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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1:7~
그들이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보러 나갔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나은 자니라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보다 큰 이가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세례요한의 때부터 천국은 침노를 당하노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가지니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사람이니라
귀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부를 NFFJ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한과 같도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이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목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세례요한, 성공인가? 실패인가?
한 사람의 생애를 평가할 때에 그가 성공했는가, 실패했는가의 기준은?
무엇으로 하겠습니까? 객관적인 자료를 가지고 역사를 평가한다 하더라도 그가 갖빈 역사적 평가의 기준은 자기 자신이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세월이 흐르고 시대를 지난 오랜 후에야 비로소 역사적 진실이 밝혀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조봉암-이승만 정권에 의해 간첩혐의로 즉결 처분에 가까운 사형을 집행당했다. 이승만대통령을 권력의 자리에서 밀려나면 손해를 보게 될 사람들이 사건을 조작해서 한 사람을 악당으로 만들어 버리기는 쉽다.
세레요한은 이천년 전에 대단한 인물이었지만 그는 역사가 흐르고 흐른 이후에나 환영받았다. 인간적으로 보아서는 요한과 같은 삶은 거칠고 험한 광야에서 홀로 하나님의 사자로 사역을 간당한 사람이다. 그의 생애를 성공? 실패?
성경은 세례요한 평가는 탁월하다. 오해? 무엇이 그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1. 세례요한은 마지막 선지자. 16~18절
암흑의 시대에 혜성처럼 나타났다.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했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 400년 동안 암흑의 시대를 보내었다.
이스라엘은 나라도 없었다. 왕통도 끊겼다. 그들은 앗수르로 바벨론으로 지중해 연안으로 흩어졌다.
유대 팔레스타인 땅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로마제국의 지배하에 하루하루를 보내었다. 그들은 강력한 메시야, 구원의 메시야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400년의 세월이 흘렀다.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말라기 4장 5절에서 하나님은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라고 예언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과의 모든 대화를 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약속하시고 400년 동안 침묵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1장 14절에서 예수님은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400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400년의 세월이 지난 뒤에 엘리야를 통해서 깨뜨렸습니다. 그 엘리야가 바로 세례요한입니다. 하나님은 세례요한을 통해서 침묵을 깨뜨리셨습니다. 사람들과의 대화를 시작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말씀하실 때 이세상의 어두움이 물러가는 것입니다.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는 것입니다.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는 것입니다.(마4:16) 그런ㅁ에도 불구하고 세례요한은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지 못했다.
그가 외친 회개의 촉구에 순간 움찔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과거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자신이 그동안 살아왔던 종교의 타성을 벗지 못했다.
요한은 광야에 외치는 소리, 외롭고 고독한 생활을 살았다.
요한을 반기고 끝가지 지지한 사람들은 불과 소수, 젊은 한 생애를 하나님의 부름에 다라 충실했다.
사람들에게는 인정을 받지 못했다. 삶이 불안정, 의식주가 보장된 그런 삶이 아니었다.
그러나 요한은 그 길이 주님이 하라고 맡긴 삶이었음을 확신하며 끝까지 갔다.
외로웠지만 그는 끝까지 자신의 사명에 충실했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가야 할 길을 남이 대신해 가 주지 않는다.
2. 세례요한은 그리스도의 오실 길을 에비한 사람. 11, 13절 이 세상에 참 빛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비하려고 온 사랍니다. 그러므로 세례요한은 구원의 전환점입니다. 이제부터 어두움의 시대가 아니라 빛의 시대입니다. 13절 말씀에서 "모든 선지자와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 그렇습니다. 이제는 율법의 시대가 아니라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시대입니다. 요한은 구약시대의 마지막 예언자입니다. 동시에 새시대의 선발대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은 모든 선지자들보다 더 나은 자입니다. 왜 엘리야일까요? 구약성경에는 많은 선지자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요한은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을 가지고 있을까요? 그것은 아합 왕의 시대와 헤롯왕의 시대가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아합 왕의 때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여호와인지 바알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표면적으로는 이스라엘의 국교가 바알종교처럼 보입니다. 선지자의 수를 비교하면 여호와의 선지자가 절대 열세한 상태입니다. 오직 한 사람, 엘리야조차도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숨어 다녀야 할 지경입니다. 그러면 백성들의 마음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계실까요? 아니면 바알신이 있을까요? 아브라함의 자손이지만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머뭇머뭇합니다. 이미 그들의 마음에 찌끼와 혼잡물이 있습니다. 바알 종교의 불순물이 들어 있습니다. 이것은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외칠 때의 사정과 흡사합니다. 아합왕의 시대는 암흑시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땅에 떨어진 어두움의 시대입니다. 하나님의 선지자가 이스라엘 안에서 말씀을 증언하는데도 생명의 위기를 느끼는 핍박 시대입니다. 세례요한은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부패하고 타락한 이 백성들에게 회개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 백성들은 회개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을 소개하면서 '엘리야' 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말라기 예언자를 통해 약속한 " '오리라'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세례요한을 통해서 새시대를 열고 있습니다. 어둠의 시대에서 빛의 시대로 전환시키고 있습니다. 요한은 구원의 전환점입니다.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메시야 구원의 예수님의 오실 길을 예비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예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3. 천국에서는 가장 작은 자라도 요한 보다 크다? 11절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예수님의 칭찬, 마태복음 11장 7절부터 15절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을 칭찬하시는 내용입니다. 7절 말씀을 보시면 "그들이 떠나매", 여기서 그들이 누구입니까?
그들은 세례요한의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언제, 어떻게 칭찬하십니까?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감옥으로 메시지를 들고 떠난 뒤에 세례요한을 칭찬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세례요한을 칭찬하시고 세례요한을 위대하다고 높여 주십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예수님은 요한에 대하여 무리들에게 질문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요한은 이런 사람이다'라고 하지 않습니다. 7절 중반부터 하반을 보시면 "먼저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고 물으십니다. 그리고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고 물으십니다. 광야와 요단강주변에는 갈대밭이 있었습니다. 요단강을 따라서 갈대밭이 길게 길게 늘어져 있었습니다. 바람 부는 대로 써걱써걱 소리를 내며 흔들리는 갈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나간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선지자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입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입니다. 선지자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갔습니다. 400년만에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갔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세례요한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가 아니다" 는 뜻입니다. 세례요한은 처음이나 끝이나 한결같은 사람입니다. 바람 부는대로 흔들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은 확신과 태도입니다. 세례요한은 돈에 흔들리지 않고, 아브라함 자손에게 추상같은 심판을 외칩니다. 자신이 감옥에 가고 죽음이 올지라도 하나님이 주신 말씀에 충실합니다. 예수님은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는 요한을 칭찬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칭찬은 요한의 신앙은 감옥에 가서라도 갈대처럼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하십니다.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예수님은 또 무리들에게 질문하십니다. 8절 말씀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고 질문하십니다. 요한의 옷차림이 어떻습니까? 요한은 약대털옷을 입고 가죽띠를 띠고 험한 곳에서 살았던 들사람입니다. 그의 음식은 들꿀과 메뚜기입니다. 그는 남루한 옷차림과 변변치 않은 음식에 익숙한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엇을 보려고 나갔을까요?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을 보려고 광야에 갔을까요?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이라면 왕궁에 있습니다. 권력 주변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들이 광야에 나간 것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를 듣기 위해서입니다. 400년만에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입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갈급한 마음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광야에 나갔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요한은 부드러운 옷입은 사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세례요한은 좋은 옷을 입고, 유행따라 옷을 입는, 옷 잘 입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 사람은 올해의 '베스트 드레서'가 아닙니다. 세례요한은 겉사람이 아닙니다. 세례요한은 옷 잘입는 사람이 아닙니다.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습니다. 왕궁이란 권력주변을 뜻합니다.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들은 사람의 인기나 박수갈채에 마음을 둡니다. 자신의 편안함이나 높은 지위를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높은 자리, 맛난 음식, 비단옷이 인생의 중요한 목표인 사람입니다.
세례요한은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요한의 겉사람은 초라하고 보잘 것 없지만 속사람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사람입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속사람이 장성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입니다. 세례요한은 겉사람은 투박하지만 속사람의 그 내면세계는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한없이 부드럽고 겸손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절대 순종하는 위대한 신앙인입니다.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더냐? 예수님은 다시 무리에게 질문합니다. 세 번째 질문입니다. 9절입니다.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고 물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엇 때문에 광야에 나갔을까요? 그들이 광야에 나간 것은 '하늘의 소리'를 듣기 위해서입니다. 400년만에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입니다. 목마른 사슴과 같이,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갈급하게 찾듯이 사모하는 마음으로,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 말씀을 듣기 위해서 광야에 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례요한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기들의 죄를 자복합니다. 상한 마음을 내어놓고 회개합니다. 요단강가에 인산인해를 이루며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자니라" 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점에서 요한이 구약시대의 선지자들보다 더 낫다는 것일까요? 구약의 선지자는 종말에 대한 예언자일 뿐입니다. 옛날 옛적에 메시아에 대한 예언을 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예언을 성취하는 사람입니다. 예언된 메시아의 길을 직접 준비한 사람입니다. 요한은 예언된 메시아를 직접 보고, '하나님의 어린양', '하나님의 아들'로 증언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세례요한은 어떤 선지자보다도 더 위대합니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을 인용하십니다. 10절 말씀입니다.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위대한 사람의 *세 번째 조건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양심의 소리를 넘어서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 그대로 세상에 전해야 합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고, 말씀 그대로 사람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생명을 걸고 외친 사람이 세례요한입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들을 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요한은 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눈으로 그리스도를 보는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질문 -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사람의 행동에는 분명한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왜 이스라엘 사람들은 광야에 나갔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사람들이 광야에 나간 이유가 바람이나 쐬고 경치나 구경하는 것이 아닙니다. 권력자를 만나 보려는 것도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광야에 나간 번지수가 잘못 되었습니다. 광야에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가 아니라 굳은 지조와 절개의 소나무, 대나무가 서 있습니다. 광야에는 부드러운 옷입은 왕궁이나 권력주변의 사람이 아니라 속사람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강건한 사람이 거기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위대한 선지자 요한입니다. 선지자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선지자입니다. 11절 말씀에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보다 큰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고 말씀하십니다. 세례요한은 선지자뿐 아니라 왕이나 제사장이나 랍비보다도 더 위대한 사람입니다. "여자가 낳은 자" 라는 히브리적인 표현입니다. 어떤 중요한 인물의 탄생을 지시할 때 사용됩니다. 이것은 최대의 칭찬입니다. 예수님의 칭찬 중에서 최고의 찬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11절 하반절에서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율법시대와 은혜시대의 차이입니다. 예수님 이후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기에 율법시대보다 더 큰 자가 됩니다. 개인의 인간적인 조건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시대에 속해 있기에 요한보다 큰 입니다*천국의 백성들은 세례요한의 이름으로 들어가는 곳이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 이름으로 들어가는 곳입니다.
*예수의 이름만이 능력입니다. 죄사함, 구원, 생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