 뒤돌아보지 않은 나를 원망깨나 했을 낫 익은 땅에서 솔직한 심정 같아서는 땅에 엎드려 친구親口라도 하고 싶었다.
돌, 고려 승려 무외無畏의 글
과 김양경의 시 등에서 전해
지는 전설의 고향 고석정에 이르니 고석정 휴게소
옛님이 반겨주는 듯 구름도 걷히고 진평왕이 비석을 세웠
고, 고려 충숙왕이 노닐던 곳, 고석바위에 이른다. 특히 조선 명종 때는 의적당義賊黨의 두목 임꺽정林巨正이 고석정 건너편에 돌 벽을 높이 쌓고 칩거하면서 북쪽에서 내려오는 조공물朝貢物을 탈취하여 빈민을 구제했다고 하는 유명 관광지를 돌아 나오니 오전 11시 전방에 들어갈 시간이다. 5년 전 만해도 군부대에서 관리하던 전방 관광업무가 지방자치단체로 위임되어 친절한 서비스는 물론이고 대단히 편리해졌다는 얘기다.
너무 오래되어서일까? 제2땅굴과 승리전망대로 향해 가는 길이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큰 저수지가 철책선 가까이 있어서 아무래도 이상하여 알아보니 1976년도에 완공한 토교저수지다.
둘레가 16km에 면적은 약 100만평 규모(몽리면적 : 4,5000만평)이며, 평균 수심은 10m나 된다. 우리지역 욱금 저수지의 서너 배의 크기기다. 철원평야는 북한의 봉래호(여의도 광장의 약4배)호수의 물로 농사를 지었는데, 북한 측에서 철원평야로 내려오는 물줄기를 황해도 연백평야로 돌려 가뭄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래서 민통선 안쪽에 토교 저수지를 비롯해 필승교회 옆의 25만평 규모의 강산저수지, 백마고지 앞의 산명호 등 세 개의 인공저수지를 만들어 철원평야의 농업용수를 안정적으로 공급하고 있다. 한 눈에 볼 수 있는 국력이다. 군 사정에 의해 아쉽게도 제2땅굴은 갈수 없어 철의 삼가전망대로 안내되었다. 높은 고지도 아니건만 모노레일을 설치하여 관광객의 편의를 도모하고 있었으며 1988년 3억 원의 예산을 들여 철원군에서 건립했다는 전망대는 우리나라 최고의 안보교육장다운 면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4층 건물로서 1층은 화장실, 2층은 군부대시설, 3층은 휴게실, 4층은 전망대가 자리 잡고 있는데 4층에는 북한지역을 자세히 볼 수 있는 망원경 20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여행의 설렘을 두렵게 했던 태풍 곤파스가 완전히 물러간 시간, 비온 뒤의 날씨라 시계視界가 워낙 좋아서 북한 쪽의 지형을 세밀하게 관찰할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 서울 - 의정부 - 동두천 - 연천 - 철원 - 월정리 - 가곡 - 평강 - 신고산 - 원산 ) 단장된 월정리 역사
우리는 경원선 보다 더 타고 싶은 열차는 경의선이다. 거기는 아버지 어머니의 고향 박천군이 있기 때문이다. 이동 경계를 서고 있는 초병을 보니 부대 사단가를 알고 싶었다. 군 생활 3년 동안 그래도 많이 불러 보았는데 첫 구절이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근무중인 초병은 개미소리 같이 약하게 “조국의 통일과...”
6사단가
조금의 통일과 독립을 위하여 맹호의 기세로 싸우고 이겨
새 세기 선두에 이름을 떨치는 강철로 뭉쳐진 6사단이다.
승리의 청성기를 높이 날리며 부르자 우렁차게 승리의
개가를 물과 불을 가리랴! 우리는 용감히 싸운다.
6사단! 6사단! 대한의 6사단.
40년이 된 그 때 그 노래 그래도 기억력이 좋은 편일까? 곡에 맞추어 잠간 불러 보았다.
한국전쟁 중 가장 치열했던 백마고지 전투! 그 현장은 우리지역이나 비무장지대 안에 있는 관계로 전승탑과 위령비가 세워져 있는 300m 정도 후방 전망대에서 바라보았다. 분명히 40년 전에는 포탄에 할 킨 상처로 풀이 자라지 않았는데 세월은 그것도 용서를 해주는 것일까? 이제는 여느 산과 다름이 없었다.
피의 능선 백마고지를 뒤로하고
백마고지로 가는 길목의 민통선 마을인 대마리는 현역시절 20사단(현 5사단) 지역인데 꼭 한 번 다녀온 곳으로 생각이 난다. 국가적으로 세제혜택을 비롯하여 많은 지원을 해주고 있고 경지면적이 많아 일반농촌 소득보다는 높은 곳이다. 선전마을로도 불리어 표본적으로 잘 사는 마을이었는데 이젠 여느 농촌과 별 다름이 없는 곳이다.
큰길가에는 과거 철원역, 얼음창고. 농산물검사소, 제사공장의 음산한 건물들이 옛 모습대로 남아있고, 해방 후 공산치하 5년 동안 철원, 김화, 평강, 포천 일대를 관장하며 양민수탈과 애국인사들을 체포, 고문, 학살하던 노동당사는 앙상한 뼈대만 남아있다. 이 건물은 소련식 건축공법으로 철근을 사용하지 않은 무철근 건물로, 2층 바닥부터 3층 지붕까지는 목조건축으로 지었
백마고지를 바라보며 평화탑 앙상한 건물의 노동당사
다는데 북한은 이 건물을 지을 때 성금이란 구실로 1개 마을마다 백미 200가마씩을 착취하여 인력과 장비를 강제 동원하는 한편 특히, 건물의 내부 작업 때는 비밀유지를 위하여 공산당원만 동원했는데. 이 건물 뒤 방공호에서는 많은 인골과 함께 만행에 사용된 실탄과 철사줄 등이 발견되었다.
가까이 가면 어디서 비명소리가 들리는 듯 의시시한 생각이 든다. 공교롭게도 6,25 60주년 특집 KBS기획드라마 “戰友”방영이 끝난 지 불과 2주 밖에 되지 않아 그 현장이 아주 생생하게 비춰지고 있어서 착각을 일으킬 정도였다. 어쩌면 뼈대만 앙상하 게 서 있던 흉측스런 건물잔재가 아직도 그대로 보존되고 있을지? 노동당사!
해방이후 이념전쟁이 한 창일 때 생지옥이었다. 고문으로... 얼마나 고생 했 을까? 많은 인명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 갔던 이 터가 나에게도 애환이 있으니 꼭 40년, 전방부대 발령을 받고 전투지원중대 부대원들과 자주 다니 던 때와 조금도 다름이 없어서 시각차를 못 느끼니 더 혼란스러움을 주었다.
초병시절 1년 가까이 머물렀던 월하리를 지난다. 혼자 몸이라면 내려서 마을 구석구석을 걸어보고 싶고 혹 그 때에 인연이 있었던 분의 안부도 듣고 싶었으나 일행의 일정에 지장이 있어서 5, 6검문소가 있던 곳을 벌써 지나고 있었다. 당시 민간인 출입을 통제했던 선에서 약 3km전방이 해제되었고 새 집이 많이 들어서서 전혀 전방의 느낌도 없었으며 군부대나 현역 군인의 모습도 이상하게 찾아보기 힘들었다.
동송면 이평리, 철원읍 화지리는 큰 길을 가로질러 행정구역이다. 계획도시처럼 꾸며져서 전 모습은 전혀 없었으나 사거리 철원천주교회는 변함없이 그 자리에... 건물 모습만 바뀌어 있었다.
나의 잔영이 남아 있을 철원평야, 학 저수지, 도피안사, 금악산, 그때를 함께 했던 전우들! 사단장, 연대장, 중대장의 얼굴이 스쳐지나간다.
다시 승리교를 통과하여 문혜리와 와수리를 지나 철원에서 화천지역으로 달렸다. 휴전선을 따라 75마일 코스를 횡단해 가는 것이다.
평화의 댐은 일반 댐과는 전혀 달랐다. 다목적 댐이 아니었고 제방을 큰 도로로 활용했으며 완전히 수량조절기능만 하고 있었다. 경관이 이처럼 아름다 울 수 있을까?
그림 같은 맑은 山 그림자
로 인해 한강은 전체수량의 12%를 잃었
으며 금강산댐에서 DMZ를 거쳐 평화의
댐에 이르는 북한강 19㎞의 수역은 물길
이 가로막힌 흐르지 않는 강이 되었다.
금강산 부근에서 발원한 북한강이 한반 평화의 댐 비 앞에서
도 남서쪽을 향해 291.3㎞를 화살처럼 걸려 흘러가며 화천 파로호를 지나 춘천, 가평, 청평을 품고 팔당에서 남한강과 합류한다. 북한강의 줄기를 따라 더 이상 갈 수 없는 최북단 이곳에 2005년 2단계 증축공사를 마쳤다. 1986년 금강산댐의 위기에 맞서 시작되었으나 현재는 물문화전시관, 인공벽천, 쉼터 등을 갖추고 안보관광객을 비롯한 많은 단체관광객이 이곳을 찾는다.
평화의 댐에서 1박을 해야 할 양구 시내로 내려오는 길은 좋은 편이었다.
아무래도 강원도 산골 깊은 산속 오지랖에 터를 잡은 카운티는 불은 전등불은 비추어 줘도 적막했다. 배도 고팠지만 두부찌개가 너무 맛있었다.
兄을 비롯한 일행은 다소 피로하여 일찍 각자 잠자리로 들었다. 너무 좋은 구경을 했음에 설렘이 가시지 않았지만 생리적인 현상을 어찌 이기랴!
아침에 일어나 해장국집을 찾다가 시내 거리가 얼마나 깨끗한 지 놀랐다. 그냥 볼일이 아니라 국민의식이 이 강원도 한복판에 아름답게 자리하고 있음을 보았다. 그래 기초질서가 있는 곳에 나라의 앞날이 보인다.
박정희대통령께서 사단장시절에 관사로 이용했던 건물이 보존되어 있어서 이정표를 따라 현장을 확인했다. 이 때 부터 꿈은 이루어지고 있었으리라,
을지전망대에서
이에 있었다. 1988년에 건립한 총면
적 324m², 높이 10m의 2층 건물이다.
비무장 지대 남방 한계선에서 가장 가
까운 전망대로 군사분계선 남쪽 1km 지점에 펀지볼 넓은 취락은 평온하다
있다. 북쪽으로 북한군 초소와 논밭이 보이고, 맑은 날에는 금강산 비로봉·차일봉·월출봉·미륵봉·일출봉까지 보인다. 한국전쟁 때의 격전지였던 펀치볼도 훤히 내려다보였다. 꼭 바가지 속 같이 생겼으며 어느 시기 화산 분화구로 인해 만들어진 고을 같았다. 친구 영화의 눈에는 바로 이 자리에서 페러를 타고 날아 내렸으면 아주 절정의 드릴을 맛 볼 수 있을 것 같이 보였을 것이다. 전망대가 서 있는 자리 또한 당시에는 치열한 격전지였다. 처음에는 군부대의 사전 승인을 받은 단체 관광객들만 출입할 수 있었으나 1998년부터 개인 관광객의 출입이 허용되었다. 북한 군인들은 자급자족용 농사를 직접 짓기도 한다고 얘기했다. 우리병사들은 비교적 자유로워 보였고 믿음직스러웠다. 저 휴전선 넘어 병사들인들 어떻게 적으로만 보일까? 피를 나눈 형제들인데, 하루 빨리 이 부끄러운 모습에서 해방되었으면 얼마나 기쁘랴!
속초를 거처 대포항에서 맛있는 바다회로 식사를 했다. 적은 값으로 싫 컷 먹는 곳을 찾느라 시간은 좀 걸렸지만, Y·D동생의 안내는 100%였다.
짧은 1박 2일이지만 전방 77마일을 횡단했고 주요 군사관광지를 둘러보았다. 옛 날을 거슬러 젊은 때로 돌아보기도 했다. 앞으로 살아가는 올바른 방향도 알게 모르게 배웠다. 일행 다행히 모두 만족한 모습으로 보였다.
첫댓글 좋은 체험을 하셨구먼, 공산. 고맙네. 사진이 보이지 않으니 어쩐일인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