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말 오후 7시 서울 대학로의 소극장 ‘정미소’. 30~50대 중년
여성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박정자씨 주연의 연극 ‘19 그리고
80’을 관람하러 온 팬클럽 ‘꽃봉지’ 회원들이다. 회원들은 연극이
시작되기 전 분장실로 몰려가 박씨와 ‘수다’를 떨고 객석으로
향했다. 지난 91년 생겨난 ‘꽃봉지회’ 회원은 현재 250여명.
팬클럽의 60% 이상은 평범한 가정주부들이다. 주부 박경희(여·53)
씨는 “박정자씨를 좋아하는 주부들이 자발적으로 만들었다”면서
"또래 주부들에게 팬클럽 가입을 권유하고 있다”고 말했다.
10대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던 팬클럽이 20·30대 직장인은 물론
40·50대 이상 중·장년층에게까지 확산되고 있다. 7일 클리프 리처드
공연 때 40·50대의 중·장년 올드팬들이 열광했듯 중·장년 팬클럽은
조직이나 열정(熱情)이 10대 팬클럽 못지않다.
지난 82년 데뷔 후 줄곧 언더그라운드에서만 활동해온 포크 가수
박강성에게도 3700여명의 열혈 팬클럽이 있다. 지난해 6월 처음
생겨난 ‘빨간봉 부대’는 공연장에서 지름 5㎝, 길이 40㎝의 붉은색
형광봉을 열심히 흔들어 댄다. 연회비 6만원을 내는 정회원 200명
중에는 30·40대가 90% 이상이고, 50대 이상도 10명이나 된다.
대만의 인기 그룹 ‘F4’ 멤버 주효천 팬클럽의 경우 회원수는 50여명
이지만 이 팬클럽 회원의 80%는 디자이너, 항공사 직원, 학원강사 등
직장인이 주축이다.
중·장년층 팬클럽이 본격적으로 생겨나기 시작한 것은 2000년 후반.
포털 사이트 ‘프리챌’의 커뮤니티 관리자 나윤경 대리는 “조용필·
이문세·김완선·전영록 등 80년대 인기 가수들을 기억하는 30대들이
웹사이트상에 처음 팬클럽을 만들기 시작해 작년부터는 연령층도 40·
50대로 급격히 확산되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프리챌’에 등록된
팬클럽 커뮤니티는 1만2000여개로 회원은 20만여명에 달한다. 이
가운데 30대 이상은 5만여명으로 전체의 25%나 차지한다.
중년 팬클럽은 새로운 인간관계 형성의 중심이 되는가 하면 사회활동
에도 적극적이다. ‘꽃봉지’ 회원들은 매년 연극계 ‘올해의 배우’
를 뽑아 시상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한국문화예술진흥원에 1억원의
기부금을 모아 내놓기도 했다. ‘빨간봉 부대’는 지난 1월 박강성씨
와 함께 강원도 홍천 명동보육원을 찾았다. 회원들이 모금한 돈 100만원
으로 생필품을 전달하고 식사를 대접했다. ‘빨간봉 부대’ 회장
정봉순(여·48·경기도 수원)씨는 “취미생활로 시작해 지금은 남편과
함께 팬클럽 활동을 하고 있다”며 “팬클럽 생활을 시작한 이후 일상
생활이 즐겁기만 하다”고 말했다
고려대 사회학과 김준호(金俊鎬) 교수는 “직장과 가정에서 바쁘게
살았던 기성세대들이 조금씩 삶의 여유를 찾아간다는 것을 반영하는
것”이라며 “팬클럽을 통해 학연·지연에 상관없는 새 유대관계를
형성한다면 바람직한 시민문화를 만드는 데도 기여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