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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여우가 뾰족구두를 벗기까지의 여정
-양효숙 수필집 『뾰족구두를 벗은 초록여우』(시와에세이,2020)
장예원/ 서울 출생/ 2017년 세계일보로 등단
1. 빨아도 지워지지 않는 감물 같은 이야기를 풀어내다
양효숙 수필가의 뾰족구두를 벗은 초록여우는 글쓰기 주체의 소박한 일상이나 경험담을 소재로 삼아 삶의 의미를 폭넓게 그려낸 전통적 방식의 수필집이다. 필자는 그녀의 수필을 읽고 자신의 철학으로부터 시작한 솔직담백한‘언어들’만이 오로지 독자의 흥미와 감동을 견인할 수 있다는 수필문학 불변의 진리를 거듭 확인했다.
요즈음 사람들은 단 불로 삶은 빨래 같은 청정한 일상을 원한다. 남들에게 그럴싸해 보이는 청정한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서 때로는‘잃고 싶지 않았던 것’들을 버리기도 한다. 또한 타고난 대로 사는 것을 겁내는 세상에서 그들은 뾰족구두를 신고 화장을 하고 불편한 옷을 입는다. 양효숙 수필가는 SNS에서 보이는 광고 같은 청정한 일상보다는“인간미 있는 맨얼굴과 진정성 있는 벗은 발에”애정 어린 시선을 보낸다. 그녀는“세련된 할머니보다는 화장기 없는 주름진 얼굴로 경로석을 차지하는 할매를 정겹게”느낀다. 심지어 주름살을 없애버린 할머니에게 주름살을 그려놓고 도망치고 싶어 할 정도다. 이러한 그녀의 성향은 유년의 기억이 한몫을 한다.
중학교 때까지 지리산 그늘에서 자란 그녀는 익지 않은 열매들의 떫은맛처럼 설익은 기억의 언저리에서“빨아도 지워지지 않는 감물 같은 이야기”를 풀어낸다. 기억의 그물을 던져서 달콤하지만은 않았던 유년시절의 시간과 공간을 끌어올린다. 기억이란 결국 순간을 영원 속에 보관하고자 과거를 현재화하는 일이다. 그 시·공간의 첫 화두가“할매”다. 나의 엄마의 시엄마이기도 한 할매. 양효숙 수필가는 소박했던 할매와의 추억들을 매개로‘순간’과‘영원’그리고 죽음에 대해 사유한다. 특히, 늙음과 죽음조차도 하나의 산업으로 취급되는 오늘날 그녀는 할매의 죽음을 통해 과거 우리가 죽음을 친숙하게 여겼던 시절을 펼쳐놓는다.
짚단 위에 두 손을 모으고 누운 할매의 주검을 보았다. 문밖출입이 자유롭지 못해도 동구 밖까지 나와서 손을 흔들었던 그 손에는 검버섯이 짙게 피어 있다. 이번에는 내가 할매 자리에 서서 작별인사를 했다. …중략… 할매 장례식 날 동네 아주머니들은 마실 와서 요리하듯이 음식 준비를 했다. 장례식을 농사일 서로 품앗이하듯이 받아들이고 도왔다. 슬픔보다는 오히려 기쁨이 마당 가득 찾아들었다. 할매에게 마지막 친절을 베푸는 연회 같다. …중략… 죽은 할매의 관 옆에서 자다가 꿈에 시달렸다. 정을 떼고 가려는지 무섬증을 줬다. 할매의 꽃상여가 요골 도라지밭을 향해 떠났다.
-「할매」 중에서
동네 아주머니들이 와서 장례식을 거들어주며 축제 분위기를 내고 손녀가 할머니의 관 옆에서 잠을 자는 일은 요즈음은 보기 드문 풍경이다. 할머니가 좋아했던 동네 구석구석을 꽃상여가 한 바퀴 도는 장례의식 또한 마찬가지다. 오늘날 죽음은 삶이나 일상과는 동떨어진 곳에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잘 살고자 하는 사람은 죽음을 최대한 멀리 그리고 미뤄두어야 한다. 경쟁적으로 젊어지고자 하는 욕망과 문화는 이를 부추긴다. 또한 의료적인 죽음이 일반화 되면서 문화로서의 장례의식은 병원 장례식장에서 혹은 상조 회사가 도맡아서 한다. 고유하게 잘 죽고 싶어도 죽음에 대한 무지와 망각을 강요받는 시스템 때문에 그 소망은 이루기 쉽지 않다. 인간의 의식주를 상품화하던 자본주의의 여정은 경험과 생활까지 상품화하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인간 활동 대부분이 문화라는 포장을 내세워 돈을 주어야만 접할 수 있는 관계로 대체된다. 금전적 관계들이 소박하고 따뜻하며 인정이 넘쳤던 전통적 관계들을 밀어낸 지 오래다. 그런 세계에서는 신뢰, 공감, 정, 연대의 감정을 중요시했던 전통적 상호관계가 회원, 등록, 입회, 수임료, 요금에 기반을 둔 계약관계로 바뀐다. 그러나 양효숙은 죽음을 망각하지 않는다. 죽음이라는 무형의 영역까지 손을 뻗친 자본이 만들어낸 겉치레와 포장의 유혹에도 끄떡없다. 이러한 삶의 태도와 근력의 밑바탕에는 할매 옷을 다 태우지 못하고 주섬주섬 걸쳐 입고 살더니 할매를 닮아가는 그녀의 엄마, 할매 웃음소리를 닮은 그녀, 그리고 할매가 들려주던 이야기를 좋아했던 그녀를 닮은 아들의 삶이 연속성을 가지면서‘순간’을‘영원’으로 지속시키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 믿음은“순리대로 흐르는 경우도 있지만 갑자기 변수의 소용돌이를 일으키다가 밀물과 썰물처럼 특별한 반전 없이 치고 빠지는”생의 변덕을 견딜 수 있게 하는 힘이다.
2. 초록여우들과 함께 구호를 외치다
지리산 그늘에서의 유년기를 뒤로하고 그 시절 그 흔한 산수유나무 한 그루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 산수유나무에 묶이지 않고 떠났듯이 그녀도“배고프고 허기진 돌담을 넘고 겹겹인 산들을 넘어가다 보면 뭔가 다른 세상이 있겠지 싶어”고향을 떠난다. 그러나 그녀의 스무 살은 희망에 차 있기보다는 막막하고 불안했다. 학생의 신분을 갖고 산다는 것이 누군가에겐 당연한 통과의례처럼 여겨지겠지만 누군가에겐 부러움의 대상이기도 한데, 대학생이라고 분류된 또래들이 그녀에게 그랬다. 스무 살 때 대학을 가지 못했던 그녀는 스무 살의 결핍을 동력삼아 항상 치열하게 꿈꾸는 정직한 삶을 살아왔다. 실제로 그녀는 개인 치과 의원에서 간호조무사로 십오 년을 지내며 내가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마흔 살이 넘어서 도서관 사서라는 자신의 진로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스무 살의 결핍 외에도 임신 6주에 뱃속의 아기 심장이 뛰지 않는다는 진단을 받고도 지리산으로 향했던 삶에 대한 열정과 긍정성 덕택이다. 수많은 도전과 시행착오 끝에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을 찾은 그녀는 그 과정 속에서 얻은 성찰과 사유를 내보이고 있다.
쉰 살의 내가 막막한 현실이 겁나고 불안해서 떨었던 스무 살의 나를 위로한다. 막연하게라도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던 오십 대가 생각보다 행복하다. 아직도 소심한 면이 있지만 주저앉지 않고 나아가는 근성은 여전하다. 주어진 상황에 대한 긍정성을 최대한 이끌어내려 한다. …중략… 쉰 살의 내가 지난여름 전국에서 올라온 학교 비정규직들과 뙤약볕에 나앉았다. 처우개선을 위한 대규모 집회로 서울역에 모였다. 스무 살의 나와 쉰 살의 내가 밀착된다. 여전히 꿈꾸는 조랑말처럼 성장하는 중이다. 사람마다 다르게 찾아오는 전성기가 정성기로 들린다. 전성기는 정성기를 품어야 가능하다. 정성을 들이는 시간이 있어야 뭔가 이뤄진다. 우연히 찾아오는 좋은 일들이 결코 우연이 아닌 필연이란 걸 안다. 온갖 정성이 누적돼 어느 시기에 터져 나온다. …중략…가슴 떨리는 순간에 정성을 들이고 그 정성을 들이는 순간들마다 가슴 떨림이 함께한다. 어떤 순간을 위해 희생되는 시간이란 없고 그저 그 순간만을 사는 것이다. 진행형의 삶에 대한 가치와 의미부여로 접근하니 꿈꾸는 방향 설정도 다르다.
-「꿈꾸는 조랑말」 중에서
일반적으로 인생에 우여곡절이 많은 사람은 모든 것을 초월하는 사람이 되거나 아님 독한 사람이 된다. 그런데 양효숙은“초월”과“독함”을 다 비껴간다. 그것은 그녀가“스무 살”과“쉰 살”의 그녀를 밀착시켜 여전히“꿈꾸는 조랑말”처럼 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성기”라는 상투적인 언어를“정성기”로 바꾸는 참신한 언어감각은 그녀가 지금껏 상투적으로 살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녀는 구멍 하나를 보고도“분출구나 비상구 하나 없이 살아야 했던 엄마 인생”을 읽고“구멍 속에 갇혔다고 생각하는 순간 솟아날 구멍 찾기”바빠지는 삶의 아이러니를 발견한다. 나아가“구멍은 언제나 새로운 세계와 맞닿아 있다”는 진리를 깨닫기도 한다. 또한“나이를 먹을 만큼 먹어도 단 맛이 안 나는 사람이 떫냐고 시비걸기 전에 뒤돌아서는”지혜를 발휘하면서도 나는 타인에게“집”이 되는 사람일까? “짐”이 되는 사람일까? 고민한다.
이렇듯 그녀는 주변 사물과 세계에 대해 상상할 줄 안다. 어떤 사물의 특징을 상상하여 창조한다는 것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기존의 상투성을 전면 부정하고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작업은 문학적 상상력의 시각으로 본다면 이중적 표현을 통해 어떤 구체적인 사물의 속성에 한 가지를 더 보태어 다른 것으로 바꾸어 놓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주체가 현실에 대응하는 고유한 방식이기도 하다. 양효숙은 그녀만의 방식으로 현실을 바라보고 대응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사물의 내면을 들여다보려는 그녀의 의지는 아래의 글과 같이 외면적 수동성을 벗어나 강력한 실천적 행동으로 가치를 부여한다.
차이와 차별은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 정규직과 비정규직 구별로 삶이 피폐해졌다. 책잡힐 일 많은 세상에서 사람들은 미래 없는 오늘을 살기 바쁘다. 비정규직이어도 책을 만지고 읽으며 도서관에서 일하는 게 즐거웠는데 길 위에서 바라보니 다르다.
초록여우들 중 한 명으로 책 속 사막의 여우를 불러냈다. 길들여지지 않는 게 있고 길들여져서도 안 되는 뭔가가 꿈틀거렸다. 한 시간 전부터 가슴 두근거리던 만남이 점점 사라지고 삭막해져서 가슴속 사막이 넓어진다. 초록별 지구가 사람 살만한 곳이 아니라는 신호음마저 감지된다.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 하나로 견디는데 누구나 할 수 있다고 우아한 빨간 립스틱이 폭언을 한다. 폭우와 폭염 속에서의 투쟁보다 더 힘든 건 폭언이다. 자존감을 지키고 생존하기 위한 처절한 투쟁은 언제까지일까. 죽어야 끝나는 일이겠지 싶다가도 자식 세대로 이어지니 죽어도 끝나는 게 아니다.
-「초록여우」 중에서
푸른 오월이 아름답고 생기 있는 이유는“담쟁이 넝쿨에 바람이 일렁이고 붉은 덩굴장미가 담장을 물들이기”때문이다. 담장과 덩굴장미의 관계는 오묘하다. 담장과 덩굴장미를 각각으로 떨어뜨려 놓고 보면 전혀 다른 재질로 이루어져 어울림이 없는 사물들이다. 그러나 덩굴장미는 담장이 있어‘너머’를 꿈꾸고 넘어갈 수 있다. 그녀는‘너머’로 나아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장미마냥“담장을 타고 오르는 손에 피멍이 들어도 버티고 핏줄이 터져도 안간힘을”쓰며“거센 바람에도 벽과 한 몸인 양 견디고”또 견딘다. 덩굴장미와 담장의 관계가 보여주듯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사물에는 각자의 존재감이 있다. 그 자리를 지켜 이겨내는 이야기가 있는 것이다. 그녀가“초록여우”들과 함께 “폭우와 폭염”속에서 투쟁하는 것은“존재감과 자존감을 드러내고 지키려는”기본적인‘사람다움’을 쟁취하기 위해서이다.
학교라는 공간은 학생들과 함께하는 배움의 공동체이지만 교직원들 간의 미묘한 신경전이 벌어지는 사회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교직원들은 남자와 여자, 미혼녀와 기혼녀, 기간제 교사, 계약직 교사, 정규교사, 부장교사, 평교사, 보건교사, 영양교사, 교육공무직 사서, 행정실무사, 급식조리원 등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누구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보이지 않는 구분과 경계들로 서로의 영역을 구획하고 있고, 이 때문에 입장이 모두 다를 수밖에 없다. 갈등 상황이 발생하지 않았을 때에는 서로의 영역이나 자리에 대해 침범하지 않는다. 자리를 침범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서로의 사람다움을 인정하고 서로의 얼굴에 모욕이 될지도 모르는 접근이나 간섭은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양효숙 수필가는 그녀가 있는 자리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님을 인정받기 위해서 즉“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지키기 위해서 다른 여우들과 구호를 외친다. 사람으로 산다는 것, 혹은 사람이 된다는 것은 각자의 자리와 장소를 지닌다는 의미이다. 비정규직이라는 단어가 슬픈 이유는 그 자리와 장소를 갖지 못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학교라는 공간에서 정당하게 환대받기를 원한다. 환대란 타자에게 자리를 주는 행위, 혹은 사회 안에 있는 그의 자리를 인정하는 행위이다. 자리를 인정한다는 것은 그 자리에 딸린 권리들을 인정한다는 뜻이고 또한 권리들을 주장할 권리를 인정하다는 것이다. 환대받음에 의해 우리는 사회의 구성원이 되고 권리들에 대한 권리를 갖게 된다. ‘너머’를 꿈꾸는 누군가에게 담장이 되어주고 그들을 환대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그녀는 초록여우들과 목소리를 함께한다.
3. 북적Book적 도서관에서 아이들과 술래잡기를 하다
학교도서관 전문가인 사서로서 자기 자리를 인정받기 위해 강력하게 투쟁하는 센 사람도 그녀이지만“사람을 읽어주기 위해”애쓰는 사랑으로 충만한 사람도 그녀이다. “사랑과 그리움”이라는 그늘의 가치를 깨닫고 자신과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늘이 되어주려 노력하는 것이다.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그녀는“실패와 실수의 순간을 맞보며 성장하는 시간이 누구에게나 있다”는 관대함과 포용력을 지니면서도 동시에“통과의례처럼 거쳐야만 되는 관문들을 누군가 대신해줄 수 없다”는 엄격함도 지니고 있다. “줄탁동시의 순간이 거저 주어지는 게 아니라며 이기고 지는 승패에 갇히기보다는 그 너머로 나아가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할 수 있는 자신감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것은 그녀가 “스스로의 몸에서 실을 뽑아내는” ‘진짜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벽장문을 열고나올 것만 같다. 앨리스는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다. 자기만의 세계가 있는 아이들이 도서관으로 숨어들다 그곳으로 사라진다. 판타지 공간에서 놀기 좋아하는 아이들의 통로가 돼주고 숨바꼭질 놀이에도 적합하다. 어릴 적 뒤란이나 어두운 광속으로 숨어들었던 각인된 순간들이 되살아난다. 온갖 농기구들과 잡동사니 사이에서 들키지 않으려고 태아처럼 웅크렸던 순간이 지나간다.
-「북적Book적 도서관」 중에서
내 몸에서 실을 뽑아내어 고치를 만들어야 했다. 스물 한 살의 나는 대학이라는 말만 들어도 고개가 돌아갔었다. 치과에서 1인 다역을 했지만 존재감이 없었다. …중략… 월급날이면 동네에 있는 김씨글방에 들렀다. 내 속내를 속지에 적어 뒀다. 감출 것도 아닌데 은유로 멋을 부리며 나만의 세계에 갇혔다. 주경야독하며 돈보다는 시간을 벌었다. 그런 이십 대를 앓던 이빨처럼 빼버릴 수 없다. 그 시간들은 나무에 거꾸로 매달려 고치를 만들며 꾸물거렸던 애벌레의 치열한 변태 과정과 맞닿았다. 고치 안에 숨어 있던 시간이 온통 갑갑함으로만 채워졌을 리 없다. …중략… 책이 주는 치유의 과정을 거쳐 지금은 나비로 산다. 나비가 꽃 속으로 숨어들 듯이 나는 책 속으로 숨어든다.
-「책 속으로 숨어들다」 중에서
“책이 주는 치유의 과정을 거쳐 나비”가 된 그녀는 그녀처럼“책 속으로 숨어든”아이들에게 그늘이 되어준다. 친구가 없어서 도서관에 온 아이들이 서가 책으로 숨어들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또한 서가 책 속으로 숨어든 아이들을 술래처럼 찾아다니며 다시 나올 수 있도록 배려한다. 이러한 배려로 학교에서 지금껏 상을 받아본 적 없는 아이와 공부와 담쌓은 아이들이 도서관에서는 상을 받는 이변이 일어난다. 그녀는 아이들이 성장 소설에서“변수와 반전”을 경험하게 함으로써‘너머’를 꿈꿀 수 있도록 돕는다. 아이들은 숨기고 싶은 내밀한 비밀과 고민거리들을 도서관에서 책과 함께 자연스럽게 해결할 수 있다. 이렇듯 그녀는 지난날의 경험으로 자기세계를 가진 아이들의 난처한 국면들을 갈피갈피 살피고 공감하려 애쓴다. 삶과 문학의 간격이 점점 멀어지는 요즈음, 통째로의 만남이 불가능한‘언택트’의 시대에 존재의 뿌리까지 살피며 책과 아이들을 만나는 그녀의 삶을 응원한다.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경험과 사유, 궁극적으로는 그들의 인생을 설명하기 위한 각자의 어휘를 만들고 싶어 한다. 그 어휘들은 가족, 연인, 싫어하는 사람들, 자신의 정체성, 꿈 등 인생의 다양한 스펙트럼에 걸쳐 있는 어휘들이다. 그것들은 우리가 희망과 기대, 때로는 불안한 감정을 가지고 앞을 내다보면서 혹은 그리움과 후회의 감정으로 지금껏 살아온 자신의 흔적을 돌아보며 우리의 삶에 대해 서술해주는 어휘들이다. 우리의 삶을 각자의 어휘로 서술하고 그것을 공유하는 한에서만, 그 삶은 참이나 거짓이 된다. 양효숙의 뾰족구두를 벗은 초록여우는 그녀가 살아온 궤적들을 엮은 그물망이다. 이 그물망을 세상에 내놓으며 그녀는“자기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뿐”이라는 아집에서 벗어나려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하고 답할 수 있게 된다. 그녀의 글에서 느껴지는 삶과 사람에 대한 성숙함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삶과 문학이 하나로 합쳐진 어떤 느낌이다. 양효숙의 글은 이 둘 사이에 균열이 없다. 그녀에게는 삶이 문학이고 곧 문학이 삶이다. 그녀의 삶과 글에서는 그녀가 추구했던“인간미 있는 맨얼굴과 진정성”이 묻어난다. 혹시나 그녀를 만난다면 그녀의 앞에서는 꾸밀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냥 있는 그대로 있으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