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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글은 제가 10여 년 전에 모 잡지사의 청탁으로 태동기에 관해 썼던 글입니다...
제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의 태동기 모습이 녹아있는 글이므로
후배분들이 한번쯤 읽으시면 좋을 것 같아서 여기 올립니다...
문학에 목숨 걸었던 시절
벌써 20년이 되었다. 중국음식점 구석방에 무릎을 맞대고 모여 앉아 공책 뒷장을 찢어 즉석 백일장을 열고, 서로 돌려가며 채점하여 장원 뽑고나서 자장면 시켜먹고 난 뒤 시커먼 입술로 뽀끔 담배를 하던 일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먼 옛날의 이야기가 되어 버린 것이다.
돌이켜 보면 그 시대의 우리는 꽤나 암울했었다. 까까머리에 시커먼 교복에 갇혀 지내던 시절. 마음대로 극장에 갈 수도 없고, 제과점에서 여학생과 팥빙수 한 그릇을 먹으려 해도 학생과 주임 선생의 눈치를 살펴야 했던 시절. 어항 속의 금붕어처럼 우리에겐 최소한의 산소와 최소한의 자유만이 허락되어 있었다.
우리들의 책가방 속엔 교과서 대신 몇 권의 시집과 소설책, 현대문학, 문학사상이 들어 있었고, 필통 속엔 꼬깃꼬깃한 가치 담배가 숨겨져 있었다. 그것이 우리에게 그 시절을 견디게 해준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그렇다고 우리가 마냥 양아치 짓만 하고 다니는 불량소년은 아니었다. 우리는 우리의 방식대로 세상을 살았다.
다른 학생들이 교과서에 파묻혀 있을 때 문학서적을 탐독하고, 학원에서 보충수업을 할 때 전국 각지의 백일장으로 떠돌아다니면서도 우리는 우리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는 생각을 한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우리는 단지 ‘문학에 목숨을 걸었’을 뿐이었다.
태동기 가요제를 아십니까
해마다 봄이면 2학년들은 쉬는 시간마다 1학년 교실을 돌아다니며 문예반 신입부원을 모집하는 PR을 했다.
“연애편지를 잘 쓰려면 문예반에 가입하세요.”
“여학교 문예반과의 그룹미팅도 적극 주선합니다.”
이것이 내가 고등학교를 다닐 무렵에 신입부원을 유혹하는 단골 헤드 카피였다. 이성에 대한 관심이 압도적으로 높은 10대들에게 그 문구의 효력은 대단했다. 덕분에 문예반 1학년생 가입자 수는 타 서클에 비해 월등했다.
현재 대구시 달서구 월성동에 위치한 대건고등학교는 내가 다닐 무렵에는 중구 남산동에 자리잡고 있었다. 지금은 도로확장공사로 사라지고 없는 남산동 로터리 대한극장 옆에 강해춘반점이라는 중국집이 있었다. 3월 중순이면 그곳에서 ‘태동기’ 신입부원 환영회가 벌어졌다.
거수에 의해서 자장면이냐 우동이냐의 선택이 주어지고, 한바탕 단체 급식이 있고 나면 2학년 문예반 회장의 연설이 있었다.
“우리 문예반의 정식 명칭은 ‘태동기문학동인회’이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이 순간부터 서로를 동인이라고 호칭한다. 내가 11대이므로 너희는 이제 12대 동인이 된다.”
‘동인’이라니, 그것은 기성 문인 단체에서나 통용되는 용어가 아니던가. 독서라고는 만화책밖에 해본 적이 없는, 여학생들과의 그룹미팅에 혹해서 온 몇몇 신입부원들에게는 머리가 아프기 시작하는 단계였다.
“우리 태동기문학동인회는 지금으로부터 11년 전에 1대 회장이신 박상훈 선배님을 중심으로 탄생하여 현재 12대에 이르고 있다. 태동기는 그 동안 수많은 선배 문인을 배출한 대구, 아니 대한민국 최고의 문학동인회다. 지금 이 자리엔 참석하지 못하셨지만 지도교사를 맡고 계신 국어과의 도광의 선생님 또한 우리 학교를 졸업하신 대선배님으로, 매일신문 신춘문예를 2번이나 당선하시고 현대문학지로 추천까지 완료하신 시인이시다. 장차 대한민국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는 우리 자랑스런 태동기문학동인회에서 나올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11대 회장의 어마어마한(?) 태동기 역사에 대한 강의가 끝나고 나면, 오늘의 메인이벤트인 ‘태동기 가요제’가 벌어졌다. 참가자는 신입부원이고 간간이 2~3학년 선배들이 초대가수격으로 노래를 불렀다.
이 가요제 순서를 겪고 나면, 문학이란 항시 책을 가까이 하는 엘리트들의 전유물이라고만 생각했던 몇몇 신입부원들의 머리가 아파졌다. 문학적 재능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순전히 노는 실력 하나 만으로도 글을 잘 쓰게 되는 것인지, 선배들의 노래 솜씨는 끝내줬다.
추억의 시화전
환영회 이후로 몇몇의 신입부원은 떨어져 나갔고, 남은 우리들은 시화전 준비에 들어갔다. 당시 태동기의 전통 중 하나는 대구 시내 고등학교 중에서 제일 먼저 시화전을 개최하는 것이었다. 이르면 3월 말, 늦어도 4월 초에는 열어야 했던 시화전을 위해 우리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시도 써보고 액자 값을 마련하기 위해 용돈을 절약해야 했다.
지금은 사정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모르지만, 그때 우리는 학교로부터 아무런 지원을 받지 못했다. 시화전 포스터나 팜플렛, 시화, 시화를 담을 액자 등에 소요되는 경비를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마련해야 했다. 선배 한 분은 한 달치 버스비를 몽땅 털어 넣어서 쌀집에서 배달용으로 쓰던 커다란 짐 자전거를 타고 통학을 했다는 에피소드가 전설처럼 전해지던 시절이었다.
시화 비용을 아끼기 위해 우리는 밤늦게까지 문예실에 남아 서툰 솜씨로 그림을 그리고 빼뚤빼뚤 글씨를 써넣기도 했다. 그 와중에도 선배들은 1학년들에게 좀 더 예쁜 시화와 액자를 배려하는 일을 잊지 않았다.
그렇게 주머니 돈을 털고 공부할 시간을 쪼개 가며 힘들게 시화전을 개최했던 것이 나중에는 커다란 보람으로 돌아왔다. 우리는 난생 처음 스스로의 힘으로 뭔가를 이루어 낸 것이었다.
시화전이 열리는 날, 우리는 처음으로 도광의 선생님을 가까이서 뵐 수 있었다. 배구선수를 연상케 하는 훤칠한 키에 한 손으로 쓰윽 머리카락을 넘기시는 모습이 인상적인 선생님 앞에서 우리는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시화전 기간 동안 우리에게는 3가지 즐거움이 있었다. 첫째, 시화전을 다녀가는 사람들을 위해 방명록을 준비해 놓고 있었는데, 그곳에는 특정한 시에 대한 품평이 적혀 있곤 했다. 하루의 전시회가 끝나면 우리는 그 방명록을 들춰보며 누구의 시에 대한 언급이 많은지, 혹시 내 시에 대한 칭찬의 메시지가 담겨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기도 했었다.
그 시절 우리는 중앙파출소 근처에 있는 YMCA에서 시화전을 개최하곤 했는데, 간혹 정체불명의 여학생으로부터 1층에 있는 아루스 제과점에서 모월 모일 모시에 만나자는 핑크빛 메시지가 방명록에 적혀 있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고교 문단에서 제법 이름을 날리고 있던 선배들만의 몫이었다.
시화전하면서의 두 번째 즐거움은 시에 대한 설명을 듣고 싶어하는 독자로부터 자신의 작품 앞으로 불려나가는 일이었다. 그때마다 자신의 작품이 누군가로부터 지목 받았다는 사실에 기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예쁜 여학생이 나를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 가슴이 콩닥거리곤 했다.
세 번째 즐거움은 자신의 작품 옆에 과연 몇 송이의 꽃이 꽂힐까 하는 기다림이었다. 주로 여학생들이 좋아하는 작품 옆에 장미나 카네이션 꽃을 한 송이씩 붙여놓곤 했는데, 꽃이 많으면 많을수록 인기가 높다는 증거였다. 그러나 이 또한 1학년들에게는 ‘해당사항 없음’이었다.
공포의 반성회
시화전 마지막 날, 재학생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인 ‘반성회’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날은 졸업한 선배들까지 대거 초청해서 강해춘반점에서 회식을 했다. 자장면 아니면 우동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메뉴에 이날만은 짬뽕 국물이 추가되었다. 그것은 선배들이 따라주는 소주를 마시기 위한 안주였다.
몇몇은 난생 처음 들이킨 소주에 인사불성이 되고 몇몇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뽕짝 메들리에 흥이 올라가는 가운데, 졸업한 선배들은 3학년부터 차례로 재학생을 화장실 근처 으슥한 곳으로 불러내었다. 그곳에는 덩치 좋은 선배가 대걸레자루를 들고 후배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른바 선배들의 ‘사랑의 매’는, 공교롭게도 방명록에 이름이 언급된 횟수가 많거나 작품 옆에 꽂힌 꽃의 숫자가 많을수록 그 강도가 심했다. 이제 생각해 보니, ‘시 좀 쓴다고 자만하지 마라’ 하는 묵언이 그 사랑의 매에 깃들어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사랑의 매가 끝나면 다시 몇 순배의 소주잔이 돌고 ‘오늘도 걷는다마는~’으로 시작되는 ‘태동가’, ‘나그네 설움’을 제창하는 것으로 반성회는 끝났다. 그런데 지금까지 아무도 우리에게 얘기해준 적이 없었다. 왜 ‘나그네 설움’이 ‘태동가’가 되었는지. 우리는 감히 선배들에게 그것에 대해 물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우리들에게 선배는 ‘하느님과 동창생’이자 ‘예수님의 삼촌’뻘이었기 때문이었다.
부산발 서울행 비둘기호를 타보셨나요
문예반 시절의 최대 추억은 백일장 참가와 현상문예 투고였다. 현상문예는 상금이나 상품이 걸려 있어서 가난했던 우리들의 입맛을 당겼지만, 당일 참가했던 수많은 경쟁자들 앞에서 보란 듯이 상패를 받아들고 뽐낼 수 있는 백일장이 그 또래의 우리들에게는 더욱 명예로와 보였다.
그 무렵 우리가 주로 참가하던 백일장은 건국대, 경희대, 동국대, 중앙대, 연세대 등 서울의 대학에서 벌어지는 것과, 대구에서 벌어지는 것, 그리고 경주의 신라문화제, 밀양 아랑제, 진주 개천예술제, 진해 군항제 등 경남․북 일원에서 벌어지는 것들이 있었다.
서울에서 백일장이 벌어지면 기차 1량에 꽉 찰 정도로 많은 숫자의 대구 지방 고교문사들이 밤차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주머니 사정 때문에, 우리는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완행 비둘기호를 주로 이용했다. 따로 지정좌석이 없고 아주 작은 간이역마다 꼬박꼬박 서는 비둘기호는, 부산에서 출발하여 우리가 탈 대구역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만원이었다.
우리들은 기차 바닥이나 통로에 신문지를 깔고 앉아 밤새도록 노래를 부르거나 문학에 대한 토론을 하며 마치 수학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즐거워했었다. 아, 그때 서울로 가는 길이 왜 그리도 멀었는지. 가도 가도 창밖에는 시커먼 산과 끊임없이 이어지는 전선만이 우리의 여정과 동행하고 있었다.
새벽녘의 용산역은 왜 또 그리 추웠는지. 한밤 내내 완행열차에 시달린 우리들의 몸은 당장 길바닥에라도 드러눕고 싶을 정도로 피곤했다.
하지만 백일장 장소에 도착하여 전국에서 몰려든 수많은 참가자들을 대하면 우리의 가슴은 이내 투지로 불탔다. 그리고 그 투지는 그때마다 괄목할 만한 수상 결과를 낳았다.
대구에서 몰려 간 우리들은 모두가 한 팀이었다. 소속 학교를 불문하고, 같이 밤차를 타고 온 동향의 누군가가 수상을 하면 우리는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여러 개의 상패와 상장을 거머쥐고 다시 밤차를 타고 고향으로 향하는 우리들은 개선장군처럼 의기양양했다.
그러나 대구나 경남․북에서 벌어지는 백일장의 경우에는 사정이 달랐다. 이번에는 학교 대항의 성격을 띠었다. 어느 학교에서 몇 개의 상을 타느냐 하는 것을 두고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다.
태동기의 사람들
70년대 중반에서 80년대 초반에 이를 무렵, 전국의 백일장이나 현상문예에서 태동기의 수상 성적은 타 학교 문예반을 압도할 만큼 월등했다. 당시 대구에서 최대 규모로 벌어졌던 영남전문대학교 주최 백일장과 한국사회사업대학교(지금의 대구대학교) 주최의 현상문예는 물론이고, 수상자에게 입학 특전과 장학금까지 제공하여 전국의 고교문사들에게 폭발적 관심의 대상이었던 경희대학교 주최 문예콩쿠르와 동국대학교 주최 백일장을 몇 년 동안 연이어 석권했다.
그때 전국의 고교 문단을 주름 잡았던 태동기 동인들은 현재 대부분 문인으로 데뷔하여 활발한 작품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중 몇 사람만 소개해 본다면, 시인 홍성백, 시인 서정윤, 소설가 박덕규, 소설가 권태현, 평론가 하응백, 시인 안도현, 시인 이정하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백일장이나 현상문예에 참가할 때마다 어김없이 상을 수상하여, 월간지에 인터뷰 기사가 실리고 전국 각지에서 팬레터가 쏟아질 정도로 높은 인기를 누렸다. 이들의 활동은 대구 시내의 타학교 문예반으로부터 위화감(?)을 조성할 정도의 부러움을 유발하는 한편, 전국 각지의 고교문사들과 활발한 교류를 하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그 결과, 어떤 단체나 관의 주도에 의해서가 아닌, 순수 자발적으로 전국의 예비 문인들이 참가한 대규모 시화전이 대구에서 몇 차례 개최되기도 했다.
영원한 우리들의 지도교사
올해로 태동기는 33년의 역사를 갖게 되었다. 그 동안 세상은 많은 변화가 있었다. 교복과 두발은 학교에 따라 자율화를 시행하고 있고, 가중화된 입시부담으로 인해 고등학교 시절의 낭만적인 서클 활동은 기대하기 어려운 수준이 되었다.
태동기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가장 큰 변화는 학교 캠퍼스가 이전하여 그 옛날, 야밤중에 숙직 선생님 몰래 숨어들어 문을 걸어 잠그고 3층 난간에서 오줌을 누고 누가 왜 마련했는지 기억에도 없는 철제 침대에 누워 밤새도록 시집을 읽던 문예실도 바뀌었다.
하지만 문예실 한쪽 벽에 걸려 있던 액자는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거기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태동기의 명제―태동기란 포유류가 생명을 얻고 꿈틀거리기 시작하는 시기라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평생을 문학만을 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아니고, 세상에 대한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열심히 꿈틀거리며 살아가자는 것이지요.
올 봄 태동기는 뜻 깊은 행사를 계획하고 있다. 그 동안 그 존재만으로도 우리들에게 커다란 정신적 지주가 되어 주셨던 도광의 선생님께서 회갑을 맞으셨다. 한 손으로 슬쩍 쓸어 넘기시던 모습이 보기 좋던 머리칼도 어느새 반백이 되신 것이다.
학교도 옮기시고 퇴임을 눈앞에 두셨지만, 영원한 태동기 지도교사로 남으실 선생님께 제자들이 회갑기념문집을 만들어 바치기로 한 것이다. 선생님, 오래오래 사십시오.
지금 내게 신이 한 가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제의해 온다면, 나는 서슴없이 고등학교 시절로 되돌아가게 해달라고 말하고 싶다.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으로 가득해야 할 10대에게,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처럼 획일화를 강요했던 시절. 그 시절을 온몸으로 살았던 사람에겐, 어쩌면 다시는 돌이켜 보고 싶지 않을 기억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 시절을 사랑한다. 오래된 일기장을 넘기다가 우연히 발견한, 이제는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말라 비틀어져 버린 네 잎 클로버처럼, 우리들의 고교시절은 태동기라는 이름과 함께 오래도록 가슴속에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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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태동기에 대한 열의! 저희가 잘 물러받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胎動期文學同人會...비록 세월에 이 나간 빨간 인주에도 가슴 뭉클함을 품고서, 길거리를 지나치면 타인이겠지만 胎動期人이라는 것 하나만으로도 가족 그 이상의 애정을 이어가는 바로 ... 선배님의 말씀처럼 오래도록 가슴속에 소중히 남아 있을 것입니다 모두들 화이팅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