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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경주풍곡요산회(전 경주운암요산회)의 2월 정기산행지는 경북 경주의 단석산(斷石山 827m)이다. 그 동안 먼 곳으로만 다녔기에 근교산의 탐방에 대한 의견들이 제기되었고 마침내 이 지역의 가장 큰 산인 단석으로 산행지가 결정된 것이다. 이 산은 삼국통일 이전에는 경주 남산, 금오산, 토함산, 소금강산과 함께 신라인들이 신성시한 오악 중에서도 중악(中岳)이라 하였으니 나라의 영산으로 모셔왔던 산이다.
특히 이번 산행에는 재약산 이후로 다시 경주고산악부와 함께 합동을 등반을 한다. 이번 산행은 풍곡인들에게도 그렇지만 경주고산악부원들에게도 지역의 명산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여 나름으로는 이래서는 안되겠다라는 반성의 의미도 포함된 산행이다. 단석(斷石)! 대화랑이었던 소년 김유신이 이 산정에서 큰 칼로 큰 바위를 둘로 쪼갰다는 전설에서 비롯된 단석........오늘 우리는 단석에 올라간다. 그것도 경주를 지나는 낙동정맥의 산줄기를 타고 산정에 오른다.
이번 산행의 들머리가 되는 당고개. 당고개는 경주 건천읍에서 산내읍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이 당고개는 멀리 태백산에서 백두대간에서 갈라져 나온 산줄기가 동해안을 따라 태백-백암-통고-주왕-도덕-단석-백운-고헌-가지-신불-천성-금정산으로, 남으로 내려와서 부산 바다 몰운대까지 가는 산줄기, 이른바 낙동정맥이 이 고개로 지나서 단석으로 들어가는 고개이다. 우리는 이 당고개에서 낙동정맥을 타고 단석을 올라 단석의 정상 직전에 낙동정맥을 보내고 정상에 오를 것이다. 하기에 일반 단석산행에 비해 다소 의미를 더한 산행이 될 것이다.
이 곳이 산행 들머리. 여기서 단석 산행이 시작된다.
앞에 경주고산악부원들이 서고 뒤에 풍곡인들이 뒤 따른다.
겨울산은 녹색이 없어 황량하고 창백하기만 하다. 하지만 이 계절에는 그에 걸맞는 운치가 있다.
단석은 한마디로 말하면 신라시대 때 화랑들의 수련장이었다. 단석산은 건천읍 송선리 우중골에 있으며, 산 7∼8부 능선 4개의 바위가 둘러싸인 천연굴이 있는데 옛날에는 상인암(上人巖:일명탱바위)라고 불리었다고 한다. 화랑들은 이 바위굴 속에 불상을 새기고 그 위에 지붕을 덮어 석굴사원을 만들었다. 이 절을 신선사(神仙寺) 또는 단석사(斷石寺)라고 부른다. 내부의 마애불상은 국보 제 199호로 지정되었다. 단석산은 경주에서 가장 높은 산(827m)으로 백제에 대한 신라의 국방의 요충지였다. 이 지역은 진달래군락지로 봄철 전국적으로 산악애호가들의 사랑을 받고 있으며, 인근 조래봉(657m)과 더불어 등산코스로 각광을 받고 있다.
산길이 낙동정맥이다 보니 깊은 산과 연결이 되어 산짐승들이 자주 출몰하기도 한다. 특히 단석은 낙동정맥 산줄기가 지나기에 바로 남으로 낙동정맥 최대의 산군인 영남알프스와 인근에 연결이 되어 있어 더더욱 그렇다. 멧돼지 출몰지역이라. 그럼 멧돼지에 대해서 한번 조사해 볼까?
멧돼지는 멧돼지과에 속하며, 가축화된 돼지의 조상 종이다.
몸길이 1~1.8m, 어깨높이 0.45~1m, 몸무게는 40~200kg이다. 머리는 원뿔형으로 크고 몸과의 구별이 확실하지 않다. 네 다리는 짧고 가늘며 겉보기와는 달리 빨리 달린다. 몸색은 어두운 갈색에서 엷은 갈색에 이르기까지 변화가 많다.
멧돼지는 예리한 송곳니가 있는데 아래턱에 있는 송곳니는 일생 동안 계속 자라 큰 엄니가 된다. 엄니는 마치 칼날 같으며 적을 공격하거나 위험에 부닥쳤을 때 긴요한 무기가 된다. 코뼈는 가늘고 길며 잘 발달되어 있기 때문에 땅 속의 먹이를 파내는 데도 적합하다. 위는 되새김위가 아니고 장(腸)의 길이는 몸길이의 15배로 같은 잡식성인 사람의 8배와 비교할 볼 때 약 2배가 된다.
멧돼지는 깊은 산, 활엽수가 우거진 숲 속에서 살기를 좋아하며 눈이 많고 추위가 심해지면 야산으로 내려오는 경우도 있다. 보금자리는 양지바른 곳에 땅을 파고 앞쪽이 트이게 입구를 파서 적의 공격에 대비한다. 과일·나무뿌리를 먹고, 작은 포유류, 물고기, 죽은 동물의 사체까지 먹는다. 긴 주둥이로 땅을 파헤치고 속에 있는 감자·고구마·나무뿌리뿐만 아니라 벌레까지 닥치는 대로 먹는다. 낮에는 비자나무·대나무가 우거진 곳에서 쉬고 저녁 때부터 행동한다. 그러나 사냥에 의한 위험이 적을 때는 낮에도 행동하는 경우가 있다. 행동권은 지형에 따라 다르지만 4-8km, 때로는 30km 이상도 돌아다닌다. 헤엄을 잘 치며 수km의 강이나 해협을 헤엄쳐 건너는 경우도 있다. 시력은 나쁘나 청각과 후각이 발달해 있다. 식물은 물론 토끼·들쥐 등 작은 짐승에서 물고기나 동물의 사체를 먹는 등 잡식성이다. 또한 벼·보리·고구마 등의 작물을 즐겨 먹기 때문에 포획이 허가되어 있는 지역이 많다.
에이고! 멧돼지 연구는 그만하고 돼지고기나 구워서 먹자!
쭉쭉빵빵 자라는 나무들. 겨울나무들.
단석은 경주의 진산이다. 어떤 이들은 토함이 진산이라 하지만 단석이 진산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경주의 젖줄인 형산강의 발원이 단석이기에 그렇다. 토함은 단석산 부근의 백운산에서 갈라진 산줄기가 포항의 호랑이꼬리 장기곶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형남기맥(일명 토함기맥, 호미기맥)이 지나는 산으로 형산강의 물을 모아주는 산이다.
첫번째 휴식. 풍곡에는 최근에 젊은 사람들, 이른바 영건스들이 들어와 분위기가 다소 달라졌다. 발랄하고 시원한 청석, 절제되고 안정감있는 콩콩이, 지적이고 점잖은 청강, 박식하고 부드러운 최교수(와인식객).............등이 입회하여 바람직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늘 막내였던 송산이 후배들을 받아놓고 늘 즐거워하고 있다.
단석은 전국적인 진달래 명산이다. 단석산에는 곳곳에 많은 진달래군락이 있지만 북쪽인 방내쪽보다는 남쪽 사면에 특히 많아 심지어 키높이를 훨씬 넘는 대단한 규모의 진달래군락지가 산재해 있다.
드디어 단석산 정상. 풍곡인들은 힘들이지 않고 정상에 올랐다고들 즐거워한다. 비교적 힘이 덜 들었던 것은 고도가 높은 당고개에서 올랐기 때문이다. 신선사 방면으로 오르면 단석도 사람 몇번 죽인다. 단석산 정상은 억새밭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중앙이 절반으로 갈라진 원형의 단석이 놓여 있다.
이 바위가 바로 김유신이 칼로 잘랐다는 그 전설적인 원형의 단석이다. 실제로 그랬을까?
삼국통일의 공신인 김유신(金庾信)은 595년(진평왕 17년) 충북 진천에서 만노군(萬弩郡)의 태수이던 서현(敍玄)장군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김수로왕의 13대손인 김유신은 15세에 화랑이 되어 17세에 고구려, 백제의 잦은 침략에 삼국 통일의 큰 뜻을 품고 서라벌 서쪽산(이 곳이 바로 지금의 단석산)에 있는 석굴에 들어가 목욕재계 하고 천지신명에게 고구려, 백제, 말갈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하자, 4일 만에 한 노인이 나타나 김유신의 인내와 정성을 가상히 여겨 비법이 담긴 책과 신검(神劍)을 주었다고 삼국사지, 동국여지승람, 동경잡기에 소개되어 있다. 김유신은 이 신검으로 고구려, 백제와 싸울때마다 승리를 거두었다고 하며, 당시의 화랑들이 수도하던 산에서 김유신은 이 칼로 무술연마를 하면서 바위들을 베었다고 하여, 이름이 단석산(斷石山)이 되었다.
김유신의 유적지는 충북 진천에 담안밭 탄생지, 태를 묻은 태령산, 식수로 사용했던 우물 연보정, 말을 훈련시켰다는 치마대와 투구모양의 투구바위가 있으며 길상사는 흥덕왕 10년(835)에 흥무대왕으로 추봉된 후 사당으로 건축되어 장군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그리고 경주에는 김유신장군묘와 금산재비각이 있다. 사귀던 천관녀의 집터는 천관사로 남아있다. 천관(天官)이란 여인의 집에 자주 드나들자, 어머니 만명(萬明)부인은 왕과 부모에게 기쁨을 주기를 기대했는데 술과 여자를 즐기느냐며 울며 타이르자 다시는 그여자 집에 가지 않기를 맹세했다. 그러던 어느날 말은 유신을 태우고 눈에 익은 길을 따라 천관녀의 집에 다다르자 유신은 말의 목을 베어버리고 그 집을 떠났다. 천관녀는 눈물의 원사 한곡을 지어놓고는 속세를 떠났다고 한다. 고려의 문인 이규보(李奎報)는 이에 아래와 같이 읊었다.
절 이름 천관사 옛부터 연 있더니
홀연 지낸 일 듣고 한 번 슬퍼라.
삐딱이 취한 공자 꽃아래서 놀고
애원하는 미인 말 앞에서 우네.
적토마 다정해서 오히려 길을 알고
상노는 무슨 죄로 채찍을 받았더냐.
다만 남은 것은 한 곡조 좋은 가사
휘영청 달빛 아래 만고에 전해지네.
김유신은 엄격한 성품을 신라 국민정신과 화랑정신으로 승화시켰는 바 이 엄격함은 가훈을 어긴 아들 원술랑과 부자의 연을 끊어버리기까지 한데에서도 잘 나타나고, 당나라의 영토적 집착을 단호히 물리친 데에서도 잘 나타난다. 660년에 백제를, 668년에 고구려를 멸하여 삼국을 통일한 김유신은 태대각간의 직위를 받고 673년 78세로 세상을 떴으며, 사후 162년 후 인신으로서 대왕(흥무)에까지 오른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겼다. 영리했던 누이 문희(文姬)는 김춘추에게 출가하여 무열왕비가 되어 문무대왕을 낳았다.
사적인 얘기지만, 나의 세째딸 이름이 이 이름을 따서 문희이다. 나의 세딸들의 이름은 전부 경주와 연관이 있다. 큰딸 '규희'는 이 지역의 유명한 독립운동가이셨던 부용당 조인좌 옹이 지어주셨고, 둘째딸 '민희'도 玟자가 '경주옥돌민'자이다. 경주의 남산은 예부터 옥돌로 유명했기에 그런 글자가 나온 것이다. 그리고 세째달의 이름은 김유신의 누이 이름인 '문희'이다.
정상에 선 경주고산악부. 좌상에 있는 분이 경주고 수학교사인 김조언선생이다. 선생은 포항여고 출신으로 대학에서 수학교육을 전공하고 현장에 계시는 분이다. 고교시절부터 수학에 뛰어났다는 선생은 경주고에서 특히 경시대회를 각별히 지도하고 있다.
단석에서 내려다 본 경주시 건천읍의 너른 들판. 건너에 보이는 산이 경주 구미산이다. 최제우 선생이 시작했던 천도교(동학)가 발현했던 용담정이 지금도 있다.
드디어 맛있는 점심시간. 이번에는 근교에 온다고 해서 특히 쇠고기샤브샤브를 준비했네. ㅋㅋ 총무와의 협의하에 송산이 준비했겠지. 맛있는 샤브샤브, 풍곡의 식량도 잘 돌아간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즐기는 산중점심. 그 가운데에 샤브샤브와 송산이 있다.
우리는 정상에서 북쪽 좌사면을 따라 하산을 시작한다. 우리는 단석의 주능선을 타고 하산하다가 천주암 방면의 가파른 된비알로 통해서 하산을 시도할 것이다. 하산 시작과 동시에 눈발이 흐트러지기 시작한다. 이상하다! 산행 때의 빈번한 강우 때문에 모임의 이름까지도 바꾸었는데(운암에서 풍곡으로.........) 또 강우가 시작한다. 아무래도 고사를 덜 지냈는지..........
한동안 따뜻했던 날씨 덕분에 산 진달래들이 싹을 틔우려다가 다시 오늘 눈발을 만나 움츠러 들고 있다.
봄날씨에 갑작스러운 눈발에 모두들 의아해 하지만 800m대 산이다 보니 나름으로의 기상조건이 있다. 하기야! 단석의 진달래가 어디 쉽게 모습을 나타낼까? 어떤 인고가 있어야 싹을 틔울 수 있겠지.
막 흐트러지는 눈발. 하지만 쌓이지는 않는다. 기온이 높아서가 아니고 량이 적어서이다. 잠시 흐트러지다 그치고 만다.
하산길 바위전망대에 선 풍곡인들. 풍곡의 막강회원들이 한군데에 모였다.
저 능선 끝까지 따라갔다가 우측으로 천주암으로 가파르게 하산할 것이다.
주능선을 계속 타고 내려간다. 그러다 천주암 방면으로 접어들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 능선을 버리고 천주암 방면으로 내려간다. 아마 매우 가파를 것으로 예상된다. 해발이 높은데 거리는 짧기 때문에 척 보면 답이 나온다. 내가 달리 등반대장해 먹겠냐?
천주암 방면으로 내려서면서 위를 쳐다보니 바위의 위용들이 만만치 않다.
사진은 이렇게 보이지만 가파른 길이다. 그러니 줄이 매여져 있지.
가파른 하산길은 계속된다. 단석에 수 없이 왔지만 나도 이 길은 처음이다. 단석산 아래의 KTX 건설로 예전 방내 모시각단코스의 산길이 훼손되어 이길을 택했지만 제법 재미있는 길이다. 별로 때도 묻지도 않고...........
드디어 나타난 천주암. 내가 경주고산악부를 리드하는 통에 풍곡인들을 리드하던 송산이 아들과 함께 먼저 천주암에 도착하고 있다.
단석산의 천주암. 말이 암이지 큰절 뺨친다. 천주암은 단석산의 북쪽 사면에 있다. 이른바 건천읍 방내면 쪽이다. 이 부근에서는 가장 큰 절이다. 물론 가장 유명한 절은 단석의 북쪽에 있는 신선사이다.
하산은 천주암 대웅전 마당을 걸어나와 정문으로 빠져 나온다.
천주암 주차장. 여기에 우리 차를 한대 대어 놓았다. 이제 이 차를 타고 다시 당고개로 가서 우리들의 차를 전부 가져올 것이다.
아래에서 올려다 본 단석산 주 능선. 하지만 정상은 능선 너머 능선에 있다. 그렇게 능선을 바꾸어 타면서 정상은 해발을 높이고 있다.
우리는 걸어서 방내 모시각단으로 나간다.
여기가 경주시 건천읍 방내리. 이 곳은 전국적으로 유명한 것이 하나 있다. 한국 최고의 양송이버섯 재배단지이다. 예전에 건천에서 빈촌이었던 이 방내마을이 양송이 재배단지가 되면서 부촌이 된 것은 유명한 얘기이다. 나도 교사하면서 예전에 이 지역에 살고 있는 학부형들에게 양송이 제법 얻어 먹었다.
경주로 나와서 뒷풀이는 송산이 개발한 '완도참전복구이'집에서 한다. 전복구이에 작은 바다가재가 맛을 보태는 먹음직스러운 주점이다. 모두들 기분들이 좋은지 석천 총무와 송산이 한 사라씩을 낸다하여 3만원씩 경쟁적으로 낸다.
요런 것도 한 커트.
즐거운 뒷풀이 시간들. 근교산행에는 이런 여유로움이 좋다.
첫댓글 오랜 만일세 진달래꽃 필적에 구경 같어면 정말로 보기 좋아설 낀데 아쉽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