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소영 VS 송윤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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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공포특집 1, <아파트>와 <아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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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6.26 / 허지웅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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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영화만큼 다양한 실험과 변주가 가능한 장르도 없을 것이다. 덕분에 기성배우들이 공포영화의 틀 안에서 연기변신과 이미지 파괴를 실험해보려는 시도도 잦아졌다. 올해는 <아파트>와 <아랑>으로 관객을 찾는 고소영과 송윤아가 꼭 그렇다.
김지운 감독의 <장화, 홍련>에서 장르적, 미학적, 텍스트적 분석의 성과와 그 흔적들을 다 지우고 나면 무엇이 남을까. 벽지? 아니, 염정아가 남는다. 극중 계모를 연기한 염정아의 연기는 드라마 <우리들의 천국>으로 데뷔했던 이 해묵은 기성배우의 가치와 평가를 그 근본부터 완전히 뒤흔들어 새로 작성하게 한 계기가 됐다. 정확히 그때부터라고 할 수는 없지만, <장화, 홍련>을 기점으로 공포영화에 진출하는 드라마 출신 기성 여배우들의 수가 크게 늘어난 것은 사실이다. 지금 이 시점에서 한국의 공포영화는 감독의 작가적 실험뿐 아니라 배우의 전혀 새로운 역량을 확인할 수 있는 무대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올해도 어김없이 수많은 공포영화들이 극장을 찾는다. 지난 몇 해를 돌이켜보면 일단 한숨부터 나온다. 장르적 고민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이 그저 시즌 특수를 노리는 장사치들과 데뷔할 기회를 찾는 신인감독들의 심심한 결합으로 만들어진 공포영화가 대부분이었다. 마치 프랜차이즈 업체의 햄버거라도 된 듯 말이다. 거의 모든 작품에서 어김없이 등장한 푹 젖은 귀신의 낮은 포복 공격 장면들만을 모아 이어붙이면, 별 어색하지 않은 영화 한 편이 만들어질 정도다. 6월 말부터 쏟아져 나올 올 여름 공포영화들을 두고도 옥석을 가리는 작업은 어김없이 이어진다. 그 비중을 결정짓는 가치판단의 여러 갈래 중, 실험적 도발을 감행한 기성 배우의 참여도를 눈여겨보는 게 시간낭비라고 말할 이는 없을 것이다.
이번에는 고소영과 송윤아다. <이중간첩>을 끝으로 오랫동안 영화계를 떠나 있었던 고소영은 <가위> <폰> <분신사바>를 연출한 안병기 감독의 신작 <아파트>에 도전한다. 영화 데뷔작 <구미호> 이후 무려 10년 만의 공포영화다. 그다지 좋지 못한 평가를 받았던 지난 2004년의 <페이스> 이후 절치부심, 다시 공포영화에 도전하는 송윤아는 안상훈 감독의 데뷔작 <아랑>으로 돌아온다. 민간 설화 ‘아랑전설’을 각색한 것으로 알려져 관심을 얻고 있는 작품이다. 두 배우는 여러모로 닮은꼴이다. 둘 다 TV 드라마로 데뷔, 시대를 대표하는 외모로 큰 인기를 누렸으나 영화를 통해선 명성에 걸 맞는 평가를 받아본 적이 없다. 데뷔한 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연기력에 대한 검증이 채 끝나지 않았다는 점 또한 공유하는 특징이다. 이들이 기존 공포영화 속 여성들의 관습적 태도, 즉 요란한 비명 소리나 부릅뜬 두 눈, 육체를 전시하는 장면 따위를 어떤 식으로 극복하고 새로운 캐릭터를 연기할 것인가에 따라 영화 자체에 대한 평가도 극적으로 갈릴 것이다. 단정적으로 말하자면 이들 영화의 8할은 고소영과 송윤아의 몫이자 책임이다. <아파트>와 <아랑>은 한국 공포영화의 지평 위에서, 두 여배우의 이력 속에서 어떤 의미로 남을 것인가.
<아파트> 감독 안병기 ㅣ 출연 고소영, 강성진 ㅣ 개봉 7월 6일
언젠가부터 자주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의문의 아파트. 그 맞은편 아파트에 차갑고 외로운 성격의 무대 디자이너 세진(고소영)이 살고 있다. 어느 날 세진은 건너편 아파트의 불이 정확히 밤 9시 56분만 되면 동시에 꺼진다는 이상한 규칙을 발견한다. 게다가 이러한 기현상은 매일 주위 집들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불이 소등될 때마다 한 가구씩 몰살당하는 상황까지 눈치 챈 세진은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려 하지만 헛수고다. 오히려 범인으로 의심받게 된 세진은 여러모로 궁지에 몰린다. 마침내 공개된 진실은 사람들의 관계를 둘러싼 파국의 드라마와 슬픈 결말을 드러낸다.
“다시는 공포영화 안 한다”고 선언했던 안병기 감독이지만 그 의미를 곡해해선 안 된다. 이는 귀신이 등장하는 공포영화를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는 뜻일 뿐, 보다 넓은 의미의 모든 공포-스릴러영화와의 결별을 선언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 자신의 말처럼 <큐브>를 연상시키는 독특한 공포영화로 돌아올 줄 알았던 안병기 감독의 신작 <아파트>에는 다시금 귀신이 등장한다. 여기에는 안병기 식 귀신 이야기의 총체, 그 집대성을 보여주겠다는 작가적 욕심과 원작의 매력이 한껏 작용했다. <아파트>는 인터넷 만화작가 강풀이 미디어 다음에서 연재했던 동명 만화를 원작으로 한다. 매회 수백만 건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했던 원작의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하지만 이런 원작의 존재감이 마냥 뿌듯한 것만은 아니다. “강풀 작가가 미웠다”는 감독의 말에는 뼈가 있다. 기본적으로 인터넷 만화와 영화는 이야기를 담는 매체의 환경이 서로 전혀 다르기 때문에 차별화된 접근법이 필요했다. 결국 원작의 많은 요소들이 수정됐다. 우선 원작의 주인공인 따뜻한 이미지의 백수 고혁이 차갑고 도회적인 성격의 전문직 여성 세진으로 교체됐으며, 낡고 오래된 행운아파트의 존재도 현대사회의 단절과 소외를 드러낼 수 있는 신축 아파트로 변모했다. 또한 여러 등장인물의 시점에서 진행됐던 이야기 구술방식이 세진의 시점으로 통일돼 전개된다. 이 모두가 영화적 특수성을 고려한 변용의 결과다. 특히 세진을 연기하는 고소영의 존재감은 <아파트>의 가장 큰 미덕이다. 스타성을 제외하더라도, 영화에 몰입하는 연기의 질과 태도는 안병기 감독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고소영 없이 생각할 수 없는 영화”라고 단정 짓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터. 귀신이 등장하는 안병기 감독의 마지막 영화가 될 공산이 큰 <아파트>에 관심이 집중된다.
"전쟁같이 찍었다" <아파트> 안병기 감독
귀신 이야기는 더 이상 안 하겠다고 했었는데? 결국 번복한 셈이 됐다. 영화 외적인 관계도 이유가 됐지만, 기본적으로 귀신이 등장하는 내 식의 영화를 집대성하고 마무리 짓는 과정을 갖고 싶었다.
강풀 작가는 영화작업에 어떤 도움을 줬나? 영화는 감독의 몫이라며 완전히 믿고 맡겨줬다. 고마운 일이지만, 난 사실 강풀 작가가 밉다. 이런 이야기가 인터넷 환경에서는 다음 연재분을 계속 보게 하는 힘과 재미가 있지만, 영화화됐을 때는 그 매력이 반감된다. 매체적 특수성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그 간극을 채우는 시간과 노력이 많이 소요됐다.
아파트 전체를 세트로 만들 수도 없고, 장소 섭외하느라 고생했을 것 같다. 전쟁, 그야말로 전쟁이었다.(웃음) 대한민국에서 공포영화 찍겠다고 아파트 빌려달라는 부탁 들어줄 아파트 주민 없더라. 빌려준다 해도 전체를 다 허가해주는 곳 또한 없었다. 결국 베란다 장면은 어느 지방의 어떤 아파트, 주차장 장면은 또 다른 지방의 또 다른 아파트, 이렇게 앵벌이 식으로 촬영해야 했다. 결국 세트-아파트1-아파트2-아파트3-아파트4를 종횡무진 오가며 영화를 만들었다. 지금까지 영화작업하면서 제일 힘들었던 것 같다.
앞으로 또 귀신이 등장하는 영화를 만들게 될까? 이번에 작업하면서 좀 더 확실하게 느낀 것은, 대한민국에서 귀신이 등장하는 영화를 만드는 일이 더 이상 새롭거나 즐겁지 않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새로운 시나리오가 없다는 사실이 가장 큰 문제다. 다 똑같다. 내가 직접 시나리오도 써봤지만, 그 방면에 별 재주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뛰어난 작가들의 존재가 시급히 수혈돼야 한다. 정말 좋은 시나리오가 없는 한, 귀신 이야기는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
<아랑> 감독 안상훈 ㅣ 출연 송윤아, 이동욱 ㅣ 개봉 6월 28일
겉으로는 강인하지만 성폭행을 당한 과거의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여형사 소영(송윤아). 그녀가 신참형사 현기(이동욱)와 함께 의문의 연쇄살인사건을 맡게 된다. 사건현장에는 어김없이 컴퓨터에 ‘민정이의 홈페이지'라는 웹페이지가 열려져 있고, 살해당한 사람들이 모두 과거 친구 사이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수사는 활기를 띤다. 소영과 현기는 이 사건의 중심에 문제의 홈페이지 주인인 ’민정이‘가 있음을 깨닫고 수사망을 좁혀가던 중, 피해자들의 친구 동민(이종수)을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한다. 하지만 동민 또한 친구들처럼 끔찍하게 살해당하면서 사건은 미궁으로 빠져든다.
안상훈 감독의 데뷔작 <아랑>의 최초 스크립트는 인터넷을 떠도는 원령을 다룬다는 점에서 '라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이 ‘아랑’으로, ‘나를 잊지 말아요’로, 다시 ‘아랑’으로 바뀐 것이다. 이는 단순히 제목이 바뀐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라인’이 ‘아랑’으로 변모하면서 초현실적인 귀신의 존재에 실려 있던 무게중심이 ‘인간들의 문제’ 쪽으로 이동했다. <아랑>은 결국 사람들의 관계와 오해 속에서 벌어지는 치유 불가능의 상처를 다룬 드라마다. 영화는 밀양의 오래된 설화 ‘아랑전설’에서 모티브를 가져왔다. 아랑전설은 성폭행을 당해 억울하게 죽은 아랑의 원령이 원에 새로 부임하는 부사에게 나타나 원한을 풀어 달라 청하고, 마침내 이상사라는 담이 큰 인물이 그 원수를 갚고 한을 달래줬다는 내용의 이야기다. <아랑> 역시 인터넷을 떠돌던 원귀가 살아 있는 사람들을 통해 한을 푼다는 이야기 구조를 공유한다. <...ing> 조감독과 몇 편의 단편영화 경력을 거쳐 데뷔하는 안상훈 감독에게 송윤아라는 스타의 존재감은 각별했다. 처음에는 모험이었다. 다소 남성적이고 거친 성격의 여형사를 연기하는 데 있어 송윤아가 과연 적합할 것이냐는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결국 기존에 정형화되다시피 한 ‘남성화된 여성’을 전시하는 것보다, 소영이라는 인물의 내면에 자리 잡은 여성성이 중요하다는 판단에 이르렀다. 송윤아는 캐릭터를 구축하고 준비해오는 성실함과 겸손함으로 감독의 기대에 부응했다. “여성성을 다루는 사회의 폭력적 시선에 할 말을 하고 싶었다”는 감독의 의도는 어떤 성과로 다가올 것인가.
"여성 향한 폭력성에 문제제기" <아랑> 안상훈 감독
영화의 아이디어를 설화에서 가져왔다 들었다. 밀양의 아랑전설은 회원(타인을 통해 자신의 원한을 푸는 것) 방식의 대표적 설화다. 나도 그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극중 민정과 소영은 동일한 딜레마에 빠져 있다. 민정은 소영에게, 소영은 민정에게 자신의 원한을 투영하게 된다.
인터넷상의 홈페이지를 통해 원한이 옮겨 다니는 방식은 그전에도 많이 사용된 설정이다. 그래서 그 부분의 무게감을 팍 줄였다. 제목도 '라인'에서 '아랑'으로 바꾼 게 그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귀신보다 사람이다. 사람들의 관계와 의도치 않은 실수들, 오해, 죄의식, 그리고 그로 인한 파국이다. 사실 인터넷 장면은 개인적 경험에서 가져온 것이다. 언젠가 싸이월드에서 우연히 여고생의 미니홈피에 가게 됐다. 그런데 미니홈피의 주인은 이미 성폭행을 당해 세상을 등진 이후였고, 그녀의 친구들이 매일 들러 글을 올리고 있었다. 나중에 인터넷 검색 사이트에서 다시 찾아봤더니 공교롭게도 유사한 형태의 사건들이 너무나도 많이 검색되더라. 그때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럼 영화를 통해 성폭행에 대한 발언을 하고 싶었나? 그렇다. 올드하다는, 80년대 호스티스물이냐는 비아냥거림을 들을 수도 있겠지만,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여성에 대한 폭력성을 영화적으로 풀어보고 싶다는 유혹을 뿌리치기 힘들었다. 사실 시나리오는 좀 더 직접적으로 발언하는 내용이 많았는데, 너무 선언적으로 다가갈까 우려돼 실제로는 좀 더 영화적으로 접근해 촬영하는 방식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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