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종로2가 탑골공원이 있다.
그 공원일대는 큰 절 원각사가 있어 대절골(大寺洞)로 불렀다.
그 원각사에는 원각사지 10층 석탑이 있다. 국보제1호 숭례문에 이어 국보2호이다.
이 탑은 흰색이라서 백탑이라 불리었다.
이 백탑 근처에서 살면서 아름다운 우정을 나누고 학문을 교류하던 실학자들이 있다.
바로 백탑파이다. 박제가 박지원 이덕무 유득공 홍대용 서상수 백동수 등이 그들이다.
조선의 르네상스라고 일컬어지는 정조대에 백탑 주위에 사는 서생들로서 나이와 신분을 넘어
우정을 쌓은 우리 실학자들 백탑파의 이야기이야기이다.
백탑파의 한 사람이었던 박제가의 <백탑청연집> 서문을 통해 백탑파의 면면을 살피려 한다.
한양을 빙 두른 성곽의 중앙에 탑이 있다.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눈 속에서 죽순이 삐죽이 나온 듯하다.
그곳이 바로 원각사의 옛 터다. 지난 무자년과 기축년 사이, 내가 18~19살 때쯤 박지원 선생이 문장에 조예가 깊어서
당대에 이름이 높다는 소문을 듣고, 탑의 북쪽으로 선생을 찾아뵈러 갔다.
박지원 선생은 내가 자신을 찾아왔다는 말을 듣고 의복을 갖추고 나와서 맞아 주셨다.
오랫동안 사귄 친구를 다시 만난 듯 손을 맞잡아 주셨고, 지은 글을 모두 꺼내어 읽어 볼 수 있게 해 주셨다.
이윽고 몸소 쌀을 씻어서 다관(茶罐)에 밥을 해 맑은 사발에 퍼서 옥 소반에 받쳐 내오셨다.
그리고 술잔을 들어 나를 격려해 주셨다.
너무나 뜻밖의 따뜻한 대접에 놀라고 기뻤던 나는 오랜 세월 아름다운 일로 여겨 문장을 지어서 응답했다.
내가 선생의 인품과 학식에 빠져든 상황과 지기(知己)에 대한 감동이 이러했다.
당시 형암 이덕무의 사립문이 그 북쪽에 마주 대하고 있었고, 낙서 이서구의 사랑이 그 서쪽에 우뚝 솟아 있었다.
또한 수십 걸음 가다 보면 관재 서상수의 서재가 있고, 북동쪽으로 꺾어져서는 유금과 유득공이 살고 있었다.
그래서 한번 그곳을 찾아가면 집에 돌아가는 것을 까마득히 잊고 열흘이고 한달이고 머물러 지냈다.
곧잘 서로 지어 읽은 글들이 한 질의 책을 만들 정도가 되었고, 술과 음식을 구하며 꼬박 밤을 새우곤 했다.
내가 아내를 맞이하던 날 저녁에도 처가의 건장한 말을 가져다 안장을 벗기고 올라타고서 시동 한 명만 따르게 하고
홀로 바깥으로 나왔다. 당시 달빛이 길에 가득했다. 이현궁 앞을 지나서 말을 채찍질해 서쪽으로 내달렸다.
이윽고 철교의 주막에 이르러 술을 마시고, 삼경을 알리는 북소리가 울린 후 여러 벗들의 집에 들렀다가 탑을 빙 돌아 나왔다.
그때 호사가들은 이 일을 두고, 왕양명이 철주관도인을 찾아가 돌아오는 것조차 잊었던 일에 빗대 말하곤 했다.
그 이후 6~7년이 지나 백탑의 벗들이 제각각 흩어졌고, 가난과 병이 날로 심해져 간혹 만나면 서로 아무 탈 없음을
다행으로 여기곤 했다. 그러나 풍류는 지난날보다 못하고, 얼굴빛은 그때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때에 이르러서야 벗과의 교유에도 피할 수 없는 흥망성쇠가 있어서 한때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중원의 사람들은 벗을 자신의 목숨처럼 생각한다.
그래서 어양 왕사진은 "빙수와 우장이 달 밝은 밤에 모자를 벗고 맨발로 나를 찾아와서는"이라는 시를 지었고,
소장형은 문집에서 왕사진과 이웃해 살면서 나눈 아름다운 일을 회상하고 기록했다. 벗들의 만남과 헤어짐을 적은 것이다.
나는 그 글들을 들여다볼 때마다 비록 다른 곳에서 태어나도 마음은 같을 수 있음을 느낀다.
백탑의 벗들과 더불어 감탄하며 즐거워한 일이 너무나 오래되었다.
벗 이희경이 박지원 선생과 이덕무 그리고 여러 사람들과 나의 글을 베껴 몇 권의 책을 만들었다.
내가 그곳에 '백탑에서의 맑은 인연' 이라는 뜻을 담아 『백탑청연집』이라고 제목을 붙이고 이렇게 서문을 지었다.
이 글을 통해 나와 벗들이 당시 얼마나 융성하게 교유했는가를 보여주고 또한 내 평생의 한두 가지 일을 밝혀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