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926 |
1939 |
1959 |
1970 |
1979 |
1989 |
1994(약) |
전체 |
6,503 |
6,082 |
9,295 |
13,009 |
14,684 |
16,464 |
16,900 |
한인 |
52명 0,8%
|
97,000 1,6% |
74,000 0,8% |
82,000 0,6% |
92,000 0,6% |
103,000 0,6% |
105,000 0,6% |
각 주별 인구 분포는 다음 표와 같다.
(표-2) 카자흐스탄 한인의 각주별 분포
주 |
인구(명) |
증가율 |
비율 | ||
|
1979 |
1989 |
(%) |
1979 |
1989 |
전체 |
91984 |
103,315 |
112,3 |
0,6% |
0,6% |
알마틔시 |
11,454 |
16,073 |
140,3 |
1,3 |
1,4 |
딸띄꼬르간 |
12,215 |
13,581 |
111,2 |
1,9 |
1,9 |
따라즈 |
11,365 |
13,360 |
117,6 |
1,2 |
1,3 |
크즐-오르다 |
12,503 |
12,182 |
97,4 |
2,2 |
1,9 |
남카자흐스탄 |
11,071 |
11,430 |
103,2 |
0,7 |
0,6 |
알마틔주 |
4,720 |
5,193 |
110,0 |
0,6 |
0,5 |
제즈까즈간 |
3,902 |
4,135 |
106,0 |
0,9 |
0,9 |
꾸스따나이 |
3,282 |
4,083 |
124,4 |
0,3 |
0,3 |
아띠라우 |
3,610 |
3,816 |
105,7 |
0,6 |
0,5 |
아스따나 |
1,958 |
2,091 |
106,8 |
0,2 |
0,2 |
앜튜빈스크 |
1,172 |
1,350 |
115,2 |
0,2 |
0,3 |
꼭세타우 |
829 |
1,045 |
126,1 |
0,1 |
0,2 |
동카자흐스탄 |
903 |
977 |
108,2 |
0,1 |
0,1 |
파블로다르 |
924 |
924 |
100,0 |
0,1 |
0,1 |
우랄스크0,1 |
577 |
631 |
109,4 |
0,1 |
0,1 |
위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카자흐스탄 한인은 주로 남카자흐스탄 지역의 도시에 밀집되어 살고 있다. 이 이유는 한인이 주로 벼농사가 가능한 남부주와 이전 수도인 알마틔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도시와 농촌별 인구 구성비는 다음표와 같다.
(표-3) 주요 한인 밀집 주의 도시와 농촌간 한인 인구 구성비
주 |
1970 도시 농촌 |
1979 도시 농촌 |
1989 도시 농촌 | |||
전체 |
50,3 |
49,7 |
53,5 |
46,5 |
57,1 |
42,9 |
한인 전체 |
73,1 |
26,9 |
80,4 |
19,6 |
84,2 |
15,8 |
알마틔시 |
- |
- |
- |
- |
- |
- |
까라간다 |
95,7 |
4,3 |
96,7 |
3,3 |
97,2 |
2,8 |
크즐-오르다 |
76,5 |
23,5 |
88,2 |
11,8 |
91,6 |
8,4 |
잠불 |
74,1 |
25,9 |
84,0 |
16,0 |
85,8 |
14,2 |
남카자흐스탄 |
67,6 |
32,4 |
76,8 |
23,2 |
84,7 |
15,3 |
딸띄꼬르간 |
50,0 |
50,0 |
55,1 |
44,9 |
61,7 |
38,3 |
출처:카자흐스탄 인구연감(카자흐스탄 통계청,1996).
위 표에 나타난 바와 같이 이주 초기 주로 농촌 지역에서 거주하던 한인들은 1950년대 후반 거주이전의 제한이 철폐됨에 따라 자녀들의 교육,경제적인 이유로 도시로 대거 이주하게 되었다. 1979년 기준으로 볼 때 117,6%의 도시인구의 증가를 나타낸 반면 농촌 인구는 90,8%로 감소했다.
이와같은 도시화의 진전과 함께 농촌의 한인 집단 농장을 중심으로 보존되어 왔던 전통 생활양식, 한국어 사용이 점차 약화되고 급속도로 러시아 문화에 동화 되는 현상을 보인다.
남녀 성별 인구구성비는 다음 표와같이 여자가 남자보다 약간 많다.
(표-4) 한인 남녀 인구 구성비
|
1979 |
1989 | ||||
|
남녀 |
남자 |
여자 |
남녀 |
남자 |
여자 |
전체 |
14684283 |
7075637 |
7608646 |
16464464 |
7974004 |
8490460 |
한인(도시) |
73985 |
36538 |
37447 |
86977 |
42660 |
42660 |
한인(농촌) |
17999 |
9196 |
8803 |
16338 |
8451 |
7887 |
한인(전체) |
91984 |
45734 |
46250 |
103315 |
51111 |
52204 |
출처:카자흐스탄 인구연감(카자흐스탄 통계청,1996).
카자흐스탄 독립이후 새로이 발생한 환경의 변화는 한인의 이주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
한인의 이주 현황은 1993년에 3,450명이 전입한 반면 3,314명이 전출하여 136명이 증가하였다. 따지크스탄의 정치적 불안으로 다수의 한인이 전입한 것이 주요한 이유로 보인다.
1994년에는 상황이 조금 다르다. 먼 외국에서 전입이 15명, 인접국에서 전입이 859명인 반면 전출은 각각 81명,1,716명으로 전체적으로 938명이 감소하였다. 이러한 전출의 추세는 계속 될 것으로 보인다. 주요한 이유는 경제적인 이유, 그리고 소련의 붕괴로 이산가족이 되어버린 가족,친척과의 재결합이다.
카자흐스탄 한인의 민족 의식은 1997년 4-6월에 카자흐스탄 민족관계 모니터링 센타의 의뢰로 강 게오르기 교수와 명 드미트리 교수가 실시한 설문 조사 결과를 토대로 분석하기로 한다.
설문조사는 알마틔와 우슈또베의 한인을 대상으로 실시하였으며, 설문에 응답한 총수는 335명으로 남자 164명 (49.0%), 여자 171명 (51.0%)이 대답하였다. 거주지별로는 알마틔 200명(59.7%), 우슈또베 135명(40.3%)이었다.
과거 소련시절에 비해서 여러 다른 민족과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했는가에 대한 물음에 변함없다(46.6%), 좋아졌다(7.2%), 나빠졌다(41.5%), 아주 나빠졌다( 3.9%)로 대체로 악화되었다고 느끼고 있다. 특히 연금생활자인 연로한 세대와 공무원·회사원 같은 봉급생활자는 많은 어려움을 느끼고 있다. 그러나 대체로 젊은 세대와 기업인, 농민등 자영업자는 허용된 경제적 자유로 만족해하고 있다. 그러나 정치적·사회적 측면에서는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는 자유를 모두 만끽하고 있다.
민족간의 관계의 악화를 걱정하고 있는가에 예(76.1%), 아니오(22.7%)로 많은 수가 미래에 대한 불안해 하고 있다. 이는 카자흐 토착민족주의의 발흥에 기인한다고 보겠다.
한편 한민족으로서의 정체의식에 관한 조사를 보면 자신을 한민족의 일원으로 간주하는지의 물음에 예(42.7%), 아니오(21.2%), 단순히 카자흐스탄 국민으로 생각한다(35.8%)라고 대답했다. 또한 자신을 카자흐스탄 공화국 국민으로 느끼는가에 대한 물음에는 예(56.7%), 아니오(8.4%), 잘 모르겠다(34.9%)로 대답했다. 이는 박명규 교수가 지적한대로 정치적인 구성원으로서의 국가 귀속의식과 인종적 의미에서의 민족정체의식이 불일치함을 나타낸다. 이러한 불일치는 한인들의 현실주의적 경향을 유도한다. 97년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전에서 한인들은 마음속으로는 한국을 응원할 지라도 겉으로는 카자흐스탄을 응원하겠다고하는 태도와도 일치한다.
"당신의 조국은 어디입니까?"에는 태어난 곳(46.3%), 구소련(13.1%), 카자흐스탄(37.9%), 조상의 땅( 6.9%), 전체 지구( 7.3%)로 대답하여 카자흐스탄 한인은 조국을 구소련, 카자흐스탄으로 간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극동 연해주의 생활을 경험한 세대와 카자흐스탄에서 태어나 자란 세대와는 분명한 간극이 있다. 연로한 세대들이 연해주 혹은 한반도를 자신의 조국이라고 분명히 하는데 반하여 젊은 세대들은 이러한 의식이 약하다. 이와같은 인식선상에서 한국정부의 대한인정책이 수립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여태까지 그들을 한국국민의 일원으로 간주하는 감상적 온정주의와 그에 대한 반대 급부적 요구인 맹목적 애족주의는 많은 실망과 반발을 사왔다. 카자흐스탄 한인을 카자흐스탄 국적을 가진 한민족으로 보는 태도가 극단적인 주관적 온정주의와 카자흐스탄 한인의 객관적 타자화를 막는 길이라 생각된다.
카자흐스탄의 민족정책에 대한 평가는 모든 민족에 대하여 평등정책(50.4%), 민족에 따라 차별정책(17.0%), 구소련의 민족간 우의의 정책(27.8%)이라 대답했다. 이러한 답변의 이면에는 공개적으로 차별이 있음을 밝히기 꺼려하는 조심스러움이 작용하였다고 보여진다. 한인의 고질적인 카자흐민족에 대한 경시적 태도로 보았을 때 실제로는 상당히 높은 불만을 가진 것으로 보아진다.
민족의 이익을 자신의 개인적 이해를 희생하실 준비가 되어 있는가의 물음에 예(28.7%), 아니오(5.7%), 생각해보지 않았다(22.7%), 그럴 수 있다(27.2%), 경우에 따라서(15.2%)라고 대답했다.
카자흐스탄에서 한인이 살아남기 위해서 무엇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가에 (전체 160.9%) 언어, 전통, 관습의 유지(79.7%), 모국으로 이주( 3.0%), 국가가 소수민족의 권리 보장(39.7%), 권력기관에서 당신 민족의 이해 대변(17.9%), 당신 민족의 문화센터 활동(16.1%), 민족 자치의 실현( 3.0%)이다. 이 결과에서 보는 바와 같이 문화적 자치의 요구가 정치적 자치에 비해서 월등히 높다. 이는 한인들이 현재 귀속된 정치공동체에 안온하게 살아 가면서 최소한 민족적 특수성을 유지해가고자 하는 현실주의적 판단으로 보인다. 본인의 생각에도 타민족을 자극하고 실현 가능성이 없는 자치구 주장은 다분히 무책임한 이상적 발상이라고 보여진다. 실제로 극동 연해주 지역 자치주 요구는 그곳 현지 주민의 반발을 사고 있으며, 역이주 현상도 보인다.
고려인 협회의 활동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43.9%), 부정적(8.9%)이었다. 긍정적인 이유는(전체 112.5%) 자기 민족의 교류의 장 제공(15.2%), 자기 민족의 이해를 대변하고 보호( 9.9%), 민족문화 행사 조직과 모국어 학습 진행(19.7%)이었다.
민족적 이유로 명백한 차별을 당한 경우 행동에 대해서는 (전체 122.4%) 침묵하고 모욕을 잊도록 노력하겠다(25.4%), 소송을 걸겠다(19.1%), 권력기관에 호소하겠다(16.7%), 국가 민족정책위원회에 호소하겠다(16.1%), 문화센터에 도움을 요청하겠다(16.1%), , 민족연합회 총회에 호소하겠다(14.0%), 기타 다른 방법(10.1%)의 순이었다.
말할 것 없이 언어야말로 민족집단을 문화적으로 특징짓는 중요한 변인이다. 언어는 곧 의식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한민족의 정신적 요체요, 같은 언어를 공유하는 집단 사이의 정체성 확인과 의사소통의 수단이다. 이를 기준으로 민족간의 경계와 민족내 경계를 설정한다는 점에서 다민족 국가 카자흐스탄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그러면 이러한 언어에 있어서 한인들은 과연 민족적 특성을 유지하면서 타민족과의 구분을 하고 있는 것인가? 이에 대한 답은 매우 절망적이다.
물론 한인들은 연해주 시절에 이미 러시아어 교육이 시작되었지만 한인 학교, 대학등이 있었고 일상적으로 모국어를 사용하였다. 당시 연해주에서 모국어로 된 7종의 신문과 6종의 잡지가 있었다. 그러나 중앙아시아로 이주하면서 1938년 크즐-오르다 고려사범대학의 폐지를 비롯한 한인 학교들이 사라지고, 무엇보다도 새로운 세대교체가 됨으로써 모국어로서 한국어를 사용하는 수가 줄어들게 되었다. 1989년 소련 전체의 한인중에서 49.4%가 한국어를 모국어라고 간주한데 비해서 러시아어는 50.2%, 기타 다른 언어는 0.4%이다. 반면 카자흐스탄 전체 인구중 90,1%가 자신의 민족어를 모국어라고 간주한데 비해서 한인은 51,7%만이 한국어를 모국어로 간주하고 있다.
다음은 인구조사시 자신의 모국어를 한국어로 기입한 숫자의 각각 해당 전체인구중의 비율을 표로 나타낸 것이다.
(표-5) 한국어를 모국어로 간주하는 한인의 비율
|
1970 |
1979 |
1989 |
전체 |
81,958(64,0%) |
91,984(56,1%) |
103,315(51,7%) |
농촌 |
21,951(75,7%) |
17,999(67,9%) |
16,338(64,1%) |
도시 |
59,647(59,7%) |
73,985(53,2%) |
86,977(49,4%) |
출처:카자흐스탄 인구연감(카자흐스탄 통계청,1996).
위의 표를 보는 바와같이 해가 지날수록 점점 한국어를 모국어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줄어들어 가고 있으며, 또한 도시 보다는 농촌이 훨씬 그 비율이 높음을 알 수 있다.
다음은 1989년의 한국어외에 다른 민족어를 모국어로 간주하는 숫자이다.
(표-6)한인의 모국어 간주 언어(1989)
|
인구 |
한국어 |
카자흐어 |
러시아어 |
기타언어 |
전체 |
103,315 |
53,420 |
151 |
49,604 |
140 |
남 여
|
51,111 52,204 |
25,824 27,596 |
61 90 |
25,162 24,442 |
64 76 |
도시 농촌
|
86,977 16,338 |
42,942 10,478 |
82 69 |
43,836 5,768 |
117 23 |
물론 한국어를 모국어로 간주하는 것과 자유롭게 구사하는 것은 별개이다. 비록 한국어를 모국어로 간주한다고 답한 사람은 많지만 한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한다고 답한 사람은 없다.
다음표는 한인들이 러시아어와 카자흐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는 비율을 나타낸다.
(표-7) 러시아어,카자흐어 구사 비율
|
러시아어 |
카자흐어 |
기타언어 | ||||||
|
1970 |
1979 |
1989 |
1970 |
1979 |
1989 |
1970 |
1979 |
1989 |
전체 |
53,3 0,2 |
48,5 |
47,0 |
0,6 |
0,6 |
1,0 |
0,2 |
0,2 |
1,0 |
농촌 |
58,8 |
56,4 |
58,4 |
1,0 |
0,8 |
1,8 |
0,3 |
0,2 |
0,8 |
도시 |
51,3 |
46,6 |
44,8 |
0,5 |
0,5 |
0,8 |
0,2 |
0,2 |
1,0 |
출처:카자흐스탄 인구연감(카자흐스탄 통계청,1996).
위의 표를 보면 한인들이 거의 90%이상이 러시아어를 구사하고 절반 이상이 자유롭게 구사하는 반면에 토착민족 언어인 카자흐어는 거의 말할 줄 모르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1979년 통계에 따르면 구소련내 비러시아계 민족들 중에서 한인들은 유태인(97,0%), 벱새인(96,6%), 까렐리아인(95,4%), 까라임인(94,5%), 독일인(94,3%), 몰도바인((92,9%) 다음으로 많은 92,1%의 사람들이 러시아 말을 사용하고 있다. 한인의 러시아어의 사용율이 높은 것은 소수민족으로서 한국어의 실용성을 잃었고 실제 생활에 있어서 러시아를 모르면 사회에 적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언어 상황은 소련이 붕괴되고 카자흐스탄이 독립되면서 민족주의 운동이 확산되고 헌법에 카자흐어를 공식 국가언어로 채택하게 됨에 따라 한인들은 카자흐어를 새로이 배워야하는 어려움에 봉착하였다.
카자흐스탄 민족관계 모니터링의 위의 설문조사에서 "카자흐스탄 국민은 다음의 언어를 반드시 알아야 합니까?"라는 물음에
*러시아어:예(72.8%), 아니오(0.0%), 대답하기 곤란(27.2%)
*카자흐어:예(76.7%), 아니오(2.4%), 대답하기 곤란(20.9%)
*한국어:예(90.1%), 아니오(0.0%) 라고 대답했다.
물론 한국과의 수교이후로 한국어를 모국어로 배우기 시작한 사람들이 많아졌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1991년 알마틔 한국교육원이 개원하여 한국어 교육을 통한 민족의식의 고양과 한-카 양국간 유대를 공고히하는데 큰 기여를 하고 있다. 한국교육원의 자료에 의하면 97년 1월 기준으로 카자흐스탄 지역 전체 138개 학교에서 194명의 교원이 총 5,355명의 학생에게 한국어를 강의하고 있다. 그 중에는 유치원 211명, 중고등학교 1,607명, 성인 3,537명이다. 대학별로는 전체 3개대학에 한국학과가 설치되어 116명의 대학생이 재학중이다. 기타 한국어를 부전공으로 선택한 학생은 10개 대학이 있다.
최근의 한국어에 대한 열기의 고조는 긍정적 현상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한국어 학습에 대한 동기이다. 연로한 세대들에 있어서 한국어는 모국어 학습으로서 의미를 갖지만 젊은 세대들에 있어서 한국어 학습은 한국계 회사 취업 등을 목적으로 하는 공리어이다. 따라서 만일 취업의 전망이나 한국의 경제 상황이 불투명하게 되면 거품처럼 열기가 사라질지도 모른다. 일상생활어로서 한국어가 자리 잡지 못하는 한 한국어 학습은 향수적, 공리적 목적의 일시적 현상이 될 가능성이 많다.
5.한인의 사회경제적 생활
중앙아시아 한인 사회의 공통적 특징의 하나로 급속한 도시화와 높은 교육수준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요소는 한인들의 사회 경제적 지위를 결정하는데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다. 결론적으로 한인은 높은 교육수준과 타고난 근면함으로 타민족에 비해서 상당히 부유하게 살고 있다. 그런데 구소련 붕괴 이후 급격한 경제적 어려움 및 빈부격차의 심화는 자칫 타민족 특히 카자흐민족에 위화감을 조성 공격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있다. 한인들은 사회적 배분에도 신경을 써 계급적 갈등이 민족적 갈등으로 비화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다음 표는 1989년 노동능력을 가진 전체인구중에서 고등교육이상을 받은 인구 1000명당 숫자이다.
(표-8) 고등교육을 받은 한인의 인구 1000명당 비율
|
카자흐스탄 전체 |
한인 |
노동눙력인구(16-59세) 남자 여자 |
113 107 120 |
251 245 257 |
노동인구 남자 여자 |
131 121 142 |
285 276 297 |
이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한인의 고등 교육열은 카자흐스탄 전체 평균 보다도 2배가 넘는다. 이같은 경향은 수도 알마틔에서 더욱 높은데 노동인구 1000명당 고등교육 숫자는 카자흐스탄 평균이 131명인데 비해서 한인은 285명에 이른다. 남자에 비해 여자의 교육열이 높은 것도 중요한 특징이다.
한인들의 직업별 분포를 보면 지역별로 다르지만 농업에서 상인,교육자,경찰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이미 살펴 본 바와 같이 한인들은 이주 당시 대부분이 집단농장에서 농사를 주된 업으로 삼았으나 차차 살림에 여유가 생기고 거주이전의 자유가 생기자 특히 자녀 교육을 위해 도시로 이사를 가게 되어 1956년만해도 70%이상이 농촌 인구이었던 것이 1970년에는 10만이 넘는 59,9%가 도시인구가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가속화 되고 있다. 이러한 도시화와 교육수준의 향상의 당연한 귀결로 한인들의 직업도 전문직, 사무직이 대중을 이루게 되었다. 참고로 1991년 크즐-오르다주의 한인의 직업분포표를 보면 다음과 같다.
(표-9) 1991년 크즐-오르다주의 한인의 직업분포
(전체) |
3,076 |
100 |
직업 |
사람수 |
비율(%) |
1 공업기사 |
514 |
16,7 |
11 법조인 |
57 |
1,9 |
2 회계원 |
464 |
15,1 |
12 언론계종사자 |
55 |
1,8 |
3 기계공장근로자 |
366 |
11,9 |
13 일반 근로자 |
42 |
1,4 |
4 초중등 교사 |
300 |
9,8 |
14 목공업 노동자 |
35 |
1,1 |
5 재봉공 |
280 |
9,1 |
15 대학교수 |
31 |
1,0 |
6 병원관련업 |
216 |
7,0 |
16 기자 |
31 |
1,0 |
|
(의사 60,간호원 107) |
17 수의사 |
30 |
1,0 | |
7 농업 |
200 |
6,5 |
18도서관,영화관 |
26 |
0,8 |
8 관리자,지배인 |
141 |
4,6 |
19 식료업 |
17 |
0,5 |
9 건설업 |
135 |
4,4 |
20 철도업 |
16 |
0,5 |
그러나 1991년 소련이 붕괴하고 독립 이후 시장경제가 도입됨에 따라 비교적 열악한 임금 수준인 공무원, 교사, 의사 등 전문직, 사무직 임노동자들이 상업, 개인 기업, 자영농 등 자유업종으로 전환하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특히 이러한 경향은 남자들에게서 강하게 나타난다.
한인들의 정계, 관계 진출은 비교적 미약한 편이다. 이는 한인의 경제계 진출현황과 비교해 보았을 때 더욱 뚜렷하다. 이러한 현상은 비록 소수민족인 한인은 정치적 진출, 관료 등용에는 제한이 있음을 입증한다. 김 엘라 이바노브나는 1985년 소련 최고회의 의원이었다. 카자흐스탄 독립이후 두 번째로 실시된 1996년 1월 25일 총선에서 상원에는 한명도 당선되지 못했으며 하원에서만 설 라이싸가 당선되었다. 정부 각료로 김 유리가 헌법재판소 소장, 대통령 비서실에 김 아파나시, 김 게오르기, 니 발렌찐 등이 일하고 있다. 다음 표는 카자흐스탄 최고회의의 한인 대의원 숫자이다.
(표-10) 카자흐스탄 최고회의 한인 숫자
최고회의 |
숫자 |
최고회의 |
숫자 |
4대 5 6 7 8 |
1명 2 2 1 2 |
9대 10 11 12 13 |
1명 1 3 2 1 |
출처:카자흐스탄 소련한인들,(알마틔:카자흐스탄,1992),pp.161-162.
한인의 결혼은 러시아의 경향을 따라 조혼의 경향을 보인다. 다음은 한인 남녀의 혼인여부에 대한 통계이다.
(표-11) 한인 16세이상 혼인 여부별 집계
|
전체 |
성혼 |
미혼 |
홀아비 과부 |
이혼 |
무응답 |
남자(명) (천명당) |
35,142
|
25,129 715 |
7,606 216 |
917 26 |
1,320 38 |
170 5 |
여자(명) (천명당)
|
36,662 |
22,523 614 |
6,028 164 |
5,072 138 |
2,840 78 |
199 6 |
출처:카자흐스탄 소련한인들,(알마틔:카자흐스탄,1992),pp.161-162.
구소련 전체로 이혼율이 최근에 급증하고 있다. 1950년 소련 전체의 이혼율이 1천 가구당 0,4%이었는데 1981년에는 3,5%라 한다. 이혼율은 30-40대에 가장 많은 것으로 집계된다.
(표-12) 연령별 이혼자수 집계
|
16-29세 |
30-39세 |
40-49세 |
50-59세 |
전체 |
19,811 |
20,457 |
11,616 |
9,051 |
이혼자수 |
650 |
1,656 |
1,024 |
558 |
출처:카자흐스탄 소련한인들,(알마틔:카자흐스탄,1992),pp.161-162.
1989년 통계에 의하면 카자흐스탄 전체 1만9천3백 한인가구가 한족가족으로 등록했다. 이는 전체 인구의 약67%로서 나머지는 혼족가구로 보인다. 그리고 평균 가족 구성원수는 3,7명으로 공화국 전체 4명보다는 작다.
(표-13) 한인 가구의 가구 구성원수별
전체가구 |
2명 |
3명 |
4명 |
5명 |
6명 |
7명 |
8명 |
9명 |
10명 |
19,350 |
4,624 |
4,730 |
5,815 |
2,598 |
1,019 |
335 |
122 |
66 |
41 |
100% |
23,9 |
24,5 |
30,1 |
13,4 |
5,3 |
1,7 |
0,6 |
0,3 |
0,2 |
출처:카자흐스탄 소련한인들,(알마틔:카자흐스탄,1992),pp.161-162.
구소련 당시 방대한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는 한인을 정신적으로 한데 묶을 수 있는 전소련 공화국간 유일한 한국어판 신문이 현재의 `고려일보'이다. 고려일보는 연해주 시절 1923년부터 블라지보스톡에서 발행되기 시작했던 한글신문 `선봉'의 후신이다. 그러나 `선봉'은 1937년 강제이주와 함께 폐간되었다가 1938년 크즐-오르다에서 `레닌기치'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가 1991년 시대와 변화에 맞추어 `고려일보'로 개명하였다. 현재 소련의 붕괴로 카자흐스탄 중심의 한인 소식지로 전락되었으나 민족신문으로서 의의가 크다. 그러나 개방 이후 한국 회사, 교회 등 한국인이 대거 카자흐스탄에 진출함에 따라서 요구되는 통·번역가로 비교적 수준 높은 한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던 고려일보 기자들이 빠져 나가 현재는 한국어판 기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하여 고려일보사가 존폐의 위기에 있다. 체계적인 후진 양성과 한국어판 기자의 사회적, 경제적 대우로 근무 의욕을 성취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알마틔의 라디오와 TV방송국에도 한국 프로그램이있다.
한인의 민족 문화 예술활동의 하나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고려극장`이다. 1924년 연해주에서 창립된 이 극장은 숱한 어려움에도 지금까지 한국말 연극을 공연하는 전세계 최장수의 한인 극장이다. 젊은 세대로 갈수록 한국말을 구사할 수 있는 배우가 없고,극작가가 없어 곤란을 겪고 있다. 이외에도 소그룹의 무용단, 가무단이 활동하고 있다.
소련 시절 한인 단체의 결성은 고르바쵸프의 글라스노스찌 및 민주화 정책의 결과 결사의 자유가 허용되면서 가능하게 되었다. 한인들도 한인이 모여 사는 국가, 지역마다 한인 단체, 문화센터를 결성하여 한인 사회의 발전과 친선 도모, 민족문화·예술의 전승 및 한글 교육의 확대를 위하여 제반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특히 88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재소 한인 사회에 민족적 자부심이 고취되면서 한인 조직 결성운동이 일기 시작 했는데 1989년 5월5일 `모스크바 고려인 협회'(회장:박 미하일)가 설립되었고,이를 전후로 카자흐스탄, 우즈베크스탄, 키르키즈스탄, 타지크스탄 등 전국 곳곳에서 `고려인 협회', `고려 문화 중앙'이라는 이름으로 한인 조직들이 생겨났다.
이들 한인 들은 독자적으로 활동을 전개 해오다가 통합의 필요를 절감하고, 우선 1990년 2월 모스크바에서 최초로 `한인 연합회의'를 개최하고 동년 5월17일에는 `전소 고려인 협회'를 창립하였다. 이에따라 협회 산하에 지역별로 지부를 결성하기로하여 `카자흐스탄 고려 문화 중앙협회(회장:한 구리 보리스비치)'와 `우즈베크스탄 고려 문화중앙협회(회장:김 표트르)'가 창설되었다.
전소 고려인 협회'의 강령에 의하면 스탈린주의에 의한 탄압정책의 유산의 완전한 청산, 재소한인의 정치,경제,사회,문화,시민의 제권리 실현 및 보호, 민족적 자각과 역량의 발전, 민족어와 민족문화의 재생,발전 등을 주요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런데 소연방이 붕괴로 각 공화국이 분리 독립됨에따라 1992년 2월 `전소 고려인 협회'는 임시회의를 개최하여 `국제 고려인 총연합회'(회장:김영웅)로 개편 되었다. 구조직을 그대로 인수하여 독립국가연합 각 지역의 `고려인 협회'가 산하조직으로 결성되기는 하였지만 이들과의 연대는 원활하지 못하여 사실상 독립국가별로 개별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는 독립후 개별 한인 단체들이 각국의 제한을 현실적으로 뛰어 넘을 수 없는 한계 때문이다. 구소련의 붕괴는 한인의 단합에 있어서 커다란 장애가 아닐 수 없다.
카자흐스탄 고려 문화 중앙협회는 1990년 3월 17일 조직되어 산하에 7개의 주가 참가하였다. 1992년 제2회 총회에서는 17개주, 4개시, 6개군이 가담하였다. 이때 채택된 강령은 한인의 민족 운동에 참가 조직, 한국어·민족문화·민족예술 활동 촉진, 구소련 한인의 자신의 역사 교육 활성화, 해외 동포와 경제적·문화적 교류 증진이다.
지역별로 한국어 교육과 `설날', `한식' 등 한민족 명절 행사를 통해 민족 문화 재생에 공헌을 하고 있다.
1995년 10월 제3회 총회에서 `고려 문화 중앙협회'라는 이름 대신에 `고려인 협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때 채택한 강령은 다음과 같다.
-모국어,민족 문화·전통 및 관습의 부흥
-한인의 권리와 이해 보호
-카자흐스탄의 민주화와 법치국가 건설에 한인들의 적극적 참여
-한인 상업 활동의 지지
-한국과 미국, 일본 등 한인 동포와 교류의 강화
-독립국가연합내의 한인과 친목 및 평화 강화·협력 증진·연계활동 의 발전.
동년 제4회 비상총회에서 채 유리 안드례예비치가 제2대 회장으로 피선되었다.
알마틔 고려문화중앙 소속단체로 여성클럽 `진달래'가 96년 6월 1일 조직되었다. 이 단체는 여성들의 자녀교육, 가정과 사회의 모든 부문에서 도움을 주고 민족문화와 전통을 재생시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한반도가 분단된 상황에서 한인들 사이에도 친북한,친남한,중립적 단체로 분열 되어 한인의 단합을 저해하는 요소가 되고 있다. 고려인 협회가 친남한계라면 `조선 통일 촉진 위원회(ASOK)' 는 친북계열이다. ASOK는 1989년 평양축전에 참가한 한인들을 중심으로 타쉬켄트에 1989년 11월 결성되었다. 그러나 남북한의 국력의 차이로 ASOK의 활동은 거의 미미한 상태이다.
카자흐스탄의 한인의 대부분은 1937년 연해주에서 불법으로 강제이주되어 왔다. 그러나 이들은 최근 까지 자신의 불법적 탄압에 아무 소리도 못하고 살아왔다.
그러다가 1980년대 후반 페레스트로이카 이후에야 한인들은 그 동안 금기시 되었던 스탈린에 의한 불법탄압과 강제이주에 대해 언급하고 비판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러시아에 이어 카자흐스탄에서도 한인의 강제이주에 대한 불법성을 인정하고 그들의 명예회복을 위한 법률을 제정하여 현재 광범위하게 명예회복 소송이 진행되고 있다.
비록 때가 늦긴 하였지만 이러한 조치는 그동안 죄인의 신분으로 타민족의 눈치를 보며 살아왔던 한인의 법률상 무죄선언으로서 카다란 의의가 있다.
소련 시절 1989년 11월 14일 최고 소비에트는 강제이주의 불법성을 인정하는 성명을 발표하여 불법 탄압에 대한 명예회복의 가능성을 열었다.
러시아 연방 최고 소비에트는 1991년 4월 26일 `탄압 받은 민족의 명예회복에 관한 법'을 공포하였고, 이에 근거하여 1993년 4월 1일 `러시아 한인들의 명예회복에 대한 결정'을 공포하여 한인의 명예회복을 전반적으로 단행하였다.
카자흐스탄은 1993년 4월 14일 일반법인 `집단적 정치탄압 희생자들의 명예회복에 대한 법률'을 제정하였다. 그러나 한인 강제이주의 경우 관련 근거 자료가 없어서 카자흐스탄 고려인 협회는 한인에 관한 특별법 제정을 추진하고 있다.
그렇지만 특별법이 제정되기 전에도 상기 법률에 의거하여 탄압 받은 한인들의 명예회복 소송이 가능하고, 실제로 현재 96년 후반기 부터 알마틔, 크질-오르다, 카라간다, 딸듸-꼬르간, 잠불 주에서는 명예회복 소송이 진행되고 있다.
특히 카자흐스탄의 나자르바예브 대통령은 96년 12월 30일 1997년을 `정치적 탄압의 희생자의 추모 및 전체 민족의 화합의 해'로 선언함에 따라 한인의 명예회복 소송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다민족 국가인 소련의 붕괴와 함께 출범한 CIS국가들 내부에서도 공화국 내부의 독립 및 소수민족의 자치요구가 빈번히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구소련 한인내부에서도 미미하나마 이러한 추세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1990년 5월 재소 고려인 협회는 창립총회에서 한인 자치구문제를 다시 공식화하였다. 한인들은 1937년 강제이주전에 거주하였던 원동지구 포시에트 부근을 거론하였다.
1991년 제2차 전소고려인 협회에서는 연해주 해안가 일대를 특별 경제구역으로 하고 한국의 지원을 받아 재소한인의 자치구를 요구하였다. 러시아 연방 상원은 1993년 4월 9일 재러 한인의 명예회복과 함께 강제이주 한인들의 연해주 정착을 지원할 것을 결의하였다.
1989년 8천 3백명의 한인이 연해주에 거주하였는데 각지로 부터 이주자가 늘어 1998년에는 대략 3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재이주자들은 주로 농사와 장사에 종사하면서 현지 정착에 노력을 다하고 있다. 현지 한인 단체는 이들의 정착을 원활하게 할 수 있는 정착촌 건설에 노력을 다하고 있다.
특히 1996년 민족문화자치주에 대한 러시아 연방법이 공포되어 한민족자치구 설립에 더욱 박차를 가할 것으로 보인다. 독일인의 볼가 공화국 설립운동도 더욱 한인의 자치주 건설 운동에 자극이 되었다.
그후 1998년 1월 연해주지사 예브게니 나즈드라텐코가 연방정부로 부터 연해주 자산으로 이관된 극동 군사지역 내의 군사기지 시설을 러시아 한인 정착 지원용으로 `연해주 한인 재생폰드(회장:김 텔미르)'에 무장으로 무기한 사용하도록 조치했다. 이 군사기지의 규모는 블라지보스톡 북쪽의 한카군 프라토노보읍과 알렉산드롭스키읍 일대 1,500ha와 호롤군 포포프카읍과 우수리스크군 보즈드비젠카읍 기지를 합쳐 여의도 9배넓이에 해당하는 1,783ha(약 540만평)에 이른다. 이곳에는 아파트, 학교, 유치원, 식당, 백화점 등의 건물을 비롯해 창고와 주유소 등 부대시설과 전기, 상하수도, 보일러 등 기반시설을 갖추고 있어 한인들이 곧바로 들어가 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농사와 경공업 등으로 자활터전을 마련하는데 큰 보탬이 될 것으로 보인다.
1993년 이명남, 임채완 교수의 `재소한인의 정체성에 관한 설문조사' 결과에 의하면 자치주 건설의 필요성에 대하여 구소련 전체 반응자의 63.4%가 긍정을, 12.9%가 부정, 잘모르겠다가 23.7%이었다. 이중 알마틔 반응자는 44.0%가 긍정, 17.9.%가 부정, 38.1%가 잘모르겠다로 반응하였다.
그러나 상기한 민족관계 모니터링 센터의 설문조사에 의하면 카자흐스탄을 떠날 기회가 있다면 어떻게 하겠는가의 질문에 생각하지 않고 떠나겠다(16.7%), 생각해보지 않았다(31.9%), 아이들의 의견을 듣겠다(11.3%), 아무데도 떠나지 않겠다(30.7%), 부모와 상의해 보겠다(8.4%)로 대답했다. 이는 자치주 건설의 주장이 다분히 현실에 근거하지 않은 이상적 주장임을 나타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많은 중앙아시아 한인이 타국으로 이주를 떠나고 있다. 이는 그만큼 중앙아시아 한인들이 처한 상황이 어렵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카자흐스탄 한인의 경우 다른 우즈베키스탄과 비교해서 상당히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민족적, 종교적 차별이 심하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에 대부분 이주를 고려하지 않고 있으며 변화된 상황에 적응하는 방안을 선택하고 있다.
러시아 극동 연해주 일대는 조상들이 강제이주 이전에 살던 지역이고 모국이 가깝다는 점에서 일부 민족주의자들에게서 이주와 자치구 건설의 필요성이 역설되고 있으나 이 역시 매우 비현실적 구호이다. 물론 중앙아시아 한인의 연해주 재이주와 자치지역 확보는 중앙아시아 한인의 가장 확실한 대안임이 틀림없지만 넘어야 할 장벽도 만만치 않다. 무엇보다도 중앙아시아 한인의 연해주 재이주에 대한 심리적 두려움이 크다. 그리고 재이주 이후의 정책에 필요한 주거지·직업 확보의 어려움, 연해주 주민의 반대, 러시아 연방 정부의 부정적 시각 등도 고려해야 한다.
그래서 중앙아시아 한인들중 민족 자치구 설립에 반대의 소리가 높다. 비록 강제로 중앙아시아까지 왔으나 이곳에서 이룩한 안정된 생활을 버리고 새로운 땅으로 가는 것은 제2의 이주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설사 이주한다고 해도 새 개간지를 얻어 논과 밭을 일구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닐 뿐더러 원동지역의 기후가 중앙아시아 만큼 농사에 유리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와같이 이동이 쉽지 않은 데 민족자치구운동은 이곳 민족으로 부터 쫓겨나는 비운을 맞을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영토적·문화적 자치가 전제된 경우에나 연해주 재이주에 동의한다는 입장이 강하다.
한편 연해주 한인들도 한인들의 원동지역에로 재이주를 우려하고 있으며 러시아 연해주 당국은 한인 자치주 설립 움직임에 제동을 걸고 있다. 연해주 주정부 내무국장 알렉산드르 와살리예브의 보고서에 의하면 한국측이 러시아 한인 단체를 통해 구소련의 각공화국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연해주로 이주시킨 뒤 자금지원을 통해 자치주를 설립하고 궁극적으로 러시아에서 분리시키는 장기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함으로서 한국과 러시아간에 외교적 분쟁의 씨앗이 될 가능성이 있다.
그런 점에서 장기적 대안으로 한인 자치지역 확보는 추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명시적 자치구 확보운동은 신중하게 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1997년은 카자흐스탄 한인들이 강제이주를 당한 지 60주년이 되는 해로 한인의 역사적 고난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카자흐스탄 한인을 비롯한 중앙아시아 한인들은 구소련의 몰락과 신생 독립국가의 건설과 함께 새로운 체제의 변동에의 적응이라는 공통의 과제이외에 언어 생활에 있어서 곤란을 겪고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카자흐스탄 한인은 카자흐스탄에 적응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국가에의 귀속의식과 민족적 정체의식의 조화로운 발전이 현재 당면한 구소련 한인사회의 가장 중요한 당면과제라고 생각이된다. 특히 전통적인 카자흐민족 경시태도, 경제적 부로 인한 민족간 갈등의 심화, 기독교의 팽창주의적 무리한 선교로 인한 이슬람교와의 종교적 갈등이 민족간 갈등으로 비화되지 않도록 주의하여야 할 것이다. 제2의 LA사건이 카자흐스탄에 일어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 것인가? 대한민국 정부도 해외동포에 대한 기본정책은 거주국에서 적응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카자흐스탄 한인을 카자흐스탄 국민으로서 보는 입장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자칫 범하기 쉬운 오류로 한반도 중심의 시각, 즉 카자흐스탄 한인을 `해외에 거주하는 한국인의 연장'이라는 모국 위주의 관점은 경계해야 한다.(끝)
장 원 창(KOICA 파견 한국학 전문가,카자흐국립대)
첫댓글 카자흐에서 유학을 준비중인자로서 정보를 공유하게 되어 너무 고맙구요 ...... 다음엔 제가 그뒤를 이어 더많은 정보를 수집하여 공유 할수 있도록 해야 겠구나 생각 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