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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청랑 김은주가 머무는 사랑의 공간 원문보기 글쓴이: 청랑 김은주
우리나라 최초 여류서양화가, 여권운동 선구자, 진보적 사회사상가
호는 정월, 군수기정의 딸. 경기도 수원 출신. 1918년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서 서울에서는 첫 번째로 개인전시회를 열어 사람들에게 유화가 무엇인지를 알리는 데 힘썼고 초창기 「이른 아침」(早朝)과 같은 목판화로 민중의 삶을 표현했으며, 1922년부터 1932년까지 해외 여행을 떠났을 때를 빼고는 매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입선과 특선을 한 재주 있는 화가였다. 미술 뿐만 아니라 문학에도 소질이 있던 그녀는 동경유학시절부터 여성이 각성하여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근대적인 여권신장에 관한 글을 발표했고, 1918년 '여자계'에 그렇게 살기 위해서 여성들이 살림살이를 개량하는 구체적 방법까지 담은 여러 논설들과 신여성이 주변의 낡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설득해 가는 과정을 담은 단편소설 <경희>를 발표했다. 이 작품은 뚜렷한 여성의식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받았다. 또한 <폐허> 동인을 구성하여 김억, 오상순, 염상섭, 김일엽과 함께 문학 활동에도 깊이 관여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는 여학생들을 만세운동에 참가시키기 위해 김활란, 박인덕, 신준려, 김마리아 등과 함께 이화학당에서 비밀 회합을 가진 죄로 감옥생활을 하기도 했으며, 중국 단둥에서 외교관 부인 신분을 이용해 독립운동가들을 비밀리에 지원한 민족주의자였다. 특히 나혜석은 여성도 인간이라는 주장을 글로 썼을 뿐만 아니라 그런 주장을 생활 속에서 온몸으로 실천해 나간 진보적인 여성 해방의 사상가였다. 일본 유학시절 좋은 혼처가 나섰으니 공부를 그만 두라는 아버지에게 맞서 학비를 벌어가며 공부를 했으며, 1920년 김우영과 결혼하였으며 결혼식전 당시는 파격적으로 신문지상의 자신의 약혼식 발표를 하기도 하였으며, 결혼식 때는 예술활동을 보장한다는 약속을 남편에게 받아내었고, 화가로 3남매의 어머니로 거기다가 외교관의 아내로 어느 하나도 소홀함이 없이 잘 해내었던 능력 있는 여성이었다. 그러나 1937년 무렵부터 방랑생활에 빠져들었고 1946년에 행려병자로서 불우한 삶을 마쳤다경제적 궁핍과 사회적 비난에 맞닥뜨리게 되면서여성에게만 일방적으로 정조관념을 지키라고 하는 사회 관습을 비판하고 나아가 그런 관념은 상대적이고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기에 해체되어야 한다는 시대를 앞서가는 주장을 펼쳤다. 현모양처가 여성의 모범상으로 굳어버린 시대에 자기의 예술을 추구하다가 이혼을 당하고 빈몸으로 쫓겨났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한 여성을 파멸로 몰아 넣은 두 남자와 그들 남성이 멀쩡하게 행사하도록 하는 사회 관습에 도전한 나혜석이 연 전람회에 대한 조선사회의 반응은 차가웠고, 사회의 냉대속에서 경제적으로 궁핍하고 쓸쓸한 생활을 하면서 나혜석의 심신은 서서히 병들어 갔다. 화재로 그림을 태워 먹고 아이들을 보지 못하게 된 충격으로 신경쇠약과 반신불수의 몸이 된 나혜석은 자기만의 방을 갖지 못한 채 절집들을 떠돌아 다녔고, 해방 후에는 서울의 한 양로원에 맡겨졌으나 그는 걸핏하면 몰래 빠져 나왔다. 아이들이 보고 싶어서였다고 한다. 여행을 떠나기 위해 짐을 쌀 때면 늘 기운이 솟아오른다고 했던 나혜석은 어느 날 양로원을 나선 뒤 종적이 묘연해졌다. 그리고 1948년 12월 10일 서울의 시립 자제원 무연고자 병동에서 아무도 모르게 눈을 감았고 그의 무덤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 나혜석은 여자도 사람이라는 주제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온몸으로 살아간 화가이며 민족주의자이고 여성해방론자였다. 자신이 내딛는 한 걸음의 진보가 조선 여성의 진보가 될 것이라는 자의식을 뚜렷하게 가지고 개인 체험을 바탕으로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에게도 인간적 권리가 있음을 주장하고 봉건적이고 인습적인 관념의 억압성을 드러내어 해체하는 글들을 써서 사회의 비난을 자초하면서도 시대를 앞서 살아갔던 나혜석은 이제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는 우리에게 여성이 인간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진지하게 던지고 있다. . 나혜석의 회화는 시기별로 화풍이 다르게 나타난다. 동경유학이후부터 세계일주 이전까지의 작품(1918-1926)은 일본에서 습득한 아카데미즘과 인상파가 절충된 화풍을 보인다. 세계일주 및 유럽체류시기 작품(1927-1929)경향은 인상파 화풍위에 야수파 화풍과 입체파 화풍이 함께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귀국이후의 작품(1930-1935)은 인상파 화풍의 작품과 파리시절의 스케치로 제작한 것으로 보이는 작품 그리고 기법면에서 완성도가 떨어지는 작품등 다양한 경향이 보인다. 대표작으로는 <자화상>, <스페인의 풍경>, <파리풍경>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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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청랑 김은주가 머무는 사랑의 공간 원문보기 글쓴이: 청랑 김은주
첫댓글 한 시대를 풍미한 멋진 분이군요. 소개에 감사하며 나혜석님을 칭송합니다 ^^
예~21세기를 사는 저 보다 50년더 앞선 분이시니~존경스럽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