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황당한 목소리로 대답하니 그녀는 천천히 걸어와서는 주저앉아 눈을 맞췄다. 그런데, 지금 보니 제느보다 나이가 많아 보인다. 꼭 그렇게 틀린 얼굴은 아니면서도 적어도 3~4살은 더 많아 보이는 것이, 제느가 그대로 크면 저렇게 될까…. 하는 모습이라 더 머리가 어지러웠다.
"누, 누구…세요?"
"누구긴. 네가 엎드려 절해야할 어른이지. 자, 왜 내 딸아이가 저기서 죽었는지 이유를 말해보겠나?"
정말, 정말 제느가 죽은 거란 말인가? 그럼 그 일주일하고, 엄마라던 말은 뭔데? 정말로 죽은 거라면 그런 건 아무 소용도 없는 거잖아. 일어나서 아무래도 불안하긴 했지만 옷자락을 잡고 다시 말했다. 제느가 딸아이라고 하는 그녀의 표정은 제느가 죽었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태연한데다가 흥분하는 기색도 보이지 않아서 마치 거짓말하는 것 같다.
"주, 죽어요? 정말 제느가 죽은 거예요? 정말요?!"
"이거 놓고 말하거라."
"으윽."
도대체 제느도 그렇고 무슨 힘이 이렇게 센지, 옷자락을 꽉 움켜쥔 내 손을 떼어내는 데 별로 힘도 들이지 않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렇게 내 두 손을 모두 옷자락에서 떼어낸 그녀는 잠시동안 나를 내려다보다가 갑자기 발길을 돌리더니 천천히 걸어가며 말했다.
"따라오거라. 아무리 그래도 내 딸이 사랑하는 녀석이니 수습은 해줘야겠지. 그렇게 넋 놓고 있으면 그냥 내버려두고 갈 테니 빨리 따라와."
"예? 아니 저기 그런데 혹시…제느 엄, 어머니 세요?"
설마 아니겠지…란 생각을 하며 슬쩍 물어보았더니, 천천히 걷던 그녀가 돌연 우뚝 멈추어 섰다. 그러니까 갑자기 뭔가 오한이 들면서 등골이 시큰시큰하니 정말 비명이 나올 것 같이 섬뜩한 느낌이 타고 오르고 소름이 잔뜩 돋았다. 한여름인데, 마치 여기만 냉장고 속이 되 버린 것 같다.
"여태 말했는데도 모르는 거냐. 남의 딸을 멋대로 가져간 놈이 예의가 없구나. 하여튼 이놈이나 저놈이나…. 앞으로는 장모님이라고 부르게나 사위. 또 그렇게 넋 놓고 있다간 진짜로 버리고 갈거니 빨리 따라오게."
"자, 장모님이요?"
"…."
"아, 예! 자, 장모님."
부랴부랴 일어나 그녀, 아니 장모님을 따라 갔다. 좀 황당하고 얼떨떨하긴 했지만 제느도 없는 지금 그저 믿고 따라가는 수밖에. 눈물을 닦고 하늘을 바라보니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이 우중충했다. 마치 내 마음처럼. 덥기 그지없어서 옷을 벗어 대충 넣어놓고 따라가는데, 이제 보니 앞에 가는 장모님 옷차림이 반바지에 면티 차림이다. 양말도 신지 않은데다 신발도 그냥 실내화고. 그냥 급하게 후다닥 나온 걸까? 아직 더운 걸 보니 방학은 끝나지 않은 것 같기도 한데….
"저기, 전철 타고…가요?"
"왜. 나는 이런 거 타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나?"
전에 제느가 이야기하기론 그녀의 어머니는 주신 다음가는 최상위 신이며 운명의 여신이다. 그리고 지금 내 앞에서 전철역으로 들어가다 말고 내 말에 반문하는 분도 그분이고. 아니, 그런 엄청난 신이라면 단숨에 순간이동이라도 할 수 있을 텐데 전철이라니? 더구나 전철역에서 오가는 사람들이 모여들며 신기한 듯 바라보는 바람에 불쾌하기라도 하셨는지 장모님은 터벅터벅 계단을 내려가셨다. 머뭇거리고 있던 나도 주위의 시선이 좀 따가워서 얼른 따라 내려갔다.
"저기 그런데 저 돈이 없는데…."
"자."
장모님이 내민 하얀 손가락 사이에는 웬 신용카드 한 장이 끼워져 있었다. 갑자기 웬 신용카드며 이건 또 어디서? 그러나 내가 황망해하는 사이 장모님은 그대로 전철 개찰구로 들어가 버리셨고 나는 그 뒤를 쫄래쫄래 따라갔다.
"…."
전철 안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전철역 안에서 본 시계로는 퇴근시간인 데다가 평일이었으니까 당연한 거겠지만, 입고 있는 옷이 거기서 입던 그대로 라서 상당히 쪽이 팔렸다. 이제 보니 옷이 너무 촌스럽다. 거기선 다들 이런 옷을 입고 있어서 몰랐는데, 더구나 장모님이 워낙 시선을 많이 끌고 있어서 옆에 있으려니 얼굴을 들 수가 없다. 게다가 사람들이 자꾸 나를 피하는 듯 하는 것이…뭐 개중에는 눈을 마주치고는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사람들도 몇몇 있었지만.
"자네가…."
전철 문에 기댄 채 창 밖을 내다보던 장모님이 문득 말문을 여시더니 뭐라 말을 하려다 다시 입을 다 무시곤 날 빤히 바라보셨다. 그 깊은 은빛 눈동자가 약간이지만 화난 듯 해 괜히 무안해져서 나는 고개를 돌렸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은 우중충한 하늘에 차창 밖으로 보이는 시가지와 건물들…전철에 탔을 때부터 시선을 부딪히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넋을 빼고 바라보는 것이 분명한 전철 안의 사람들…. 갑자기 눈물이 쏟아져서 창문에 얼굴을 숨기고 울음을 참았다. 다른 방법도 찾아보면 있었을 텐데 왜 죽는 걸 택한 거야?
"울지 말거라."
"크흑…."
장모님이 그렇게 말씀 하셨지만 어깨에 와 닿는 손길이 너무나 제느와 비슷해서 그대로 무너질 것 같았다. 어쩌면 이리도 날 쓰다듬던 그녀의 손길과 똑 같을 수가 있는지….
"내 딸을 많이 고생 시켰던데, 이렇게 울고만 있어서야 쓰겠느냐?"
"예? 그, 그건 제가 일부러 고생시킨 게 아니라…."
"어쨌건 고생시킨 것은 맞다."
그렇게 아픈 말씀을 하시다니, 단호히 딱 잘라 하시는 말에 어이가 없어 눈물을 닦고 바라보았더니, 빙글 웃음을 짓고 계셨다. 그런데, 저 분하곤 분명히 오늘 처음 만난 건데 자연스럽게 경어가 나오고 왜인지 낯설지 않다. 물론 너무나 젊어 보여서 아무리 봐도 도대체가 제느의 어머니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지만 그녀와 닮은 얼굴에 비슷한 분위기라, 아무래도 그것 때문인 것 같다. 아니야, 정말 그것 때문일까?
"일주일 후에 올 테니 걱정 말거라. 인간들이 생각하는 그런 죽음으로 생각하면 안되지. 다만 단단한 상처를 줬으니 뒷감당이 상당히 힘들게다."
"예…? 그게 무슨 말이죠?"
"마음에 금이 죽죽 가 있을 테니, 아무리 모르고 한 일이라도 책임을 지어야겠지. 상당히 시달릴 걸세."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일주일 후에 온다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자네처럼 영성을 잃은 것은 아니니 이곳의 시간으로 일주일 정도 지나면 회복해서 오기에는 충분하지."
"주, 죽지 않았단 말이에요?!"
그렇다면 일주일이라고 그랬던 것이? 그런데 장모님 얼굴이 왠지 언짢아 보이셨다.
"난 안 죽었다고 하지 않았다. 확실히 죽었어. 뭐 인간들의 의미로 본다면 약간 심한 혼수상태라고 할 수 있지. 자네는 영성을 잃어버렸지만."
그게, 그렇다면 그럼 도대체 왜 난 울었던 거지? 왜 그렇게 처절해야 했냐구? 죽었다고 꺼이꺼이 혼자서 질질 짠 거란 말이야? 겨우 일주일, 아니 일주일씩이나 못 보니 충분히 울만한 일이구나.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제느가 죽은 건 사실인데, 정말 그 방법 밖에 없었을까? 내가 그렇게 눈물을 훔치는 데 장모님은 마치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하신 것처럼 다시 말을 이으셨다.
"아무리 눈앞에서 신성과 영성을 모두 잃으며 윤회의 사슬에 얽매인다고 해도 그런 걸 범하는 신은 없어.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3만년간 내 딸이 자네를 찾아다닐 이유도 없었겠지. 어쨌든 좋게 해결은 봤으니, 뭐 갈라서지는 않을 거야."
"가, 갈라서요?"
갑자기 머릿속에서 그려졌다. 일주일 후에 돌아온 제느, 아까 본 날짜로 봐서는 그때면 이미 방학도 끝날 때인데 설마 학교에서 봐도 아는 척도 안하고 잔뜩 삐쳐서 말을 걸어도 무시하거나 아예 세렌네 집에 눌러 살아버리면 이거 정말 큰일이잖아? 뭔가 방법을 생각해보고 싶어도 깜깜하기만 해서 장모님을 바라보았지만, 이분은 마치 내일 아니라는 듯 차창 밖만 바라보며 딴청을 피우실 뿐이었다.
"오셨습니까?"
전철에서 내려 역에서 나오는데 옆에 웬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 한 명이 다가오더니 정말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고개를 드는데 얼굴을 보니 선글라스를 쓴데다 귀에는 작은 이어폰까지 끼고 있어 꼭 영화에서 나오는 요원 같았다. 더구나 역 앞 광장으로 나오니 도로에 엄청 비싸 보이는 검은 색 중형차가 몇 대 서 있고 주위에는 검은 양복들이 둘러서서 사람들을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뭐, 뭐예요 이건?"
"서비스라던데? 뭐, 요인 보호라나?"
요인 보호? 검은 양복들에 엄청 비싸 보이는 중형차가 서비스? 나참, 저보다 훨씬 약한 제느도 전혀 필요 없을 듯한데 저렇게 힘이 풀풀 흘러넘쳐서 공포스런 사람한테 보디가드라니, 완전히 돈낭비다. 짧은 말로 설명한 장모님이 내 손을 잡으니 다가와서 뭔가 말하려고 하던 검은 양복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돌아가서는 가운데쯤의 차 문을 열었다. 아아. 방금 다가왔을 때 참 무시무시했어. 무슨 덩치가 저렇게 듬직한지, 앞에 다가오니까 꼭 벽에 막힌 느낌이었다.
"타라."
"예?"
내가 잘못 들었나 싶어 반문하니 장모님이 위협적으로 으르렁댔다.
"놔두고 간다?"
"아, 아니에요. 탈게요."
문을 열고 차안으로 들어가는 장모님의 위협아닌 위협에 부랴부랴 차에 탔다. 지금 제느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유일한 줄인데다 이렇게나 위협적이니 그저 고분고분 말을 듣는 수 밖에 없었다.
"안녕하세…."
차에 들어가니 장모님이 긴 머리칼을 추스르며 앉고 있고 곱게 정장을 차려입은 웬 아가씨가 멍하니 굳어있는 게 보였다.
"저기요?"
눈앞에서 손을 흔들어도 모르는 것이, 장모님을 보고 많이 놀란 모양이다. 하긴 그럴만 하지. 저 얼굴이 보통 얼굴이야?
"에휴."
손가락으로 머리카락 몇가닥을 꼬던 장모님이 돌연 한숨을 내쉬시더니 손가락을 딱 튕겼다. 그러니 멍하니 초점을 잃었던 아가씨의 눈동자에 빛이 돌아오고 허둥대기 시작했다.
"에? 아, 안녕하세요. 저는 교황청 직속 비밀…."
"비밀결사대의 소피아? 나이는 23세. 지금까지 변변한 악마 셋과 싸웠고 그럭저럭 간신히 이겼군. 작년에는 이집트에서 출토된 석판을 위해 하느님의 이름을 걸고 사람도 몇 명 죽였고…잘 쓰는 모기는 메이스와 축성 은 작렬탄을 쓰는 10mm 볼카닉 매그넘, 타고난 능력은 그럭저럭 쓸만하구만."
"어, 어떻게!"
장모님이 주룩 읊은 말에 크게 놀란 아가씨가 손을 품속에 집어넣더니 은빛으로 번쩍거리는 커다란 총이 들려나왔다. 그리고 매서운 표정을 짓고 장모님에게 총을 들이대는 것 아닌가.
"내 신상정보는 기밀일터, 어떻게 안거지?"
한방 쏘면 사람이 그대로 쪼개질 것 같은 커다란 총을 코 앞에 들이대고 위압적으로 말하는데 장모님은 그저 피식 웃더니 손을 들어 총구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가는 손가락이 총구에 다 들어가 힘을 주니 소피아가 힘없이 총을 뺏겼다. 그리곤 침을 꿀꺽 삼키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 운명의 실을 잣는 나 파르테이아에게 비밀이 있다 말하는 건가."
"그, 그…."
그녀가 말을 더듬다 죄진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이니 장모님은 총을 휙 던져 고쳐잡고 탄창을 빼더니 다시 돌려주었다. 은색 탄창 안에는 묵직해보이는 총알이 가득 들어 있었다.
"흠. 그래도 사위에겐 위험할테니 제거해둬야지. 괜히 무슨 일 났다간 딸아이한테 시달릴 테니."
"저, 그런데…."
"응?"
이름이 파르테이아. 장모님 이름은 파르테이아. 이 이름은 이제 죽어서도 못 잊겠군. 어떻게 잊겠어. 일단 살벌한 분위기는 바꿔야겠다 싶어 어렵게 연 말문을 이었다. 장모님이 동그랗게 눈을 뜨고 쳐다보는 게 꼭 제느가 쳐다보는 것 같아 가슴이 아려왔다. 울컥하고 뜨거운 게 올라와 급히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배고프다는데 왜 웃는 거야? 장모님의 웃음에 괜히 멋쩍어져서 몸을 더 의자에 파묻었다.
제느의 몸을 찌르던 그 느낌, 그게 손에 남아 욱신거린다. 뼈와 살이 갈리는 끔찍한 느낌…. 연약한 육체 속을 파고들어가는 금속의 소리…. 어째서 제느는 그런 방법 밖에 모르는 거야? 자기는 뭐든지 다 알고 내 머리 위에 있는 것처럼 행동하면서! 왜 이런 극단적인 방법 밖에 쓸 줄 모르냐구. 서로 상처만 더 주게 될걸 뻔하게 알고 있었으면서…. 시간만 지나면 해결될 줄 아는 건가?
"그만하거라."
"으윽…. 그런데 제느, 제느는 지금 어디 있죠?"
"지금 내 옆에서 자고 있다네."
"…그게 무슨 말이죠?"
내 귀가 잘못되지 않았다면 잘못 들은 것 같은데? 어떻게 옆에서 자고 있다는 거지? 장모님은 지금 여기에….
"그말 그대로라네. 내 옆에서 자고 있어. 자네가 얼마나 고생시켰는지 몸이 말이 아니더군."
"저, 정말이에요?!"
그렇다면 진짜로 정말이란 말인가? 무심결에 장모님의 어깨를 잡았더니 장모님이 그야말로 잡아먹을 듯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날 노려보았다. 무슨 눈길이 그렇게 매서운지, 등골이 싹 싸늘해져오는 게 마치 악마를 보는 듯 했다.
"무례해졌구나. 아니, 옛부터 그랬지."
옛부터 그랬다고? 내가 아무말도 못하고 있으니 장모님은 다리를 꼬고 앉아 슬리퍼를 신은 발로 내 옆에 앉은 아가씨의 다리를 툭 쳤다. 그러니 눈치만 보고 있던 그녀가 눈을 감더니 스르르 옆으로 무너졌다.
"지금 여기에 있는 건 내 분신이야. 딸아이 같은 경우야 본신으로 다녀도 아무 상관없지만 나는 아니라서 말이지. 마침 하계에 일도 있고 해서 분신으로 내려왔는데 집나간 그녀석이 죽어서 돌아왔어. 어디서 뭘했는지 몸이 만신창이가 됐던데? 그리곤 막 잠들면서 나한테 부탁했지. 바보 같은 남편 혼내달라고."
"호, 혼내요?"
"그래."
말을 마친 장모님의 눈빛이 처절하게 가라앉았다. 역시 따라오는게 아니었는데. 자라목이 돼어 눈치를 살피고 있는데, 장모님은 눈빛을 거두고 지그시 감더니 말을 이었다.
"또. 아까 말했던 것처럼 일주일 안에는 어떤 수를 써서든 내려오겠다고, 그동안 내 남편 어디가서 괜히 죽지말게 도와달라고 했지. 다시 찾으려면 귀찮다고 말이야."
제느가 정말 그랬단 말이야? 다시 찾기가 귀찮다고?
"그렇게 황당한 표정 짓지 않아도 되네. 자네가 끔직히 여기는 그 아이가 한말이니까. 마음이 갈가리 찢겨 약해져만가는 그 아이가 한 말이니까."
그렇게 말끝을 흐리며 장모님이 얼굴을 돌렸는데, 말끝의 여운이 좀 이상하다. 약해져만 간다고?
"약해지다니요? 그게 무슨 말이죠?"
정색한 내 질문에 창밖을 보던 장모님이 얼굴을 돌렸는데 그 눈가에 습기가 차 오르는 걸 보니 덜컥 가슴이 철렁했다. 제느한테 정말 무슨 일이 있는 거야?
"미안하지만. 그 아이에게 직접 듣게나. 내려오거든."
"다 왔습니다."
어느새 차가 멈추고, 창 밖에 낯익은 세렌의 집이 서 있었다.
"둘째 딸아! 엄마 왔다! 당장 문 열어라!"
차에서 내리자마자 장모님은 냉큼 대문 앞으로 달려가 소리높여 외쳤다. 그렇지만 나는 함부로 그 앞에 갈 수 없었다.
세렌의 집안에서는 그야말로 정신이 멍해질 정도로 거대한 기운이 하늘을 향해 뻗쳐나오는 게 느껴졌는데, 거의 장모님과 맞먹는 수준인 것 같았다. 그리고 그와 같이 있는 기운들도 굉장한 느낌이었다. 분명 7대 대신 중 한명인 세렌과 그 가족들의 기운이리라. 분명히 예전에는 전혀 알아보지도 못할 것인데, 보이지도 않는 것인데 이렇게나 강렬한 느낌으로 다가오다니….
"페르!"
다짜고짜 문 앞에서 지르는 소리에도 잠잠하던 집안이 장모님이 허리에 손을 얹자 부산해졌다. 안에서 누군가 후다닥 뛰어나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린 것이다.
"어, 엄마! 그렇게 부르지 말랬잖아! 아직 카엘한테도 말 안해줬단 말이야! 어? 왔네?"
"아, 예. 아하하."
"어머나 어색한 웃음. 무슨 일 있어요? 언니는 왜 같이 안 왔어요?"
"…."
이 사람들은 왜 이렇게 다 똑같이 생긴거야? 페이로자느가 눈동자를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물어오는데 제느가 자꾸 떠올라 목이 메어 도저히 대답할 수가 없다.
"페르. 네 언니는 집에 있으니 좀 있으면 돌아 올거다. 일단 들어가자."
"응? 왜 집에 가?"
"사정이 있다."
"페르라…. 애칭인거야?"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장모님에게 뭐라 반문하려던 페이로자느의 표정이 뒤에서 들려온 말에 돌같이 굳어졌다. 그 뒤에서 카엘이 방긋 웃고 있었다.
페르, 아니 처제라고 해야하나? 어쨌든 제느의 여동생이니까. 카엘이랑 둘이서 다투며 옥신각신 하는데 눈 앞에 제느 얼굴이 아른거려 도저히 더 볼 수가 없어서 집으로 들어가는 장모님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다녀왔군요. 역시나 제이로느는 없네요."
현관에서는 오랜만에 보는 세렌이 기다리고 있다가 우리를 맞았다. 세렌의 얼굴은 나와 장모님의 기분을 생각해서인지 몰라도, 웃지 않는 얼굴이었다.
"뭐, 제가 내려오겠다고 했으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려오겠지. 나라도 남편이 이렇게 어리벙벙하면 마음이 안 놓일 거야."
"그런데, 페르라니, 저와 그이는 전혀 몰랐어요. 어쩐지 전에 그렇게 싫어하더니 다 이유가 있었군요?"
"제가 싫어도 어쩌겠어. 들어가자. 할 이야기가 많으니. 더구나 이쪽도 피곤해 보이거든?"
"예. 들어가죠."
실의에 빠진 나는 세렌이 손을 잡고 이끄는데로 집안으로 들어가 되는 데로 자리에 앉았다. 여기도 정말 오래간만이네. 한 몇 일이면 돌아올 줄 알았는데 네 달이나 걸리다니. 하지만 결국, 그렇게 힘든 여행을 끝내고 남은 것은 외로움과 칼날에 걸린 것 같은 실낱같은 희망이라니. 이것보다 더 안좋을 경우가 있을까?
"자. 이걸로 눈물 닦아요. 그리고 앞으로 마음 단단히 먹어야 할겁니다. 바가지 긁혀야 할 테니까."
"예? 바가지요?"
바가지라니? 손수건을 받아들고서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몰라 되물었는데 세렌은 그저 살풋 웃으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 미소가 왠지 마음에 걸리는 게 그냥 쉽게 넘길 말은 아닌 것 같다. 또 모르지 저 말대로 제느가 날 육포로 만들지도 모르니까. 잠시 후 집밖에서 다투던 카엘과 페이로자느가 들어오고 아렌이를 비롯한 가족들이 모두 모이니 장모님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랑의 여신께서 승위후로 지상에 계신지 하계시간으로 1000년 가까이 되는군요. 짧은 기간이긴 하나 잘 지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하계에서의 생활은 어떠신지요?"
"저야 뭐, 여전합니다만. 운명의 여신께서는 무슨 일로 하계에 오신거죠?"
"하계에 내려와본지도 근 3억년 가까이 되가는 군요. 제가 이렇게 내려온 것은 다른 할 일이 있는 차에 잠깐 들린 것이기도 하지만 중간에 주신께서 전언을 내리신 것이 있었습니다."
"예에?!"
장모님의 그 말에 다들 눈이 튀어나오는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놀라는데 도대체 왜 그러는지, 영문을 모르니 난 그저 고개만 갸우뚱할 뿐이었다.
"으음. 그러니까."
탁자 위의 음료수를 들어 마시는 장모님을 바라보는 가족들의 목에서 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주신께서 전하셨습니다. 현재 7대대신들의 집들중 두채가 비어 있습니다. 이로 인해 불균형이 발생하고 있으며 특별한 이유 없이 사랑의 여신게서 하게에 내려와 있는 것에 대해 불편해 하셨습니다. 이에 100년간의 유예기간을 줄 테니 그 뒤에 전원 반드시 올라오라고 하셨습니다. 개척자 크라시아필리스라면 모르지만, 이제 막 승위하신 사랑의 여신께서 최상위7대대신의 집을 비우고 하게에서 오랜기간 계시는 건 좋지 않을 뿐더러, 한시가 시급한 일들도 밀려있는 이 상황에 천사들이나 다른 대신들을 위해서라도 적어도 본신 만큼은 지금 당장 올라오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장모님이 그렇게 말하시니 세렌의 얼굴이 대번에 어두워졌다. 아니, 가족들 얼굴이 다들 어두워지는 걸 보니 꼭 무슨 선고라도 받은 사람들 같다. 그저 올라가라는 건데 왜 저런 반응들이지? 솔직히 신계라면 여기보다 살기도 더 좋지 않으려나? 갑작스레 싸해진 분위기에 내가 어리둥절해 할 때 입술을 깨물고 있던 세렌이 말을 꺼냈다.
"저도 근시일 내에 올라가야 한다고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너무 갑작스럽습니다. 주신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이긴 하나 지금 당장 본신이 올라가는 건 어려울 것 같고, 일단 제 분신을 먼저 보내도 되겠습니까? 물론 100년 후에는 모두 올라가도록 하겠습니다.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그이나 페르를 위해서라도 하계에 너무 오래 있는 것은 좋지 않겠지요."
"그러하십니까. 그렇다면 다음 7대 대신 모임까지는 분신이나마 올라와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래. 그럼 이 이야기는 그만하고…. 페르야."
"윽. 왜, 왜요?"
난데없이 자신의 이름이 나오니 페이로자느가 옆에 앉은 카엘의 팔을 꼭 끌어안으며 노골적으로 싫은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만 장모님쪽이 역시나 한수 위라서, 손가락을 까딱이니 페이로자느가 입을 삐죽 내밀며 카엘과 조금 떨어졌다.
"이리와라."
"아앙! 싫어!"
"아앗! 어머님!"
장모님이 직접 일어나 싫다고 하는 팔을 잡으니 페이로자느는 마치 경기 들린 것처럼 흠칫 놀라며 울상이 되어 팔을 마구 비틀었다. 하지만 장모님의 손은 강철 같이 굳건하고 반항은 미약하기 그지 없었다.
"오늘 내가 가져갈터이니 다음에 받으러오게나. 우후후훗."
"카엘! 이거 놔 엄마!"
장모님은 그렇게 말하더니 죽으려고 하는 페이로자느를 데리고 말 그대로 훅 하고 그대로 정말 사라져 버렸다. 어떻게 동의도 안 받고 그냥 되는 데로 끌고가나? 아무리 하늘 높은 장모님이라지만 이건 좀 너무한데. 잘못하면 제느도 저렇게 딸려가는 거 아냐? 아 무섭다.
카엘과 세렌이 사라진 곳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씁쓸히 웃으며 고개를 휘휘 젓고 카렌이가 일어나더니 신경질을 부렸다.
"으악! 어떻해! 프로라브타의 구슬 만들어 달라고 하려고 했는데!"
"맞다! 할머니가 알브리 스틱 안 돌려줬잖아!!"
"그만해라. 이미 가신걸 어떻게 하니? 그런거 집에 처박아두고 쓰지도 않는 게 얼마나 많은데 얘들이 참. 니네 방 정리나 해라 이 녀석들아. 딴 집 가봐라. 여자애들이 다 너희들 같이 하고 사는지. 그리고 아르벤도 피곤할텐데 집에 가봐야 하겠지요? 새 옷을 줄테니까 일단 씻고 오세요. 제이로느 걱정일랑 구석에 치워놓고요."
"예에…."
--------------------------------------------------------------------------------------------------------
아암....우헤헷! ^^
이제....시작합니다. 나의 사랑 아르벤 챕터7!!
Z.B.S의 의미가 뭘까요??
알아맞히시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_-_;;;;
일단은 카페에 연재할 생각이고, 사정이 좀 나아지면 나우누리에도 다시 올릴 예정입니다.
쓰기 등급을 조정해놓을 테니 감상이나 잡담 남겨주세요 ^^
첫댓글 잇~힝 드뎌 연재 하시는군요...마뉘 기다렷 답니다아~
흐음... 나우누리..들어가 본 지 오래됐군요...하이텔은 파란으로 바뀌면서 종종 지도 보러 들어갔었는뎅..
아아.. 너무 오래 기다렸어요ㅠ
크옷!!! 드디어,,,드디어 대망의 쳅터 7이~~~!!!! 아르벤 많이 혼내주세요!!이넘 맞아야 합니다. 이쁜 제느누님 울리고.
2년!!!!!!!!!!!
빨리 올리지 않으면 다 죽여버리겠다~~~....
ㅠ.ㅠ ...왜 안올려주시는 걸까나... ㅠ.ㅠ(군기가 빠진게야...ㅋㅋㅋ ) 샤이라 님 힘~ 힘~ ^^*
오오.. 드디어~ 보게되었도다아~ 크흐흑.. 얼마나 기다렸던가.. 크흑..
이제 돌아오셨습니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