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4년 10월 1일 조지아주(州)에서 출생하였다. 조지아공과대학교를 졸업한 후 해군에 입대하여 원자력잠수함 개발계획에 참가하였다. 1953년 퇴역하여 고향에서 가업인 땅콩농장을 경영하였다. 1963년 민주당 상원의원, 1970년 조지아주 주지사가 되어 흑인등용과 행정기구개혁을 실시하였다. 1976년 11월 민주당 후보로서 대통령선거에 출마, 현직 대통령 G.R.포드를 누르고 제39대 대통령이 되었다.
취임 후 특히 에너지파동과 경제문제의 타개를 위하여 노력하는 한편, 이집트-이스라엘 양국을 조정하여 중동평화를 정착시키고자 하였다. 또한 중국과의 국교정상화와 소련과의 제2차 전략무기제한협정(SALT)을 성공시켰다. 그러나 1979년 11월 이란인들이 테헤란 주재 미대사관을 급습하여 미국인 직원을 인질로 붙잡는 사건이 발생하여, 1980년 4월 미군의 인질구출작전 실패 및 국내 경제정책의 파탄 등으로 1980년 말 대통령선거에서 공화당의 R.W.레이건에게 패하였다(연임에 실패 - 미국대통령은 두번까지 가능) .
퇴임 후에는 애틀랜타에 카터센터를 설립, 냉전 후 지구상에서 야기되는 중대사건의 분쟁해결사로서의 조정 역할에 진력하고 있으며, 1994년 6월에는 개인자격으로 북한을 방문, 김일성 주석과 회담을 갖고 교착상태이던 핵문제를 논의하여 해결의 실마리를 푸는 데 공헌하였다. 퇴임 후 21년간 세계 평화와 인권을 위해 노력한 공로가 인정되어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또한 국제 해비타트에서 펼치는 '사랑의 집짓기' 운동의 일환인 지미카터 특별건축사업(JCWP)을 해오고 있으며, 2001년에는 한국을 방문하여 충청남도 아산 등에서 사랑의 집짓기에 참여하였다.
노벨위원회는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78)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하면서 이례
적으로 "카터 전 대통령은 무력 사용의 위협이 대두되는 요즘 '분쟁은 최대한 국제법
에 기반을 둔 중재와 국제공조를 통해 해결돼야 한다'는 원칙을 지켰다"고 우회적으
로 부시의 일방주의 외교를 비판했습니다.
미국 매파에서는 카터를 무능한 인간이라고 싫어하고 비둘기 파에서는 평화의 대통령
이라고 좋하합니다.
카터는 이스라엘과 이집트의 평화조약을 이끌어냈고, 레이건 대통령 취임 직후 이란
인질들을 무사히 구출해 냈고,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소련에 대해 모스코바 올림픽
에 불참하는 결정으로 인기는 없지만 도덕적인 입장을 취한 점등을 들 수 있습니다
그 다음 국제간 이해증진을 위해 카터 센터를 세워 분쟁해결을 위해 '대화'를 강조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나라 광주민주화 운동때 신구부를 묵인했다는 비난도 받고 있습니다
지금은 사랑의 집짓기 운동에 열중하고 있구요
▒ 지미 카터 약력
△1924년 미국 조지아주 플레인스 출생
△61년 조지아주 민주당 상원의원 당선
△71년 조지아주 주지사 당선
△76년 미국 제39대 대통령 당선
△78년 이집트-이스라엘 캠프데이비드협정 중재
△79년 중국과 국교 수립
△79년 이란 회교혁명, 미국인 66명 인질사건 발생
△79년 소련과 2차 전략무기제한협정 체결
△79년 소련 아프가니스탄 침공
△80년 아프간 침공 규탄 모스크바올림픽 보이콧
△81년 대통령 퇴임
△82년 카터센터 설립
△90년 다니엘 오르테가 니카라과 대통령에게 공정선거 권고
△94년 보스니아 휴전 중재
△94년 북한 방문 김일성 주석과 핵동결 약속
△2002년 쿠바 방문, 미국-쿠바간 긴장 완화 협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